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22.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3. 희각지, 경안각지 (20080703)

담마마-마까 2020. 1. 23. 19:16

https://youtu.be/VtXwACnsYEY

22.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13. 희각지, 경안각지 (20080703)

 

저번 시간 이어서 삐띠 삼보장가 부분부터 오늘 할 차례죠.

 

삐띠(piti)는 뭡니까? 기쁨입니다. 기뻐하는 겁니다. 그 기뻐하는 것이라도 어떤 기뻐하는 겁니까? 그냥 일반적인 기뻐하는 것하고 차이가 나죠!

조건이 뭐냐 하면 염리(厭離, nekkhamma) 욕망으로부터 떠난 것, 버려버린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을 삐띠 삼보장가(piti-sambojjhaṅga, 喜覺支)라고 그럽니다.

 

만약에 내가 욕망이 일어난다. 그 욕망을 내가 멈춰가지고 아! 멈추니까 이리 좋은 거구나 하고 했을 때 일어나는 것. 화가 일어나는 데 알아차림 해서 화가 일어나는 걸 알고 탁 멈췄다. 그래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러니까 그런 탐·진·치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삐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반적인 세속적인 거하고는 차이가 나죠? 예를 들면 돈이 백 원이 필요해서 백 원을 가지므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세속적인 기쁨인데, 돈이 필요 없어가지고 전부 다 버려버리고 나서 일어나는 기쁨,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삐띠 삼보장가(희각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은 돈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지워진 거죠? 조건지워진 겁니다. 이렇게 조건지워진 것들을 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돈 한푼 없어가지고 참으로 기쁘구나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경전에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마라가 부처님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로 인해서 굉장한 기쁨을 가진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그 재산으로 인해서 또 굉장한 기쁨을 가진다. 뭔가 내가 집착할 게 있어가지고, 그런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을 느낀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거라. 아이도 없고 재산도 없고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기쁨이 하나도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이가 있으면 아이로 인해서 괴로움도 있다는 거라. 재산이 있으면 재산으로 인해서 괴로움도 있다는 거라. 집착할 만한 것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 집착할만한 것이 있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물론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 기쁨은 여기서 말하는 삐띠가 아니고 '조건지워진 기쁨'이라는 거라. 조건지워진 것은 언제든지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온에서 말하는 수온-느낌에 대한 덩어리 그중에는 즐거운 것도 있고 괴로운 것도 있고 무덤덤한 것도 있다는 거라. 그런 기쁨이라는 거라. 기쁨이라는 것은 그 즐거움에 가까운 기쁨이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 기쁨이니까 어떻게 돼요? 조건지워진 것들은 변하게 돼있으니까 그 기쁨은 즐거움으로 또는 괴로움으로 이렇게 변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런 기쁨은 속세의 기쁨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반대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라.

 

경전에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다니야라고 하는 소치는 사람과 부처님이 대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거는 언젠가 내가 한번 얘기를 했던 부분입니다. 소를 말뚝에다가 잘 매어가지고 외양간에다가 잘 두었다는 거라. 날이 보니까 꾸리꾸리 해가지고 비가 올 거 같거든. 그래도 인제 걱정을 안 한다는 거라. 어린 젖소들, 아기들은 엄마한테 젖을 배불리 먹여놨다는 거라. 그러니까 밤새 엄마 찾을 일도 없고 또 아기소들도 마찬가지고 어미소도 마찬가지고 외양간 말뚝에다가 잘 매여놨기 때문에 도망갈 염려도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비가 오더라도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는 거라.

모든 소들이 외양간에 다 들어가 있다. 들어가 있어 어린 송아지도 일찍이 젖을 먹여버렸다. 그 소들을 말뚝에다가 잘 연결해뒀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없다. 그래서 비가 아무리 와도 괜찮다. 비가 와도 오히려 나는 기쁨을 느낀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에 맞춰서 부처님이 댓구를 갖다가 뭐라 하느냐면,

나는 기르는 소도 없고 소가 없으니까 당연히 송아지도 없다. 송아지가 밤새 젖 달라고 할 것도 없다는 거라. 송아지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비가 오든 말든 간에 나는 소도 없고 송아지도 없고 묶어 둘 말뚝도 없으니까 비가 오든 말든 나는 전혀 관계없다. 나는 오히려 기쁨을 가지고 산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또 다니야가 얘기합니다.

나는 비가 들이치지 않게끔 창문도 잘 닫아놨고, 비가 새지 않게끔 지붕도 튼튼하게 잘 이어놨으니까 비가 오려면 와라. 나는 안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그럽니다.

나는 집도 없다. 그러니까 당연히 닫을 창문도 없다. 집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서든 머물고 지낸다는 거라. 그러니까 비가 오고 안 오고 하는 것은 내하고는 큰 관계가 없다. 비가와도 지붕 무너질 염려도 없고 지붕 사이로 비 떨어질 염려도 없는 거고,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즐겁게 잘 지낸다는 거라. 기쁨을 가지면서.

 

또 다니야가 그럽니다.

나는 말 잘 듣는 우리 애도 있고, 또 온순하고 가정일 잘하는 마누라도 있고, 집에 가면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나는 기쁨을 가진다는 거라. 집에 이런 것이 있으니까 비가 오든 말든 나는 기쁨을 느낀다는 거라.

부처님은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다는 거라. 걸리적거릴 것이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도 나는 기쁨을 느끼고 산다는 거라.

 

다니야는 스스로 자립해가지고 내가 먹을 만큼 먹는 즐거움도 있다는 거라.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또 모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고 그런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디에 매이지 않고 열심히 하는 만큼 벌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거라. 비가 오든 말든 나는 관계없다 하는 거라.

부처님은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벌어먹는 거는 없다.

그렇지만 밥 굶어 죽는 일은 없다는 거라. 탁발 나가면, 내가 스스로 경작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먹을 걸 준다는 거라. 그럼 먹을 걸 안 주면 기쁨을 양식으로 해서 살아간다는 거라. 그러니까 전혀 문제없다는 거라.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보면 딱 극단적입니다.

한 사람은 뭐가 있으므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는 파트고, 또 부처님은 뭐가 없으므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파트입니다.

 

조류학자들이 가끔씩 그런 것들을 느낀다고 그럽니다.

지금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기쁨, 삐띠 삼봇장가를. 새들이 다치면 데리고 가서 잘 치료를 해줍니다. 치료할 동안에는 굉장히 마음을 졸인다고 그럽니다. 이 새들이 바르게 상처를 치료를 받고 날아갈 것인지, 아니면 오늘 치료받은 것이 내일 덧날 것이 아닌지 해서 맨날 고민한대 그것 때문에. 물론 오늘 지나고 나서 상처가 많이 치유될 것 같으면 거기서 오는 기쁨도 있죠? 기쁨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보면 그 치유하는 데 매달려서 기쁨보다는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하는 이런 것이 범벅이 돼가 있는 것이지 기쁨만 오롯이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떤 때가 가장 기쁘냐 하면 그렇게 치료한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낼 때 그렇게 기쁘답니다. 공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날려 보내는 데 날려 보내고 나서도 서운하지가 않다는 거라. 아! 고놈이 지금쯤은 어디 가서 밥 먹고 살겠지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즐겁고 기쁘다는 거라. 또 그놈이 지금은 한해가 지났으니까 몇 살이 됐겠지, 얼마만큼 아름답게 자랐을까? 이런 상상들을 할 거 같으면 그 새가 직접 나한테 없어도 기쁨이 계속 일어난다는 거라. 그것만 생각해도.

 

부처님 말씀이 꼭 맞습니다.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얻어지는 것은 꼭 기쁨만은 아니다. 기쁨과 괴로움이 범벅이 돼가지고 조건지워진 거니까. 기쁨도 항상 할 수가 없고 괴로움도 항상 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놓아버리고 나서는 괴로운 것은 없다는 거라. 조류학자들이 새를 놓아버리고 나서 아! 그거 아깝다 해가지고 괴롭다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거는 진정으로 그 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겠지.

진정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걸 놓아버렸을 때 기쁨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거라. 오히려 더 증가했으면 증가했지 감소하지는 않는다 하는 거라. 그래서 속세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것이 어떤 기쁨이든 간에 줄어드는 경우들이 많지만은, 수행을 통해서 놓아버리므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는 거라. 언제까지라도 그것을 생각하므로 인해서 기쁨은 항상 있게 돼있다 하는 거라. 그게 여기서 말하는 삐띠 삼보장가입니다.

 

극단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들, 모든 것들을 놓아버렸을 때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기쁨은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괴로움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쁨은 이런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하는 거라. 이것은 오온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즐거운 느낌들은 순간적이고 덧없다는 거라.

그 느낌은 그 기쁘다는 느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느냐면 고통으로 받아들여라 하고, '아! 괴로운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라고 언젠가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괴로운 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괴로운 걸 껴안지는 않죠? 멀리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것일수록 껴안지 말아라는 거라. 멀리 하라는 거라. 그것이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서 또 담마를 통해서 얻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은 욕구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애착, 갈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넥캄마(nekkhamma) 버려버리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그런 순수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욕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쁨은 더욱더 증가해지게 돼있다 하는 거라.

 

마라가 부처님이 탁발 나갔을 때 조작을 해가지고 바리때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게끔 해서 빈 바리때를 들고 오게끔 합니다.

여러분들 알다시피 스님들은 그날 오전 중에 탁발해가 아무것도 안 받아왔으면 그날은 굶어야 합니다. 당연히 그날 부처님이 굶어야 되는 거라. 그때 마라가 부처님한테 그럽니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 봐라. 그러면은 먹을 것이 많을 것이다 하고 부처님한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다시 그 마을로 안 들어가죠!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은 그런 장애들을 이미 버려버렸다는 거라. 취하고 좋아하고 그다음에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이미 다 버려버렸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로 인해서 기쁨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은 장애라는 거라. 왜? 변하는 거기 때문에 장애입니다. 그런 장애는 이미 나는 다 버려버렸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장애물이라는 것은 가는 걸 막는 겁니다.

기쁨도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막히는 거고 괴로운 것도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막히는 거고, 그래서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장애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똑같다는 거라. 기쁜 것들이든 즐거운 것이든 이런 어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전부다 똑같기 때문에 그런 장애는 이미 다 버려버렸다는 거라. 나는 장애를 버려버렸기 때문에 항상 언제든지 행복하게 산다는 거라.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뭐로써 살아가느냐 하면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거라. 기쁨을 먹고 살아간다는 거라.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거라. 오늘 하루 음식을 못 먹는다 해가지고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라. 나는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항상 충만해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행복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희각지(喜覺支)를 스님이 뭐라고 풀이를 해놓았느냐 하면

'탈세간의 성취 점검법이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이때까지는 수행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세간적인, 세상적인 것들이었거든.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어떻게 했어요? 줄기차게 괴롭고 또 갈등 속에서 수행을 해온 거라. 사띠 한다고 용을 쓰고, 이게 바른 진리인가 아닌가 하고 갈등을 하고, 또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되고 그렇단 말이라. 그러니까 혹독할 만큼 자기 자신을 다스려나갔던 겁니다. 수행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자연스럽게 대상을 보고 일어나져야 되는 것인데 이때까지는 그렇게 못했단 말이라. 안되니까!

 

그런데 이젠 이 기쁨의 부분부터는 탈세간적인 것들이 돼나갑니다.

왜? 그렇게 부단히 노력함으로 인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리거든. 그래서 아! 조건지워진 것이 변함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구나. 무상이구나.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거구나. 그 속에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거,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것을 지독한 노력을 통해가지고 이제는 그것을 알았다는 거라.

 

그런 알아차림을, 그런 고유한 특성을 탁 알았을 때는 뭔가가 툭 떨어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봤으니까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뭐냐면 인제는 세간적인 것들을 버려버린 상태가 된다는 거라. 진짜 수행자답게 출가인답게 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난 수행을 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앎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맨 처음에 뭐였습니까? 기쁨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기쁨이라는 각지는 탈세간적인, 출세간적인 것들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들입니다.

 

더 크게 얘기하면 '아! 이것으로 인해서 윤회를 벗어나겠구나'하는 마음이 탁 듭니다. 또한 내가 그런 기쁨을 맛봄으로 인해서 '아! 내가 윤회로부터 벗어났다.' 그 순간만큼은 벗어났다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보면 수행들을 하다가 이 삼법인에 대한 특성들을 탁 알 때는 대부분이 보면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바람이 확 통하듯이 그런 느낌들이 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쁨의 현상들입니다.

기쁨의 현상들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전에 아비담마 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설명들을 했으니까 그 부분은 생략을 하도록 하고.

 

그 밑에 한번 계속 보십시오.

속세라는 것에서 떨어져 있는 윤회의 틀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기쁨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운 기쁨이다. 이것이 삐띠 삼보장가이다.

 

부처님이 그런 걸 뭐라고 했느냐면

"삽바라상 담마라상 지나띠(Sabba rasaṃ dhamma rasaṃ jināti)"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담마의 맛은 다른 모든 맛을 지배한다.'

담마의 맛을 아는 사람은 다른 맛을 취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다른 어떤 좋은 맛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담마에 비할 바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담마의 맛을 취하지, 다른 맛을 취하지 않는다는 거라. 버려버린다는 거라. 그게 담마의 맛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그 담마를 맛봤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출세간을 내가 알았다 해가지고 깨닫는 건 아니죠! 겨우 인제 한발짝 맛을 본 것뿐입니다. 아! 요게 달구나 하고 맛을 본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크게 바뀐다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실제적으로는 계속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쁨들을 맛보지 못하면 힘이 좀 듭니다.

 

그걸 판별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대부분 보면 법에 대해서 확신이 안 선다. 내가 지금 수행하는 이것이 진짜 깨달음에 이르게 할 건지, 아니면 나를 평온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끔 만들어 줄 건지 그런 확신이 안 든다.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이 삐띠 맛을 많이 못 봤다는 거라. 한두 번은 봤겠지. 봤겠지만 그것이 삐띠인 줄 모르고 지나갔다든지, 아니면 그 맛을 회상할 줄 모른다든지, 아니면 그런 경우가 아주 미약해가지고 그런 것들을 잊어버렸다든지 이랬을 경우에, 그럴 경우에는 법에 대한 확신들이 설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삐띠 맛을 많이 맛본 사람들은 법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더 이상 다른 맛을 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또한 정해진 시간에 수행하는 것들이 싫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삐띠 맛을 못 본 겁니다.

오늘 한 시간 하겠다. 그 한 시간 할 동안에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없이 그냥 하는 거고, 또 내일 또 이렇게 한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오늘은 잘되니까 한 시간 할 거 두 시간 해버리고, 내일은 안 되니까 삼십분 만에 때려치워버리고.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수행을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얘기거든. 그건 아니라는 거라. 수행을 싫어하는 것들이 생겨난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하루빨리 삐띠의 맛을 봐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들을 자꾸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아! 내가 삐띠를 체험했구나, 안 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판별을 해보면 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이 안 돼면 '나는 삐띠를 모른다' 하고 판단을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뭐 괜히 스님 "나는 정에 들었습니다." 이런 소리 해쌌지 말고 스스로 자꾸 점검을 해봐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통하지 않아도 삐띠 삼보장가를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삐띠는 뭐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그랬습니까? 넥캄마(nekkhamma)라 그랬죠! 버려버리는 것으로서 일어납니다. 자꾸 버려버려보면 얻어집니다. 여러분들은 다 버릴 수 없죠? 그렇죠! 조건지워놓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끌고나가야 된단 말입니다. 버려버릴 수가 없거든.

 

그럼 뭘 해야 되겠어요, 삐띠를 체험할려면? 지족(知足), 만족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만족할 줄 알아라! 내가 이마만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또 이마만큼 잃어버렸으면 그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이마만큼 더 생겼으면 그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그것을 지족이라고 그럽니다. 생겨나고 잃어버리고, 불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에 관계하지 않고 만족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배울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족하는 법을 배우면 삐띠는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지족(知足)하는 걸 배울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음! 괜찮아. 나는 요것만 해도 충분해. 아! 나는 좋아.' 이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충동을 억제해야 됩니다. 충동을. 뭘 확 가질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확 내버릴려고 한다든지 이런 충동적인 것을 갖다가 스스로 자꾸 억제해야 됩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도 충동적인 것이고, 욕망이 일어나는 것도 충동적인 것이고, 그런 것들을 일단은 막아야 된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면 음! 일단은 그걸 막아. 욕구가 일어나면 그것도 일단은 막아. 이렇게 막음으로 인해서 지족하는 것들을 만들어나가야 된다는 거라. 막고 나서 '음! 이거면 됐어'하고 자꾸 뭐 마인드 콘트롤이면 마인드 콘트롤이고 이렇게 자꾸 만들어나가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렇게 지족하니까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하고 좋거든. '아! 그래 이거야' 하면서 기쁨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라. 뭔 말인 줄 알겠습니까?

 

그다음에 경안각지(輕安覺支) 한번 봅시다.

빳삿디 삼보장가(passaddhi-sambojjhaṅga) 간단하게 합시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네.

다섯 번째는 경안각지입니다. '고요한 마음에 도달하는 감동의 길이다.'

 

기쁨이 일어나고 나면 되게 좋습니다. 스스로에게 감동합니다. 날아갈 거 같습니다. 그 초기 단계가 뭐냐면 이 경안각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경안각지는 고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요한 것도 처음에는 경쾌하게 일어나집니다. 보통 알아차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뭘 해야 될지 뭘 하지 말아야 될지 하는 분석능력이 생깁니다.

분석능력이 생기면 '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해야 될게 뭔가?' 하는 것들을 안다는 거라. 내가 해야 될 거는 해야 되고, 버려야 될 거는 버려야 되고, 이런 것들을 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버릴 것이 많으면 더욱더 노력해야 되는 거고, 해야 될 것이 많으면 또 더욱더 노력해야 되는 거고.

 

그러니까 분석능력이 생기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 내가 더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노력이 자꾸 따른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까 '아! 이것이 바른 거구나' 버려버리는 것으로 인해서 '버려버리니까 내가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구나' 하는 걸 안다는 거라.

사로잡히지 않는 걸 아니까 거기서 일어나는 것들이 기쁨이라는 거라. 그런 기쁨이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전부 가벼워집니다. 굉장히 경쾌해진다는 거라. 진짜 깃털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가벼워져 버립니다. 그것을 뭐라 그러냐면 경안각지라고 얘길 합니다.

 

언뜻 이해가 잘 안될 수가 있는데, 뙤약볕에 아주 뜨거운데서 걷다가 지쳐가지고 죽을 판인데 저 저쪽에 오아시스가 하나 있다. 그늘진 야자나무가 하나 있고, 그럼 그게 얼마나 기쁘겠어? 쫓아가가지고 거기서 물 먹고 나서 시원한 그늘에 그렇게 누워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는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오아시스가 아니고 신기루라 할 거 같으면 실망으로 변하겠죠. 그런데 진짜 오아시스인지를 내가 손으로, 눈으로 직접 확인했단 말이라. 그게 뭐냐면 출세간적인 것들을 내가 직접 확인했다는 거라. 실재적인 것들 궁극적인 실재를 갖다가 알았거든.

그러니까 그 오아시스로 인해가지고 굉장한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기쁨도 내가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음으로 인해서 기쁨이 더욱더 증가하고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편안해지는 거라. 그늘진 곳에서 누워서 이렇게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거든.

 

왜 그러냐면 출세간적인 그 기쁨도 조건지워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 기쁨도 오래갈 순 없습니다. 변해가는 성질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쁨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 부분 지나고 나면 사라져버리고 나서는 반드시 계발해야 되는 게 뭡니까? 이 경안각지라는 거라. 평온한 상태. 평온한 상태가 있어야만이 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이게 안 되면 삼매는 이미 멀리 가버리는 거라.

 

이렇게 될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이 수행을 통해서 되면 참 좋은데 그리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통상적으로 보통 얘기하는 여덟 가지에 대해서 얽매이지 말아야 됩니다. (세간팔법, lokadhamma)

이익이 생기고, 손해가 오고, 칭찬받고, 비난받고, 명예롭게 되고, 불명예스럽게 되고, 고통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이 여덟 가지, 세상적인 것들 여덟 가집니다.

이것을 겪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또 방황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조금 이익이 있다 해가지고 좋아갖고 날뛰어 쌌고, 조금 손해봤다 해서 풀이 죽어버리고 이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조금씩 자꾸 의연하게 대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평온한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여덟 가지들을 대할 때는 조건지워진 것이라고 판단해야 됩니다. 조건지워진 것은 어떻게 됩니까?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조건지워진 것은 어떤 경우든지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며칠 전에 스님이 그걸 봤는데, 세포가 1초에 백만 개 생겨났다가 백만개 사라진다고 그럽니다. 이 가만히 있는 몸이! 우리는 아무것도 안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몸도 그렇다고 그럽니다. 의학적으로 그것을 증명을 해놨더라구. 백만 개씩이나 왔다갔다 하는 거라. 엄청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거라.

 

스님이 저번에 그런 얘기를 했죠. 물질의 변화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다 하고. 아주 빠르게. 빛은 1초 동안에 지구 일곱 바퀴 반 돕니까? 그 정도로 빠르다 하는 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그마만큼 빠르게 일어난다는 거라. 마음은 그보다 더 빠르고, 그것의 열일곱 배나 빠른 거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런 조건지워진 것들을 바라볼 때는 일어났으면 사라진다 하는 사실로써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 조건지워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조금 전에 얘기한 여덟 가지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조그만 것에서도 자꾸 얽매여 들어간다는 거라. 누가 조금만 나한테 안 좋은 소리해도 그것에 얽매여 들어가 가지고 하루 종일 괴롭고 힘들다는 거라.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마음도 편치 않을 뿐아니라, 마음이 편치 않으면 실천수행 하는 것도 딱 멈춰버립니다.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여러분들 거기에 매여들어가 있을 때 수행이 되든가? 절대 안되는 것들이라.

 

이 경안각지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느낌입니다. 엄청난 느낌! 편안한 상태로 마음 편하게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것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자꾸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 선정각지 부분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거는 뭐냐 하면 정진을 해나가는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격렬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그래서 사띠만으로는 불안정함이 반드시 있다고 언젠가 얘기를 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억납니까? 사띠는 안정되고 고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그런 격렬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런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는 피나게 격렬하게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 단계가 지나서 삐띠가 생기면, 삐띠가 생김으로 인해서 그런 격렬함이 사라져버립니다. 그건 내가 사라지라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경안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고요해지고 그 어떤 때라도 자연스럽게 사띠가 됩니다. 자동적으로 사띠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집중하는 것들을 조절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 선정각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