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4. 마음의 영양소1 (20080807)

담마마-마까 2020. 1. 24. 14:17

https://youtu.be/eiCfMjq3GAE

24. 마음의 영양소1 (20080807)

 

··· 아까 스님이 물질에 대한 부분이 아직은 좀 미흡했다고 그랬고, 마음에 대한 부분이 좀 미흡했다고 그랬는데, 단편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이.

 

물질을 그냥 이 몸이라 생각해봅시다. 일단!

이 몸이 성장할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영양분이 필요하죠. 어떤 영양분들이 필요합니까? 음식물도 있을 거고, 또 다른 거, 이 몸이 만들어지는 것은 뭐 업으로 인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을 거고, 그러면 업도 어찌 보면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거고, 일단 그런 걸 다 떠나서라도 여러분들 어릴 때 몸하고 지금 몸하고는 많이 다르죠! 그마만큼 성장했고, 아니면 성장이 멈춘 사람은 퇴보하고 변화해 나갈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몸은 이해하기가 좀 수월합니다. 몸이 건강해지고 성장할려면 뭐 음식을 먹든지 뭘 먹든지 끊임없이 영양분을 섭취를 하면 된단 말입니다. 얼굴이 더러우면 씻고 또 영양크림이나 바르고 이러면 아름다워지고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뭘 영양분으로 해서 살아갈까요?

누구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수행자 대답)

물론 알아차림을 빼고는 얘기를 할 수 없는 거고, 영양분을 삼을 수 있는 것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여러분들은 마음이 어떤 것을 영양분으로 삼는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마음을 잘 몰랐다 하는 부분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경우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오히려 어린애보다도 못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는 않을 거고, 그래도 뭔가 조금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하는 부분들이 있죠! 뭐가 다릅니까?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됐을 때 뭐 크게 영향을 안 받죠! 뭐 화가 난다든지 아니면 상대방이 밉다든지 이리하더라도 뭐 부처님 말씀이나 스님 말씀에 '그러면 안되지, 내가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지' 해서 '행복하기를' 이렇게 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해나가기도 하고, 그럴 거란 말입니다.

그럼 기본적으로 마음의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거는 악의나 이런 것보다는 자애로운 것들이 영양분이 될 수가 있겠죠!

 

그다음에 또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런 교리적인 거 얘기하지 말고, 팔정도 중에서 뭐 어떤 거? (수행자 대답)

예. 보시도 물론 영양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영양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을 먹었을 때 마음이 증장되는 걸 얘기합니다. 마음이 커나가는 것!

그런데 보시 많이 해나간다고 해서 마음이 커나간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물론 그런 마음을 가지면 참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애로운 것은 어쨌든 그거는 키우면 키울수록 마음은 성장해 간다는 거라. 영양소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띠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그걸 먹으면 만병통치약이 되듯이, 마음이 의연해지고 커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Caturārakkhā bhāvanā (짜뚜라-락카- -와나-)

네 가지 보호 수행

 

Namāmi buddhaṁ guṇasāgarantaṁ,

나마-미 붓당 구나사-가란땅,

sattā sadā hontu sukhī averā,

삿따- 사다- 혼뚜 수키- 아웨--,

kāyo jeguccho sakalo dugandho,

-- -굿초- 사깔로- 두간도-,

gacchanti sabbe maraṇaṁ ahañca.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

 

저는 한량없는 공덕의 배인 부처님께 예경 드립니다.

모든 중생들이 항상 행복하고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이 몸은 나쁜 냄새들을 풍기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Namāmi dhammaṁ sugatena desitaṁ,

나마-미 담망 수가떼-나 데-시땅,

sattā sadā hontu sukhī averā

삿따- 사다- 혼뚜 수키- 아웨--,

kāyo jeguccho sakalo dugandho,

-- -굿초- 사깔로- 두간도-,

gacchanti sabbe maraṇaṁ ahañca.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

 

저는 선한 곳으로 나아가게끔 설해진 담마에 예경 드립니다.

모든 중생들이 항상 행복하고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이 몸은 나쁜 냄새들을 풍기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Namāmi saṅghaṁ munirājasāvakaṁ,

나마-미 상강 무니라-자사-와깡,

sattā sadā hontu sukhī averā,

삿따- 사다- 혼뚜 수키- 아웨--,

kāyo jeguccho sakalo dugandho,

-- -굿초- 사깔로- 두간도-,

gacchanti sabbe maraṇaṁ ahañca.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에 예경 드립니다.

모든 중생들이 항상 행복하고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이 몸은 나쁜 냄새들을 풍기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 스님이 게송을 한마디 읊어드리겠습니다.

마음의 필수 영양소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빨리어 게송입니다.

 

'나마미 붓당 구나 사가란땅' 그렇게 돼있습니다.

'위없는 덕을 갖추신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삿따 사다 혼뚜 수키 아웨라' 이 부분 아마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모든 중생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게송들이죠.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지적을 안 한 부분이 뭐냐면

'까요 제굿초 사깔로 두간도' 이럽니다.

'이 몸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부정관이죠.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나오고, 사마타 수행에서도 나옵니다.

 

그다음에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 그렇게 돼있습니다.

매일 매일 기억하고 회상해야 될 다섯 가지 중에서 뭐가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것이 있죠? 그 죽음에 대한 것들입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

탁 이까지만 되면 내가 부처님 위대하다고는 안했을 거라. 그 뒤에 딱 뭘 붙였느냐 하면 '아한짜' '나도 이와 같이 죽는다.'

 

이후로 붓당 이라는 단어 대신에 담망이 들어가고, 상강이 들어갑니다.

담망에 들어갈 때는 '나마미 담망 수가떼나 데시따' 하고 그렇게 합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고 하는 것입니다.

상강에 들어가면 '나마미 상강 무니라자 사와깡' 그렇게 됩니다.

'위없는 스승의 제자들인 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삼보가 기본적인 마음의 영양소의 기본적인 조건에는 들어가집니다.

나마미 붓당(namāmi buddhaṁ), 나마미 담망, 나마미 상강 할 때의

'나마미'는 인도에 가면 처음에 사람을 보면 뭐라고 인사합니까?

"나마스떼(namaste)" 그러죠. '나모, 나마미, 나마스떼' 다 똑같은 어근에서 나온 겁니다. '어떤 대상을 의지한다. 어떤 대상에 귀의한다.' 그런 뜻이죠.

인도에서는 귀의한다는 그 대상은 신(神)이죠! 그래서 '신에게 귀의합니다. 신에게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 할 때 이 '나마스떼'라는 용어를 씁니다. 옛날에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신, 신들에게 이 나마스떼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의 성자, 구루(guru)라고 하는 성인들에게 이 나마스떼라고 하는 용어를 씁니다. 요즘은 통상적으로 쓰죠!

 

옛날 같은 경우에는 '나마스떼'라 하지 않고, '스왓디' '스와스띠' 라고 그렇게 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요즘 우리말로 하면 행복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하는 그런 거하고 마찬가지이고.

안 그러면 '스왁가따' 그렇게 합니다. '당신을 보고 지낼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하는 그런 용어들을 쓰는데, 요즘은 나마스떼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너무 종교 자체가 신적인 개념으로 많이 바뀌다 보니까, 일반인들에게도 그 신의 개념을 도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태동이 되는 거고, 일반인들에게도 그런 신(神) 개념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전에는 신과 성인들에게만 쓰던 용어들을 일반인들에게도 쓰는 그런 현상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나마미', '나마스떼' 라고 하는 것은 '나는 예배합니다' '나는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스님은, 누가 다른 사람이 '나마미 붓당(Namāmi Buddhaṁ)' 이렇게 하면,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라는 용어를 쓰면 나는 그 용어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여러분들은 '나모 땃사 바가와또(Namo tassa bhagavato)' 이렇게 할 때든지 '나모 붓닷사(Namo buddhassa)' '나모 붓다야(Namo buddhaya)' 뭐 이렇게 할 거 같으면 그건 받아들이는 어감이 조금 다르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안정된다든지 마음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붓다(Buddha) 아니면 담마(Dhamma), 상가(Saṅgha)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하면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절대적인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눈에서 눈물이 금방 툭 떨어질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독송을 하든지 듣든지 하면 마음에서는 이미 분노라든지 욕구라든지 하는 것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그런 상태가 되고 그런 마음들이 됩니다.

 

그마만큼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의미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바로 열반에 들려고 했던 이유도 의지할만한 대상이 없거든. 아무리 이 세상을 살펴봐도 자신보다 뛰어나고 더 훌륭한 스승이 없는 거라. 의지할 곳이 없는 거라.

그마만큼 스님에게도 '나마미 붓당' 할 때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할 때 그 부처님이라는 의미는 그냥 신적인 의미보다는 진짜 먼저 가신 스승으로써 내가 의지하고 나아갈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주 크게 와닿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붓다 담마 상가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받아들여야 됩니다.

부처님의 덕은 더 이상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상 가는 것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도 완전 무결하다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하고, 부처님이 간 길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길을 간 성자들도 마찬가지로 부처님과 담마와 같이 존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무니라자(munirāja)'라고 그럽니다. 성인 중에서도 왕이다, 성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인.

그 성인인 부처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와까(sāvaka)' 제자들이기 때문에 꼭 마찬가지로 부처님과 같은 존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ṅgha)에게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영양분을 키우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써 자리를 잡아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영양분으로써 기본 조건이 되어야할 뿐아니라, 다른 조건으로써도 이것은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불교도가 되기 위한 기본조건이고, 또 내가 담마를 배우기 위해서 아니면 일반적인 법칙을 배우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조건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가 되면 먼저 뭐부터 합니까? '삼귀의' 삼창부터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다.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겠다. 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가겠다.' 하는 그게 기본조건이라는 거라. 불교도가 되기 위한 기본조건인 것이고, 마찬가지로 마음의 영양분을 주고 마음을 증장시키기 위한 기본조건은 반드시 이 삼보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개념들이 이해가 아직 잘 안되고 할 거 같으면 자꾸 경전독송들을 하든지 아니면 삼보의 의미를 회상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도 기운이 툭툭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법을 가르치기 싫을 때도 있고 그래선 안되겠지만 그럴 때도 있고, 또 수행을 하기 싫을 때도 있고, 뭐 어쨌든 그런 상태들이 가끔씩 올 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보통 뭘 하느냐 하면 이 경전독송을 합니다. 경전독송도 아주 간단한 걸 합니다. 삼보에 대한 회상부분!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대한 것, 그걸 갖다가 줄기차게 합니다. 한 한시간 정도 아주 간단한 구문이지만 그걸 갖다가 줄기차게 쭉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붓다 담마 상가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그런 마음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성장이 안 되면 그건 아무리 오래 살고, 또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 법으로 볼 거 같으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거라. 그러면 마음을 성장시켜주는 게 우선이 돼야하는데 그러기 위한 기본조건은 조금 전에 얘기한 삼보에 대한 것들이 확립이 되게끔 자꾸 스스로가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삿따 사다 혼뚜 수키 아웨라(sattā sadā hontu sukhī averā,)'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그러니까 마음의 영양분을 주는 첫 번째 영양분이 됩니다.

아웨라 - 두려움이 없다는 말도 되고 괴로움이 없기를 번뇌가 없기를 하는 말도 되고, 그런데 어쨌든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평화롭기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수카 - 행복하기를.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그럴려면 어떻게 돼? 고통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웨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들이 없도록 하는 것.

 

며칠 전에 스님이 경주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경주 어느 절에 갔더니 종무소 앞에다가 요즘 모기들 파리들이 많으니까 모기 파리 잡아 죽이는 전기로 하는 거 있죠? 그거는 모기나 파리가 붙어갖고 타가지고 죽는 그런 거더라고. 무수하게 하여튼 죽었더라고. 그걸 떡 달아놓고 있더라고. 그래서 지금 정신이 있나 없나, 절에서... 그래서 내가 한번 물어봤어. 이거 누가 설치해놨습니까? 주지 스님이 설치를 해놨다는 거라. 아무리 여름이라서 모기하고 파리한테 괴롭힘을 당한다고 하지만 그걸 이리 죽일라고 이렇게 전기로 가지고 죽이는 거, 그거는 나도 뭐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그거는 이렇게 해놓으면 달려든다면서? 주변에 있는 모기나 파리들이. 그래서 거기에 부딪쳐가지고 죽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걸 해서 되겠느냐 하니까, 주지 스님이 그걸 달아놨는데 뗄레야 떼지도 못한다는 거라. 그래요? 그럼 내가 뗄게요 하면서 내가 떼버렸어. 차마 그 죽어가는 거를 보고 있지는 못하겠더라고. 내가 안 봤을 거 같으면 모르겠는데 그걸 직접 눈으로 모기들이 거기서 엉겨붙어가지고 죽는 걸 보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체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누가 죽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불행하게 되고 싶은 사람 있느냐는 거라. 고통스럽게 되고 싶은 사람 없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죽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누가 죽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모기 잡는 걸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어버리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다들 살려고 하다가 그 모기나 파리는 죽는 거라. 살려고 거기에 달려든 거지 죽을라고 달려들지는 않는다는 거라.

모든 중생들은 꼭 마찬가지라. 살고자 한다는 거라. 생존본능은 항상 가지고 있는 거라. 살고자 할 뿐 아니라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고통스럽고 치욕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거라.

 

'모든 중생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하는 자애의 생각,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첫 번째 조건이다 하고 그래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걸 되돌려보면 '내가 평화롭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 같으면 남들도 그렇게 바라지를 않는다는 거라. 내가 죽기 싫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기 싫은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남이 잘못되기를, 행복하지 않기를,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것들은 대부분이 보면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에 얽혀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거든. 그렇게 불행하길 원하지 않고, 고통스럽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서 내가 뱉는 말은 남들이 그걸 들으면서 고통스럽지 않아야 되는데, 고통을 당하는 걸 즐긴다는 거라. 자기는 그렇게 원하질 않으면서, 이율배반적이라는 거라.

 

그거는 그렇진 않다는 거라. 나와 마찬가지로 남도 똑같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게 돼있는 거라. 살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럼 내가 일으키는 행동들이나 내가 일으키는 말들은 좋은 결과가 오도록 해야지 나쁜 결과가 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속에서 항상 누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또 내 가족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자애의 마음을 항상 가지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왜?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 나를 위해서!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자기가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라.

이것이 첫 번째 마음에 영양을 주는 요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항상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자꾸 마음속에서 어떤 경우든지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응용한 것이 뭡니까? 처음 수행할 때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돼있지 않으니까 뭐부터 합니까?

앉아가지고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이 없기를' 멧따바와나를 먼저 한다는 거라. 하고 나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이 되면 그때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대상을 관찰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두 번째 경우는 어떤 경웁니까? 바로 마음이 안정돼서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고 고요해지지를 않으니까, 이때까지 설득했던 마음들과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천천히 절을 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에게 예경드리는 것들입니다.

천천히 절을 하면서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하고, 그리고 그 동작에 마음을 일치시켜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담마를 회상하고 담마의 고마움을 알고 그렇게 절을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가에 대해서 성스러움을 알고 그렇게 따라갈 것을 맹세하고, 그것을 마음을 동작에 일치시켜서 안정시키고,

그래서 그렇게 절 세 번을 하는 거라.

그것을 천천히 나누어가지고 삼십몇 동작으로 구분을 해놓았던 겁니다.

그것이 먼저 돼야 만이 어떻게 됩니까? 몸과 마음이 안정돼서 마음에 영양분을 취할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취할 준비가 됐을 때 마음속에서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지혜롭고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고 자비의 게송,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라고 하는 그런 바와나를 하는 것들입니다.

네 가지 사무량심을 한량없이 펼치게 돼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첫째 요소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항상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먼저 그 마음을 먼저 가지라는 거라. 남을 치료할 때도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평화롭기를 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고 나서 치료를 하고,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마음을 가지고 나서 일을 시작을 하고, 이렇게 모든 시작점에는 이것을 먼저 기준점으로 두도록 자꾸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말을 할 때도 그렇게 하고 나서 말을 해보라고. 생각을 할 때도 그렇게 하고 나서 생각을 해보고. 그럴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이 나쁜 곳으로는 빠지지 않고 나쁘게 물들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마음의 영양소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까요 제굿초 사깔로 두간도(kāyo jeguccho sakalo dugandho,)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까요' 몸, 신체라고 하는 것은 몸 전체가 악취가 나고 더러운 것이다 하는 거라. 집에 고양이나 개들 많이 키우죠. 만약에 그것이 죽었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오래도록 키운 강아지나 고양이일 것 같으면 아마 그거 부둥켜안고 울고 그럴 거란 말이라. 오래도록 아마 그 고양이를 잡고 있어도 그렇게 냄새난다 하고는 못 느낄 겁니다. 죽은 시체인데도.

그런데 사람 한번 보십시오. 탁 죽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우는 것들도 가장 친한 사람이나 처음에 부둥켜안고 울지, 그것이 몸이 식고 나면 부둥켜안지를 않습니다. 울기는 울겠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관에다 집어넣고 하는 거라.

 

고양이 한 달 안 씻어도 냄새 안 납니다. 그렇게 안 납니다.

사람은 한 삼일만 안 씻으면 가까이 가지도 못해. 더럽다고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이 몸은 굉장히 더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씻겨주고 이뻐해주니까 그게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아주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이 몸이라는 거라. 사람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개나 소나 돼지고기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죽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어떤 경우에는 그걸 짤라가지고 먹기도 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하죠! 자기가 애지중지 기른 것은 그렇게 안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었다, 다리뼈 손뼈 짤라가지고 정육점에 갖다가 팔 수 있습니까? 왜 그럽니까? 똑같은 뼈인데, 똑같은 살이고. 인간은 그래도 그런 동물과 다르게 사고를 하고 조금 더 고귀한 동물이라고 판단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그 고귀한 값을 해야 된다는 거라. 동물하고 똑같이 마음이 성장하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동물보다도 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사람입니다. 동물이 지나간 자국은 풀이 나지만 사람이 지나간 자국은 풀이 안 난다고 그럽니다. 그마만큼 악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악한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마만큼 더럽다는 거라. 부정하다는 거라.

 

그런데 왜 그렇게 인간은 부정하지 않다고 자꾸 생각하느냐는 거라. 이 몸은 원래부터가 부정한 것이고, 더러운 것들입니다.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털 하나를 빼내더라도 그게 얼마나 더러운 겁니까? 피지 먹고 자라고 있고, 오만 고름들 더러운 것들 먹고 자라는 겁니다. 그 머리카락 씻겨주니까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안 씻어주면 그렇게 냄새날 수밖에 없는 거라.

원래부터 인간의 몸,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는 그렇게 더러운 것이라는 거라.

 

이 몸의 부정관, 이 몸의 더러운 것을 이해를 해야 만이 적어도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몸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아야 만이 마음이 증장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거라. 몸에 신경 쓸 것들을 마음으로 돌릴 수 있다 하는 거라.

인제 몇십 년 동안 몸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고 신경썼으니까 그마만큼 해도 돼. 그마만큼 해도.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예 안 하는 것들도 아닐거고.

그럼 적어도 내가 먼저 받아들이라는 거라. 아! 이 몸은 참 부정한 것이구나.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더러운 것이구나. 그걸 먼저 받아들이라는 거라. 그래야 몸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두 번째 마음의 영양소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세 번째는 다음 시간에 합시다.

세 번째는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생명은 죽는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냥 죽는다 이랬을 거 같으면 아까도 스님이 얘기했지만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닌데, '나도 그와 같이 죽는다' 하는 거라.

굉장히 부처님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그런 대목들입니다.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하고 진도들을 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자기 자신의 마음을 증장시킬 수 있는 계기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