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2. 지식적인 것들을 앎으로 해서 진리에 눈을 뜰 수가 있는가? (20090120)

담마마-마까 2020. 11. 27. 23:06

https://youtu.be/A_aeKTCZPxU

* 기초수행 문답 2 (20090120)

Q2. 지식적인 것들을 앎으로 해서 진리에 눈을 뜰 수가 있는가?

 

수행하는 것보다는 불교에 관한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책을 읽으면 거기서 여러 가지 감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부처님 말씀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 이외의 이런 지식적인 것들을 앎으로 해서 진리에 눈을 뜰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깨달음의 과위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수행보다 책 읽는 게 더 좋죠? 그렇죠! 스님 법문 안 해주면 오기 싫어하고 그렇죠! 실제 수행하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은 경우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실제 수행하라 그럴 것 같으면 어쨌든 게으름 피울려 그러고 어쨌든 그 시간을 피할려고 하고 또 대충대충 할려고 하는데, 법문해준 거는 녹음해놨다가 몇 번이라도 계속 들을려고 하고 책도 진리의 말씀들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나에게 도움 되는 거는 두고두고 옆에 있으면서 자꾸 여러분들이 읽을려고 그럽니다.

 

경전이나 법문 듣는 것이 여러분들 가까이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빠리얏띠(pariyatti)' 라고 그럽니다. 배운다는 것, 교학이라고 하는 것을 빠리얏띠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빠띠빳띠(paṭipatti)'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한다.

교학과 수행이 둘 다 능숙하면 참 좋습니다. 사실은 둘 다 능숙해야 됩니다.

교학만 많이 익혀지면, 그러니까 법문 듣고 책 읽는 것만 좋아지면 의심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이게 진짜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이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의문들 이런 것들이 자주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빠띠빳띠 수행만 또 열심히 하면 확신은 드는데 그 확신에 대한 뒷받침을 못해줍니다. 이게 어디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걸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완전한 확신이 들지를 않는다는 거라. 확신은 들었는데 확신에 대해서 재확인하는 작업을 못하기 때문에 조금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개를 다 갖추면 의심을 없애고 이 길에 대한 확신들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걸 수레의 양바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가지를 다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현재 지식욕들이 더 많은 실정입니다. 그걸 가정하에서 얘기를 해볼게요.

여러분들에게 책 읽는 것을 예로 들더라도 도움이 되는 게 있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있죠? 어떤 게 도움이 되고 어떤 게 도움이 안 됩니까?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있듯이, 또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고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죠? 세상의 책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해서 수행에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감각적인 욕망을 키워주고 하는 책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다지 수행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 돈을 잘 벌어주게 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높은 관직에 오르도록 명예가 높아지게 하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도 물론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한다는 빠띠빳띠는 그런 것들을 제외한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경을 공부하고 법문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에서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점으로 잡아야 됩니다. 나에게는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익이 없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은 큰 값어치를 못하겠죠! 그래서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는 것 그것을 기준점으로 잡는다고 보면 됩니다.

또한 내가 공부하는 것들이 도덕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잡아도 됩니다. 오히려 남을 해치고 남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불행하게 하는 것, 또 내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내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되지 않겠죠. 하나 더 기준점으로 잡으라고 할 것 같으면 도덕적인가 아닌가? 도덕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또한 기준점으로 잡으면 됩니다.

 

결국 배운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실용주의를 취하고 있는 겁니다.

이익이 있고 또 행복하게 하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엄격하게 말할 것 같으면 한계를 가지는 거죠! 왜 한계를 가집니까? 배움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그 지식은 크게 소용이 없는 실정이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공부는 많이 했는데 남을 잘 못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공부는 별로 없는데도 남을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탁상공론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이익은 되지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만약에 부처님 일대기를 읽었다, 아니면 수행 방법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읽고 나서 감명은 받았습니다. 감명은 받았는데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할 거 같으면 크게 이익은 없죠? 그것으로 인해서 나를 항상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런 책을 읽어서 그 방법대로 내가 실천함으로 인해가지고 이익이 항상 따라오고 행복이 항상 따라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수레의 양바퀴다' 하고 얘기합니다. '배운다는 것하고 실천하는 것은 동시에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인도에서 부처님 당시 때는 부유하다 라고 하는 기준점은 소가 몇 마리 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내 집에 소가 많으면 참 부자고 행복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하지만 목동 입장에서는, 양치는 사람이나 목동 입장에서는 그 소를 아무리 잘 세고 관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부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주인의 소지 그 목동의 소는 아니라는 거라. 아무리 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목동은 자기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면, 그래서 실천돼서 그것을 내가 체험해보지 않으면 크게 이익되는 것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익되게끔 자꾸 할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많이 알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를 알더라도 그것을 자꾸 실천하는 방향으로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지식을 대하는 불교적인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그 답에는 보면 강한 믿음을 가지고 경전을 공부하든지 또 진리를 아는 사람과 대화하여서 의문나거나 납득가지 않는 것을 납득 갈 때까지 질문해서 실천하라. 그러면 예류과에 도달한다.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책의 예를 들어봅시다. 책을 여러분들 볼 때 어떻게 책을 봅니까? 그냥 눈이 글자 따라서 쭉 읽죠!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눈으로써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글자라고 하는 이 보이는 대상은 물질입니다. 물질이나 또 내가 보는 여러분이라고 하는 대상은 형태의 덩어리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보이는 대상은 물질과 모양이나 형태의 덩어리라고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아, 보이는 대상이 꽃이다, 사람이다 뭐 아니면 만약에 글자가 '도서관'이라고 돼있다 그러면 '도서관'이라는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고 도서관을 연상을 시킨다든지 이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건 물질이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물질적인 대상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만이 눈으로 관찰하는 법을 시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가장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통 어떻게 하느냐면 하얀 천을 이렇게 한 30cm 되는 걸 잘라가지고 그 천을 뚫겠다 하고 쳐다봅니다. 그 펼쳐져 있는 하얀 천을 갖다가. 그러면 그 천이 '얼른얼른얼른' 하고 그림자가 생기든지 아니면 그 천이 계속 쳐다보면 연기처럼 희끄무레하게 되기도 하고 아마 여러분들도 하나의 대상을 계속 그렇게 관찰을 하면 그럴 겁니다. 여러분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스님을 눈도 하나 깜빡 안 하고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똑 망막에 뭐가 씌우듯이 흐릿하게 이렇게 보여집니다. 그리해도 계속 관찰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또 변하죠?

하얀 천을 관찰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하얀 천을 그리 관찰하면 희끄무리하게 되기도 하고 색깔이 변하기도 하고 그림자가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 천이 잘려집니다. 조각조각 잘려집니다. 그리고 그 천이 얇아졌다가 두꺼워졌다가, 또 이 천이 많아졌다가 적어졌다가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착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물질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게 물질입니다.

 

여러분들이 글자를 읽어도 글자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읽어야만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글자를 연상해서 생각할 것 같으면 수행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도' '서' '관' 이라는 글자로써 '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서'가 일어나지고, '서'가 사라지고 나서 '관'이라는 게 일어나지고 하는 것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의 현상으로 바라봐야지 만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그냥 '도 서 관' 이라고 해서 머릿속에 도서관을 생각해버릴 것 같으면 눈으로써 글을 읽는 바른 관찰법이 안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글자를 읽을 때는 수행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생겼다가 사라지는 대상으로 봐야 됩니다. 아까 경행할 때도 그랬죠? 두 가지만 생각하라 그랬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이 두 가지만 생각하라 그랬습니다. 글자라고 하는 것 책이라고 하는 것도 물질적인 겁니다. 그것을 읽는 것은 마음입니다. 글자와 마음만 대상으로 삼아야 되는 것이지 거기서 생겨나는 잡념 생각들 관념들 이런 것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냥 글자만 읽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끊임없이 글자가 생겼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끊임없이. 그걸 쭉 따라 읽다 보면.

여러분들이 경행할 때 들어올리는 것이 끝나고 나면 나아가지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 끝나고 나면 내려놓는 것이고 그러듯이 끊임없이 하나의 대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합니다. 경행을 할 경우에. 아주 빠르게 그렇게 됩니다.

글자도 꼭 마찬가집니다. 하나의 글자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그다음 글자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글자를 지속적으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여기에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다고 판단될 때까지 글자를 읽을 때는 수행의 대상일 때는 그렇게 읽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삼매의 힘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대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성품으로 보이지 않으면 삼매는 생기질 않습니다. 집중하는 힘이 그만큼 강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몸의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을 해야 됩니다. 눈으로써 관찰하는 대상이 사대요소로써 파악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글자든지 대상이든지 앞에 보이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런 방법으로 관찰을 해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법문을 들을 때 귀로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귀로 관찰할 때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냐 하면 소리가 생기는 곳으로 마음을 기울이지 말아라! 마음이 가지 말아라. 지금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있죠? 그럼 여러분들 귀가 여기에 올 수는 없죠?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있는 곳으로 와지죠? 이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소리가 생기는 곳으로 마음이 가버릴 것 같으면 마음이 밖의 외부대상을 따라서 흘러가버립니다. 그럼 이것이 지맘대로 왔다리갔다리 거기에 따라서 휩쓸려버린다는 거라.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대상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 몸의 물질적인 이 몸과 그리고 이 마음입니다. 물질적인 이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들리는 소리, 어디로 해서 들립니까? 내 귀를 통해서 들립니다. 그럼 마음은 이 귓바퀴에 있어야 되는 것이지 스님이 말하는 입에 가 있으면 안된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소리가 생기는 곳으로 마음이 향하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은 반드시 이 귓구멍 귓가에다가 두도록 해야 됩니다. 소리는 어차피 내 귀를 통해서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귓가에서 듣는 것과 그 소리가 사라지는 것 두 가지만 관찰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귀를 통해서 들리고 사라지고 들리고 사라지고 합니다. 이 두 가지만 관찰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 눈으로 볼 때 경전을 볼 때 관찰하는 법이 잘 안될 때 하얀 천으로 인해서 훈련하듯이, 귀로 소리 들릴 때도 그와 같이 훈련을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면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가지고 베개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위에다가 귀를 딱 대보십시오. 그러면 이 손바닥이 귀를 꽉 막는 형태가 됩니다. 지금 한번 해보시겠어요? 옆으로 눕지는 못하지만 요렇게 한번 대보십시오.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꽉 막으면 '시시시시시시' 하는 그런 소리들이 들리죠? 그걸 일단 관찰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시시시시시시' 하는 소리부터 시작해가지고 아주 가늘고 미세한 소리들이 들립니다. 조금 더 예민하면 진공관에다가 아주 가는 모래들을 뿌려보십시오. 그러면 '다라라라라라라락' 하는 소리가 들리죠? 하나의 소리가 '다라라락' 끝나고 나면 그다음 소리가 '다라라락' 들리고 하듯이, 그게 끊임없이 '다라라라라라라락' 생겼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진공관에 모래를 흩뿌리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까지 이 귀에다가 마음을 놓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소리가 들릴 때 마음이 들리는 쪽으로 향하지를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다보면 이 귀 안에서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고 귀를 막고 있는 손목, 손목에서도 나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 정도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귀에다가 마음을 놓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집중력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그래야 만이 밖에 소리가 들리더라도 이미 마음은 귓바퀴에 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들을 해야 됩니다. 소리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로써 관찰을 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불교에서 경전이나 법문을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수행에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경우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 소리들리는 것에 빠져버리고 또 경전에 있는 것으로 해서 감명을 받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도 무상하고 불만족이고 실체가 없는 현상이다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대상으로써만 그것이 필요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면 경전이 없이 바로 수행을 할 경우에는 별 효과가 없는가?

그건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예 경전도 모르는 사람들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던 예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할 것 같으면 우선 먼저 실천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보다 오히려 실천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하고 얘기합니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 한국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병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듣고 보는 것들입니다. 실제 수행을 하는 것보다 듣고 보는 것이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많이 들어와가지고 법문을 듣고 다운로드를 하고 그리합니다. 그런데 실제 선원에 와서 수행은 안 한다는 거라. 특히 한국 사람들이 그런 병폐들이 거의 있기 때문에 되도록 그럴 시간이면 한번이라도 수행을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아까 책을 읽는 법 그다음에 법문을 듣는 법에 대한 관찰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수행에 조금씩 도움을 받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예류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식만으로 보는 것 듣는 것만으로 예류과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한 그 방법으로 도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책을 많이 읽었다 해가지고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