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1.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2. 정진각지 (20080612)

담마마-마까 2020. 1. 23. 12:58

https://youtu.be/Iln6wGhsShc

21.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2. 정진각지 (20080612)

 

저번 시간에 택법각지까지가 끝났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정진각지(精進覺支) 위리야 삼보장가(vīriya-sambojjhaṅga) 부분에 대한 것을 하겠습니다.

 

노력한다, 정진한다 하는 것,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될 거 같죠? 그거는 아니죠! 만약에 누구든지 오르지 못하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랐다. 굉장히 노력해가지고 그 정상에 올랐을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죽고 나서 저 세상에 가면 염라대왕이 너는 에베레스트 정상 올라갔으니까 천국으로 가라 하고 얘기해줍니까? 그러지는 않죠! 노력이라고 하더라도 욕구 욕망에 관계되고 또 번뇌에 관계되고 그다음에 집착에 관계된 것이 아닐 거 같으면 그것은 불교에서는 노력이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물론 노력이지만은 그것은 바른 노력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고 얘길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 하는 뜻입니다. 위(vi)라고 하는 것이 '반대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나야띠(nayatī)'의 변형이 나야(naya) 할 때 나야가 됩니다. 나야띠는 뭐냐하면 '이끈다 지도한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율'이라고 할 때 '위나야(vinaya)'라고 하는 것은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세상의 삶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통상적으로 위나야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왜 '위나야(vinaya)를 지키는 것을 위리야(vīriya)'라고 하느냐?

그 제목에는 '계율을 지켜라. 그것이 정진각지다' 하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위나야를 지킴으로 해서 위나야로 인해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욕구나 분노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부처님 당시에 삽바다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어요.

이 스님이 출가하고 나서 참 열심히 노력을 했거든. 그런데 아, 이거 깨달음 하고 전혀 관계없이 살아오게 된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다시 또 속세로 돌아갈려고 하니까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거든. 꼭 실패하고 돌아온 것처럼 돼버리니까.

이 삽바다사 스님이 출가해가지고 열심히 노력해도 뭔가 과위를 얻지도 못하고, 그런데 출가생활 계속 할려니까 그것도 안 되고, 집에 돌아갈려니까 그것도 자존심이 상해갖고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라.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문제에 봉착을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어떻게 합니까? 보통은 보면 포기해 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는 다른 걸 포기, 물론 한쪽을 포기하게 될 때 한쪽을 포기하게 되는데, 양쪽 다를 포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됐을 때는 보통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것을 잊기 위해서 술을 먹는다든지 아니면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안 그러면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어떤 일들을 저지르든지, 그러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자살해버립니다.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안 그러면 남의 목숨을 끊든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게 돼버립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풀고 나가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노력은 열심히 하는데 뭔가 수행이 안 되거든. 그러면 안 나오게 된다고. 선원에 나와 봐야 별 효과가 없으니까. 맨날 해봐야 똑같은 현상들 나타나고, 안 그러면 이곳 말고 또 다른데 좋은 스승이 있나 하고, 더 좋은 가르침이 있나 해가지고 기웃기웃기웃 이렇게 하고, 일반인들이 하는 거하고 거의 다른 게 없이 그렇게 해나갑니다.

 

이 삽바다사 비구스님도 마찬가지였거든. 죽어버릴라고 생각한 거라.

어느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독사를 한 마리 잡아 왔어. 사찰 입구에 왔다갔다 하니까 다른 스님들이 물릴까봐. 그래 쪼래기에다 독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거 내 달라 내가 풀어줄게 하고 이 스님을 안심을 시키고 나서, 독사가 있는 자루에다가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럼 독사가 물 거 아니라. 그럼 자기가 죽을 거라고. 그랬는데 아! 이놈의 독사가 물지도 않네.

 

나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태국이나 버마 이런 데서 특히 캄보디아 같은 경우도 마찬가진데 숲이 많은 데서 새벽에 탁발을 나가면 뱀을 밟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있습니다. 그중에는 독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뱀을 밟으면, 일반적으로 뱀을 밟으면 바로 뱀이 사람을 뭅니다. 나도 몇 번 물렸거든. 그런데 독사란 놈은 한 번도 안 문 거라.

그게 차이가 뭐냐 하면, 언제 때 물리느냐 하면 내가 정신없이 탁발을 가는데 신이 나가지고 막 탁발을 나갔을 때, 그럴 때 나갔을 때 뱀을 밟았을 때는 틀림없이 그 뱀이 물어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을 집중하면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걸어가면서, 탁발한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그 탁발의 고마움을 멧따를 보내면서, 쭉 걸어나가게 될 때는 뱀을 밟아도 뱀이 안 물어. 신기할 정도로!

 

그래도 이 스님은 경전에서 안 물었다 하는 거 보니까 아마 그 정도는 됐던 모양이라. 그래도 사띠는 꾸준하게 했다는 거라. 단지 그 결과물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뿐인 것이지. 사띠는 하긴 하고, 이것이 맞고 이것이 틀리다 하는 것은 안다는 거라. 세상은 변한다는 것 다 이치적으로 알고 있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알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뿐이라는 거라. 거기서 더 발전을 해나가지 못하는 거라.

사띠 삼보장가도 되고, 담마위짜야 삼보장가도 되고 하는데, 그리고 이 위리야도 어느 정도는 있는데 아! 여기서부터는 막혀버리는 거라. 안 되는 거라.

그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집중하는 힘들이 있고, 사띠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뱀이 안 물어. 내 경험으로 그래요. 내만 그런 거 아니고 많은 스님들이 그래.

이 스님도 뱀한테 안 물렸거든. 그러니까 뱀한테 안 물리니까 어떻게 하겠어? 죽을려면 스스로 칼로 목을 자르는 수밖에. 그래가지고 목을 자르려고 칼을 댔는데 그때 정신이 번쩍 드는 거라.

 

인제 나는 곧 죽거든. 인제 곧 죽는단 말이라.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그전에는 몰랐던 거라. 그전에는. 나도 이렇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긴 알아도, 찰나 찰나에 이렇게 두려움을 가지고, 찰나 찰나에 이렇게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몰랐던 거라. 죽을려고 칼을 대니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거라. 엄청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라. 이걸 왜 몰랐느냐는 거라. 그러다가 칼을 긋다가 깨달음에 이르는 거라.

그러다 다시 선원에 들어왔어. 죽을려고 칼 가지고 간 스님이 오니까 어찌 된거냐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이 칼로써 번뇌를 끊어버리고 왔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 정진각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한순간이라도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한순간이라도!

내가 희망하고 목적하는 것이 완전하게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고, 끊임없이 힘써야 되는 것들입니다.

보통은 보면 그렇게 하더라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낙담합니다. 안 그러면 게으름 피우거나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걸 여러분들이 가만히 보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도 목표달성 하는 것 내가 대성공이다 할 정도는 손꼽을 정도가 됩니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보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 안됐고 실패하고 그런다는 거라.

 

그럴 때 낙담하고 게으름피우고 다른 일들을 생각할 거 같으면 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것에 안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뭐냐 하면 이 노력이라는 거라. 수행에서도 진척이 없다, 오늘 하나 내일 하나 똑같이 진척이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정진이라는 거라.

정진은 어떻게 해야 돼? 아까 그 스님과 같이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끊임없이 노력을 하니까 끊임없이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이 알아지는 거라. 그게 꼭 죽음의 순간에만 나타나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일상생활에서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 노력이라고 얼마만큼 중요하냐면,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37조도품(三十七助道) 한번 봅시다.

 

맨 처음에 뭡니까? 사념처죠! ···법 그것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몸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느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생각들이나 안팎의 대상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걸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 하고 사념처(四念處)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명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뭡니까? '아따삐'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것! 그다음에 뭡니까? '사띠마'라고 그러죠. 사띠로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뭡니까? '삼빠자노'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거란 말입니다.

아따삐(ātāpī)-열의에 노력이 없이 열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삼빠자노(sampajāno)-끊임없이 알아차릴 때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하는 노력이 없으면 끊임없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사띠마(satimā)-사띠를 이어나가게 될 때 거기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띠가 안 되는 거라. 사념처를 할 때도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고,

 

37조도품 중에 그다음이 뭡니까? 네 가지 노력(四正勤)입니다.

그거는 그대로 그냥 노력입니다. 삼마빠다나(sammā-padhāna) 그렇게 얘기합니다. 네 가지 노력. 일어난 악한 것들은 버려버리고, 일어나지 않는 아꾸살라(akusala)-악한 것들은 스스로 막아버리고, 일어난 선한 것들은 자꾸 증장시키고, 일어나지 않는 선한 일들-꾸살라(kusala)는 일어나게끔 노력하라. 이게 네 가지 노력이라.

 

37조도품에 사념처 다음에 네 가지 노력, 그다음에 뭡니까?

사여의지죠. 사여의지족(四如意知足) 그럽니다. 잇디빠다(iddhi-pāda) 그럽니다. 그게 뭡니까? 찬다(chanda), 위리야(vīriya), 찟따(citta), 빤냐(paññā) 거기에도 위리야라는 것이 있어요.

 

그다음에 뭡니까? 오근(五根) 인드리야(indriya)! 오근 인드리야에도 삿다(saddhā), 위리야(vīriya), 사띠(sati), 사마디(samādhi), 빤냐(paññā)가 있습니다. 거기고 위리야가 나옵니다. 위리야가 안 나오는 곳이 없어요.

 

그다음에는 오력(五力) 발라(bala)! 거기는 또 위리야가 없습니까? 삿다발라, 위리야발라, 사띠발라, 사마디발라, 빤냐발라. 거기도 위리야!

 

칠각지(七覺支) 봇장가(bojjhaṅgā) 중에도 위리야! 위리야가 포함이 안 된 게 없습니다. 위리야가.

 

팔정도(八正道)에는 위리야가 없습니까? 팔정도에도 위리야가 있습니다. 삼마와야마(sammā-vāyāma)라고 하는 것. 바른 노력입니다.

 

악한 행위를 하든 선한 행위를 하든 지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못합니다. 내가 마음을 내지 않으면 못한다는 얘기라. 그러면 악한 행위도 내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악한 행위를 하는 거고, 선한 행위도 내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거라. 통상적인 게 그렇다는 거라,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 위리야가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위리야를 잘해야 됩니다.

그 위리야를 증장시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계율을 지켜라 하는 거라.

 

계율을 지키는 건 뭡니까?

악한 것들을 끊어버리고 포기해버려라. 완전하게 끊어버리고 아리야삿짜담마(Ariya sacca dhamma)-성스러운 진리의 담마를 증득해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 위험성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위리야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인내해야 된다는 거라. 하고 싶어도 그것이 나쁜 것이면 안 해야 되는 것이고, 좋은 것이면 가기 싫어도 그것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라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뭐라 그랬느냐면 도둑의 도시와 행복의 도시로써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영화에 그런 게 있던데, 바이러스가 어느 마을에 침입했어. 그러니까 연방정부에서 그 마을 전체를 큰 장벽을 쌓아버립니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이 그 장벽 밖을 나가지 못하게끔 경계를 다합니다. 나갈려고 할 거 같으면 쏴 죽여 버리고.

꼭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부처님이 얘기한 도둑의 도시라고 하는 것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도둑이 우글우글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도둑놈이 그쪽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되는 거라. 울타리를 치고 잘 쪼아가지고 그리고 항상 경계를 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도둑의 도시'라고 그럽니다.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고 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 견해를 가지는 것, 뭔가 영원한 것,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늘 열심히 하는 거고, 평생 살 것처럼 하니까 내일은 안 죽는다고 생각을 하니까 오늘 또 뭘 하는 거고, 그런 거라. 다 그런 삭까야딧티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나'라는 견해가 없을 거 같으면 너, 나, 할 필요도 없는 거라. 그런데도 나, 너, 하고 있거든. 도둑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경계를 하라는 거라. 단단히 노력해가지고 내 속에 있는 도둑놈이 활동을 못하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내가 행복의 도시 닙바나로 갈 수 있다 하고 부처님이 비유로써 얘기를 해놔 놨습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계를 지켜라.

그걸 갖다가 스님이 비유를 해놔 놨습니다. 내가 뭐 좀 나쁜 짓을 하고 싶다. 뭐 이리하더라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떤 법회에 가든지 법회 맨 앞에 뭐부터 합니까? 오계부터 받습니다. 그게 기본입니다.

오계를 지키라는 거라. 거짓말 하지 마라 할 거 같으면 거짓말 안 하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나쁜 짓 하지 마라 할 거 같으면 나쁜 짓 안 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할 때만이 이 노력의 힘은 증장이 돼나간다는 거라. 증장되지 않을 거 같으면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두 가지로 나눠놨습니다.

사띠가 되고 그다음에 택법각지가 되고 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는 이런 정진각지가 일어나집니다. 왜? 해보니까 이게 부처님이 말한 무상(無常)이고, 이게 무아(無我)이고 이게 고(苦)구나 하는 걸 알거든. 그러니까 더욱더 노력하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는 것이 나오면 더 빨려들어 가는 거와 마찬가지라.

수행에서도 사띠가 잘 돼나가고, 그것에 대해서 또 명확하게 알게 되고, 또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아, 이것이 이렇게 변해나가고 하는 것을 내가 체득을 하게 되고, 아, 이게 무상이구나 하는 법을 이해를 하게 되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내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는 걸 이해를 할 거 같으면 더욱더 노력해서 수행할려고 한다는 거라. 노력의 힘이 자꾸 일어난다는 거라.

 

노력의 힘이 안 일어날 때는 지겨울 정도로 자꾸 무상을 봐야 된다는 거라.

지겨울 정도로 무아를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러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을 탈출할 수 없다는 거라.

 

통상적으로는 우리나라보다 남방불교권에 있는 사람들이 무상·고·무아를 더 잘 이해합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그냥 일반적인 수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누가 돌아가셨다 이리 할 거 같으면 우리는 와 죽었느냐 해가지고 울고불고 가족들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안 웁니다. 관 뚜껑 열어놔 놓고 사람들 누구든지 볼 수 있게끔 하고, 그 앞에 가서 '치즈' 하면서 사진 찍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미 무상을 알고 있어서 그러는 거라.

 

누구든지 죽게 돼있다. 영원한 것은 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깨달음을 이루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무상을 알고 무아를 안다고 해가지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깨달음에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고 조금 더 다가가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다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방콕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더 잘 놉니다. 흥청망청 잘 놉니다. 우리는 오히려 남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잘 못 노는데 그 사람들은 더 잘 놀아.

내가 한 번 정도 아니면 몇 번 정도 수행을 통해서 아! 이게 무상이구나. 이게 무아구나 하는 걸 알았다고 해가지고 끝나버리면 그 사람들하고 다른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동남아시아 사람들하고. 끊임없이 자꾸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끊임없이! 그렇게 할려면 우선 기본적으로 가져야되는 것이 계율 부분입니다. 계율을 잘 지켜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도 하나의 단점이 있습니다. 그 밑에 스님이 적어 놨지만 보통 보면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금전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그걸 갖다가 '나는 금전을 가지지 않는다' 하면 금전은 안 가집니다. 그 대신에 지폐는 가지거든. 지폐는 금전이 아니니까.

또 어떤 스님들은 그거 금전도 안 가지고 열심히 계율을 잘 지킵니다. 탁발도 나가고 예불도 열심히 하고 또 누가 보시한다고, 가끔씩 보시한다고 해서 물품만 주는 게 아니고 돈도 주거든. 그것 가지고 여러 가지를 사라고. 그럼 그거 안 받는다 해가지고 탁 내쳐버리고 이렇게 합니다. 아주 고고하게 계율을 잘 지켜나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 거룩하다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기준을 뭐로 잡아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거기 스님이 적어놨죠.

그렇게 하므로 인해서 자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품이 고쳐졌는가? 마음이 고요해졌는가? 자아의식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졌는가?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가? 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높이 평가하지 않고 하는 걸 갖다가 하게 된다는 거라.

 

사리뿟다 존자는 제자들을 참 잘 지도를 했습니다. 부처님에 버금가게 사람들도 참 많이 따르고 그 사리불 존자를 좋아했습니다. 어린 사람이 출가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부처님이 사리불 존자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게 하고, 수행을 하게끔 합니다.

 

수카라고 하는 사미도 마찬가지로 사리불 존자한테 가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일곱 살짜리인데, 사리불 존자가 아침에 탁발을 나가니까 같이 따라 나가거든.

한참 따라 나가는데 저쪽에서 농부 하나가 논에 막 물길을 트고 있는 거라. 그래서 일곱 살짜리가 할아버지뻘 되니까, 그냥 우리말로 할 거 같으면 사리불 존자한테 "할아버지 저거 뭐 하는 거예요?" 하고 물어봅니다.

"저렇게 물길을 트고 하지 않으면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어서 논에 있는 벼들이 다 죽어버린다. 그러니까 논에 벼를 잘 키울려고 할 거 같으면 저렇게 물길도 내고 잡초도 뽑고 그래야 되는 것이다."하고 얘기합니다. "응, 그래."

또 한참 가다 보니까 누가 대나무를 가지고 막 만들고 있거든. "저거는 뭐 하는 거예요?" "어! 저거 대나무를 저렇게 잘 짜르고, 굽고, 앞에는 또 동으로 철로 가지고 화살촉을 만들고 해가지고, 화살 만드는 거야. 대나무를 굽어진 걸 잘 펴고 잘 다듬지 않으면 그 화살은 못 쓰는 거야." "응, 그래."

또 한참 가니까 나무를 가지고 뭘 막 짜르고 있거든. "저거는 뭐 하는 거예요?" "아! 저거가지고 수레 만드는 거야. 저 둥그렇게 큰 나무는 그냥 놔두면 썩어버리고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는데 그 나무를 쪼개고 적재적소에 맞게끔 끼워맞추고 할 거 같으면 사람들도 실어나르고 물건들도 실어나를 수 있는 그런 수레가 되는 거야." "응, 그래. 그렇구나"

하물며 말도 못하는 논이든지 대나무든지 나무도 그렇게 노력해가지고, 물론 다른 사람이 노력을 한 거지만, 하여튼 노력을 해가지고 쓰임새 있게 하는데, 나는 사람인데 사람으로 태어나가지고 쓰임새 없이 살아가서 되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물론 사리불 존자가 그런 얘기를 하죠. "그래요. 그러면 나도 쓰임새 있게 살아가려면 수행하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수행하는 법을 딱 받아 듣고 수행을 합니다. 탁발하고 와가지고.

 

그런데 어린아이가 어른보다도 훨씬 뛰어나거든. 그냥 들은 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라. 우리 같이 판단을 하고 뭐 이렇게 안 하거든. 그러니까 금방 수행해서 과위에 도달하게 돼버립니다. 점심때가 됐는데 아! 이 수카가 밥 먹으러 안 오거든.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탁발해온 음식을 가지고 수카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부처님이 보니까 수카가 지금 예류과를 통해가지고 일래과 불환과를 향해갈려고 하는 중인데 사리불 존자가 거기 갈 거 같으면 고마 거기서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끝나버릴 거 같거든.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리불 존자한테 거기 가지 마라 소리도 못하겠고.

그래서 부처님이 와가지고 이 사리불 존자한테 살큼 말을 겁니다.

오늘은 탁발 잘했느냐, 누가 어쨌느냐 하면서 이렇게 한참 동안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얘기를 하니까 수카한테 줄 도시락을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방문 앞에서 그렇게 있었거든. 그 사이에 수카가 깨달음을 이루고 아라한이 돼버립니다.

 

그랬는데 12시가 넘어버렸거든. 스님들은 12시가 넘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부처님이 그럽니다. 인제 저 수카 사미가 아라한이 되었으니까 가서 밥 줘라. 사리불 존자가 수카한테 가서 밥을 주거든.

 

계율이라는 거는 그런 거라. 그 계율을 지킴으로 인해서 내 성품이 고쳐졌는가.

내가 이때까지 해왔던 행위들, 나쁜 것들이 고쳐졌느냐는 거라. 고쳐지지 않는 계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또 집착하는 일이 없어지고, 마음의 평안을 얻느냐는 거라. 그럴 때만이 그 계율이 값어치가 있게 된다는 거라. 무조건 계율만 지킨다 해서 그것만 고집하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오히려 의례의식에 매여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어쨌든 무상을 알고 있는데 슬럼프에 빠지고 진척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고행을 합니다. 고행을.

내가 인제는 한번 해봐야지 하면서 몇 시간이고 수행을 하고 막 쥐어틀고 그럽니다. 수행하고 고행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될 거 같으면 누구든지 뭐 몇 시간이 아니라 몇 일씩 고행을 하면 다 깨달음을 이루겠지. 각 사찰에서 결제 끝나게 되면 일주일씩 잠도 안 자고 고행들을 하는데 다 해제할 때 되면 성인들이 되고 나와야지. 한 놈도 성인 돼가지고 나왔다는 소리를 못 들었거든. 고행하고 수행하고는 분명하게 다른 겁니다. 그걸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진척이 없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두 번째 길이 뭐냐 하면 노력하는 길이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단, 그 노력은 이때까지 노력하고는 분명하게 달라야 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좌선 한 시간 하고 끝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경행을 합니다. 후다닥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앉아있던 좌복을 갖다가 저쪽에 갖다놔 놓고 또 내 옆에 있던 교재들이나 이런 것들도 경행하는데 걸리지 않게 갖다 놓고 합니다. 그걸 알아차리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없다는 거라. 으레 그런 거로 생각을 하는 거라.

 

스님이 여기 좌선하고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이 좌복 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좌선하고 일어나서 경행할 때, 일어날 때 하나하나의 동작을 다 알아차리면서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그리 안 한다는 거라. 그런 노력을 안 한다는 거라.

그리고 좌복도 마찬가집니다. 죄복 하나를 가지고 저쪽에 갖다 놓고 할 거 같으면 얼마만큼 많은 동작들을 해야 되고, 얼마만큼 많은 행위들을 해야 돼? 왜 그렇게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그리하냐는 거라. 좌복 그냥 놔두라는 거라. 좌복을 피해서 경행을 하라는 거라. 되도록이면 움직이는 걸 적게 하고, 뭐든지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해야 되는데 그리 안 한다는 거라.

 

경행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줬어요. 경행하면서도 한발이 완전하게 닿아서 완전하게 닿은 걸 알아차리기 전에는 한쪽 발을 들지 마라 해도 한쪽 발을 벌써 들고 있는 거라. 눈은 저기 앞을 전방을 바라보면서 경행하면서 오만 거 다 보고 있는 거라. 눈은 땅으로 내리꽂아라는 거라. 경행할 때는 걷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보는 것이 우선이 돼서는 안 되는 거라.

그럼 안 보도록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발을 봐도 안 되는 거고 앞에 있는 전방을 봐도 안 되는 거라. 한 1~2m 앞에 있는 땅에다가 눈을 내리깔아라는 거라. 깔고 경행하는 것만 집중하고 알아차려라는 거라.

멈춰 섰으면 '멈춰섬'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움직이는 대상이 없으니까 즉시 호흡으로 돌아와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돌고자 함' 하는 마음을 내고 나서 천천히 돌고, '가고자 함'하고 마음을 내고 나서 또 '왼발' '오른발' 하면서 가고, 경행은 그렇게 하라는 거라.

가르쳐줘도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아! 진척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뭐 우째라는 얘기라.

 

수행에서 진척이 없을 때는 스승들이 이렇게 뭐라 합니다.

되게 뭐라 합니다. 뭐 하고 있느냐고 그럽니다. 하나하나 동작을 다 지적을 합니다. 왜 생각 없이 팔을 올리느냐?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따끔하게 자꾸 해야 된다는 거라. 내가 사띠를 놓쳐버릴 거 같으면 밥을 안 먹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행이 더욱더 엄격해져야 됩니다.

 

물고기가 땅 위로 올라올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보니까 세상의 이치와 반대라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 생각이나 여러분들 자체를 완전히 백팔십도로 뒤집지 않을 거 같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얘기라.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어떤 견해들을 가지고 있고, 항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뭔가 있는 것처럼 생각들 하고 있었는데, 다 거꾸로 하고 있는 거라. 깨닫고 나서 보니까. 그럼 수행도 마찬가지 거꾸론데, 이놈의 물고기가 땅 위에 올라오는 거하고 뭐가 다르냐는 거라. 대부분 땅에 올라오면 죽어버린다는 거라.

죽지 않을려면 땅 위에 올라온 물고기가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땅 위에서 살려고. 스스로 바꾸고 진화하지 않으면 땅 위에서 못사는 거라. 그런 것이 이 정진각지라는 거라.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더 노력들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희각지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