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3.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4. 선정각지, 평온각지 (20080709)

담마마-마까 2020. 1. 24. 00:51

https://youtu.be/UgXN-umYNCo

23.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4. 선정각지, 평온각지 (20080709)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번뇌의 장 - 칠각지 부분)

오늘 지나고 나면 다음 주에 결제 들어가지죠.

저번 시간에 희각지하고 경안각지 부분까지가 끝났습니다.

오늘은 사마디 삼보장가(samādhi-sambojjhaṅga) 선정각지(禪定覺支)에 대한 것부터 하겠습니다.

 

선정이라고 하는 것, 참 재미있는 상태입니다. 착각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장애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끔씩 아! 나 선정 경험해봤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거든요. 그런데 엉토당토 않는 소리들을 하는 때가 있어요. '자면서 선정을 경험했다'하고 하는 경우들을 듣습니다.

선정은 그런 게 아니죠? 그렇게 미지근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있으면서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갔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선정은 그런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대상에 집중해가지고 집중으로 인해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이 선정입니다.

 

마음을 통일시켜가지고 그 대상에 오롯이 집중하는 능력.

그냥 태양빛 아래 있는 종이는 타질 않습니다. 그런데 돋보기 현미경을 가지고 최대한 거기에다가 집중해가지고 한 포인트에다 집중해서 있을 거 같으면 그 종이가 탑니다. 그 돋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이 작은 글씨를 확대해가지고 볼 거 같으면 작은 글씨로 봤을 때는 아주 잘 쓴 글씨로 보이더라도, 크게 확대해보면 거기에 아주 꺼칠꺼칠한 부분까지 다 드러나지게 됩니다.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처음에 대상을 봤을 때는 그 대상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선정을 통해서 보니까 그 대상이 일어나는 상태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갖가지 형태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하는 것들을 여러 차례 경험을 하게 되는 거라. 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들을 선정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으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물질이 변화되는 것을 분명하게 따라잡을 수 있어야 되고, 거기에 맞춰서 마음이 변하는 것도 분명하게 따라잡을 수 있어야 되니까, 그 속에서는 절대 잡념이 없겠죠! 번뇌가 없어진 상태, 대상과 마음이 통일된 상태, 이것을 사마디 삼봇장가(samādhi-sambojjhaṅg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연히 고요하게 마음이 대상에 집중된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 삼매라고 하는 것은 집중하고 고요함으로 인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마음이 안정이 안 된 상태에서, 그리고 느긋한 상태에서는 선정을 계발할 수도 없고 선정에 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행하는데 그 대상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금방 한 시간이 지나갔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선정이 아닌 거라. 그리고 잠자면서는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을 못한다고. 그러면 당연히 선정의 경험을 못해보는 거라. 그런 것 가지고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이 사마디(samādhi)에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초기삼매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근접삼매라고 얘기합니다.

삼매에 들기 직전이라는 뜻이죠. 그때는 굉장히 예민해지고 예리해집니다. 조그마한 외부적인 자극에도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찰나삼매입니다. 위빳사나삼매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수행대상을 명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사물의 특성들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지녔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찰나삼매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뭐냐 하면 근본삼매입니다. 사마타삼매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깊이 집중해서 완전하게 몰입돼버리는 상태. 그래서 대상과 마음이 완전하게 몰입돼서 그것조차도, 물질적인 것조차도 버려버리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마음조차도 버려버리게 되는 상태, 그걸 사마타삼매라고 그럽니다. 그걸 보통 네 가지 아니면 여덟 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집중이라고 하는 것은 한 대상을 오래도록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합니다. 오랫동안 알아차릴 때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대로 알고 사라진 것은 사라졌다고 알면서 생기는 현상들을 갖다가 사마디 삼보장가라고 그럽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알고, 없고, 알고, 없고, 하는 것들이 연속돼서 알아차리는 상태를 얘기하게 됩니다.

알아차리니까 일어난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고, 사라졌을 때는 없어져버린 거라. 그러니까 얼마나 무상해? 허무하게. 그게 굉장히 고통스럽게 다가와지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 삼보장가를 계발할 때는 절대 완전한 평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어떤 면에서는 마음 한쪽 구석에는 아픈 구석이 있습니다.

좋고 싫고 하는 것을 완전하게 버려버린 우뻭카하고의 차이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미세하게 마음의 떨림이 있게 돼있는 것이 사마타 바와나입니다.

사마디 삼보장가를 계발하게 되면 모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대상을 둑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떤 오온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것이지, '내가 일어났다 사라진다' 라고, 아니면 '나의 것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라고 보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뭐라고 표현을 했느냐면

'시간의 경과도 잊어버리는 忘我(망아)의 영역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영역이 바로 선정각지입니다.

집중력의 예를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집중력은 있습니다. 일부러 수행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애들 보고 지 좋아하는 거 하라 할 거 같으면 몇 시간이라도 합니다. 특히 요즘은 게임 같은 거 예로 들으면, 아주 신이 나가지고 엄마가 밥 먹으라 하는 소리도 못 듣고 그 게임하거든 몇 시간이라도. 그런데 지가 하기 싫은 거, 공부해라 할 거 같으면 십분도 앉아있지 못하는 거라. 안절부절하고.

 

집중력에는 세 가지 법칙이 반드시 존재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즐겁다는 거라.

두 번째가 지치지 않는다는 거라.

세 번째가 시간제한이 없다는 거라.

 

당연히 삼매를 계발하면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겠죠. 어느 정도 계발이 되고나면 자기 스스로 삼매에서 빠져나올 시간 하고 아닌 시간을 구분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 세 가지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즐거우니까 그 즐거운 것은 항상 미세한 떨림을 가져오게 만든다 하는 거라. 그것조차도 버려버려야 되는데 그것에 빠지고 버리지 못했다는 거라. 그리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까지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는 거라. 계속 그 대상에 몰입된다는 거라. 그러면 당연히 언제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게 된다는 거라. 이 세 가지 법칙이 반드시 존재를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아! 사마디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스스로 판별해 볼 때 이 세 가지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걸 자기가 잘 조절을 해보면 됩니다.

 

하기 싫은 거 하게 될 거 같으면 어떻게 해? 대부분 졸립고, 하기 싫어하고, 금방 밥 먹어도 배가 고프고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지게 됩니다.

삼매도 마찬가집니다. 삼매에 들지 않았을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대부분 그런데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또 끊임없이 할려고 하는 것들, 시간도 없이 막 몰입해 들어가는 것들, 그런 것들 보면 좋은 것들입니까, 나쁜 것들입니까? 어른도 마찬가지죠! 어른도 대부분 보면 술, 마약, 아니면 어떤 나쁜 짓 이런 것들 보면 요요 세 가지 법칙에 거의 맞아떨어져.

 

통상적으로 세속적으로 말하는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술을 그만두는 것은 힘들다는 거라. 그런데 술에 빠지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담배에 의존하는 것도 아주 간단한데 담배 끊는 거는 또 그렇게 힘든 거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어쨌든 인간은 누구든지 이런 집중력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줄 것이냐? 그게 뭡니까? 그렇죠!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걷고, 앉아있고, 서 있고, 누워있고 했을 때 그것 자체를 알아차리도록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아이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이들도 올바르게 집중력을 키워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이가 하기 싫어하더라도. 왜? 그렇게 할 거 같으면 당장은 내가 이익이 없어 보이니까 하기 싫어도,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는 것들을 갖다가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명상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인해서 집중을 키워주도록 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집중력을, 바르게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탐진치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대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런 걸 대신해서 서로 행복하게 되고, 서로 공존하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수행에서 집중을 할려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은 이제는 앉고 걷고 서고 하는 방법들을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집중이 잘 안 되거든.

뭐가 집중하는 것을 방해합니까?

그게 뭐냐면 다섯 가지 장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뭡니까? 감각적인 욕망들(kāmacchnda), 악의(byāpāda)를 가지는 것들, 혼침·망상 나태와 게으름(thi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들 그다음에 의심(vicikicchā)하는 것들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마디가 계발되면 이 다섯 가지가 드러나지 않고 나중에는 완전하게 없어져 버린다 하고 스님이 누누이 얘기를 합니다.

 

대상에 집중하면 에깍가따(ekaggata, 집중)가 계발됩니다. 그 대상과 내가 관찰하는 마음 딱 두 개밖에 없다 하는 에깍가따, 그 대상에 집중하는 것들이 계발되고.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 뭡니까? 기쁨입니다. 삐띠(plti, 희열)

그다음에 그 대상으로 마음이 향하는 것들, 열심히 노력을 하므로 인해서 대상으로 향하는 것들 위딱까(vittaka)가 있게 되고.

또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즐거움이라는 수카(sukha, 행복)가 있게 되고.

그래서 그 대상을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끊이지 않고 관찰하는 위짜라(vicāra)가 있게 되고,

그래서 바른 견해가 생기고,

그래서 집중을 하는 상태에서는 맨처음에는 이 다섯 가지가 계발이 됩니다.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 이것으로 인해서,

앞에 얘기한 다섯 가지 까마찬다부터 해가지고 위찌낏차-의심까지 다섯 가지 장애들을 몰아낼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물론 수행을 해나가면서 점차적으로 위딱까, 위짜라 부터 떨어져 나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언젠가 스님이 네 가지 성인에 대한 것들을 설명을 하면서 그 부분을 좀 자세하게 해줬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우리 홈페이지에서 그런 것들은 참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마디 삼보장가입니다.

 

사마다 삼보장가가 계발되면 불안함이 전혀 없고 몇 시간이라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럴 때 대상을 면밀하게 파악을 해나가서 그 대상에 오롯이 빨려들어가는 듯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되도록 경행이나 서 있는 상태나 이런 것들을 하지 말고 좌선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을 바꿔버리면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깨져버립니다.

 

절대 그럴 때는 스님이 혹시라도 내가 좌선하고 있는데 경행하라고 죽비를 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일어날 때가 아니다 싶을 때는 좌선을 그냥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이 안 될 때 11 비율을 맞춰나야되는 것이지, 수행이 잘 돼나갈 때는 절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깨져버리는 경우, 좌선하고 있을 때 사마디가 깨져버리고 망상이 일어나고 할 때는 그전에 사마디를 다시 체험할려고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그때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서 부드럽게 경행을 해줘야 됩니다. 똑같은 사마디는 절대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사마디가 깨어져버렸을 때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다섯 가지 힘이 균형이 안 맞았기 때문입니다. 앉아 있어봐야 안됩니다. 그때는 경행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리불 존자에게 우빠와나 라고 하는 스님이 와서 물어봅니다.

윗자(vijjā)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명(明), 밝게 드러낸다는 그런 뜻으로서, 지혜 그런 뜻으로 써집니다.

"윗자(vijjā)에 의해서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안된다고 그럽니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럼 윗자를 가지고 안되면, 짜라나(caraṇa)는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행(行)이라 그럽니다. 행(行)-짜라나의 의미는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걸 전에 제가 인터넷에 우리 홈페이지에 안 올렸던가요? 짜라나에 대한 걸? 안 올린 거 같네요. 정리해 놓은 것은 있으니까.

어쨌든 짜라나는 보통 보면 나쁜 행위들보다 바른 행위들을 얘기할 때 이 짜라나라고 얘기합니다. 협소하게 해서 얘기 할게요.

여기서 우빠와나 스님이 얘기를 했을 때의 짜라나는 도덕적인 그런 바른 행위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할 때, 수행할 때는 바른 행위가 뭡니까? 삼매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마디를 가지고 해탈을 이룰 수가 있느냐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짜라나(caraṇa)로 인해서 완전한 깨달음이나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똑같이 그럴 수 없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우빠와나 스님이 다시 물어봅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합했을 때,

"윗자하고 짜라나하고 같이 있을 때 완전한 해탈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 안 된다는 거라. 그것도.

"그럼 이 두 가지가 없을 때 이뤄질 수 있느냐? 완전한 해탈을" 그것도 안 된다는 거라.

이 스님이 헷갈려 버린 거라. 뭘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를 모르겠는 거라.

 

여러분들도 사리불 존자를 스님 법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익히 듣고 알고 있을 거라. 아주 자상한 분입니다.

목련 존자 하고 사리불 존자가 왜 2대 제자냐 하면, 단도직입적으로 수행 쪽으로 얘기하면, 아주 초심자들을 갖다가 자상하게 이끌어가지고 이 사람을 도의 경지에 딱 올려놓는 것은 사리불 존자가 일등이라.

그런데 도의 경지에 딱 올라갔다 해가 다 되는 것은 아니거든. 진리를 체험했다 해가지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맛은 봤는데 그 맛을 본 놈을 저쪽 아라한까지 탁 채고 나가는 것은 누가 제일이냐 하면 목련 존자가 제일인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양대 제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초보자들 이렇게 끌고나가 가지고 법의 맛을 얻도록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자상해야 될 거라. 나중에는 법의 맛을 본 사람은 그걸 우격다짐으로 끌고가고 하려니까 목련 존자 같은 경우에는 아주 직선적이고 사람을 확 잡아끄는 게 있는데 사리불 존자는 안 그래. 아주 여성적이고, 그래서 설명을 할 때도 조분조분조분하게 설명을 해주는 그런 스타일이고, 목련 존자는 그것하고 반대고.

 

그래서 그걸 차례차례 설명을 해줍니다.

윗자가 있다고 했을 때, 아까 윗자를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지혜죠!

그럼 지혜가 있다 할 거 같으면 누가 지혜가 있는 겁니까? 내가 지혜가 있다고 하는 거라. 통상적으로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다. 아! 내가 뭘 체험했다. 아! 내가 뭘 알았다. 아! 내가 인제 사띠가 잘 된다.

사띠가 잘 된다고 하면서 대부분 뭘 합니까? 그 이면에는 '내가' 그런 걸, 사띠를 잘했다, 성취했다 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윗자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라.

짜라나 가지고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아! 내가 삼매를 체험했다. 윗자든 사마디든 그것은 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속에서 누가 성취했고 누가 이루었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사마디를 체험하면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사리불 존자의 입장에서는 못 깨닫는다. 못 깨닫는다 하는 거라.

 

밥을 먹으면 배고픔은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밥으로 인해가지고 내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물어볼 거 같으면, 당연히 건강하게 할지 안 할지는 나도 모른다는 거라. 밥을 먹는 게 차곡차곡 쌓여가지고 일정하게 계속 먹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몸이 건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밥이라고 하는 것은 배는 부르게 할지 몰라도 몸을 건강하게 유지를 해준다고는 얘기 못한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

 

사마디를 체험했다고 해서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리고 사띠를 잘 하고 있다고 해가지고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사리불 존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부분인 거라.

그런데 사띠하고 사마디로 인해서 어쨌든 깨달음을 이루거든! 그러면 뭘 제대로 해버려야 되겠어요?

''라고 하는 것들, 그것만 딱 제거해버리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거라. 사리불 존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마디를 체험하고 싶다.'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버리라는 거라. '사띠를 잘 하고 싶다.' 그 생각 자체를 버려버리라는 거라. 조그마한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그 깨달음에는 주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어가 있는 즉시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거라. 항상 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취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마음이고, 순간순간의 작용이 마음인 것뿐입니다. 그 마음이 연속한 것뿐인 것이지 그 상태에서 어디에도 주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어가 없을 때 해탈이나 열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사마디도 엄밀하게 따지면 사띠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그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사마디의 개념하고는 완전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忘我(망아)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나를 버려버린, 주어를 버려버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지, 나를 잊어버려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 진공상태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사띠도 사마디도 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사닥다리 같은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깨달음을 이루고 해탈하기 위한 것은 그 어디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마디 삼보장가는 뭔가가 아직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미세한 떨림이 있게 됩니다.

그걸 버려버린 상태가 뭐냐 하면

우뻭카 삼봇장가(upekkhā-sambojjhaṅg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평등각지.

우뻭카(upekkhā)라는 게 뭡니까? 평등하다, 침착하다.

사람들이 어떨 때 침착해집니까? 누가 만약에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쪼맨한 사람이 나한테 그럴 거 같으면 '니는 혼자 얘기해라' 전혀 겁을 안 먹죠. 니가 나를 위협하고 때려봐야 나는 전혀 거기에 밀리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렇게 침착하고 그럴 수가 있다는 거라.

 

우뻭카 삼보장가(upekkhā-sambojjhaṅga, 平等覺支)라는 것은 뭐냐면, 앞에 여섯 가지가 두루두루 갖춰진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모든 능력을 다 갖춰서 균등하게 잘 갖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우뻭카·침착함·평등함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할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죠.

그래서 이 우뻭카 삼봇장가가 계발되면 바로 깨달음에 들어가집니다. 바로!

 

그런데 여러분들은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할려고 생각을 해야지 그걸 이걸 지속적으로 다 한다 해가지고, 머릿속에 든다 해가지고, 실천 하나도 안 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라. 우뻭카 삼봇장가도 마찬가지로 '이런 경지가 있구나' 하는 것만 이해를 해버리지, 그것을 취하려고 할 거 같으면 아예 아무것도 못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우뻭카 삼봇장가는 칠각지의 마지막에 위치해놓은 만큼 깨달음의 바로 조건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침착하고 평온하고 안온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떤 깨달음도 이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문제해결을 할려면 이성적이고 냉정하지 못하면 문제해결을 못합니다. 반드시 그걸 일상 생활에서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문제에 부딪쳤을 때 먼저 마음을 냉정하게 하는 법들을 배워야 됩니다.

··· 평등각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그 대상자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바라보게 되는 거라. 이것이 법의 본래의 성품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에 좋고 싫은 것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당연히 평온해지니까 도와 과에 가까워지게끔 된다 하는 얘깁니다.

 

가끔씩 스님도 공부 안 될 때 처음에 어떤 것으로 공부에 신심을 일으켰느냐 하면, 사리불 존자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도 저녁에 잘 때 되면 어딜 보고 인사를 했는지 아십니까? 삼배를 꼭 하고 자는 분이 있습니다. 앗사지 존자입니다. 앗사지 존자가 누군지 알죠?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하셨던 오비구, 그중에 한 분이라. 그것도 막내란 말이라.

앗사지 존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아주 평온하고 아주 고요해 보여. 차마 가서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그 스님이 공양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렸어. 탁발하러 가는 모습부터 발견해가지고 그 스님을 따라가도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똑같은 상태, 그리고 공양을 잡술 때도 마찬가지. 공양이 다 끝나고 나서 사리불 존자가 앗사지 존자에게 물어봤어.

법을 깨닫습니다. '아! 이게 진짜 진리구나' 하게 됩니다. 너무나 유명한 얘기니까 내가 상세하게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 법을 만났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마지막 열반에 드실 때까지 꼭 저녁에 자기 전에는 앗사지 존자를 향해서 이렇게 삼배를 합니다.

 

스님도 가끔씩 공부 안되고 할 때 아! 사리불 존자가 앗사지 존자에게 절을 할 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하는 걸 떠올리기도 합니다. 아주 평온해집니다. 그러고 나면 또 수행이 좀 돼나가. 어쨌든 무엇이든지 문제해결 할려면 고요하게 가라앉혀가지고, 붙어있는 지푸라기들 이런 것들 전부 톡톡 다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

 

더 재밌는 얘기 해드릴게요.

부처님 입멸 후에 인도에 가장 위대한 왕인 아소카 왕이 인도를 최초로 통일했던 왕입니다. 마우리야 왕조에서. 그 통일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렇게 했을 거라. 그런데 하루는 의문이 드는 거라. 내가 이렇게 해가지고 뭐가 남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거라.

그래서 왕궁 밖으로 쭉 내다보고 있는데 조그마한 일곱 살짜리 스님 한분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거라. 그 모습이 너무나 침착한 거라. 일곱 살짜리가.

아마 사리불 존자가 앗사지 존자를 보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였을 거라. 왜? 깨달음을 이루었던 분들은 누구든지 그 우뻭카가 계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강한 자극이든 어떤 것이든 관계하지 않고 평온을 그대로 유지해갑니다. 이 일곱 살짜리도 꼭 마찬가지라. 아라한이었으니까.

 

이 아소카 왕이 딱 반해버린 거라. 그래가지고 그 사미스님을 왕궁으로 초대해가지고, 왔는데 뭘 어떻게 스님을 앉혀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스님이 편한데 가서 앉으십시오 하니까, 일곱 살짜리가 왕의 손을 딱 잡으면서 나하고 같이 앉읍시다 하면서 원래 왕이 앉는 자리에다가 가서 털썩 앉는 거라. 그 아소카 왕하고 같이. 꼭 동네 아저씨 손 잡고 가듯이, 아소카 왕이라 할 거 같으면 날아가는 새도 무서워가지고 피해가는 아주 위대한 왕이었어. 그런데 일곱 살짜리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평온하게 그렇게 앉는 거라.

 

아소카 왕이 거기서 그냥 완전하게 마음이 열려버린 거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거라. 그 꼬마 스님 입장에서는 그 방에 이렇게 쭉 둘러보니까 자기보다 법으로 뛰어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거든. 그렇게 판단을 내린 거라. 그랬으니까 당연히 높은 자리에 가서 앉는 것은 당연한 거라. 그래도 왕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에 왕의 손을 잡고 같이 가서 그렇게 앉은 거라.

그러고 나서는 이 아소카 왕이 불교를 아주 많이 홍보를 하고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칙령들을 내리고, 그 뒤로는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 해서 진짜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소카 왕을 이끌었던 사람도 뭐를 가지고 이끌었습니까? 이 우뻭카로 인해서 이끌었습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집안에 그런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요 그 집안 자체가 아주 좋아집니다. 훌륭해지고 전혀 문제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침착하게, 그러면은 가정은 반드시 행복하게 돼있다는 거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격렬하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침착하게 생활하는 것이 그 어떤 것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자! 우뻭카 삼보장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마디의 상태에서는 완전하게 고요하지는 않습니다. 왠지 모르게 약간 기분이 좋습니다. 약간. 왜? 내가 지금 수행 잘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약간은 들떠있게 됩니다. 약간의 떨림은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 그게 강해져버리면 당연히 사마디가 깨져버리는 거라.

 

그런데 이 우뻭카라는 것은 그것조차도 버려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근대 사마디 하고 우뻭카 하고는 딱 종이 한끝 차이입니다. 그거 딱 버려버리고 나면은 아무것도 사로잡히지 않거든.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탐심(貪心)이라든지, 진심(瞋心)이라든지, 치심(癡心)이라든지 이런 것들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게 되고,

칠각지가 그런 상태입니다.

 

뒤에 칠각지의 실천 부분네 가지 성인의 경지에 대한 것들 할 때 쭉 많이 설명했던 것들입니다. 그걸 참조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쨌든 간에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수행하지 않더라도 처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지식하고 관계가 굉장히 깊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들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물론 그리하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반드시 수행을 통해서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를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수행을 통해서 첫 번째 성인의 경지에 이르르면 더더욱 좋고!

 

그렇게 한 것과 그렇지 않고 지식으로 첫 번째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은 분명하게 나중에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는 좀 차이가 납니다.

수행을 통해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해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지도할 때 월등하게 뛰어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쳤을 때는 지식보다는 그래도 수행 쪽입니다. 그렇더라도 지식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거는 쭉 써놓았습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읽어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로써 이 부분 마치고 번뇌의 장은 다 끝을 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