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느낌을 알아차려야 되는 이유..

담마마-마까 2013. 6. 10. 16:30

 

 

저희 한국명상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할 때,

제일 처음에 현재의 마음을 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몸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꺼풀이 닿아있는 느낌을 느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입술이 닿아있는 느낌, 손이 닿아있는 느낌,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있는 느낌,

이렇게 네 종류의 느낌을 시작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눈꺼풀이 닿아있는 느낌을 느끼십시오.”

그러면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느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을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눈꺼풀이 닿았을 때, 따뜻하다. 떨린다, 무겁다. 가볍다 하는,

닿아있는 그 느낌 자체가 느낌이지, 특별한 것이 느낌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맨 느낌의 상태에서 우리는 눈꺼풀이 떨려서 싫다,

눈꺼풀이 가벼워서 기분이 좋다 하는 육체적 느낌으로 발전하는 것도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느낌은 맨 느낌에서 육체적 느낌으로, 정신적 느낌으로,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합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느낌은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렸을 때, 느낌이 무상한 것이며,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통찰지혜를 갖게 됩니다.


수행자가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영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경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느낌은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려야 되는 이유는,

이 느낌이 항상하지 않고 매순간 변한다는 사실,

즉 무상(無常)을 알기 때문에 느낌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의 성품을 자세히 보면,

그 느낌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라고 알 수 있게 되어,

무아를 철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의 무상함은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로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그 느낌의 성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올바른 길에 접어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느낌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매우 알아차리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느낌이 소멸되면 갈애도 소멸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12연기를 통해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러한 느낌은 화살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압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나는 느낌을 맨 느낌이라고 하며,

 

맨 느낌에서 반응한 느낌을 육체적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 느낌은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덤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육체적 느낌이 다시 반응을 하면 이제 정신적 느낌으로 변화합니다.

정신적 느낌은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그리고 정신적으로 덤덤한 느낌입니다.


맨 느낌에서 육체적 느낌으로 변화 했을 때

우리는 화살을 한 번 맞은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 육체적 느낌에서 다시 정신적 느낌으로 변화하면

화살을 두 번 맞은 것에 비유합니다.


누구를 볼 때 처음에 맨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보고 ‘좋다!’ 라고 하면 육체적 느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서 죽겠다!’ 라고 하면 느낌을 집착하는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 느낌이 그냥 정신적 느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느낌이 있을 때, 또 좋은 느낌이 있을 때, 더 좋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그것들이 간절하기를 더 바랍니다.


그래서 느낌은 반드시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욕망의 느낌이 생겨서 세 번째 화살을 맞게 됩니다.

이처럼 정신적 고통과 갈애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의 느낌입니다.


우리는 갈애가 괴로움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려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되는데,

오히려 갈애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갈애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네 번째 무명, 무지의 화살을 한 번 더 맞게 됩니다.


이렇게 갈애로 인해서 일어난 느낌은

바로 거듭 네 개의 화살을 맞는 것으로 발전해서

그 상처가 우리들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줍니다.


인간이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런 느낌의 발전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맨 느낌으로 시작해서, 그 느낌이 더 괴로움으로 증폭되어서,

끝없는 화살을 계속 맞은 뒤에. 비탄에 잠기고 생명을 끊거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느낌이나 수행자는 단지 느낌이라고 알아차리면,

모든 느낌은 단지 대상으로서의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느낌은 반드시 느낌으로 알아차리라는 당부를 거듭하셨습니다.


만약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나서 필연적으로 집착을 하고

괴로움이 따르게 됩니다.

 

경전에서 밝히는 느낌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다음으로 분류된 느낌은 세간의 즐거운 느낌, 세간의 괴로운 느낌,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 외에도 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맨 느낌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최초의 느낌입니다.

이때의 맨 느낌은 아직 좋다거나, 싫다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으로 바뀌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맨 느낌에서 알아차림이 없으면 육체적 즐거운 느낌, 육체적 괴로운 느낌,

육체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바뀝니다.

또 느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신적 즐거운 느낌, 정신적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바뀝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느낌에 대한 갈애와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단지 맨 느낌에 상태에 머물러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하여 미래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느낌을 알아차려서 얻는 통찰지혜는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 일어납니다.

이런 느낌을 통하여 찰나삼매가 생겨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처음에 일어난 맨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

미래의 원인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모두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려서 얻는 통찰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명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