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느낌의 중요성. 각성과 평정을 동일하게 깊은 수준으로 발전시켜나가야... 고엔카

담마마-마까 2013. 6. 10. 16:30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受)의 중요성


붓다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자기를 변화시키는 조직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실재를 경험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무지를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맞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그래서 생산적이고 유용하며 행복한 삶으로 인도된다.

 

염처경(念處經, Satipattana Sutta) “깨어있음에 관한 설법”에서

붓다는 자기 관찰을 통한 자기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법이다.

 

자신에 관한 진리를 관찰하는 시도는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과 몸,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이 양자를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몸과 마음의 실재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설명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지적 이해에 의존하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들은 자기탐구의 작업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지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직접 실재를 탐구하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들 각자는 육체적 느낌을 수단으로 하여 그 느낌에 의해서 신체의 실재를 경험한다.

눈을 감고도 우리는 손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신체의 다른 부위의 존재도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안다.

책이 외적인 형태와 안으로는 내용을 가지고 있듯이

신체 구조도 외적 대상인 몸(kaya)과 내적인 주관적 느낌(vedana)의 실재를 갖는다.

우리는 책 속의 모든 낱말을 읽음으로써 책을 이해한다.

우리는 느낌을 느낌으로써 몸을 경험한다.

느낌에 대한 각성 없이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없다.

이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구조도 형식과 내용으로 분류된다.

마음(citta)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를테면 생각. 감정. 기억. 희망. 공포. 정신적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몸과 느낌을 따로 분류하여 경험할 수 없듯이 인간의 마음은 마음의 내용물로부터 분류해 낼 수 없다.

그러나 마음과 신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한 쪽에서 일어난 것은 다른 쪽에 영향을 준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핵심에 해당된다.

붓다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낌이 따른다.”(증지부)

그러므로 느낌의 관찰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의 전체성을 검토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신체와 느낌, 마음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 네 가지의 실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다.

이것이 염처경의 네 가지 부분으로써 깨어있음을 설정하는 네 가지 접근 양식이며

인간존재를 관찰하는 네 가지의 관점이다.

만약 탐구가 완벽하다면 모든 국면이 경험되어져야 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느낌(受, vedana)을 관찰함으로써 경험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붓다는 특별히 느낌을 각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붓다의 가장 중요한 교설중의 하나인 법망경(Byahmajala Sutta)에서

 

 “깨달은 자들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로 관찰함으로써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장부)

 

라고 했고, 느낌에 대한 각성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팔정도를 이해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느낌을 경험한 사람에게 고통(苦), 고통의 원인(集), 고통의 소멸(滅), 소멸에 이르는 길(道) 등을

깨닫는 길을 가르쳐 준다.”(증지부)

 

그러면 정확하게 무엇이 느낌(受, Vedana)인가?  붓다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술했다.

붓다는 마음을 구성하는 식(識), 인식(想), 느낌(受), 행(行)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느낌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면 정신과 육체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상응부)

물질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필연으로 신체적 대상을 갖는다.

이 신체적 요인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실천의 목적은 우리의 내면에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삶의 변천을 다룰 능력을 개발시키는 것이다.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관찰함으로써 명상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마음의 균형에 의해서 맹목의 습관적 반응을 소거하고 상황 속에서 가장 유익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은 다섯 가지의 신체 감각(眼. 耳. 鼻. 舌. 身)과

마음(意)인 여섯 개의 감각의 문을 통해서 만난다.

연기법(緣起法)에 따르면 접촉이 어떤 감각에서 일어나 신체와 마음의 현상을 만나자마자 곧 느낌이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면 우리의 의식은 느낌을 알지 못한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무의식의 충동은 순간의 좋고 싫은 느낌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충동은 의식 속에 나타나기 전까지 무한한 시간 동안 반복되며 강화된다.

만약 수행자가 주의하여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한다면,

그들은 충동이 일어나 그들을 압도하기 전에 충분히 위험한 긴장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깨닫게 된다.

물론 소화시키기 어려운 격렬한 충동의 불꽃은 느낌의 작은 성냥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만약 신체 내부에서 느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수행자는 큰 불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불꽃을 꺼버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신체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깨달아 어떤 습관적인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남을 미리 막을 수가 있다.

 

느낌의 신체적 측면은 우리의 내면에서 무상(無常)의 실재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케 하므로 특별히 중요하다.

변화는 우리의 내면에서 모든 순간에 느낌의 형태로 일어난다.

무상이 경험되어져야 할 곳도 바로 이런 신체적 느낌의 수준이다.

변화는 느낌을 계속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끊임없이 변화되는 본성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각이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의 허망함을 분명하게 한다.

무상(無常, anicca)에 대한 직접 경험은 자동으로 집착으로부터 초연하게 하고,

동시에 탐욕이나 화 등의 새로운 반응뿐만 아니라 모든 습관적 반응을 제거한다.

이렇게 하여 점차 수행자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신체적 측면이 포함되지 않으면 느낌의 각성은 부분적이거나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체적 느낌을 통한 무상에 대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붓다는 말했다.

 

몸에 대한 직접적인 각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은 삿된 행동을 삼가고,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은 모든 번뇌와 업장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으리라.

완전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인하여.(법구경)

 

고통의 원인은 탕하(tanha) 즉 갈망과 혐오이다.

보통 우리는 신체의 감각과 마음을 통해서 만나는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한 혐오와 탐욕의 충동을 가진다.

그러나 붓다는 대상과 반응 사이에는 느낌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내면의 느낌 없이 외적 실재에 반응하지 않는다.

혐오나 탐욕 없이 느낌의 관찰법을 배울 때 고통의 원인(集)은 일어나지 않고 고통(苦)은 멈춘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이다.

만약 느낌에 대한 각성이 완전하다면 관찰은 신체의 느낌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체적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의 뿌리를 꿰뚫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깊이 관찰할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함으로써

염처경(念處經, Satipatthana <염처경은 장부22와 중부10의 두 곳에 실려 있다.>)을 꿰뚫는 신선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은 깨어있음의 확립(念處, Satipatthdna)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존재의 정화, 슬픔과 한탄의 초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소멸, 진리의 길을 걷는 것,

궁극적 진리(nibbana)의 직접 경험”(상계서) 등 우리가 느낌에 깨어있어야 하는 목표를 열거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이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간결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수행자는 철저한 이해와 깨달음, 몸 안에서 몸의 관찰, 느낌들 안에서 느낌들의 관찰,

 마음 안에서 마음의 관찰, 마음 내용 안에서 마음의 내용의 관찰에 대한 뜨거운 노력을 견지하여

세계를 향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게 되느니라.”(상계서)

 

 ‘몸 안에서 몸의 관찰, 느낌들 안에서 느낌의 관찰’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파사나 수행자에게 이 표현은 대단히 명확하게 다가온다.

 몸. 느낌. 마음. 그리고 정신적 내용들은 인간 존재의 네 가지 측면(四念處)이다.

정확하게 이 인간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재를 경험해야만 된다.

이 직접적인 경험을 얻기 위해 수행자는 깨어있음(念, sati)과

철저한 이해(正知, sampajanna)의 두 가지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설법에서는 ‘깨어있음의 확립’(念住, Satipatthana, The Establishing of Awareness)이라고 부르지만

깨어있음(念, Sati)은 “나”라고 부르는 현상의 무상을 꿰뚫고 깊이 자신의 본성을 통찰하는

철저한 이해(正知, Sampajanna) 없이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는다.

깨어있음의 확립(Satipatthana)의 실천은 수행자로 하여금 그들의 본질적이면서 순간적인 본성을 깨닫게 한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이것을 완전히 체득했을 때,

깨어있음은 자유로 인도하는 올바른 각성(正念)을 견고하게 확립(住)하게 된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외부 세계나 내부 세계를 향한 탐욕과 혐오는 사라진다.

무의식 속에 집착이 남아있는 한,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깨어있음에 관한 설법’에서는 먼저 몸의 관찰을 토의한다.

이것은 정진-신체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자기관찰을 시작하는 아주 적절한 지점이다.

몸(身)의 관찰로부터 느낌(受), 마음(心), 정신적 대상(法)의 관찰(四念處)로 자연스럽게 발전된다.

설법은 몸을 관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설명한다.

먼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호흡관찰이다.

호흡의 또 다른 방법은 몸의 움직임에 주의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목표인 열반에 이르기까지는 거쳐야 할 확실한 단계들이 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구절들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안으로나 밖으로 혹은 안과 밖을 동시에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여 조용히 멈춘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멈춘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사라짐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깨어있음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이것이 몸이다.”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이 깨어있음은 오직 철저한 이해(正知)와 관찰(正念)만이 남는 상태까지 발전하여

그는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초연하게 머문다.(상계서)

 

이 구절의 중요성은 몸의 관찰을 논하는 모든 부분뿐만 아니라,

느낌 마음 정신의 대상들의 관찰을 논하는 부분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다음 구절은 ‘몸’(身)대신에 ‘느낌’(受), ‘마음’(心), 그리고 ‘정신적 대상’(法)으로 각각 대치된다.)

이 구절은 염처경의 수행에서 공통된 바탕을 이룬다.

깨어있음의 확립(念住)을 체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고 넓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느낌의 각성을 언급하는 구절을 이해하면 사라지게 된다.

깨어있음의 수행에 있어서 수행자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통찰을 성취해야만 한다.

이 꿰뚫는 통찰의 수단은 느낌의 관찰로 인간 정신과 신체의 다른 세 가지 현상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첫 단계가 다를지라도 그런 차이를 뛰어넘는 수행은 느낌의 각성을 포함해야 한다.

 

수행자는 육체의 내부나 외부, 육체의 표면이나 심층에서,

이들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

즉 다른 곳이 아닌 어떤 부위의 각성으로부터 수행자는 점차 신체의 전 부위를 느끼는 능력으로 발전된다.

그들은 수행을 시작했을 때 일어나는 강한 느낌을 처음에 경험할지도 모른다.

이런 단계에서 그들의 몸과 마음의 구체적 실재, 통합되고 어느 정도는 견고하고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여전히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행해 감에 따라 대상의 견고함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마음과 육체는 모든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떨림의 과정으로써

진실한 본성을 체험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런 경험으로 수행자는 육체(色), 느낌(受), 마음(心), 그리고 정신적 대상(法)들이 진실로 무엇인지

즉 그것들은 비개인적 흐름, 계속적으로 변하는 현상임을 이해한다.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 실재에 관한 이런 직접적인 이해는 환상 오해 편견 등을 점차로 소멸시킨다.

단지 신념에 의해서 혹은 지적인 추론에 의해서 받아들인 올바른 개념조차도

그것들이 직접 경험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점차로 내면의 실재를 관찰함으로써 지각을 왜곡시키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이 소멸된다.

그리고 오직 순수한 각성과 지혜만 남는다.

 

무지가 사라질 때 탐욕과 혐오의 무의식적 경향은 제거되고 그리고 수행자는 모든 집착,

그 자신의 몸과 마음의 내적 세계에 대한 가장 깊은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

이 집착이 소멸되면 고통은 사라지고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붓다는 종종 “느끼는 것은 무엇이나 고통과 관계한다.”고 말했다.(상응부)

그러므로 느낌(受, vedana)은 거룩한 진리의 하나인 고통(苦諦)을 탐구하는 이상적인 수단이다.

불쾌한 느낌들은 분명하게 고통이다. 그러나 큰 기쁨도 역시 매우 미세한 초조나 불안의 표현이다.

모든 느낌은 무상(無常, impermanent)이다.

만약 유쾌한 느낌에 집착한다면, 그것들은 곧 지나가 버리고 고통이 남는다.

모든 느낌은 괴로움의 종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붓다가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말했을 때,

그는 느낌(vedana)의 일어남으로 인도하는 길과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언급했다.(상응부)

마음과 물질의 조건지어진 장소(處)에 인간이 남아있는 한 느낌과 고통은 소멸되지 않고 저항한다.

이것들은 오직 인간이 조건지어진 장소(處)를 초월하여 궁극적 실재인 열반(nibbana)을 경험했을 때만 멈춘다.

 

붓다는 말했다.

 

 어떤 인간들은 법(Dhamma) 대로 살지 못하네.

 단지 그들은 법에 관해 너무나 많은 말만 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비록 법에 관해서 들은 바가 없다 해도

 몸으로 법을 보아 진실로 여기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는 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법구경)

 

우리 자신의 몸은 진리를 볼 수 있다.

수행자가 진리를 내면에서 발견했을 때 그것은 그에게 진실이 되고 그는 이것에 따라 살아간다.

자신의 내부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워서 우리는 각자 그러한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느낌에는 세 종류가 있다.

유쾌함 불쾌함 그리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

이 세 종류는 모두 무상하고 조건지어진 것들에 의존하고 부서져 사라지기 쉽다.

실재를 본 거룩한 진리를 따르는 자는 세 가지의 느낌으로부터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마음의 균형으로 인하여 초연하고, 초연함으로 인하여 그는 자유롭다.(중부)

 

만약 수행자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쾌감의 무상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느낌의 쇠퇴 사라짐 그리고 그것들의 멈춤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그리고 그런 느낌에 관한 자신의 포기를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땐 무의식 깊이 조건지어진 쾌감을 향한 갈망은 소멸된다.

만약 몸 안에서 일어나는 불쾌감의 무상함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때 무의식의 깊이 조건지어진 불쾌감을 향한 혐오는 소멸된다.

만약 몸 안에서 일어나는 쾌감이나 불쾌가 아닌 느낌의 무상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때 무의식 깊이 조건지어진 무지는 소멸된다.(상응부)

 

쾌감을 향한 열망, 불쾌감을 향한 혐오, 쾌감도 불쾌감도 아닌 느낌에 대한 무지,

이런 무의식적 조건화가 완전히 소멸된 자,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

진리를 본 자, 갈망과 혐오를 끊어버린 자, 모든 악업을 쉬어버린 자,

자아의 환상을 완전히 깨달은 자, 고통이 끝나버린 자,

그를 가리켜 수행자라 부른다.(상응부)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견해가 올바른 견해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향한 노력이 올바른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깨어있음이 올바른 깨어있음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집중이 올바른 집중이다.

그리하여 몸과 행동과 말과 생활이 진실하게 정화되리라.

그리하여 수행자의 내면에서 팔정도(八正道)는 열매를 맺으리라.(중부)

 

팔정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정진하게 된다.

고집스럽게 정진함으로써 마음은 더욱 섬세하고  주의 깊어진다.

 

마음의 주의 깊음과 예민함으로 인하여 집중이 생기고, 집중으로 인하여 올바른 이해가 발전한다.

올바른 이해가 참다운 믿음을 개발시켜 팔정도를 실천하는 수행자는

“전에 내가 들었던 진리를 지금 몸 안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생활하고,

전에 들어왔던 통찰로써 꿰뚫어 관찰한다.”는 믿음을 지닌다.(상응부)

 

 

우리는 마음과 물질의 전체, 그 미묘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마음과 육체의 표면적인 움직임이나 사고에 주의 집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신체의 모든 부위에 걸쳐서 느낌을 자각하는 것과 더불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만약 마음의 평정 없이 느낌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내부의 느낌을 보다 잘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예민해지고 그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함에 따라 고통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마음의 평정만 있고 내적 느낌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이때의 마음의 평정이란

마음의 심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습관적 반응을 감추고 있어 단지 표면적인 안정일 뿐이다.

 

래서 우리는 각성(慧)과 평정(定)의 양자를 동일하게 깊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내부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자각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그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다.

자신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 자신의 내부에서 직접 진리를 경험하여 성취한 이해력,

이것이 붓다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얻은 지혜”(yatha-bhuta naan-dassana)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엔카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