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습관, 위빨라사(vipallāsa, 顚倒) (20081204)

담마마-마까 2020. 1. 26. 23:44

https://youtu.be/m87s0OJFtHM

* 습관, 위빨라사(vipallāsa, 顚倒) (20081204)

 

습관을 붙인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처음 목요일 탁발팀들도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모였던 분들인데, 지금은 오히려 수행에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스스로 화요일 날도 오게 되고 목요일 날도 오게 되고, 목요일 날도 담마스쿨까지 하고 네 시 넘어서 가는 것들을 보면서, 습관 붙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이익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니그로다 외도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長部)에 나오는 건데 간략하게 얘기하면 니그로다들이 부처님을 비난하기를 뭐라고 비난하느냐 하면 "고요하게 홀로 즐길 줄 알지 다른 종교가들과 같이 만나서 토론하고 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부처님이 알고 있는 그런 지식 지혜라고 하는 것은 한낱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다."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니그로다는 사람들이 이삼천 명이 한곳에 모여서 집회를 하고 또 수행도 하고 그렇게 하는 무리인데, 어느 날 산다나 장로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을 찾아뵐려고 생각을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지금 부처님이 고요하게 숲에 앉아서 수행하고 있는 시간이거든.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 뵙지 못하고 이 니그로다 외도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저 저쪽에서 보니까 이 산다나 장자가 찾아오고 있거든. 그래서 니그로다들이 얘기를 합니다.

"조용히 해라. 저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인데 조용하게 법을 듣고 조용하게 수행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우리같이 이렇게 떠들고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별로 안 좋아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용히 해라."

그래가지고 이 산다나 장자가 왔을 때 이 니그로다 외도들이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아주 하잘 것 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이 얘기를 듣고 그 니그로다 외도들이 있는 곳에 찾아갑니다.

조금 전에 너희들이 무슨 얘기를 했느냐?

니그로다들이 모여 앉아서 얘기한 것들은 뭐 가정에 대한 얘기, 후광에 대한 얘기,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이 만나서 얘기하는 것들하고 똑 마찬가집니다. 그중에는 간혹 법에 대한 얘기들도 있겠죠. 또 서로 간에 도반에 대한 걱정들도 있고, 꼭 마찬가지로 니그로다들도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거든.

부처님한테 이 니그로다들이 그럽니다.

"부처님이 얻으신 깨달음이 어떤 것이냐? 그걸 한번 나타내 보여보라." 하고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알기에는 그 깊이가 너무 깊다. 그러니까 알기 쉬운 것부터 하자. 너희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얘기부터 한번 해보자" 하고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깨달음이 어떤 것이냐?"

 

쉽게 얘기하면 기독교인들이 불교인한테 불교에 대해서 한번 토론해보자 하고 얘기하니까 불자 한 분이 "너희들은 불교에 대해서 모른다. 나는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알고 있으니까 먼저 기독교에 대해서 너희들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얘기를 하고 나서 그 깊이와 불교를 비교해주겠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러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이 그 얘기를 할 수 있거든. 어느 종교가가 토론을 벌일 때 남의 종교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깨달음을 이룬 그 교리, 그 수행에 대한 것을 가지고 토론을 할려고 그러는 거지. 자기가 잘 아는 부분에 대해서.

그런데 부처님은 반대로 얘기를 하거든.

 

그래서 좀 의아해 있는 상태에서 그 니그로다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부처님이 낱낱이 얘기를 합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교리들은 이런 것인데 맞느냐? 또 너희들이 추구해 나가고 있는 목적이 이런 것인데 맞는가?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다 맞는 얘기들을 하거든. 아주 조목조목하게 얘기를 합니다. 결국에는 그 니그로다가 마지막까지 도달할려고 했던 것들에 대한 것까지 얘기해나갑니다.

대부분 외도들은 보면 마지막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깊은 삼매에 드는 것들, 또 신통을 가지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거의 최종적인 것에 해당이 됩니다. 죽음 이후에 다음생에서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또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이생에서는 신통을 얻고 삼매를 자유자재로 성취를 하고 노닐게 되는 것과, 죽음 이후에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시피 합니다. 그것을 부처님이 정확하게 집어내줍니다.

 

그래서 그 니그로다들이 부처님한테 그렇게 물어봅니다.

"이거 이상 가는 깨달음이 있는가? 이거 이상의 법이 있는가?"

부처님은 당연히 있다고 그러거든.

"이거 이상 가는 것이 있다. 한번 들어보겠는가? 내가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할 거 같으면 칠 년만 할 거 같으면 이거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른다. 아무리 이생에서 삼매를 자유자재로 들고 나고 하고, 또 신통이 열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욕심을 가지고 있고, 또 화내는 것이 있고, 또 어리석은 일들을 한다.

그런데 내가 가르쳐주는 이 방법으로 해서 깨달음을 이루면 이런 것조차도 완전하게 소멸해버리게 된다. 한번 해보겠느냐?" 합니다. 머뭇머뭇 하거든.

그래 그러면 칠 년이 안되면 육 년, 일 년, 칠 개월, 그러다가 칠일까지 얘기를 합니다. "칠일만 한번 해봐라. 그럼 반드시 너희들이 추구하는 목표 이상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니그로다들은 뭔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면 만약에 그렇게 그걸 따랐을 경우에 내가 스승을 바꿔야 되는 게 아닌가? 내가 따르는 스승은 이 사람인데, 또 내가 추구해가는 교리는 이것인데 교리 자체를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닌가? 요즘말로 할 거 같으면 종교를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때까지 지켜왔던 풍습들이나 관습들은 이런 것인데 그 자체를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다시 얘기를 합니다. 이거 한다 해가지고 너희들 스승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는 법도 없는 것이고, 너희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런 가르침을 버리라고도 얘기 안 한다. 너희들이 이때까지 따라왔던 풍습들도 그런 관습들도 그대로 따라오면 된다. 다만 칠일만 없는 셈 치고 이거 한번 해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어찌 됐을 거 같습니까? 따라 했을 거 같습니까? 결국 안 따라 합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해서 끝이 납니다.

 

거기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과거생부터 익혀온 습관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혹 맞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것들을 바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 거라.

지금도 이 남방불교권에 가면 신부님이나 목사님 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빳사나 수행센터에 와서 수행을 합니다. 신부복이면 신부복을 입은 상태에서 그냥 합니다. 목사님들은 특별하게 옷을 입지를 않으니까 그냥 평복으로 하는데, 또 이슬람 사람들은 오면 자기들의 옷을 입고하고 안 그러면 터번을 쓰고 이렇게들 합니다. 그거 절대 터치를 안 하거든. 그렇다고 해가지고 당신 것들 다 틀렸다 하고 얘기도 안 합니다. 다만 이것으로 인해서 당신이 깨달음에 이르고 당신이 이익이 있고 행복할 거 같으면 따라해라는 거라.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이다 그럽니다. '천인사'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다. 인간들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천상에 있는 천신들까지도 의문 나는 것들 또 깨달음에 이르는 것들은 부처님에게 여쭙고 그에 따라서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그래서 '천인사(天人師)' '삿타데와마눗사낭(Satthā deva-manussān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단순한 그런 스승이 아니라 아주 둘도 없는 위없는 스승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그마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거든. 그걸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합니다. 아주 다루기 어려운 그런 사람들도 잘 이끌어준다는 거라.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티(anuttaro purisa-damma-sārathi)' 이렇게 얘기하죠. 잘 이끌어주는 스승. 그냥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누구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따라오는데. 그런데 경전 곳곳에는 니그로다 외도들 뿐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까지도 잘 안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그 근본뿌리가 뭐냐 하면 이 습관이라는 것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에게 병이 생겨났다. 그러면 아픕니다. 병이 생겼으면 아픕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선언합니다. '병이라는 것은 고통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인정을 하거든. 병이 생기면 당연히 고통스러우니까. 그런데 그까지는 이해를 한단 말이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만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하면 누구든지 남을 비판할 줄 알고 또 바른 걸 제시는 할 줄은 아는데, 그것을 제시만 해주는 게 아니라 부처님은 해결책을 같이 제시를 해주거든.

"병이라는 것은 고통이다. 그런데 그 고통이라는 것은 고통이 없는 그 질병을 완전히 넘은 상태가 있다. 그런 것이 존재를 한다. 또 그렇게 완전히 넘은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있다. 길이 있다" 하고 그 길에 대해서도 제시를 해준다고.

 

여기에 이르르면 사람들이 탁 막혀버립니다.

병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는데 그 고통이 완전히 없는 상태 소멸된 상태를,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건강한 상태를 상정을 합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 가서 치료해서 몸이 안 아프도록, 건강하도록 만든다는 거라. 병이 걸리지 않는 건강한 이 육체를 병을 완전히 넘은 상태로써 상정을 합니다. 부처님이 상정한 상태하고 다른 상태죠.

당연히 그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것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분명히 그 길이 아니고 요 길이다 하고 제시를 해놨는데 일반인들은 그 길을 안 따르고 다른 길을 따르는 거라. 건강하기 위해서 헬스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이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 건강한 육체라고 하는 것, 그런 건강한 상태라고 하는 것도 망가지는 것들이라는 거라. 부서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건강한 상태가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육체가 있는 한은 병은 항상 존재를 한다는 입장이라.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길을 추구를 해나가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말하는 병이 없는 상태, 병이 없는 경지라고 하는 것은 육체로부터 멀어지는 것들, 육체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신체 이 몸이라고 하는 것들을 집착해서 그것만 건강하게 만드는 것들만 생각한다는 거라.

일반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망상을 하고 또 여러 가지 개념들 관념들을 가지고, 또 뭘 좋아하고 문화적인 것들을 만들어내고 습관을 가지고 하는 그런 것들은 감정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자기의 생각들이 관리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들을 전혀 못한다는 거라. 관리되어가서 그것이 습관으로 배여버린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하냐면 '전도몽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위빨라사(vipallāsa, 顚倒)' 그렇게 얘기합니다.

산냐위빨라사, 딧티위빨라사, 찟다위빨라사 그렇게 얘기합니다. 개념을 전도몽상하고 있고, 견해를 전도몽상하고 있고, 인식하는 마음이 전도몽상된 상태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우들을 많이 겪어옵니다. 얼마만큼 많은 개념을 전도몽상하고 있습니까?

 

산냐(saññā)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내가 여기서 선등님을 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산냐라고 하는 것은 선등님이 정확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여기 물체가 보이는 겁니다, 형태가. 그런데 이것은 뭡니까? 완전한 인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런 형태들을 띠면 선등님이다 하고 이미 개념화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멀리서 있을 때는 그게 선등님인지 아닌지 뭔지를 갖다가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선등님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거라. 나는 일단은 개념화 돼있으니까 저것은 선등님이라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건 선등님이 아니고 우빨리님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는 거라. 이걸 '산냐위빨라사' 라고 그럽니다.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이것은 꽃이고 이것은 무엇이고 이런 나름대로의 견해들을 가지게 되는 거라. 좋고 싫은 것들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게 되는 거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딧티위빨라사'입니다. 완전한 인식해서 견해를 가지는 것!

산냐하고 딧티하고 차이점은 뭐냐 하면 딧티(diṭṭhi)는 그것을 확신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계속 축적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했다 그러면 '아, 저놈은 나쁜 놈이다' 하고 인식을 하거든.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거든.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항상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 거라.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저 사람은 나에게는 착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은 저 사람을 나쁘게만 볼까? 견해들을 가지기 때문에.

 

그다음에 '찟따위빨라사' 마음(citta)이라는 것. 마음은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집니다. 그것이 맞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은 내 마음이고, 이 마음은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한번 낸 마음은 세월이 한참 지나도 똑같은 마음인 것으로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내하고 원수진 사람은 그렇게 마음을 한번 먹었던 것들은 십 년 후에 만나더라도 그 사람은 똑같이 원수 된 마음으로써 다시 보게 된다는 거라. 십 년 전에 마음하고 십 년 후에 마음은 분명히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마음인데.

 

산냐, 딧티, 찟따라고 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감정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런 위빨라사(vipallāsa)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수행에서도 이렇게 습관되어 집니다.

오늘은 목요일 저녁 수행하는 시간이다. 습관되어져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별 특별한 거 없으면 그냥 와서 수행하는 거라. 수행이 잘되든 안되든. 화요일 수행하는 시간이다. 그냥 와서 하는 거라. 목요일 탁발하는 시간이다. 그럼 그냥 와서 하는 거라. 습관됐으니까. 좋은 쪽으로 습관되어지는 거죠.

나쁜 쪽으로 습관되어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걸 내가 일부러 들먹이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이런 습관되어지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이런 습관들이 변하지 않게끔 만든다는 거라. 그래서 좋은 습관들을 들여놔 놓으면 좋은 쪽으로 유도를 할 것이고, 나쁜 쪽으로 습관을 들여놔 놓으면 나쁜 쪽으로 자꾸 이어져서 바뀌게 돼있다는 거라.

 

부처님이 이런 여러 가지 법문들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에서 조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땅을 긁적긁적하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저기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고, 또 한쪽에서는 나무를 붙잡고 찍찍 긁어쌌고 이러거든.

아난다 존자가 보니까 참 가관이라.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부처님, 우째 그럴 수가 있습니까?" 부처님 말씀은 하나도 버릴 말이 없는데 왜 저렇게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저렇느냐는 거라. 경악을 하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아난다야! 사람들은 처음부터 내가 하는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는 거라. 왜? 거꾸로 얘기하거든. 아까도 얘기했지만 질병은 고통이다. 그 고통이 없는 상태가 있다. 그럼 길이 이런 것이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딴 생각하는 거라.

없는 상태를 만드는 걸 자기가 개념으로, 자기가 산냐로, 자기가 마음으로 이미 설정을 해놔 놓고 만들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그 소리가 안 들어오는 거라. 그러니까 딴짓을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어렵다는 거라.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거라.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부터 이때까지 그런 시더분한 잡담들만 계속해서 듣고 해왔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한번 보십시오. 앉아 모이면 수행에 도움 되는 얘기 얼마만큼 하는가? 앉아 모여 있다 그러면 쓸데없는 얘기들만 계속하고 있다는 거라. 이생에서만 했습니까? 줄기차게 계속 해왔다는 거라 과거생에서 부터. 그거 습관들여져 왔는데 그게 한꺼번에 바뀌겠냐는 거라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도.

 

결국은 뭐냐면 화내는 것, 욕심내는 것, 어리석은 것 이런 것들 계속 증폭해온 얘기들만 이때까지 해왔다는 거라. 그러니까 남들 얘기할 것 같으면 좋은 일이면 집착하는 마음을 같이 내가지고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박수쳐주면서 더 증폭시켜주고, 또 싫은 얘기하면 화내는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그걸 또 증폭하고, 그렇게들 해온다는 거라.

탐진치의 얘기들로서 쭉 과거전생부터 살아와졌는데 내가 인제사 그거 아니다 하고 원인·결과에 대한 얘기들을 한다고 해서 귀에 익겠느냐는 거라. 어렵다는 거라. 못 따라온다는 거라.

 

우리들은 그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익혀온 습관, 그런 성격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을 해야 됩니다. 그걸 부정할려고 하면 오히려 배척하게 됩니다. '아! 그런 것이 있다.' 먼저 인정을 해야 바꿀려고 할 거 아니라.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을 통상적으로 여섯 부류로써 나누어 놓습니다.

신앙을 지니는 형태, 그다음에 생각하는 그런 유형, 그다음에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런 부류들, 그다음에 욕심 많이 부리고 욕구를 가지는 부류들, 그다음에 화를 잘내는 화를 내는 부류들, 그다음에 어리석은 형태들, 이런 것들로써 분류를 해뒀습니다. (여섯 가지 성향, 습성)

이런 여섯 가지라 하더라도 성격은 감정의 관할에 속합니다. 그래서 나쁜 감정들은 번뇌라고 얘기를 합니다.

 

마음에 욕구가 일어나면 마음이 화상을 입습니다.

불이 나면 끌 수가 있지만 마음에 일어나는 욕구라고 하는 화상에 데이면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얼굴에 화상 입으면 어떻게 됩니까? 얼굴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못 돌아옵니다. 이 신체도 화상을 입으면 그런데 마음에 화상을 입으면 마음이 안 바뀌겠습니까?

화를 자꾸 내는 욕구를 많이 내는 그런 패턴들로 될 거 같으면 그런 성격으로 규정되어서 이런 거라. 마음이 계속 그렇게. 몸이 화상 입어 갖고 형태가 바뀌듯이 마음도 그렇게 바뀐 형태로 자꾸 쌓여지는 거라.

 

분노가 일어날 거 같으면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분노가 일어나면 부들부들 떨고 뭘 아무것도 못합니다. 동작 자체가 불능인 상태로 돼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낸 사람은 경찰에게 체포된 것과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딱 묶여버린다는 거라. 꼼짝달싹을 못하는 거라. 마음이 자꾸 딱딱해지고 그래서 그 화낸 상대를 결코 잊지 않게 됩니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니까. 마음도 그렇게 굳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화낸 상대에게는 그런 굳어진 마음들이 있으니까 항상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나는 거라. 그 상대가 자기 마음속에 딱 굳어져 있거든.

그래서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콘크리트에 딱 굳어져 있는 거와 마찬가지 형태들이라. 다른 생각들이나 다른 정보들이 들어가질 못하는 거라. 그 얼마나 나쁜 것들이라. 그런 것들이 습관되어 있으면 뭐 제대로 뭘 하겠어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 할 거 같으면 그거 누가 바르게 볼 수가 있겠어요?

 

어리석다고 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물에 걸리는 거와 같다 하고 그럽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화내는 사람은 저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내가 깔아뭉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바르게 공격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라도 하는데, 어리석어 버릴 것 같으면 그런 것조차도 아예 못하는 거라. 생각하는 것조차도 없어져버리는 거라. 완전히 그물에 딱 걸려버린 형태라.

 

탐 진 치라고 하는 것들은 이렇게 성격으로 굳어지고 그것이 내 수행하는데 큰 장애를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성격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에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망상들입니다. 밖의 정보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들에 의지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증폭되고 감소하고 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갈망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동일한 것은 없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면 동일한 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똑같은 데서 관찰하고 있더라도 항상 새로운 것들입니다. 탐·진·치가 많은 인간으로서 습관이 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현재 동일한 곳에서 새로운 것들만 계속 관찰할 거 같으면 흘러가는 물과 마찬가집니다. 계속적으로 변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런 습관들을 갖다가 빨리 버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이왕 습관을 쌓을려고 할 거 같으면 좋은 습관을 쌓도록 자꾸 하십시오. 나쁜 습관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 외도들도 마찬가지였고, 부처님 제자들도 부처님 말을 귀담아듣지 못하는 습관들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거는 세세생생 그리 가더라도 깨달음 하고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살아가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강과 마찬가집니다.

끊임없이 현재만 존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윤회전생입니다. 윤회하는 것들입니다. 그 고리를 끊는 방법은 딱 그 하나의 고리만 탁 끊어버리면 됩니다. 그 고리만 탁 끊어버리면 첫째가 끊어지는 거라. 끊어지지 않는 고리들은 한 고리만 끊으면 된다는 거라. 그 방법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여기 것만 탁 알아차려서 끊을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의 성격들을 바르게 만들도록 하고, 또 그런 좋은 습관들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수행을 자꾸 할려고 하고 또 그런 좋은 길을 자꾸 따라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습관들은 깨달음을 굉장히 방해합니다. 그런 것들은 반드시 인정을 하고 버려버리도록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