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0.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1. 택법각지 (20080522)

담마마-마까 2020. 1. 22. 23:22

https://youtu.be/8EmrIU1FRvc

20.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1. 택법각지 (20080522)

 

··· 200페이지에서 다 끝낼려 했는데 하다 보니까 자꾸 분량이 늘어나버리네. 조금씩 줄이는 방향으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한번 쭉 다들 읽어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교재를 보면서 하십시오. 택법각지에 들어가기 전에,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극단적인 견해에 빠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가사를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그런 견해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있다, 없다'로서 판단들을 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참 극단적인 견해들입니다. 눈으로 보면 무엇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있다. 꽃이 있다. 그다음에 말소리가 들린다. 냄새가 난다. 이렇게 '있다'라고 판단을 합니다. 그렇죠! 그렇게 판단 안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면 사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럼 대부분 실제적으로 있든지 없든지 간에 '없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소리가 안 들리면 '안들린다' '없다' 그런다고. 이 두 가지가 빠지기 쉬운 그런 견해입니다.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될 부분인데, 태국 같은 경우에는 아짜리야(Ācariya) 시험이라고 있습니다. 스승의 자격을 주는 겁니다. 스승의 자격을 받으면 이제부터는 제자들에게 수행을 가르쳐도 되고 그다음에 법을, 담마를 가르쳐도 되고, 그렇게 법문을 해도 되도록 그렇게 돼있습니다.

아짜리야 시험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에까(eka) 그러니까 '하나'에 대해서 설명을 해봐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란 뭐냐?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아짜리야이기 때문에 그 하나에 대해서 적어도 몇시간은 법문을 할 수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 정도 능력이 되느냐 하는 걸 테스트 하는 거라.

 

이게 어떻게 해서 나왔느냐 하면 부처님 당시 때 꾼달라께시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주 부유하게 자랐는데 어느 날 눈에 뿅가는 남자를 발견했어요. 집 마루에서 보니까 집 밖에 도적놈이 하나 잡혀서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그게 딱 눈에 들어왔거든. 그래가지고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거라. 그래서 부모들이 관청을 구워삶아가지고 그 사람을 빼와서 이 꾼달라께시 하고 결혼을 시키거든.

꾼달라께시야 그 남자를 좋아해서 결혼했다지만 그 남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거라. 단지 자기가 죽음에 이르게 된 걸 갖다가 빼내준 은인밖에 안 되는 거라. 꾼달라께시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평생 해온 직업이 남의 물건 훔치는 도둑놈이었단 말이라. 그러니까 결혼해서도 어떻게 해서 이집 물건을 훔쳐가지고 내 것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는 거라.

 

그래서 부인한테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내가 만약에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 같으면 신에게 곡물을 바치겠다 하고 약속한 것이 있다 하면서, 부인을 속여가지고 귀금속을 차게 해서 낭떠러지 위로 데리고 갑니다. 낭떠러지 위에서 귀금속만 빼앗고 부인을 죽여버릴려고, 떨어뜨려 가지고.

부인이 얘기하거든. 우리 부모들은 연로하다. 조금 있으면 돌아가실 분인데 조금만 참으면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이 패물만 당신 것이 되는 게 아니고 우리집 전재산이 당신 것이 된다. 왜 참지를 못하고 이렇게 나쁜 악행을 연속으로 지을려고 하느냐.

 

그래도 도둑질하는 사람들은 그거 못 기다립니다. 십 년 후를 못 기다린다고 하는 거라. 십 년 후에 아무리 많은 것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수중에 돈이 들어와야 되는 거라.

애들 보고 만약에 “너가 뭘 잘하면 한 달 후에 용돈을 만 원을 주겠다 ”그렇게 얘기하는 부모 말을 잘 듣겠어? 아니면 “너가 뭘 잘하면 지금 백 원을 줄게” 하고 얘기하는 말을 잘 듣겠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거, 하면 당장 이익이 따르는 거, 만 원보다는 백 원이 작지만 지금 백 원이 낫다는 거라. 그게 대부분의 인간의 심리라.

 

꾼달라께시가 묘안을 내가지고, 그래 그럼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당신에게 예는 표하고 가겠다, 하면서 그 남자 주위를 세바퀴 돌고 절을 할려고 합니다. 남자가 방심해 있는 사이에 낭떠러지 위에서 그 남자를 밀어버립니다.

그런데 꾼달라께시 입장에서는 생각하니까 참 난감하거든.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가 그렇게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부모 볼 염치도 없고, 또 허무한 거라. 허무한 거라.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를 해서 각각의 논쟁을 하는 집단에 들어가서 배웁니다.

당시 때 여섯 무리의 큰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그 사상가들한테 가서 다 배우는 거라. 그래서 논쟁에서 그 꾼달라께시를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가 돼버리는 거라. 어느 스승도 못 당해내는 거라. 무엇에 대해서 토론을 할 거 같으면 꾼달라께시가 반드시 이기는 거라.

세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지고 논쟁을 하든, 아니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느냐? 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냐? 이런 것 가지고 각각 논쟁을 다 이기는 거라. 의기양양해 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에 조그만 모래산을 쌓아놓고 거기다가 나뭇가지를 꽂아놓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논쟁해서 이길 사람이 있으면 아 나뭇가지를 빼가지고 나를 찾아오라. 그럼 논쟁해주겠다.

 

마침 그 길을 사리불 존자가 지나다가 보고 나뭇가지를 가지고 갑니다. 여러분들 잘 알다시피 사리불 존자는 지혜로써는 제일의 존자입니다. 아무리 논쟁을 잘한다 해도 사리불 존자는 이길 수가 없는 거라.

논쟁은 뭐냐 하면 '있다, 없다'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거거든.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은 '있다, 없다'를 이미 떠난 거라. 중도로써 가거든. 그러니까 그 논쟁하는 사람이 그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는 거라. 꾼달라께시가 당연히 진거라.

 

그때 이 사리불 존자가 꾼달라께시에게 한 가지를 물어봅니다. 꾼달라께시한테 질문받은 거는 사리불 존자가 다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사리불 존자가 질문을 던지는 거라. 그때 얘기가 나온 게 뭐냐면 에까(eka)! 하나가 뭐냐?

이때까지 논쟁은 이것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 없다 가지고만 했는데, 하나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게 있다고 하는 거야 없다고 하는 거야? 뭔지를 도통 모르겠거든.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가 뭡니까? 하나가! 하나가 뭐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게 깁니까? 이 막대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길다고 할 수도 있고, 짧다고 할 수도 있을 거라. 만약에 길다고 했다. 그럼 이거보다 두 배 되는 걸 갖다 놓고 이것이 기냐? 그것도 길다고 했다. 그럼 앞에 거 조금 전에는 길다고 했는데 틀림없이 짧은 거거든. 상대적이죠.

처음에 이걸 보고 길다고 했던 사람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정도 되는 것들은 짧은 건데 그거보다 기니까 길다고 틀림없이 생각했을 거란 말이라. 그런데 이거보다 더 긴 걸 갖다 대주니까 오히려 짧은 것이 돼버리는 거라.

사물을 판단하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로 인해서 연기로써 받아들일 거 같으면 에까(eka)를 이해합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을.

 

일어난 것은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게 돼있죠. 사라진 것은 다시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있다고 하는 것이 영원한 것도 없고, 없다고 하는 것이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있다, 없다'를 떠나게 됐을 때 하나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라.

사실은 그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조건지워진 것이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항상 유(有)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항상 무(無)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인도적 사상가들이 그걸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해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텅빈 상태까지 갔다. 그리하더라도 그걸 없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사대요소가 궁극적인 물질이다, 그 사대요소도 없다고 얘기는 못한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있을 거 같으면 변하지 말아야 되는 건데, 궁극적인 물질은 뭡니까?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의 요소가 변하지 않는 겁니까, 바람의 요소가 변하지 않는 겁니까? 다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보다도 마음의 궁극적인 것은 훨씬 더 빠릅니다. 오히려 물질의 열일곱 배나 더 빠르다는 거라. 그러니 논쟁하는 사람들이 불교의 논점으로 얘기할 거 같으면 논쟁거리도 안 돼버리는 거라.

 

부처님이 얘기한 중도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바로 양극단을 초월한 길이다 하는 거라. 있다고 해서 고정된 것으로 봤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고, 없다고 해서 고정된 것으로 봤을 때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런데 그 극단을 떠났을 때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해결책이라는 겁니다.

 

택법각지(dhammavicaya- sambojjhaṅga, 擇法覺支)라고 하는 것은 꼭 이와 마찬가집니다.

법에 대해서 내가 분별하고, 구별하고 나누고 분해하는 능력을 얘기합니다.

나누고 분해해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변하는 거거든. 변하고 또 불만족스럽고, 거기에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는 거라. 적어도 택법각지를 알려고 할 거 같으면 그게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거라.

 

사띠를 잘 해나가면 참 좋은데 사띠가 안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사띠를 잘 해나가면 현상들을 보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립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택법각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띠를 못해가니까 어떻게 돼? 반대로 보겠죠? 그러한 견해들에 또 묶이게 되고. 그러니까 항상하는 것처럼 봐버리고. 사띠를 한다고 하면서도 사마디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고. 사띠를 한다고 하면서도 대상에 오히려 내가 묶이게 돼버리는 거고. 그러니까 밖의 대상을 보고 눈에 보이면 '보인다' 하고, 눈에서 안 보이면 '안보인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사띠 안되니까 그런 거거든.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는 거라? 택법각지를 이용을 해야 된다는 거라.

밖에 대상이 보일 거 같으면 적어도 밖에 대상으로 마음이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럴려면 먼저 밖의 대상이 눈에 맺히도록 자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거라.

소리 들리는 거는 마음이 소리들리는 데로 가야되는 것이 아니고, 그 소리가 내 귓바퀴에 와서 부딪치도록 귀에다가 집중을 해야 되는 거고. 냄새도 마찬가지고 접촉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밖의 대상들은 전부 다 감각기관에 머물도록 먼저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밖에 있는 감각대상에다가 마음이 가버릴 거 같으면 방황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있다 없다에 빠지게 된다는 거라.

 

먼저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되는 게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먼저 머물도록 하라.

밖에 대상들이 어떤 경우든지 이렇게 하도록 하라.

말을 내가 할 거 같으면 그 말은 다른 사람도 듣지만 나도 듣습니다.

그럼 나는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귓바퀴에다가 온 사띠를 다 기울여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그 소리로 인해서 마음이 밖으로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우선 돼야만이 그러고 나서는 마음에 머물도록 자꾸 노력을 할 수가 있는 거라. 소리가 들리는 것이 귓바퀴에서 다시 입술로 변형이 되고,

왜? 마음으로 전환되지 않을 거 같으면 입술로 바뀌어지질 않습니다.

입술로 달싹달싹하게 될 때는 이미 마음이 말하는 것에 일치가 돼있는 상태가 되야만이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들을 내가 사띠할 수가 있다는 거라.

마음으로 향하라 해가지고 이 가슴으로 향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가슴에 이렇게 할 거 같으면 말을 내가 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라.

 

이와 마찬가지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감각기관으로 들어와서 그것이 일차적으로 되고 나면 그러고 나서는 다시 마음으로 향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항상 마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말을 할 때는 뭐를 가지고 말을 하는가? 접촉할 때는 뭐로 가지고 접촉하는가? 접촉하는 포인트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거고, 볼 때는 뭐로 가지고 보는 겁니까? 눈으로 보는 겁니다. 이렇게 다른 대상들을 마음으로 반드시 인식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택법각지 부분에 들어가집니다.

 

그렇게 될려면 대상 자체가 바뀐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택법각지를 이해할 거 같으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망상이 막 일어났단 말이라. 그럼 사띠가 안되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난 거라. 사띠가 잘 될 거 같으면 자동적으로 택법각지가 돼.

사띠가 안되니까 택법각지도 안되고 망상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럼 택법각지로 인해서 사띠를 계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일어난 망상이 적어도 뭔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라. 택법해야 될 거 아니라.

요게 탐욕으로 인한 망상인지 아니면 화냄으로 일어난 망상인지 어리석음으로 일어난 망상인지 아니면 자애로운 것으로 일어난 망상인지, 뭔가를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사띠가 안돼서 망상이 일어날 때는 망상을 구분해 볼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구분이 돼야 만이 강하게 사띠가 되는 거라. 사띠가 느슨하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나는 거라.

 

대부분 보면 수행 참 쉽게들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수행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할 거 같으면 쉽게 그냥 오토매틱화 돼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수행을 아주 짬지게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대상을 명확하게 한번 봐야 되는 것이 아니고, 줄기차게 따라가면서 봐야 되기 때문에 수행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거라.

그럴려면 마음에 활력도 있어야 되고 사띠도 끊임없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걸 뭐로 뒷받침 해줄 거라? 택법각지로써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단순하게 '망상' '망상' '망상' 이렇게 하지 말고, 사띠가 잘될 때는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망상' '망상' 한두 번만 해버리면 망상이 금방 끝나버립니다. 그마만큼 내가 예리하게 깨어있기 때문에! 또 더 예리하게 깨어있으면 망상조차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망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거 같으면 사띠 안 하는 거거든. 사띠가 엷어진 거라. 그러면 그 망상 자체를 '망상' '망상' 아니면 아프면 '아픔' '아픔' 이렇게 해가지고는 절대 사띠를 정상적으로 계발을 시킬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럼 내 지금 상태에서는 적어도 그것을 더 꿰뚫어 보라는 거라.

잠이 온다. 잠이 오면 '잠이 옴' '잠이 옴' 하지 말고 이놈의 잠이 오는 것이 어떻게 오는 건지 분명하게 보라는 거라. 눈꺼풀이 따가운 건지 아니면 눈꺼풀이 무거운 건지 아니면 송곳으로 쑤시듯이 하는 건지 잠이 오는 것도 다 다르단 말이라. 그걸 자꾸 구분해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면 여섯 가지로 구분해서 보라.

그렇게 해서 사띠를 더욱더 계발시켜 주도록 하고, 그리고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써 보도록 하라. 화내는 것이 있다, 그 화내는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꿈같은 얘기다 하고 알 거 같으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에 화를 콘트롤 한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 대상 자체를 삼법인을 통해서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은 먼저 이러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자꾸 분석하고 분할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현상들을 삼법인의 입장에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것들이 연기법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바라봐야 됩니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고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일어난다 하는 사실. 똑같은 것이 두 번 반복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똑같은 것들이 한 찰나도 반복해서 지속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연기의 이치입니다.

 

이 세 가지로써 알아차리는 것을 택법각지라고 얘기합니다.

 

그정도로 해서 택법각지는 마치고 다음 시간에 위리야 삼보장가 부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