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결집 (20070913)
자, 1차 결집 한번 보도록 합시다.
빨리어(Pāli), 이제 빨리어 라는 것은 알 겁니다. 경전을 니까야(Nikāya) 라고 그럽니다. 근데 왜 빨리어 니까야를 읽어야 됩니까?
예를 들어보자. 한글로 편하게 근본경전이라고 그럽니다. 아함경(阿含經)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아함경을 왜 읽어야 되는데? 여러분들 많은 거 읽습니다. 반야심경도 읽고 금강경도 읽고 법화경도 읽고 뭐도 읽고, 많이 읽는데 아함경을 왜 읽어야 되느냐는 거라. (대답)
그럼 뭐 법화경이나 다른 거는 그렇다고 얘기 안 합니까? 대승에서는? 나중에 나왔든 어쨌든 간에 '부처님 말씀이다' 다들 얘기들 합니다. (대답)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대승 쪽에 많이 접해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핑계거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런데 왜 이 아함경이라고 하는 빨리어 니까야를 읽어야 되느냐는 거라. 간단하게 얘기하면 부처님과 눈높이를 맞추는 거라. 부처님과 눈높이를!
대부분 절에 가면 부처님을 어떻게 봅니까? 우러러보죠? 눈높이가 안 맞습니다. 그러죠?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부처님 육성입니다. 부처님 육성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을 신으로써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아, 이게 진짜 부처님 말씀이구나’ 하는 부처님 육성을 직접 들을 때 부처님을 신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만들어서 ‘아, 내가 따라가야 될 스승이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을 자꾸 신격화 만들면 그거는 불교를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매불 행위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왜 자꾸 신으로 만들어 놔놓고 자꾸 문제를 만드느냐는 거라. 도깨비방망이 같이 뚝딱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데 왜 자꾸 그걸 바라느냐는 거라.
그러지 않기 위해서, 그러지 않기 위해서 경전을 공부해야 되는 기본이 뭐냐 하면 빨리어 니까야라는 거라. 대승에서는 소승이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 소승에서는 "소승이 뭡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소승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소승 얘기하면 그게 통합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부처님의 담마를 공부해야 될 때는 다른 것을 먼저 공부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빨리 경전을 가지고 빨리 니까야를 먼저 토대로 해가지고 뼈대를 세우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인해서 무너져버립니다. 자꾸 바뀌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제1차 결집(第一結集), 오늘 프린트 양이 좀 많습니다이.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마하깟사빠 장로가 주축이 돼서 라자가하 근교 칠엽굴에서 제1차 결집을 합니다. 그 집회를 불교도들은 상기띠(saṅgīti) 라고 그럽니다. 상기띠! 교법을 함께 소리 내서 암송한다는 뜻입니다.
결집, 결집하죠? 상기띠가 결집입니다. 결집이라는 의미가 뭐냐 하면 서로 모여가지고 소리 내어서 암송하는 걸 갖다가 결집(結集)이라고 그럽니다. 그 첫 번째 결집 이후에 2차 결집, 3차 결집 쭉 하면서 현대까지 5차 결집, 어떤 경우엔 6차 결집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도 글을 다 쓰는 시대입니다. 그렇죠? 제3차 결집부터 글로써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후대에는 만약에 5차 6차 결집 나오면 이게 영구히 가져가려고 대리석 석판에다가 쓰는 결집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들 똑같이 상기띠라고 그럽니다.
제1차 상기띠, 제2차 상기띠 서로 모여서 합송합니다. 그때 1차 결집하던 때나 지금 하는 결집이나, 얼마 전에도 결집했습니다. 1956년도에 결집했습니다. 요 근래에! 똑같이 글로 쓰는 시대에도 합송합니다. 합송해가지고 다 결집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1차 결집은 부처님이 설한 법과 율이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다 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한사람이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아이고, 인제 홀가분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식으로 법을 해석하고 하는 것들을 보고 '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부처님 법이 영원히 변경 없이 이어질려면 우리가 결집을 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모여서 한 게 제1차 결집이 시작된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초기의 부처님 말씀이 그대로 집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제1차 결집입니다. 그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부정을 못합니다. 제1차 결집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그때의 방식이, 합송하는 방식이 경전의 근거로써 그대로 제시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만약에 지금 글로써 부처님 말씀을 쓴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과 같은 운율 산문 형식이나 이런 식으로 적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1장 쭉 하고 나서 그걸 갖다가 그걸 간추려가지고 싯구 형식으로 만들고 1장 끝, 2장하고 2장 끝, 그렇게 해가지고 열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면 1장은 맨 마지막에도 1장은 무엇, 2장은 무엇, 3장은 무엇, 10장 끝, 이것으로 이 1과가 끝이다] 하고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거는 기억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방식이지 글로 쓰는 방식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글로써 그렇게 쓸 거라? 글로 쓸 때는 절대 그렇게 안 씁니다.
대승경전 어디를 한번 보십시오. 법화경을 보든 뭘 보든 이런 방식으로 써진 게 있는가? 없습니다! 내가 비교하는 이유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고, 곡해해서 듣지 말도록 하십시오.
깟사빠 존자가 수밧다라고 하는 제자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아, 결집이 급선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칠엽굴이라는 곳에서 결집을 하게 됐는데, 우빨리 존자가 율에 대해서 묻는 것으로써 시작을 합니다. 가장 먼저 중요한 범계- 빠라지까(Pārājika, 바라이죄) 라고 그럽니다.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사람은 승단에서 추방되는 죄, 그래서 그 첫 번째 계율은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가지고 어떻게 말해지게 됐느냐 하는 걸 갖다가, 그러고 나서 그 변경돼가지고 어떻게 됐다 하는 걸 말해가지고 넘어가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고, 세 번째는 뭐고, 이런 식으로 각각의 방식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그것이 비구계, 비구니계 각각의 계율 조항 하나하나에 대해서 문답식으로 반복을 해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계율이다 하고 끝냅니다.
그러고 나서 아난다에게 법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깟사빠가 물어봅니다. 「범망경」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설해졌는가? 하고 물어보면 아난다가 쭈우욱 얘기해나갑니다. 그래서 경은 보통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일로, 누구에게, 뭐라고 설했다.] 하면서 쭉 진행이 돼나갑니다. 꼭 기본바탕을 이렇게 깔고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사문과경」에 대해서 또 똑같은 방식으로 하고, 이렇게 경전을 진행해서 모두 송출을 하게끔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경전이 중구난방이거든. 그러니까 이것을 외우기 쉽게 정리를 해야 될 필요가 있다 해가지고 긴 것은 긴 것대로 모으고, 짧은 건 짧은 것대로 모으고, 서로 비교해 놓은 것 스님같이 대승불교 근본불교 이렇게 비교해 놓은 것, 아니면 번뇌 뭐 어쩌고 이렇게 비교해 놓은 것, 이런 것 비교해 놓은 것 대로 모으고, 이것 저것에도 안 들어가는 아주 아름다운 구절들이 있다 그러면 그거는 아름다운 구절들대로 책으로 하나 모으고, 이런 식으로 쭉쭉쭉쭉 묶어 나갑니다. 그리해야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기 때문에! 그래서 그 방식이 뭐냐 하면 다섯 개 경전 그룹으로 구성이 되게끔 됩니다.
[[ 교재 내용
경장은 아래 5개 그룹으로 분류됩니다.
* 장부 경전(長部; Digha-nikāya) (34경): 비교적 긴 이야기를 포함한 경전.
* 중부 경전(中部; Majjhima-nikāya) (152경): 중간 길이의 교설로 구성된 경전.
* 상응부 경전(相應部; Saṃyutta-nikāya) (5품 56상응 2872경): 짧은 경전을 교리나 설자 등의 공통점에 상응해 그룹으로 나눈 경전.
* 증지부 경전(增支部; Aṅgutta-nikāya) (11개장 2189경): 4성제나 5력 등 말해지는 교설의 수에 의해 처음부터 11개 그룹으로 나눈 짧은 경전의 모임.
* 소부 경전(小部; Khuddaka-nikāya) (15경): 이상의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경전의 모임.
숫따니빠따(경집)」「담마빠다(법구경)」 자따까(본생경) 등. ]]
그거 말고도 여러 가지가 의논이 됩니다. 아난다가 그럽니다. 부처님이 유언하신 말씀 중에서 “승단이 원한다면 내가 열반한 후에 계율 가운데 잡다한 소소한 것들은 버려도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가섭 존자가 물어봅니다. “그래 뭘 버리면 좋다고 얘기 하드냐?” “그건 안 물어 봤는데요.” “그럼 니가 부처님도 아니고, 내가 부처님도 아니고 뭘 버리는 것이 좋은지도 모르는데 뭘 버리라는 얘기냐? 소소한 게 뭔데?” “지금 우리는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모른다.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그것조차도 버릴 수가 없다!” 해가지고 못 박아 버립니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또 물어봅니다. 니는 왜 부처님이 열반하려고 할 때 열반하는 걸 갖다가 제지하지 못했느냐? 그래서 결집 들어가서 아난다가 다른 아라한들한테 욕을 많이 먹습니다. 부처님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더 있을 수가 있는데,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는데 왜 일찍 열반하게 만들었느냐? 뭐 이런 것부터 해가지고 그런 것까지 다 기록을 해놔놓습니다.
심지어 어떤 것까지 있는지 압니까? 결집이 끝나고 나서, 우리 결집하고 있는 사이에 장로 뿐나는 "너희가 아무리 여기서 결집을 해봐야 나는 너희들이 결집한 경과 율 이것을 난 안 믿는다. 나는 내 맘대로 살 것이다." 하고 하는 것까지 다 기록이 돼있습니다. 결집에! 그래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것들을 많이 전하기도 합니다.
이런 결집은 1차 결집으로써 처음 시작이 되는데 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 특징이 뭡니까? 결집은 누가 합니까? 출가자들이 하죠. 재가자들은 전혀 참석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만약에 재가자들이 참석을 했을 거 같으면 경전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겠죠. 출가자 위주가 아니었겠죠. 그런데 출가자들, 아라한 오백 명만 참석을 했기 때문에 출가자 위주로써 경과 율이 정립이 되게끔 됩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후에는 불교 흐름이 출가자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나중에 대승이라고 하는 새로운 파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 게 이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쉽게 말하면, "너는 뭔데 너가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우리는 그러면 부처님 제자도 아니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사람들도 아니냐?" 하는 반발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게 2차 결집 때 구성 인원으로 인해서 일어나졌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데 그러한 출가자 아라한들이었기 때문에 2,550년간이나 하나도 변형시키지 않고 유지를 해나갔습니다.
만약에 뒤집어서 얘기해서 재가자와 출가자가 같이 결집해서 하는 상태가 됐다, 이후로도 계속 그렇게 결집이 진행됐다 그러면 이게 변형을 안 가져올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겁니다. 기본적인 구조 자체가 성격이 다른 집단인데. 가섭 존자가 그걸 모르고 출가자들로만 구성원으로 했겠느냐는 거라.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될 경우에는 내가 봤을 때는 전자를 버려야 됩니다. 정통성을 갖다가 이어나갈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다른 어떤 부류들이 생겨나서 불교를 더 흥하게 하든 어떻게 하든 그거는 그 부분의 일이고, 내가 부처님 제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말씀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그럴 것 같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 1차 결집 때는 출가 승단들이 구성 인원으로써 참석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아라한이라고 하는 오백 명이 모여서 역할 담당을 해나갔다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후계자 지명했습니까? 후계자 지명 안 했죠? 지금 1차 결집 주도한 가섭 존자도 후계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난다가 후계잡니까? 라훌라가 후계잡니까? 누구도 후계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오백 명의 아라한이 모여서 이것을 해낼 수가 있었느냐? 출가의 정신 때문입니다. 출가의 방식이 합의도출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놔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그 뒷일을 걱정을 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후계자 누구를 하나 정해 놨다. 후계자 그놈이 딴 맘을 품으면 우짤낀데? 그럼 변질돼버리는데.
승단의 조직이라는 것이 그와 같은 겁니다. 승단에 혼란을 불러오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이 이런 합의도출 입니다. 누구든지 합의해서 하나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방식! 그런 방식은 우두머리가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토론해가지고 합의점을 만들어내면 되는 거라.
조금 더 바람직한 방향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갖다가 부처님은 이미 아셨고, 그러한 방식들을 가섭 존자가 가장 먼저 알고 그런 방식으로 송출해가지고 만들어냈던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1차 결집은 경과 율만 확립이 되죠? 경과 율만 확립이 되는 것은 상기띠 합송방식으로 인해서 확립이 돼나갑니다. 문자로 쓰여진 것은 그 훨씬 이후에 3차 결집 때, 기원전 1세기 때 문자로 쓰여지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이런 합송에 의한 전승 방식이 불교 경전의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3차 결집 때 글자로 써져도 구전 방식 그대로 따르고 있잖습니까?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아함경. 스님 말한대로 안 되어있는지 되어있는지!
그리고 경전 제1차결집의 네 번째 가장 큰 특징은, 옛날에는 지리적인 것 때문에 오백 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때 당시에 출가 대중이 오백 명만 있었겠습니까? 인도 전역에? 무수한 인원이 있었을 겁니다. 그럼 당연히 오백 명 아라한들만 모여서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거기에 참석못한 대중들도 있게 돼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그 참석못한 대중들이 뒤늦게라도 알 것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그거 아니다”하고 부정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결집을 해낸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앞으로 이 경과 율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결집을 하게 된 겁니다. 부정할 거는 부정하게 되더라도 이 아라한들이 만들어낸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쭉 부처님 법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들 때문에 이 결집을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제1차 결집은 크게 보면 4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사에서 아니면 우리 인류사에서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한번 보십시오. 어디에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한번 보십시오. 누구 어느 신이 내가 이러이러했다 하고 적었다는 것뿐이지 이런 방식 취하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합리적인 것들이라!
자, 이렇게 결집된 제1차 결집은 삼장(三藏) 중에서 이장(二藏)으로써 구성이 돼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다 빼먹고라도 이거 하나는 얘기해야 되겠습니다.
보통 나중에 가면 어떻게 되느냐면 부파분열되는 부분에서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상좌부불교도 분열돼서 설일체유부 근본 설일체유부 무슨 부파 이렇게 각 부파로 나눠지고 상좌부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일반적인 계통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십시오. 그러니까 상좌부, 대중부 이렇게 있다가 대중부가 막 부파하고, 상좌부도 막 부파하고 해가지고 상좌부 부파분열 될 때 보면 상좌부라는 것 자체가 거의 파가 없습니다. 맞습니까? 불교 역사 혹시 알아본 사람?
큰 오류를 범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상좌부는 처음부터 존재를 했었고 지금까지도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열도 없이 하나의 맥(脈)의 흐름을 탈 거 같으면 1차 결집 때 했던, 여러분들 그 밑에 한번 보십시오. 남서상좌부, 상좌부의 흐름을 적어놓은 것이 있을 겁니다. 2차 결집 때 그 부분이 나옵니다.
2차 결집 때 상좌부 하고 대중부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거든요. 그래서 상좌부 중에서도 2차 결집 때 모였던 인원이 남서지방에서 올라온 인원도 있었고, 북서지방에서 올라온 인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2차 결집이 일어났던 웨살리라고 하는 동부지역 쪽에 있는 비구들이 뭐가 잘못됐다 해가지고 그걸 쳐버리고, 다시 1차 결집 때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를 한 게 2차 결집이 됩니다.
2차 결집이 됐는데 중요한 건 뭐냐 하면 그렇게 결정이 됐는데, 웨살리에 있던 동부지역 비구들이 그 결정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게 뭐냐면 대중부가 구성이 되죠!
그럼 요쪽에 상좌부들은 남서부하고 북서부에 있던 상좌부들은 또 나름대로 상좌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북서부 쪽에 있던 상좌부가 있고, 남서부 쪽에 있던 상좌부가 있습니다.
북서부 쪽에 있던 상좌부는 나중에 분열이 되면서 설일체유부로써 분열이 돼나갑니다. 같은 상좌부인데 왜 이거는 설일체유부라고 이름을 지었냐 하면 그쪽 지역에 바라문계급들이 흥하기 때문에 그거하고 대항하기 위해서 논장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처음으로 경(經) 율(律)이 아니라 논(論)이 생겨나갑니다. 대항하기 위해서! 싸우기 위한 것으로.
남서쪽은 어떻게 됐냐면 그거 없이 그대로 상좌부라는 이름으로 해서 남쪽으로 더 이동을 합니다. 더 이동을 해서 스리랑카까지 넘어오게 됩니다. 그 상좌부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동남아 각지로 다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2,550년이 지나더라도 처음에 있었던 상좌부는 그대로 맥을 가지고 오면, 부파분열이 아니라 대승불교가 생겨나고 새로운 불교가 생겨나더라도, 전통적인 맥(脈)은 그대로 이어져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다른 경전에 보면 가장 큰 오류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부파분열 할 때 상좌부불교가 없어져 버립니다.
상좌부 중에서는 설일체유부로 아니면 근본설일체유부로 아니면 분별설부로 이렇게 분열됐다고만 해버리고, 맥을 끊어버리는 거라.
왜 이렇게 되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이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만약에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의 경전들이 남아있는 것이 정통성을 확립할 수가 없습니다. 정통성을! 중간에 어디 부파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알 거라. 그리고 빨리 삼장을 비교하는 근거로써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왜 지금 학문적으로는 그렇게 하면서 그 정통성들은 보이지 않게 막을 치느냐는 거라. 그게 어떤 면에서는 대승우월주의 사상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는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그 부분들을 명확하게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 그게 지금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으니까 문제가 있는 거죠.
(질문) 그리고 그런 대승, 소승이라는 개념조차도 이미 1956년 결집 지나고 1970 몇년도에 UN에서 결의해가지고 대승, 소승이라는 개념을 쓰지 말자 해가지고 없앴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쓰고 있거든. 어쨌든 그거는 부차적인 것들이고 지금 스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너무 그쪽 위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님도 이쪽저쪽을 다 살펴보고 그래도 이것이 정통적인 것이다 하는 것들을 제시를 해서 여러분들한테 뼈대를 세워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경전들을 다시 한번 잘 더듬어보시기 바랍니다.
뒤에 쭉 나와 있는 거는 조금 설명해야 될 부분도 조금 있기는 있는데 혹시 읽어보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다음 시간에 질문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송으로 배우는 부처님이야기(구두쇠 이야기) (20071018) (0) | 2020.10.25 |
---|---|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의 진심 (20071011) (0) | 2020.10.18 |
테-라와-다(Theravāda) (20071004) (0) | 2020.10.18 |
제2차 결집 (20070920) (0) | 2020.10.18 |
빨리어(Pāli) 경전이란? (20070927) (0) | 20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