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5. 마음의 영양소2 (20080828)

담마마-마까 2020. 1. 25. 01:35

https://youtu.be/YsdJuuFmNjU

25. 마음의 영양소2 (20080828)

 

··· 마음의 영양소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서 오늘은 그 부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영양분이라고 할 거 같으면 보통 '아하라(āh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음식'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몸에도 먹는 음식이 들어가야 몸을 유지하듯이, 마음에도 그런 영양분이 있어야 만이 마음을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고, 또 수행을 해나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뜻으로 '마음의 영양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저번 시간에, 저번 시간에 스님이 얘기한 것은 스님이 만들어낸 마음의 영양소들입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적혀있질 않습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적혀있냐면 팟사(phassa), '팟사 아하라' 뭡니까? 접촉이죠!

스님 소리도 여러분들 귀에 접촉을 하는 거고, 여러분들이 스님을 보는 것도 접촉인 것이고, 일어나는 느낌들도 접촉으로 인한 것이고, 걷고 서 있고 앉아있고 일상생활하고 하는 모든 정보는 신체에 접하는 접촉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이걸 불교에서는 마음의 영양분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영양분은 영양분이라도 나쁜 쪽으로 영양분이 될 수가 있기도 합니다.

그 접촉하는 것을 잘못 이용할 경우에는 나쁜 방향으로 하겠죠.

 

경전에 두 번째는 뭐냐면 '마노 산 쩨따나 아하라(mano sañ cetanāh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노(māno)는 보통 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표현들을 많이 하죠.

쩨따나(cetanā)는 뭡니까? 의도! 마음으로 의도를 내는 그런 영양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접촉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걸 듣고 싶다 하는 마음을 내야 되는 거고, 내가 보고 싶다하는 마음을 내야 되는 거고, 인식하고 싶다 하는 의식, 그런 기분을 갖다가 '마노 산 쩨따나 아하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꼭 마찬가집니다. 걸어가고 싶다, 앉아있고 싶다, 살아가고 싶다, 어떻게든 뭘 하고 싶다 하는 그런 기분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영양분도 한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항상 있게 되기 때문에! 이것도 영양분이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경전에 뭐라고 있느냐면, '윈냐나 아하라(viññāna āh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 개념이든 아니면 실재적인 것이든 보통 그 마음이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들, 경험하는 것들, 그다음에 지식을 아는 것, 그다음에 감정이라든지, 아니면 인식하는 개념이든지, 이런 것들은 마음의 영양분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 인식하는 거는 개도 인식하고, 아주 미천한 아메바도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접촉은 누구든지 있게 돼있고, 그다음에 뭘 하고 싶다 하는, 살고 싶다 하는 것도 누구든지 있게 돼있는 거고, 인식하는 것도 누구든지 있게 되는 거라.

살아있는 생명이면 누구든지 있는 것이 이 팟사, 그다음에 마노 산 쩨따나, 그다음에 윈냐나(viññāna)라고 하는 것들이라.

 

이 세 가지를 통상적으로 아하라, 영양분이다 하고 경전에는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스님 나름대로 정리한 이 게송을 알면 이 부분에 대한 이해들을 좀 더 잘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세 번째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gacchanti sabbe maraṇaṁ ahañca)' 그렇다고 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 죽음에 도달한다.

갓찬띠 - 도달한다. 이르른다.

아한짜 - 나도 그와 마찬가지다. 나도 죽는다 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 만약에 지금 여기서 죽음을 맞았다. 어디에 태어날 거 같습니까? 확신할 수 있는 사람? 확신은 못하는데 누구든지 열반에 이르든지 아니면 천상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렇겠죠? 죄를 많이 지었든 아니면 착한 일을 많이 했든, 저기 소나 돼지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란 말이라. 아니면 그보다 더 못한 것으로 태어나는 것은 더더구나 없을 것이고. 물론 간혹은 나는 뭐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 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잠깐의 생각일 뿐이지 그 생각이 지속하지는 않을 거라.

 

왜 그러냐면 누구든지 다 다음 세상이 만약에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잘 태어나길 바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믿으면 어쨌든 천국간다고 얘길 하게 되는 거고,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꼭 마찬가지로 너가 좋은 행위 할 거 같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단지 그게 하느님이 아니고 '너의 행위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지.

그런데 다음 세상이 그게 천상이든 어떤 세상이든 간에 영원하다 할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영원하지 않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 다른 종교에서 뭘 할 거 같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하고 얘기는 하지만, 영원히 천상에 머문다 하고 얘기하는 적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도 마찬가지고. 너가 좋은 일 할 거 같으면 천상세계에 태어나지만 영원히 천상세계에 있는다 하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는 거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라.

 

보통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는 경우들, 그런 데는 천국에 태어나기 위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수를 믿든 아니면 뭘 하든 이런 조건들을 두루 갖추지 않으면 천상에는 못 태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지가 잘났고 못났고 해가지고 천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 절대신을 완전하게 믿느냐 안 믿느냐를 가지고 천상에 태어난다, 안 태어난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부처님은 거기에 대해서 많은 비판들을 해놔 놨습니다.

유일신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리고 전지전능한 자라고 할 거 같으면, 쉽게 말하면 인간도 창조했고 이 세상도 창조했고 그다음에 천상세계도 창조를 하게 되는 그런 형태들을 띠는데, 사람이 행한 행위도 어떤 면에서는 신이 다 알고 있는 거니까 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내가 짓는 착한 행위도 신의 책임이고, 악한 행위도 신의 책임이다. 모든 것은 신의 책임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 신만 믿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안 믿으면 천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고 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수행하는 것도 신의 책임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사람이 절대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상이 만약에 그렇다고 할 거 같으면 제대로 굴러가겠느냐 하는 거라.

부처님이 말한 요점은 바로 그겁니다.

모든 것이 신의 책임인데 인간이 해야 될 게 뭐 있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신을 믿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거라. 천상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앞뒤가 안맞는 얘기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힌두교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이 방법들을 많이 얘기합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 '나'라고 하는 것은 가짠데 '나'라고 하는 진짜가 있다 하는 겁니다. 그 진짜와 이 '나'라고 하는 가짜 하고가 합일되면 천상에 태어난다. '브라흐마나'의 세계가 된다. 그럼 브라흐마나하고 '나'라고 하는 거하고 합일시키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영혼은 변하지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는 그런 것들이다. 개인에게도 그런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영혼이 있다는 거라. 단지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거라.

그걸 빨리 계발시켜가지고 나에게 영원불멸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런 개체, 영혼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 거 같으면 나와 브라흐마나하고 합일되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불교에서는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영혼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천상세계는 인정을 합니다. 명상수행을 열심히 해가지고 그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힌두교에서도 똑같이 수행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수행하면 범아일여가 된다고 합니다. 범아일여가 돼서 그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건 둘째 치고 내가 죽지 않는 영원불멸이 된다 하는 그런 사상인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고, 수행을 해가지고 수행을 잘하면 브라흐마나라고 하는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그 천상세계도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그런 세계는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차원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차원은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네가 브라흐마나의 세계로 갈 거 같으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잘하고 이런이런 수행들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유를 뭐라 했느냐면 물에다가 물을 섞으면 똑같이 물이 되는데, 물에다 기름을 섞으면 섞이지 않는다. 네가 브라흐마나의 세계로 갈 거 같으면 브라흐마나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브라흐마나의 세계에 갈 수가 없다는 거라. 달리 말하면 이 세상 자체가 브라흐마나의 천상세계를 유지할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철과 철은 자석으로 서로 연결되지만 철과 나무는 절대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활 그러한 수행으로 인해서 천상세계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천상세계로 갈 것이고, 천상세계가 설혹 없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 자체가 그런 천상 세계다 라고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 사상하고 불교의 천상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 자체가 많이 다르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는 게 뭐냐면 자이나교 같은 경우들입니다.

자이나교는 보통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고행을 많이 가르칩니다.

부처님은 육년 고행하셨죠! 이 자이나교에는 기간을 정해가지고 십이 년 고행을 많이 시킵니다. 인도 같은데 보면 발가벗은 나형외도(裸刑外道)들을 볼 때들이 있습니다. 그거는 대부분이 보면 이 자이나교도 수행자들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받을 때도 그릇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받는 게 아니고 맨손으로 받습니다. 물질로 인해가지고 업이 더러워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물질은 더러운 것이다 하는 거라. 그 물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면 윤회를 갖다가 끊어버릴 수 있다 하는 거라. 그 업을 끊어버릴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그런 겁니다.

 

물론 자이나교에서는 절대적인 영혼은 없다고 봅니다.

그건 불교하고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지만, 그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도 힌두교하고는 다르게 유일한 영혼이 아니고 복수를 얘기합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조금 더 차이는 나긴 나는데

어쨌든 업이라는 것들의 존재를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업은 물질로 인해서 더러워지기 때문에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 물질에 더러워지지 않도록 할 거 같으면 업을 소멸해나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업을 소멸하는 기간을 한 십이 년 이렇게 고행을 하면 소멸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쩌면 자이나교의 교주가 부처님보다는 연배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십이 년이라고 잡은 거는 부처님의 육년 고행을 염두에 두고 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들도 들고 하는데, 그래도 핀트를 잘못 맞췄죠. 부처님은 고행 자체를 반대를 해놨죠.

 

자이나교는 이런 것들인데, 부처님은 반론을 상당히 많이 제기를 합니다.

물질로 인해서 업이 더러워진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이나교도들하고 불교도들하고 한 자리에서 수행을 해나가게 됐는데, 자이나교도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맨날 수행을, 고행을 하거든. 한쪽발로 서가지고 있기도 하고, 비 오는데 그냥 비를 맞으면서 요가자세들을 취하기도 하고, 단식을 하기도 하고, 고행들을 하는데, 불교수행자 승려들은 유유하게 옷 다 걸치고 탁발나가서 공양받아와서 한적한데 가서 공양잡숫고 하거든.

 

자이나교 사람들이 불교 승려들한테 왜 그렇게 사치를 하느냐? 종교가라고 할 거 같으면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그런 게 있어야지, 그리고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하고 고행하려고 하지 않고 뭐 그렇게 사치스럽게 하느냐 그렇게 얘기하니까, 불교 승려들은 우리 부처님은 그렇게 고행하라고 한 적 없다.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내가 왜 그거 하느냐?

그런데 당신들은 뭐 할려고 그렇게 고행하느냐 하고 자이나교 수행자들한테 물어봅니다.

 

그거는 간단하다는 거라. 업을 제거하기 위해서! 업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태어난 거라. 업이 없으면 내가 다시 안 태어난다는 거라. 윤회하지 않는다는 거라.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리 고행을 한다는 거라. 이렇게 고행을 하면서, 물질로 인해서 업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그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 고행으로 인해서 물질 물욕적인 것들을 버려버릴 것 같으면 업은 소멸되는 것이다 하는 거라. 업이 전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근심 걱정 없이 열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보니까 틀린 것 같은데 반론을 제시를 못하겠거든.

업은 부처님도 얘기를 한 거니까 뭐 비슷한 거 같은데 잘 모르겠는 거라. 논리적이라. 그정도로 자이나교는 어떤 면에서는 논리적입니다.

 

부처님이 가서 물어봅니다.

그래 그럼 하루 고행하면 얼마만큼 업이 사라지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그거 똑바로 대답할 사람 없다는 거라.

그럼 앞으로 남은 업이 얼마나 있느냐? 업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떻게 알아. 모른다는 거라.

그럼 뭘 근거로 해가지고 십이년 고행하면 업이 다 소멸된다고 하느냐? 업이 얼마나 소멸됐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면서, 고행으로 인해서 업이 소멸된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느냐? 그거는 이치에 안 맞지 않느냐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업은 그렇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하게 열반을 얻은 사람들도 그 업으로 인해서 과보를 받기도 하는 것이고 하는데, 업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날 거 같으면 업이 영향을 못 미치게 할 수는 있다.

아닙니다. 우리 자이나교 교주인 마하위라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말합니다.

마하위라가 틀리게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걸 바르게 말했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느냐? 나는 내 제자들한테 그런다. 내가 한 말도 맞다고 받아들이지 마라. 네가 스스로 확인해가지고 그게 맞을 거 같으면 받아들이라고. 그런데 마하위라라 해가지고 무조건 신뢰하고 그 말을 맞다고 할 거 같으면 당신이 그걸 확인할 수 있어야 될 거 아니냐. 하루 단식하고 하루 고행해가지고 얼마나 업이 소멸되는지도 모르는데 뭘 가지고 확인하느냐는 거라. 그런 것은 맞지 않다.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은 없다고 얘기합니다.

 

보통 이 세 가지가 대부분 범주에 속합니다.

그래서 영원하다는 것은 없다는 거라. 영원을 구할려고 하느님을 믿고, 아니면 범아일여 내가 아트만을 계발해가지고 브라흐마나가 될라고 하고, 자이나교도 같이 그렇게 고행도 하고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는 거라.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아가는 괴로움, 살아가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영원한 걸 바라는 거고, 그리고 죽는 게 두려우니까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망상일 뿐이다 하는 거라. 개념이라는 거라. 실재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은 집착과 욕구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얘길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안 죽을라고 합니다. 왜 안 죽을라고 합니까?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살고 싶어서! 그런데 천년만년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죽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그건 누구든지 아는 상식이라. 그렇잖아요. 누구네 딸래미 결혼한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들었다. 그럼 그 결혼하는 걸 봤다. 그거는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말이라.

그런데 당신은 죽는다. 그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도 그리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 그걸 평범하게 안 받아들인다는 거라.

바닷물은 짜다고 아는 거라. 그거는 상식적으로 안다는 거라. 그런데 눈이 오는데 눈이 왜 따뜻하지 않느냐고 우는 사람을 보고 뭐라 그럽니까? 바보라고 얘기합니다. 바보! 누구든지 죽는다는 거라. 너도 죽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뭐라고 얘기할 거라. 바보라는 거라. 그러니까 죽은 사람 앞에 가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우는 사람은 부처님이 보기에 바보라는 거라. 당연히 죽는데 왜 우느냐는 거라.

 

경전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고 형도 돌아가셨어요. 그래가지고 아버지와 형의 장례를 지내는데 안 울거든. 사람들이 순 빌어먹을 놈이라고 그러는 거라. 형은 그렇다고 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안 우는 놈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그 사람이 내가 왜 울어야 됩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보고 울지는 몰라도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형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부질없는 거 여덟 가지 하다가 갈 뿐이다는 거라. 돈 많이 벌려고 하고, 이익을 바라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명예, 남에게 험담 듣고 그다음에 칭찬도 받고 비난도 받고 그다음에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하는 그 여덟 가지, 여덟 가지를 그냥 누리다 갈 뿐이라.

그런데 그거는 내가 보기에는 부질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왜 부질없어요? 즐거운 것이 항상 즐거울 수 없고, 변하게 돼있는 거고, 괴로운 것도 항상 괴로울 수 없고 변하게 돼있는 거고, 명예롭게 돼있는 사람도 명예가 떨어지기도 하는 거고, 부유로운 사람도 가난하게 되고, 이렇게 자꾸 변하는 거기 때문에 부질없는 거라는 거라. 그런데 아버지하고 형은 그거 하다가 갔거든. 자기가 보기에는 참 어리석게 살았거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 여덟 가지 하고 있는 거라. 살아간다는 거 자체는. 그리고 누가 나에게 안 좋은 소리 할 거 같으면 그 즐겁지 않은 느낌이 항상 갈 줄 알고 그것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비탄한다는 거라. 사람이 살았으면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돼있는데, 그 죽음을 보고 비탄해 하면서 운다는 거라.

그 여덟 가지를 잘만 이해했다고 할 거 같으면, “아이고! 내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느냐” 하고 비탄해 울지는 않는다는 거라.

 

왜? 나나 당신들이나 머지않아서 죽는다는 거라.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거라는 거라. 그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죽음을 보고 울 필요가 있느냐는 거라. 그건 쓸데없는 거라는 거라.

모든 형태 있는 것들은 변화하게 돼있다. 무상한 것이다. 이 법칙에 의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무지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지, 나는 그걸 아는데 왜 내가 울어야 되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그럽니다.

죽음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서 수행으로 삼아라.

죽음은 수행의 도구로써 굉장히 유용하게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스님이 예비수행 부분에 그거 적어놓은 거 혹시 봤습니까?

 

예비수행 뭐가 있습니까?

을 하므로 인해서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주는 것, 또 한 가지는 뭐가 있습니까? 멧따바와나! 자애를 방출하므로 인해서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고 집중력을 키워주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또 뭐가 있습니까? 마라나눗사띠죠! 죽음에 대해서, 아! 내가 죽으면 내 몸이 어떻게 썩어가고 어떻게 변해가고 하는 걸 생각함으로 인해서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려서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

 

통상적으로 부처님이 한 열 가지를 얘기해놓았습니다.

그 열 가지 중에 하나가 이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는 겁니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나하고 관계있는 사람이 죽었다 할 거 같으면 슬프지마는 관계없는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안 슬픕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데 그러면 나와 나의 가족들이나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절대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슬플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은 죽을 리가 없다 하는 전제조건을 내려서 그 자신이 죽었을 때 아니면 내 가족들이나 누가 죽었을 때 뭔가를 잃어버렸다, 손해났다는 생각 때문에 슬픈 거라.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들은 나하고 손해나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반드시 죽음은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나도 죽는다는 거라.

이 게송의 참 백미가 뭐냐 하면 '아한짜', 아한짜라. 나도 그와 같이 죽는다 하는 거라. 관계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라는 거라.

죽음에 대한 관찰은 마음을 백팔십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때 언제라도 죽음에 대해서 관찰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마라나눗사띠 바와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죽음은 언제든지 우리 곁에 찾아올 수 있다 하는 사실을 빼먹으면 안됩니다.

이게 왜 도움을 주느냐 하면 경각심을 일으키거든. 굉장히 경각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빨리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 빨리 내가 착한 일 바른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명상을 할 거 같으면 사띠(sati)가 아주 잘됩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에 대해서 명상을 하면 긴박감을 가지게 됩니다. 상웨가(saṁvega)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나도 죽는다는 사실. 그래서 냐나(ñana) 이해력도 가지게 됩니다.

 

'사띠, 상웨가, 냐나' 알아차림에 긴장감이 없고 노력하려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사띠가 흩어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띠한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똑같은 사띠가 반복된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호흡을 할 때도 그냥 단순하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똑같은 '일어남, 사라짐'만 있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은 이 세 가지를 계발시켜준다 하는 거라.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명상들을 깊이 있게 관찰을 하도록 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관찰을 해나가면 욕구를 빨리 떨어뜨리게 된다는 거라. 즐거움을 얻을려고 하는 욕망들, 세상은 갈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일상생활할 때도 어떤 일에도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는 거라.

 

어느 때라도 무상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할 수가 있다는 거라. 모든 존재하는 존재의 본질은 변화하고 허무한 것이다. 나라고 하는,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진리를 바르게, 빨리 이해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마라나눗사띠 바와나를 하라고 하는 거라.

 

또 그렇게 해나가다 보면 죽음의 순간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라.

확실하게 사띠, 마음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비록 이생에서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물론 그랬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마라나눗사띠를 지속적으로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이생에서 살아가는데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죽음을 맞아서 다음 생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예외 없이 죽는다. 나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는 사실을 잘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죽음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들을 자꾸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혹시 누가 돌아가셨다고 할 거 같으면 일부러라도 자꾸 관찰을 하도록 해보십시오. 죽음은 누구든지 찾아오는 것이고 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날 거 같으면 그 죽음에 대해서 구역질을 낼 필요도 없고, 그 죽음을 피할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거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거라. 그래서 그 죽음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가 있다는 거라.

관찰을 해보라고. 해보면 오히려 다른 거를 관찰할 때보다 더 쏙쏙 알아. 더 사띠가 잘되고. 왜? 이해하게 되니까, 죽음을. 그리고 내가 긴박감을 가지게 되니까, 긴장감이 있으니까 더욱 잘되는 거라.

그런 죽음을 봐가지고 그런 죽음도 몸도 변하고 그런 변화되는 것들을 봐가지고 무상을 즉각적으로, 실제적으로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는 거라.

 

경전에 죽음에 대해서

죽고 나면 하루 때는, 몸이 의식이 끊어지고 나면 몸이 차가워집니다.

아주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죽은 사람 손을 잡고 있으면 금방 몸이 식어져버립니다. 한여름인데도 진짜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집니다. 몇도 안 내려가는데도 그렇게 됩니다.

인간이 온도변화가 심할 거 같지만 인간의 몸이 살아있을 동안에 온도변화가 그렇게 많이 기복이 심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몇 돕니까? 36점 5도 라고 그러죠! 고열로 인해서 의식을 잃을 정도면 몇 도정도 됩니까? 39도 40도 그 이상을 넘지 않습니다. 몇도 안 차이 납니다. 그런데 40도가 넘어가면 의식도 잃을 뿐아니라 나중에는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거라. 떨어지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인도에서 왜 사람들이 얼어가지고 죽는지 아세요? 우리는 상상을 못 할 거라.

이십몇도 이러는데 왜 죽느냐는 거라. 몸이 그마만큼 보호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그 정도 온도에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 몸이 이게 어찌 보면 참 단단할 거 같아도 가장 형편없는 게 이 몸이라. 그런데 죽고 나면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그 싸늘하게만 식어가느냐는 거라. 금방 딱딱하게 굳어져버리는 거라. 물렁물렁하던 이게 금방 굳어져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해. 그래서 죽은 사람들 어떻게 합니까? 굳어지기 전에 하루가 지나기 전에 이걸 다 싸매야 돼. 안 그러면 나중에 분질러져. 그걸 한번 상상을 해보라고. 얼마나 이 몸이 하잘 것 없는가.

 

이틀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냄새 막 진동합니다.

아무리 뭐 방부제 갖다 놓고 오만 곳에 다 집어넣고 하더라도 거기선 다 진물들이 나와. 오만 진물들이 다 나오는 거라. 살아있으니까 하루 안 씻어도 이 얼굴이 안 씻은 줄 모르죠. 죽고 나면 하루 안 씻고 하루 놔두면 그냥 온데 물 다 나옵니다. 안 닦아주면 도저히 보지도 못할 정도라.

하루 지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거라. 온데 진물들 나오고 냄새는 진동을 하고, 그런데다가 몸에서는 푸릇푸릇 반점들이 생겨나가고, 그 반점들이 생겨나는 거 지금 저승꽃이 핀다고 사람들이 그러죠? 그거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 그러니까 빨리 얼굴을 분을, 단장을 해주는 거라 죽고 나면.

 

삼일째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구더기 나옵니다.

그 몸을 펼쳐놔 있을 경우에는 그 구더기들이 삐죽삐죽 나와서 몸을 갉아먹는 걸 한번 보십시오. 내 몸이 그렇게 되는 거라.

 

한 일주일이나 그렇게 놔둬 봐요. 물기들은 싹 다 빠져나가 버리고 뼈에 가죽만 딱 붙어있는 게 아주 시커매져서 보지도 못할 정도라. 얼룩 들어간 반점들이 인제는 아예 새카매갖고 꼭 어디 다쳐가지고 부스럼딱지 앉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탁 붙어있어. 참 형편없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한 한달이나 지나봐요. 그 가죽조차도 다 허물어져서 없어져버려. 뼈만 보르르 남아있어요. 흰 뼈도 있고, 조금 거무스름한 뼈도 있고, 갖가지 뼈들만 남아있는 거라. 인제 그때 되면 누가 이거 물어가라 해도 물어가는 개도 없어. 그 뼈는 그러면 안 변할 거 같애요?

일 년 이내에 다 삭아져 버립니다. 부수지 않아도 다 삭아가지고 천천히 내려앉아. 내려앉고 나면 바람 한번 쉬익 불고 나면 휘익 그냥 흰 잿가루 다 휘날려버립니다. 아무것도 안 남아. 그걸 상상을 하라는 거라. 나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와 닿는 것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불확실한 겁니다. 살아가는 것들도 불확실하고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데, 오직 하나 확실한 것은 죽음이라는 거라.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마음에 영양분을 자꾸 주도록 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를 여러분들이 꼭 기억을 하고 해서,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이 엷어지고 또 부처님 말씀을 공부할려는 마음이 엷어지고 할 거 같으면 이것들을 자꾸 끄집어내가지고 회상해서 마음의 영양분을 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첫 번째가 뭐라 그랬습니까? 자애!

두 번째는 욕구와 집착을 억제하도록 하라.

세 번째가 죽음!

이런 것들은 자꾸 여러분들이 되뇌이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간이 많이 되었네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