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부처님 소원 (20090212)

담마마-마까 2020. 1. 27. 13:35

https://youtu.be/uPKC7dAtaLE

* 부처님 소원 (20090212)

 

부처님이 소원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떤 소원이 있을까?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없겠죠! 그러니까 소원이라는 말은 말이 좀 이상하지만 구구절절이 부처님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그 당부했던 것들이 뭔가?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완전하게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열반에 들기 십 개월 전에 몸에서 굉장한 통증이 있었습니다. '마라난띠까웨다나(maraṇ·antika·vedāna)' 라고 그럽니다. 도저히 이 느낌은-웨다나는, 이 고통스런 느낌은 그냥 끝나는 게 아니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만이 끝나는 느낌이라는 거라.

마라나- 죽음, 죽음의 신이 찾아와가지고 죽음으로 인해서 끝난다 -띠까.

그런 느낌-웨다나 라는 겁니다.

얼마나 고통이 극심했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십 개월 전에 이 통증이 왔는데 이 통증을 막아냈습니다. 어떻게 막아냈느냐면 위빳사나 수행을 이렇게 쭉 하시면서 선정삼매에 이렇게 듭니다. 그 삼매에 들기 전에 먼저 부처님이 원합니다. '내가 오늘부터 완전하게 열반에 들기 전까지 이 통증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바라면서 선정에 들어갑니다.

 

그거는 스님도 체험을 해봐서 아는 건데, 위빳사나 수행을 하다가 몸이 좀 많이 피곤하다든지 아니면 몸이 좀 많이 축이 났다 싶을 경우에는 발란스를 맞춰주기 위해서 일부러 삼매에 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분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삼매에 드는데 삼매의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을 하면 괜찮은데, 조절이 안 될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하루 종일 삼매에 빠져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나에게 먼저 얘기를 합니다. '내가 한 시간 후에 삼매에서 깨어나기를' 아니면 '큰스님이 나를 급하게 찾을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깨어나기를' 이렇게 하고 나서 삼매에 들면 거의 대부분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되면 거의 대부분 그때 깨어나집니다. 또 큰스님 부를 때는 다른 소리는 다 안 들리는데 큰스님이 부를 때는 그 소리를 알아차리는 거라.

 

부처님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고통이 내가 이 몸을 버리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고통이라는 거를 아시는 거라. 팔십 노구 된 스승님이 그 고통을 참지 못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무진장하게 노력을 했겠어요? 열반의 상태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 무여열반, 아라한의 선정에 들었을 때는 느낌조차도 사라집니다.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건 하나의 경지이고 그 경지는 다시 그 선정에서 깨어나면 깨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는 아라한인 부처님조차도 느낌은 가지고 있게 됩니다. 단지 느낌으로 인해서 번뇌에 휩싸이지는 않죠!

 

어쨌든 이 느낌은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시다가 선정삼매에 들기 전에 이렇게 먼저 원을 세웁니다.

'오늘부터 내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까지 이 통증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한 시간 뒤에 선정 삼매에서 깨어나기를 하면 거의 그대로 되듯이 부처님도 마찬가지 선정에서 깨어나고 나서는 다시는 이 고통이 찾아오지를 않는 거라. 참 불가사의 하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하지 않아야 될 것을 했습니다. 선정에 드는 것, 시간만 나면 선정에 들어서 고통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계속 지속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제를 지내고 나서 그다음 해에 2월 보름 될 때 짜빨라 라고 하는 곳 부근에서 부처님이 이생의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십 개월 전에는 내가 열반에 들기 전까지는 다시는 이 고통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원했듯이, 이 열반에 드는 해의 2월 보름에는 뭐라고 또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선정 삼매에 들기 전에 원을 했느냐 하면 '내가 오늘부터-2월 보름부터 웨사카 보름날-4월 보름까지만 이 선정에 들도록 하겠다. 4월 보름 이후에는 다시는 아라한과 선정에 들지 않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4월 보름날 열반에 드시겠다는 얘긴 거라.

 

선정 삼매에서 나오고 나서 비구 스님들을 다 모읍니다.

"수행자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완벽하게 모든 진리를 가르쳤다. 그리해도 혹시 의문나는 것들이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45년 동안 가르치지 않은 진리는 없다는 거라. 비밀스럽게 감추어둔 진리는 없으니까 혹시 그런 게 있으면,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은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거라. 없거든!

 

"적어도 나의 제자라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의 제자 수행자라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밝혀놓은 이 진리, 이 담마를 배우고 실천하고 끊임없이 계발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바란 것이라는 거라.

 

나의 제자일 거 같으면 내가 완벽하게 제시해놔 놓고 가르친 이 진리를 먼저 배워라는 거라. '빠리야땁바' 완전하게 배우라는 거라.

그래서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악한 일들을 짓지 않는 것이다 하는 걸 배우라는 거라. 빨리 배우라는 거라. 그거 다 가르쳐줬으니까 그걸 먼저 배우라는 거라.

 

배우고 나면 그것을, 그 담마를 실천하여라. '아세위땁바(āsevitabbā)'

계속 그 배운 것을 되새겨서 실천하고 수행해서 그 담마를 알아라는 거라. 배우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그 담마를 알아야만이 되는 것이지, 알지 못하는 담마, 글로써만 읽고 머릿속에서만 있는 담마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걸 실천하라는 거라. 그 담마를 알기 위해서 몸소 실천하라. 베풀어라 하는 걸 배웠으면 내가 직접 몸으로 실천해서 베풀고, 수행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걸 갖다가 배웠으면 실제로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갖다가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실천을 하고, 이렇게 직접 담마를 실천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는 그렇게 하면 진리를 계발하라. '바웨땁바(Bhāvetabbā)'

자꾸자꾸 실천하다 보면 어떤 것이 바른 도덕적인 행위고, 어떤 것이 나에게 유익한 진리이고, 어떤 것이 나에게 통찰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하는 걸 내 스스로 안다는 거라. 그런 것이 일어난다는 거라. 이런 유익한 진리 계정혜(戒定慧)에서 일어나는 진리를 언제까지 하라느냐, 아라한이 될 때까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구구절절 끊임없이 노력하라.

게을러있지 말고 나태해져있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라. '바훌리까땁바(bahulīkātabbā)' 이런 것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을 앞에 놓고 부처님이 문득 생각하고 말씀하신 거라.

 

왜 그랬을까? 부처님이.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내가 지금 가르치고 설한 이 진리 외에는 없거든. 그런데 내 몸은 인제 이월 보름이니까 앞으로 삼월보름 사월보름 두 달 뒤면 완전히 열반에 들어야 되는데, 이 몸을 여의어버리면 내가 무슨 도깨비도 아니고 뚝딱해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나가지고 다시 재림해가지고 다시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닌 거라. 열반에 들고나면 자취를 감춰버려 다신 오지도 안해. '부처님, 부처님 이 세상에 다시 오시오' 한다 해가지고 다시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 완전한 가르침, 이 깨끗한 가르침, 이 순수한 가르침이 완전하게 확립돼있으니까 이 확립돼있는 진리가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신 거라. 오래도록!

 

지금 여기 모인 수행자들은 그런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사람으로 일단 태어났고 부처님의 진리를 온전하게 듣고 이해해서 실천해서 깨달음에 이르려고 할 거 같으면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그래가지고 왔다는 거라.

그리고 지금 현재 육근이 다 멀쩡하고 건강하다는 거라. 건장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거라. 듣는데 하등의 문제도 없고, 말하는데 하등의 문제도 없고, 생각하는데 하등의 문제도 없는 상태로서 이 자리에 와있다는 거라. 얼마나 복을 받은 거라.

 

그리고 그 부처님의 진리가 낱낱이 설해진 가르침들을 직접 내가 접하고 있는 거라. 부처님이 앞에 나타나가지고 법을 설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장소에 그런 도반들하고 같이 모여서 이 자리에 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거라.

아마 모르긴 해도 세계인구가 50억이라 할 거 같으면 50억 중에 그런 인연을 지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라. 아주 극소수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극소수에 속해있다는 거라.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이 가르친 이 순수한 담마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거라. 그게 의무인 거라. 부처님이 바라신 거고.

어떻게 노력해야 됩니까? 부처님 말씀하신 거와 같습니다.

이 담마를 배우고 그걸 실천하고 그리고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 그거 외에는 없는 거라. 여러분들은 이런 부처님의 완전한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만큼 믿고 있습니까? 얼마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거라.

 

가띠까라(Ghaṭīkāra Sutta)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삼보에 대해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수행을 통해서 그 믿음을 보여준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통해서 그 확신들을 가지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게 아니라는 거라. 진정하게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자라고 할 거 같으면 다른 길은 없다는 거라. 수행을 통해서 그걸 자기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바라신 거라.

온 마음으로 그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까지는 멈추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는 지금보다 더 했겠죠. 더 부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더 가슴 깊이 새겼을 거라.

 

숲속에 들어가서 수행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숲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 것이냐 하면 마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는 곳이라고 돼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절을 해서 그다음 발자국으로 옮기는 길이가 한 180cm 정도 된다고 그럽니다. 그 180cm인데 그렇게 절을 했을 때 그것을 삼백보 간 길이가 숲속에 해당된다고 그럽니다. 요즘 말로 통상적으로 하면 한 4km에서 5km 그 사이정도 될 겁니다.

 

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수행처다 할 거 같으면 보통 그렇게 돼있습니다.

마을이 끝나는 데서, 물론 마을이 듬성듬성 있는 데는 치지를 않고, 대부분 마을 군락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 군락지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한 4km~5km 떨어져 있습니다. 그럼 스님들이 아침에 탁발을 가기 위해서 그 4~5km를 갔다가 탁발을 해서 돌아옵니다. 보통 4~5km 걷는데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그러니까 왕복 두 시간에 탁발하는데 한 시간을 치면 보통 세 시간이 족히 넘어가집니다.

 

탁발하는 시간이 손을 펴가지고 손금이 보이는 시간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명이 틀 때죠. 손금이 보이지 않으면 탁발을 못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정오 전까지는 해야 되니까. 어쨌든 우리 시간으로 할 거 같으면 한 7시 정도 돼서 출발을 한다는 거라. 그럼 한 세 시간에서 세 시간 반 정도 왕복, 그다음에 탁발하는 시간 하면 일곱시부터 하면 열시에서 열시 반 정도 돼서 선원에 들어오게 되는 거라. 그럼 대충 챙겨가지고 공양을 하면 열한 시에 공양을 하게 되는 거라. 딱 그게 탁발하기에도 용이하고 또 민가하고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적하고 수행하기 좋은 그런 공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가지는 것이 숲속이란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숲속은 수행자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도 여기 숲을 좋아합니다. 왜? 민가에서 벗어났는데 그리 많이 벗어나질 않으니까 뭘 감추고 그다음에 얼른 또 와서 가지고 도망가기 수월하기 때문에 이 숲을 좋아하는 거라. 항상 숲에는 도둑놈들이 있게 되는 거라.

수행방법을 배워서 '숲에 들어가서 실천하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할 거 같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하라'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 도둑놈들이 출가하는 스님들이라 해가지고 아니면 출가한 수행자라 해가지고 봐주겠냐는 거라. 안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숲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느 수행자들이 부처님한테 와서 수행 방법을 스승들에게 배웠어요.

"인제 가서 수행하라." 그러니까 인제 숲을 향해서 떠날려고 합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그럽니다. "가기 전에 사리불 존자한테 인사를 하고 가거라."

사리불 존자가 그 스님들의 인사를 받고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왜 부처님이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하고 가라 했을까? 아! 그렇구나 숲에 들어가서 수행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다. 낭패를 당하지 않게끔 보호장치를 마련하라고 부처님이 나에게 가서 인사를 하라고 했구나.'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시중을 들던 일곱 살짜리 사미승에게 "니가 따라가라" 하고 얘기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숲에서 수행을 하려고 하니까 도둑놈들이 그 숲을 장악하고 있다가 스님들을 윽박지릅니다. "여기 와서 수행할려고 할 거 같으면 우리말을 들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 우리는 그래도 여기가 가장 숨기에도 용이하고 또 활동을 하기에도 용이한 것은 그래도 데와-천신들이, 신들이, 그 당시에는 바라문 신이겠죠.

바라문 신이 우리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몇 번에 걸쳐서 바라문들에게 제사를 지내준다. 너희 중에 한 명을 이 제사를 지내는데 희생양으로 보내라. 그럼 수행하도록 해주겠다. 나머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 그 정도였어요.

 

여러분 같으면 여기 중에 한 사람 죽으러 가라 하고 나머지는 앉아 수행하라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여기 안 있고 다 도망갔을 거라. 도망가면 그 도둑놈들이 도망가도록 놔 주겠어? 쫓아와서 다 해꼬지를 하겠지.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 보내지도 못해.

최고 큰 어른 스님이 "내가 가겠다." "안됩니다. 스님"

"내가 가겠다." "스님도 안됩니다."

가만히 이 사미 스님이 생각을 해보니까 부처님과 사리뿟다 존자기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이런 위험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스님들 내 말을 들으시오.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두 아라한 성인들께서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이런 위험을 아시고 나에게 그 문제를 해결하라 하고 보낸 겁니다. 그러니 나를 보내주시오." 그래서 그 사미 스님이 따라 갑니다.

 

도둑놈들이 이 사미 스님을 죽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미 스님은 전혀 얼굴 하나 안 변하고 가거든. 기가 찬 거라. 어린 스님이니까 일곱 살짜리 스님이니까 철이 없어서 그러겠지 생각을 하다가도, 마지막 죽을 때 돼서 칼을 대면 그래도 무서워하겠지.

그런데 이 스님은 상낏짜라고 하는 사미 스님인데 이 스님은 그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내가 마지막 죽을 때가 될 거 같으면 나한테 얘기해 도." 그렇게 부탁까지 하거든. 그러면서 생글생글생글 거리면서 같이 어울리고 하는 거라.

무섭다고 하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고 꼭 엄마 옆에서 마음 평온하게 침착하게 그냥 있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지금 당장 내가 살해당할 거를 알고 있으면서.

 

마지막 죽일려고 칼을 들이대니까 그리해도 이 사미 스님은 아주 고요하게 있으면서 삼매에 쏙 들어가 버립니다. 칼을 찔러도 칼이 닿지를 않고 칼이 튕겨져 나오고, 그 어린 스님의 얼굴은 전에 보다도 더 환하게 빛이 나거든.

이 도둑놈들이 잘못했다고 뉘우칩니다.

 

숲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 내가 자칫 잘못될지, 언제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는 곳이 이 수행하러 가는 숲입니다. 지금도 태국에서는 결제가 끝나고 나면 해제하고 나서는 반드시 이런 체험들을 하게끔 합니다.

빵수꿀라(paṁsukūla)라 해가지고 요즘말로 하면 두타행이죠. 두타행을 하게끔 합니다. 두타행을 하는 장소가 어디냐면 이런 장소, 숲속에 아무런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집이라든지 천막조차도 없이 그냥 숲에서, 노지에서 지냅니다. 그 옆에는 묘지가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죽은 짐승들의 냄새가 역겹게 진동을 하기도 하고 합니다.

 

처음에 수행하러 갔을 때는 저녁에 밤이 되면 불도 없으니까 뭐가 조금만 움직여도 무서움이 발칵 일어납니다. 무슨 부엉이 비슷한 소리라도 하나 들리면 그날 잠을 못 자. 도둑놈이 없는 숲인데도 그렇다는 거라. 그런데 그 숲이 진짜 도둑놈들이 많고 우글우글하는 그런 곳이면 그런 곳에서 누가 수행을 하겠느냐는 거라.

그런데도 부처님 제자들은 거기 들어가서 수행을 하는 거라. 꼰단냐 존자도 거기에 들어가서 수행을 했고, 사리뿟따 존자도 거기에 들어가서 수행을 했고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라. 왜 그랬겠느냐는 거라.

 

그 부처님의 진리, 그 가르침을 내가 직접 수행하고 실천해가지고 그것을 내 것으로 완전히 만들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숲이 가장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으니까. 설혹 그러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두렵지 않다는 거라.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은 그것인데 설혹 그것을 못하고 죽는다 한들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는 거라. 또 그것을 완전하게 이룰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거고.

적어도 부처님 제자라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서 지금까지 그런 마음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려고 하고, 또 그 가르침을 직접 실천할려고 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노력을 하는 그런 자들을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는 거라.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과연 죽을동살동 수행을 하고 있느냐 하는 거라.

수행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를 보여주지 못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고 부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와서 수행을 하고 있는가?

또 내가 이런 몸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것이 뭔가? 하는 걸 분명하게 깨달아야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이차적인 것에 자꾸 마음이 쏠립니다. 돈을 벌어야 되니까 돈만 벌려고 그러고, 조금 더 직급이 높아져야 되니까 직급 높아지는데 신경을 쓰고, 그러다 보면 죄를 짓고 또 나쁜 행위들을 하고 업을 쌓게 되고 윤회의 고리를 자꾸 만들어나가고.

일차적으로 이루어야 되고 또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망각하는 즉시 윤회의 쇠사슬이 여러분들을 탁 낚아채게 됩니다.

 

부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지닌 자는 수행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보여주는 자입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믿고 확신이 든 것들을 보여주는 자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