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수행자의 마음가짐 (20081106)

담마마-마까 2020. 1. 26. 13:33

https://youtu.be/4I7LurBrt0g

* 수행자의 마음가짐 (20081106)

 

좌선하고 경행하고 차이점을 아는 사람? 어떤 차이점이 있어요? (수행자 대답)

왜 경행이 거칠다고 생각합니까? (수행자 대답)

동적인 것이라서? (수행자 대답)

그 얘기를 잘못 들으면 수행할 때는 편하고 좋은데 집에 가면 머리 복잡하다는 얘기로 밖에 안들리는데? 그럼 집에서 일상생활할 때는 수행 안 해요? 왜 경행이 그렇게 거칠어졌는데? 경행도 똑같습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단지 주대상이 걸음인 것뿐입니다.

 

배를 관찰하고 있을 때 배에서 일어나는 현상 사라지는 현상, 갖가지들을 관찰해나갑니다. 앉아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게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라는 성품을 알아차려나가는 거란 말이라.

경행할 때는 뭘 대상으로 하는 겁니까? 발입니다. 발!

발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을 통해가지고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런데 왜 경행하면서 거칠어져? 경행하면서 언제 호흡을 관찰하라 한 적이 있어요? 왜 호흡들이 거칠어져?

 

수행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건 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가(ogha)'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격류'란 뜻입니다. 아주 거친 물살이 흐르는 걸 '오가'라고 그럽니다. 그걸 거슬러 가야 되는 경우에 오가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는 길은 그렇게 거슬러간다 해가지고 세상의 흐름과 반대방향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오가(ogha)를 부처님이 네 개로 나눠놨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는 견해(diṭṭhi, ), 견해를 건너뛰어야 되고,

또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들(kāma, )도 건너뛰어야 되고,

또 하나가 뭐냐면 내가 살고자 하는 것(bhava, )도 건너뛰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항상 알아차리지 못하고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것, 아위자(avijjā)라 해서 무명(無明)도 건너뛰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 네 가지를 건너뛰지 못하면 바르게 수행할 수도 없고, 당연히 건너뛰지 못할 거 같으면 해탈이나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살아야 되는 거고, 여러분들은 어차피 욕심을 가져야 되는 거고, 어차피 여러분들은 보면 '이건 누구다, 이건 여자다 남자다' 하고 견해를 가져야 되는 거고, 또 살아가다 보면 알아차리면 좋은데 그렇게 못하고 살아가는 게 태반이란 말이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 그걸 다 버리라고 얘기한 적은 없거든.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오가'라고 하는 거라.

 

물소 떼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강을 건널 때는 절대 물살이 센 곳으로 가서 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가장 잔잔하고 약한 곳으로 가서 강을 건넙니다. 그것도 일직선으로 건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비스듬하게 강을 건넙니다. 상류에서 강을 건너기 시작하면 천천히 강의 흐름에 몸을 맡겨가지고 하류 쪽에 와서 강을 건너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수행은 그와 같이 하라. 그것이 '오가'라고 하는 그 급류, 격류를 건너는 방법이다'하고 그럽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욕심을 부려야 되고 할 거 같으면 그럴 거 같으면 똑바로 하라는 거라.

 

네 가지를 다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들이 지금 잘못하는 게 뭐냐 하면 경행할 때 경행하는 걸 하질 않는 거라.

왜 좌선을 해, 경행하면서? 경행할 때는 발걸음만, 발걸음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면서 내려놓고 하는 데만 온 신경을 다 쏟으면 됩니다. 그것도 강하게 이걸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발도 더욱더 천천히 돼나갑니다.

왜 자꾸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경행할 때는 발이 변화되는 것들을 보고 그 속에서 느낌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만 내고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좌선을 시작하면서 '내가 삼매를 체험해야지' 하고 좌선을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삼매를 경험해야지 하고 좌선할 거 같으면 좌선할 때 절대 삼매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경행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의 세 가지 포인트를 절대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걷고 있으면 걷는데, 걷고 있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왜 다른 걸 알아차릴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렇게 실황중계하라. 실황중계를 하다 보면 틀림없이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게 법의 성품들입니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변화되는 느낌들을! 그래서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그러다 보면 더욱더 내가 세밀하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걸 알아차림하려고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 변화되는 감각들을 더욱더 알려고 하다가 보니까 천천히 되어나가지는 거라.

그래서 천천히 하라.

그 세 가지 포인트를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첫 번째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놓쳐버리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라. 그래서 오늘은 경행시간을 좀 짧게 일부러 했던 이유도 그런 겁니다. 다음부터는 경행을 하더라도 똑바로 하도록 그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우리 연우님, 만약에 연우님한테 아이가 둘이 있다. 한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고, 한 아이는 나하고 가까운 사람의 아이라. 둘이를 어떻게 키워야 될 거 같애? 비슷한 나이라고 치자. 음? 똑같이 키워야겠지.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거라. 똑같이 키울거라. 똑같이 키우는데 두 아이 입장에서는 어떨 거 같아요?

우리 엄마가 나를 똑같이 키운다고 생각할 거 같애요? 안 할 거 같애요? 예. 안합니다. 남의 자식 아이는 똑같이 키워주는 데도 뭔가 모르게 받아들여지는 게 달라집니다. 마음속에서 조금 더 엄마의 애정을 더 받을려고 그러고 똑같이 주는데도 나한테 더 핍박되게 조금 모자라게 주는 것같이 보이고, 시각 자체가 조금 달라지게끔 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 물을 여기 한 반을 채워가지고 줬다. 뭐라고 그럽니까?

"반이나 있네" 합니까 아니면 "반밖에 안되네" 합니까?

생각이 수행에서 굉장히 많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얘길 합니다.

 

자기 아이와 자기가 데리고 있는 하인의 아이를 똑같이 키웠지만, 한 아이는 생각이 어떻느냐 하면 항상 삐뚤어지게 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조금 모자라든지 넘치든지 하게끔 보는 거라. 그래가지고 성년이 됐는데 이 하인의 아이는 꾀를 냅니다. '내가 여기 이대로 있었다가는 영원히 하인으로 있을 것이다.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칠 거 같으면 내 신분을 속이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면서 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어느 날 다른 동네에 있는 똑같은 부잣집에 심부름을 보내거든. 아주 먼 곳이라. 그래서 이때다 싶어가지고 주인집의 돈을 훔쳐가지고 그 마을로 갑니다. 가는데 편지를 하나 쓰는 거라. 그 주인이 편지를 쓰는 것처럼 해가지고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니까 당신의 딸과 결혼하게 해 달라. 그럴 거 같으면 당신하고 나하고는 친척이 되는 것이다.' 하고 주인 도장을 위조해가지고 편지를 봉해가지고 갔어. 그 친구는 당연히 그 사람의 아들이겠거니 하고 딸하고 혼인을 시켜줬거든.

 

그런데 이쪽에 있던 사람은 가만히 보니까 집에 재산도 다 없어지고 큰일났거든. 그래서 이놈을 잡으러 간 거라. 잡으러 가가지고 그 사람을 잡을려고 하는데, 이 하인의 아들은 미리 꾀를 내는 거라. 우리 고을의 풍습은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함께 밥 먹는 법이 없다. 아버지의 모든 수발을 하고 그런다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그 주인이 자기를 잡으러 온 걸 알고 일부러 그 주인한테 더욱 잘해주는 거라. 발도 씻겨주고 진짜 옛날에 자기가 집에 있을 때 하인이 하듯이 그렇게 해줬거든. 그 주인이 가만히 보니까 불쌍하거든.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거기서 정착할려고 하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니까, 고마 돈 훔쳐가고 내 아들 행세하고 하는 것을 눈감아주고 가버립니다.

 

그래가지고 이쪽에서 신분을 속이고 결혼을 해서 사는데 어릴 때부터 길러진 습관이라는 게 인제 그때부터 나타납니다. 뭐만 보면 자꾸 불만을 터뜨리는 거라. 아무것도 아닌 건데 불만을, "아 왜 이것밖에 안되느냐?" 그래서 어떤 놈들은 이만큼 갖다 주고, 아니면 많이 갖다 주면 "너는 집에 냉장고도 없나?" "반은 냉장고에다 보관하고 반만 갖다주지 지금 내한테 다 갖다 주면 그걸 내가 다 어떻게 먹느냐?" 많이 갖다 줘도 뭐라 하고 적게 갖다 줘도 뭐라 하고 모든 게 그런 형태를 띠고 있는 거라.

 

그와 같은 성품을 쭉 계속 지녀왔던 사람이 부처님 당시 때 태어나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 사람 이름이 띳사 입니다. 참 업이라는 게 무서운 겁니다. 과거 전생부터 그런 습관들을 지녀왔던 게 출가했다 해가지고 그게 금방 바뀌는 게 아니라. 탁발을 나가면 이 맛도 없는 이걸 왜 주느냐, 이 맛있는 걸 뭐 어쨌느냐? 내내 그러니까 신도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돼? 고마 스님한테 탁발해주기가 싫은 거라. 만날 궁시렁거려 싸니까. 똑같은 걸 받는데도 다른 스님들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받는데 이 띳사 스님만 하여튼 유별나게 토를 달거든.

가만히 보니까 이래선 안되겠다 싶은 거라. 그런데다가 허풍을 또 그렇게 잘하네. 우리 집에 금송아지가 있는데 뭐 어쩌고 하는 식으로. 내 형님은 아주 부자라서 거기 가면 사방상가-사방에 있는 스님들을 마음껏 초청해가지고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아나따삔디까나 위사카 부인이나 하는 분들은 어찌 스님들 먹는 거 하나를 그렇게 딱딱 맞춰주지 못하느냐? 그 대장자, 또 대부인이 그것조차도 못한다면서 이러거든.

 

가만히 스님들이 보니까 이래선 안되겠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고, 돈 많은 집 도련님이 출가해놓으니까 출가 생활이 잘 안 맞아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다가, 도가 지나치니까 저 사람이 진짜 돈 많은 집 도련님이 출가한 게 맞나 싶어가지고 그 띳사 스님의 고향으로 가서 알아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장자의 아들이 출가한 적은 없고, 그 장자의 집에 문지기의 아들이 출가한 적이 있다는 거라. 문지기로 있다가 하도 궁시렁궁시렁 자꾸 남의 빈정만 사쌌고 이러더니, 목수들이 와있으니까 목수들 따라서 어디 떠돌아다니다가 출가한 사람이 있다고. 전후 사정을 보니까 이 띳사 스님이 장자의 아들이 아니라 그 문지기의 아들이었던 거라. 이 사실을 부처님한테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가만히 보니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상가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느냐면 일반 재가인들은 상가의 문제들을 알아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규칙이 있습니다. 스님들의 일들은 세세하게 알지 마라 하는 겁니다. 이 스님이 옛날에 출가하기 전에 뭘 했니, 뭘 하고 살았니, 이런 걸 알 필요도 없을 뿐아니라, 또 그 스님이 법랍이 얼마나 되니, 또 이 스님이 도력이 얼마나 깊니, 이런 걸 세세하게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래서 스님들에게도 내가 도가 얼마나 깊었다 하는 걸 갖다가 일반인들에게 얘기를 못하게끔 합니다.

왜 그랬냐 하면 일반 신자들이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다른 스님들이 다 똑같이 보여야만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어린 스님이든 나이든 스님이든 다 똑같은 스님으로 보여야만이 한 스님에게 공양 올린 것이 모든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마음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상가의 일들을 세세하게 알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제는 그게 안되거든. 저 띳사 스님도 인제 신도들한테 찍혀버린 거라. 다 스님들이 똑같이 보여야 되는데 저 스님한테는 유달시리 탁발해주기가 싫은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탁발하러 나가니까 띳사 스님만 오면 싹 돌아서 버려. 그러니까 탁발도 못하는 거라. 며칠간 쫄쫄쫄쫄 굶고 있다가 굶어 죽게 생겼거든.

 

부처님이 탁발을 해가지고 와서 띳사 스님한테 가서 얘기를 합니다.

"속에 내용이 없는 사람의 소리는 크다." 속이 비었으면 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또 소리가 큰사람의 내용은 텅텅 비어있다."

'까따하' 라고 하는 빨리어가 있습니다. '물병'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물병인데 인도의 물병은 토분으로 만들어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악기는 물병 모양을 개조해가지고 그 속에 물을 채워가지고 통통 두드려가지고 소리를 냅니다. 크게 만들기도 하고 작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똑같은 크기라도 물을 많이 채우고 적게 채우고에 따라서 두드리면 소리가 다릅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게 뭔지 압니까? 크면 클수록 소리가 크게 납니다. 물이 덜 채워지면 덜 채워질수록 소리가 크게 난다는 거라. 그걸 '까따하' 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도 괜히 그런 사람 있죠? 괜히 불평불만만 하고, 괜히 뻥튀기해서 말하고 그런 거 있죠? 속이 비면 빌수록 더 그런다는 거라.

 

그래서 이 띳사 스님한테 부처님이 신신당부를 합니다.

"말을 할 때 항상 물병을 생각하고 얘기를 하라. 내가 소리가 크고, 또 남을 비꼰다든지 아니면 뻥튀기해서 말할려고 할 거 같으면 텅빈 물병과 같이 생각하라. 물병의 내용이 비었으면 소리가 크구나 생각하라."

왜 그렇게 크게 낼 이유가 없다는 거라. 뻥튀기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또 다르게 왜곡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걸 자꾸 생각하라 해가지고 결국 띳사 스님이 그것을 바꾸어나갑니다.

 

남들에게 보일만한 자랑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될 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집니다. 남에게 자꾸 내세울려고 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꼬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이 잘하고 인정받고 하는 걸 내가 용인하지 못할 때. 잘했으면 잘했다 하면 될 건데 그것가지고 인정을 못하는 거라.

과장되거나 비꼬거나 하는 것들은 그런 버릇들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바른대로 얘기하면 될 건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초조하거든. 초조하고 불안해서 안 되는 거라.

 

이게 세속에서만 이러고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욕먹습니다. 출가한 사람이든지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이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큰일 납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그런 사람 없습니까?

수행하고 있는데 한참 수행하다가 조금 고요해지고 할 거 같으면 '아! 그다음에 내가 삼매 체험하겠지' 하면서 삼매 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 경행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봐주느냐 그거 신경 쓰고 있는 사람들, 아마 부처님 앞에서 그렇게 했을 거 같으면 맞아 죽었을 거라.

 

그거는 세속에서도 뻥튀기를 하고 또 비비꼬고 할 거 같으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렇지 않겠거니 하고 속일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 안 됐으면 안 된대로 그대로 거기에 맞게끔 그대로 하면 됩니다. 오히려 속이고 비꼬고 뻥튀기하면 할수록 속도는 더 늦어지는 거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과거부터 쭉 그렇게들 해왔습니다. 업의 현상으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몸에 배여져 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흐름을 바꿀려고 할 거 같으면 그러한 것들 하나하나도 여러분들이 자꾸 바꾸어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질투하고 화내고 미워하고 망상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다 수행에 장애가 된다 하는 것들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것들은 악업을 쌓는 것이다 하는 것들은 안다는 거라.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인제는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이라. 자기의 습관들을 한번 더 다시 체크해가지고 그걸 빨리 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인제는 미세한 것들이라도 하나씩들 체크를 하고 그것을 바꾸어나갈려고 해야 만이 이 격류들을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행을 할 때 미리 지레짐작을 한다든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도취가 된다든지 남에게 보일려고 하는 형식적인 것들을 하다가 보면 마음의 평온함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해야, 그것도 밤이고 낮이고 항상 그런 마음들이 돼야 공부를 해나갈 건데 애초부터 그게 안 되는 거라.

마음에 평온하고 침착하고 하는 것들이 없으면 당연히 통일성-사마디라고 하는 것들을 체험을 못합니다. 마음에 집중이 안 되면 사띠하는 거는 더욱더 힘들어지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우선 수행은 아주 자연스러워야 되고, 수행은 아주 고요하고 평온해야만이 수행이 되어나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라고 할 거 같으면 빨리 버려버리도록 하십시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고 또 부정적으로 보고 또 있는 그대로 하지 않고 축소하거나 부풀리거나 하는 것들은 그런 성격이 만약에 나에게 있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빨리 버려야 될 성격이다.'하라는 거라. 술 먹고 정신이 흐트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면 보기 싫죠? 그와 마찬가집니다. 정신이 이미 흐트러져 버렸다 하는 거라.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신뢰하지를 못합니다. 수행하는 수행자들끼리도 결국에는 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그 사람 자신은 더욱더 수행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게끔 됩니다.

 

수행을 할 때는 바르게 수행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이 어떤 파도가 닥치더라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끔 됩니다. 수행에서 여러분들이 만나야 될 장애는 여러분 스스로가 만들어야 되는 게 아니고, 장애들은 무수하게 여러분들에게 다가와집니다. 그 장애들을 똑바로 직시하고 수행을 할려고 해야지, 자꾸 비뚤어지게 자기 자신을 만들지는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자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