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빨리어(Pāli) 경전이란? (20070927)

담마마-마까 2020. 10. 18. 14:11

* 빨리어(Pāli) 경전이란? (20070927)

https://youtu.be/ibjjiYoeXhs

youtu.be/1v20AQULhTg

 

자! 프린트물 한 번 보십시오. 맨 처음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빨리(Pāli) 성전(聖典)의 언어라고 되어있습니다. 언어학의 분류에서 빨리어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빨리어 경전에 빨리어라는 단어가 있습니까? 빨리 경전을 안 봤으니까 모르지. 없습니다! 그럼 이 단어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빨리어라는 단어는? 경전에도 없고 언어학적인 명칭에도 없고.

물론 분류는 빨리어가 어디에 해당이 된다는 분류는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쁘라끄리뜨(prakrit) 라고 그럽니다. 속어(俗語)라는 건데 중기 인도 언어의 일종으로써 빨리어라는 건 있습니다. 그거는 분류학상으로 그렇게 나타난 것이지 언어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산스끄리뜨(Sanskrit) 같이 언어학적으로 해당이 되고 하는 건 아닌 거죠.

 

근데 어쨌든 불교 경전은 전부 빨리어로 써져 있단 말이라. 그럼 빨리어 라는 것이 어디에 해당이 되느냐는 거라. 어떻게 해서 그게 생성됐느냐는 거라.

빨리어하고 비슷하게 문헌을 남긴 것이 자이나교입니다. 빨리어하고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보니까 자이나교라는 거라. 그럼 자이나교를 갖다가 뭐라고 그럽니까? 반 마가다어다 그럽니다. 마가다어는 아닌데 마가다어하고 좀 비슷하다 하고 그러는 거라.

자이나교는 불교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동이 됐죠? 그래서 불교의 뒤를 이어가지고 융성했던 종교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서양인들이 인도의 언어를 조사하면서 자이나교하고 불교를 똑같은 종교라고 판단했습니다. 내용도 비슷하고 또 용어도 비슷하고 근데 한참 연구가 되다 보니까 아, 이게 아니라! 두 개는 자이나교하고 불교는 사상적인 면이 확연하게 달라버리고, 글자도 똑같다고 생각했던 빨리어하고 자이나교에서 써놨던 마가다어하고 성전언어하고 조금 다르다는 거라.

 

사상적으로는 자이나교에는 삼법인이 사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도 빨리어하고 자이나교의 성전언어하고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이 빨리어를 반 마가다어에도 넣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 마가다 언어가 없는 상황에서 비교하기 위한 문헌으로써는 이 자이나교 문헌들을 갖다가 많이 비교 대상으로 합니다.

왜 그러냐면 자이나교는 지금도 아직도 있습니다. 인도 서부의 봄베이 하고 그쪽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무역을 아주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굳건하게 내리고 있는 종교가 이 자이나교입니다. 지금은 많지는 않지만 150만에서 200만 정도의 신자가 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성전언어도 분명하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근데 이 빨리어는 가만히 보니까 마가다언어라고 생각했던 자이나교 성전어 보다도 더 오래된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거든. 이 빨리어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고전언어라고 하는 범어(梵語) 산스끄리뜨 하고 유사성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집니다. 이 산스끄리뜨는 초기 중기 말기 해가지고 여러 계층으로 나눠집니다. 초기 때 쓰던 산스끄리뜨하고 중기 때 쓰던 거하고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옛날 고전 범어 산스끄리뜨는 베다어에 가깝습니다.

근데 그 유형들이 빨리어에 많이 남아있는 형태들을 띱니다. 그렇다고 산스끄리뜨 하고 같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

 

그러면 나중에 스리랑카에 전해졌던 상좌부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해줬던 분이 누굽니까? 마힌다 장로죠. 마힌다 장로가 살았던 곳이 ‘웃제니’ 거든요. 웃제니. 인도의 서부 지역의 웃제인의 총독의 딸하고 아소까왕이 왕자일 때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마힌다 입니다. 아소까가 국왕이 되어서 지금의 빠탈리뿌트라(Pataliputra)로 돌아간 뒤에도 마힌다는 어머니에 안겨서 서인도 웃제니 부근에서 커나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마힌다 장로 같은 경우에는 그 웃제니 쪽의 언어를 쓰고 있었어요. 그 언어가 뭐냐 하면 ‘파이사치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언어일 것인가 해가지고 비교를 해봐도 비슷한 부분은 참 많이 있는데 그건 또 아니라는 거라. 그러니까 빨리어가 어디에도 분류가 안 돼.

 

그러면 언제 상좌부불교의 언어로써 빨리어가 써졌느냐? 하는 거라. 상좌부불교에서는 빨리어를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성전(聖典)이라고 합니다. 성전(聖典)!

경율론(經律論), 스리랑카에서 글로써 만들어진, 글로써 써지게 된 것이 경·율·론입니다. 경율론 삼장을 가리키는 걸 갖다가, 성전을 가리키는 걸 갖다가 빨리(Pāli) 라고 그럽니다. 다시 말하면 빨리(Pāli) 라는 말은 성전(聖典)이란 의미입니다.

왜? 경전에만 빨리라는 용어가 없는 것이 아니고 주석서 조차도 빨리라는 용어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빨리어는 어느 때 쓰던 것이냐?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마가다어라고 그럽니다.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을 쭉 기록으로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그거는 한번 참조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빨리어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은 언제인가? 스리랑카에 있을 때는 전혀 빨리라는 걸 갖다가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근데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다시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이런 쪽으로 번져나가면서 그 나라의 불교도들 또 비구스님들 하고 대화를 하거나 글로 주고받을 때 자기 나라 말로써 쓸 거 같으면 못 알아듣습니다. 요즘 같이 통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쓸 수 있는 게 뭡니까? 공통된 언어인 빨리어일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어가 고대부터도 불교도 특히나 스님들 사이에서는 지금의 영어같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써 작용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도 빨리어를 각 나라 장로스님들이 만나면 대화의 형식으로써 채용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죽은 언어인 사어(死語)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거라. 왜 그러냐면 비행기, 배, 담배, 옛날 그 당시에 성전언어로 써질 때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근데 신조어로써 그런 빨리어 용어들을 채용해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따지면 사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빨리라는 용어가 통용된 것들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 빨리어가 성전언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성전어는 어느 쪽의 언어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쓰던 언어일 뿐입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쓰던 언어로써 남겨라” 하고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라.” 그런 구절들이 경전의 많은 곳에서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경과 율을 집대성했던 이 두 상수제자, 두 제자 우빨리(Upāli)하고, 아-난다(Ānanda)는 부처님 옆에서 계속 시봉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썼던 그 빨리어를 그대로 사용을 했을 것이다 라고 보여집니다.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부처님 당시 때의 마가다어가 아닐 것 같으면 틀림없이 변형이 가해졌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봤을 때, 다른 제부파들을 봤을 때. 그런데 이 상좌부만이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상좌부의 성전만이 변형되지 않고 유지돼왔다고 하는 것은 빨리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 외의 제부파 부분에 보면 쭉 써내려온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잘못 판단하는 부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부파시대의 모든 부파들은 나중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지금의 상좌부는 뭔가? 부파가 있던 없던 존재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이 부파를 소승으로써 낮추어봐왔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라고 그럽니다.

 

그럼 지금의 남방 상좌부불교가 소승불교냐? 그건 여러분들이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거라. 그 소승이라고 낮잡아봤던 부파는 이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소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대승에서 만들면서 소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고, 남방상좌부는 상좌부인 채로, 인 채로 면밀하게 유지가 되어왔고, 그 부분이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로써 내준 부분입니다.

 

이미 부파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게 7세기이고, 그전에 이미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부파의 계맥을 스님이 쭉 적어놨습니다. 상좌부 쪽에서 이런 이런 게 떨어져 나가가지고 이게 언제 멸망했고, 대중부에서 요러 요런 게 떨어져 나와서 어떻게 멸망했다 하는 걸 스님이 적어놨으니까 그걸 참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경전들이 각 부파에서 만든 경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 부파도 다 없어져버렸고, 경전들도 온전하게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 짜깁기입니다.

그러면서 대중부에서 만든 경전들은 점점 더 많아지죠? 거기에 보면 언제 때 화엄경이 만들어졌고, 법화경이 만들어졌고, 언제 때 뭐가 만들어졌는가를 적어놨어습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다 그런 경전들도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대승경전을 쓴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길 하고 적어놨다고.

부처님 당시에 살았던 분이 아닙니다. 그것도 수백 년 지나서 새로운 경을 만들어낸 분인데, "나는 이와 같이 이해한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맞는 말이라. 근데 한결 같이 부처님이 직접 이것을 설한 것으로, 자기가 들어가지고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문제가 있는 부분입니다.

 

아라한들을 뭐라 그럽니까? ‘붓다노 붓다’ 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에 의해서 붓다가 된 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아라한들도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이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분들이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가 부처님을 존경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아니죠? 절대적이었습니다. 사리불 존자도 "부처님이 가는 길을 쫓아서 살아갈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감히 그 훨씬 후대의 대승의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마치 부처님같이 경을 찬술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행태들을 띠고 있습니다.

 

논장(論藏)이 성립이 됐을 때 제3차 결집 이후에 카타왓투(Kathāvatthu 論事)라고 하는 논장이 쓰여지고 그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 논장 부분은 어디 경에다가 집어넣어 놓았습니까? 율에다 집어넣어 놓았습니까? 따로 독립해놓았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하고 얘기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논장은 논문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부처님이 말한 사상은 내가 생각하니까 이렇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들도 그렇게 합니다. 하물며 그 후대의 대승경전들이 경으로써 독립되어가지고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님은 생각합니다. 그때 당시에도 그런 게 있었는데 "대승의 경전은 악마의 경전이다. 악마의 설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경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표현이 명확합니다. 스왁-카-또-(Svākkhāto)라고 그러죠?

'스왁-카-따(Svākkhāta)' 분명하게 잘 설해진 가르침!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동일하게 잘 설해진,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을 잡아보더라도 명료합니다. 딱 부러지게 '이거는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스르르르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은 공이다. 색은 색이다.' 하고 명료하게 하지 '색이 공이다' 하고 얘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걸 명료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다음에 두 번째 특징은 뭐냐 하면 반드시 경험적인 부분입니다.

'산딧티까(sandiṭṭhika)' 라고 그럽니다. 지금 현재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전은! 지금 현재 경험될 수 없는 것일 것 같으면 경전에 포함을 안 시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이 뭡니까? 내가 지금 실천해서 지그 바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삼법인이 어떻고 쭉쭉쭉쭉 외워도 그게 실제 내가 체험되지 않는 거라면 그거는 틀린 거라는 거라.

 

세 번째 특징은 뭐냐 하면 시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아깔리까(akālika)'라고 합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든지 체험을 할 수 있고, 언제 어느 때든지 행해 나갈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또한 다른 특징은 뭐냐 하면 검증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보니까 아, 이렇구나 하고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에히빳시까(ehipassika)' 검증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가장 큰 특징이 '빠라맛타(paramattha)' 빠라맛타는 여러분들이 잘 알죠? 실재(實在)하는 것. 관념적이지 않고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또 부처님 가르침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빳짯땅 웨-디땁보-(paccattaṁ veditabbo)' 라고 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 스스로 증명할 수 있고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의 특징입니다.

이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대승경전을 비불설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면 뭐 부처님이 설한 게 아닌가? 그럴 것 같으면 그 이전에 훨씬 전에 아라한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 경을 얼마든지 만들었겠죠. 부처님 말씀이라 하면서.

 

그런데 안 만들고 그대로 일언일구(一言一句)도 안 바꾸고 한 것은 뭐냐 하면 이것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 이것 이상 더 보태고 자시고 할 것들이 없다고 판단내렸기 때문에 그렇게 내려오는 것들이라. 한번 쭉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잘못 판단해왔던 것들이 이 속에 있습니다.

 

「4장. 테-라와-다의 가르침」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그래서 빨리어 경전에 대한 것들은 이 정도에서 하면 어떻게 해서 경전이 태동이 됐고, 이 경전이 소중한 것이 얼마만큼 소중한 것이다 하는 부분들도 드러나지고, 또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부파불교, 또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 대한 것들을 다시 정립할 수 있는 계기들이 될 겁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테라와다」에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프린트물을 좀 많이 내줬죠? 다음 시간에 할 부분들이니까 읽어오시기 바랍니다이.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