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6. 수행하는 목적과 방법은? (20090224)

담마마-마까 2020. 12. 2. 13:38

https://youtu.be/ZZCudqRG7kQ

* 기초수행 문답 6 (20090224)

Q9. 수행하는 목적과 방법은?

 

기초수행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수행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것들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해서 수행한 목적이 뭡니까? 해탈이죠.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겁니다.

 

늙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늙어가는 것이 보기 싫지만 어떻게 해? 내 자신도 그렇게 늙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병든 환자들을 건강할 땐 피하고 싶지, 피해지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도 병에 걸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뭐 어쨌든 간에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노병사(老病死)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해를 하면 간단한데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거든.

왜?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걸 쉽게 받아들일 사람 있습니까? 쉽게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죽을 때 "아, 나 죽기 싫어" 하는 소리 하는 사람 아무도 없겠지. 병든 거 받아들인다고 할 거 같으면 뭐 그냥 그대로 병든 것들에 대해서 아파하고 할 이유가 없겠지. 그런데도 아프면 육체적으로 아프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도 다 아파한단 말이라.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에 마음으로 병이 든 거거든. 아무리 주름살 이렇게 쫙쫙 펴서 안 늙을라고 하더라도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거라. 안 늙을라고 하다보니까 자꾸 주름살을 펴고 몸에 신경을 쓰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노병사를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한다 하는 거라.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노병사를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하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출가해서 수행했던 겁니다.

뭐 때문에? 노병사를 뛰어 넘기 위해가지고! 간단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탁 이루고 보니까 마침내 인제 나는 알았다는 거라. 마침내! 그걸 뛰어넘을려고 그렇게 무진 애를 쓰고 그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해서 부정할려고, 그렇게 안될려고 무지 노력했지마는 그것에서 오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뿐이었다는 거라. 나는 인제 그 괴로움을 뛰어넘어버렸다는 거라. 진리를 찾았다는 거라. 출가수행 한 목적을 이루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바로 그 얘기합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괴로움을 뛰어넘어서 진리를 이루었고 이 세상에서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은 다 이루었다." 목적한 바를 다 이루었다는 거라. 바로 그랬거든. 그게 뭐였느냐는 거라. 바로 그 밑에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여섯 가지 인식기관에 인해서 접하는 여섯 가지 정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접촉, 그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일어나는 게 느낌이라는 거라. 웨다나라고 하는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느낌으로 인해서 '나'라든지 나의 영혼이라든지 내 것이라든지 아니면 개념이라든지 좋고 싫다라고 한다든지 또 모든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을, 이 기능을 부처님이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그걸 뛰어넘었으니까 이 느낌으로 인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니까 이 느낌에 어떤 느낌에도 얽매이지 않게 됐기 때문에, 얽매이는 방법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는 거라. 얽매이지 않으니까 당연히 괴로움이 없어지고 괴로움을 뛰어넘어 버리는 거라. 그 길이 내가 진정 수행하는 목적이었는데 그 목적을 이루었다는 거라. 그러한 상태를 열반하실 때까지 계속 유지해나갔다 하는 거라.

 

생로병사라고 하는 괴로움이 없는 세계, 깨달음의 세계, 또는 윤회로부터 해탈한 세계, 그다음에 윤회의 원인이라는 무명 갈애를 끊어버린 열반의 경지, 이런 말로 부처님이 표현합니다. 부처님 말고 각각의 제자들도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이런 '해탈했다' '열반했다' 아니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여러 가지 말로 표현들을 하는 겁니다.

 

수행으로 목적하는 것은 이런 해탈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수행목적이 해탈 맞습니까? 무엇 때문에 수행합니까? 몸 건강해지기 위해서, 아니면 조금 더 잘 살려고, 아니면 화 좀 덜 낼려고, 아니면 욕심 좀 덜 가질려고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겁니다. 해탈이라는 것! 그걸 목표로 해서 달려가는 게 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하고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 목적이 있으니까 인제는 어떻게 달려갈 것인가 하는 방법만 잘 알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몇 시간이라도 집중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일상수행을 하든지 모든 것이 수행이 되어야 됩니다. 수행하는 것, 그리고 이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는 방법이 돼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방법을 부처님이 가르친 게 뭐냐 하면 부처님의 담마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자체가 이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법을 설하신 가르침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지 다른 길을 향해서 달려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봐야 됩니다. 시중에 있는 많은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이 목적을 행해서 달려가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의 법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왜? 부처님도 이 목적을 위해서 출가를 했고 그래서 그 목적을 마침내 이루었으니까 당연히 가르친 것은 이것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 방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누구든지 다 출가하고 누구든지 다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속적인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것들도 얘기를 하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세속적인 삶의 방법도 목적은 똑같습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통상적으로 부처님이 얘기하는 세속적인 삶의 방법이 뭡니까? 네 가지를 보통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뭡니까? 천한 행위를 하지 말아라.

그 천한 행위의 절대적인 판단기준은 뭐냐 하면 탐·진·치라고 하는 그런 충동, 탐·진·치의 충동에 휩싸여있어서 나쁜 행위 천한 행위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행위를 하지 말아라.

천한 행위 두 번째의 판단기준은 뭡니까? 우리 불교에서만 있는 오계인 거 같지만 자이나교에도 있고 다른 종교에도 있고 이 오계는 거의 비슷합니다. 네 가지는 경우들은 비슷합니다. 그거는 뭡니까? 세상에서 보통 상식으로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천한 것이다 하고 규정해 놓은 것들, 이런 것들이 판단기준이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 천한 행위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기준은 탐치에 끌려들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맨 처음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해당이 안 되더라도 세속적인 상식으로 그것이 천한 것일 경우에는, 이 두 가지가 판단기준이 됩니다.

 

처음에는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 두 번째는 뭡니까? 게으르지 말아라.

살아가는데 있어 살아가는 방법이 게으르면 안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설한 이 가르침·담마라고 하는 것은 노력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열심히 노력하는 자만이 이 진리를 얻을 자격이 있고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게으른 자에게 그 어디다 쓰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 게으르지 말아라.

 

그다음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요즘 같이 정보화시대 때 아마 맞을 수가 있습니다.

각종 다양한 정보, 각종 다양한 사고 이런 데 조종되지 말아라.

누가 이 말하면 셀락 누가 저 말하면 셀락 이렇게 휩싸이지 말아라는 거라. 니가 나아가는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목적을 행해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왜 다른 것에 왜 휩싸이냐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모으는 것, 세상의 쓰레기를 모으지 말아라.

이것의 근본적인 목적은 생각도 모이는 겁니다. 그리고 필요 없는 나라든지 어떤 개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정립해 놓는 것들도 쓰레기라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모으지 말라는 거라. 왜? 그런 것들도 변해가는 속성에서는 한치도 비껴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을려고 한다는 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느냐는 거라. 물질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마음의 기능 마음의 작용들도 다 변해가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물질은 변할지라도 마음은 안 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걸 모아두고 딱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쓰레기라고 얘기합니다. 쓰레기를 모으지 말아라는 거라.

 

세속적인 삶의 방법에도 부처님이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그 기준대로만 살아갈 거 같으면 적어도 그래도 참 잘 살아간다 하고 얘기를 할 겁니다. 하물며 수행자들은 더 엄격하겠지? 더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삶의 방법을 갖다가 강조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갖다가 도외시한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인 삶의 방법이 바로 그 출가지의 삶의 방법과 마찬가집니다. 수행자들 삶의 방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도 꼭 여기서도 한 치도 안 벗어나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사띠하라. 알아차림하라.

천한 행위를 하지 않을려고 하더라도 내가 알아차리지 않으면 천한 행위를 방어를 할 수가 없고, 게으르지 않을려고 하더라도 내가 사띠하지 않으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고, 여러 가지 세상의 다양한 정보 잘못된 사고에 조종되지 않을려고 해도 사띠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고, 세상의 개념이나 이런 쓰레기들을 모으지 않을려고 하더라도 사띠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라. 수행하는 삶의 방법은 사띠하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사띠를 실천하라. 알아차려라. 알아차려라.

 

뭘 알아차려? 부처님이 알아차린 게 뭡니까?

여섯 가지 대상과 그걸 인식하는 감각기관에 접하는 느낌,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느낌을 알아차릴려고 하니까 어떻게 알아차리겠어요? '명칭을 붙여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사띠의 기능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보통 인제 겨울이니까 '춥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피부가 추위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피부는 지 혼자로는 절대 춥다는 걸 느낄 수가 없습니다. 춥다 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내가 춥다' 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는 이 두 가지 기능이 있는 겁니다. 몸이라고 하는 나와 마음이라고 하는 나!

보든지 듣든지 느끼든지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몸으로써 먼저 알고 그것을 마음으로 인해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 프로세서를 항상 밟아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나를 알려고 할 거 같으면 그리고 그것을가지고 수행을 하려고 할 거 같으면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를 내가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사띠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인 것은 흘러간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나는 흐르지 않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자꾸 개념이 생기고 그것이 생각이 돼서 망상이 돼버리고 이렇게 된다는 거라.

 

이 위빳사나의 구조, 사띠의 구조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 그리고 먹는 것들, 걷는 것들 이런 모든 기능들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수행은 시작이 됩니다.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훈련이 맨 먼저 중심이 돼서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찰하는 그런 과정을 밟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가 그런 알아차림이 계속 연속하게 되면 마음은 완전하게 가라앉게 되고 더 예리해져서 어떤 미세한 현상에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볼 수가 있게 돼서 아, 그 속에서 그 사물의 특징,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 사물의 진정한 특성을 있는 그대로 통찰할 수 있게 된다는 거라. 그게 깨달음 지혜로 연결되는 길이기 때문에, 수행의 길은 부처님이 보기에는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거라. 이게 유일한 길이라는 거라.

 

머리로는 여러분들이 그걸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머리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니죠? 방법은 뭡니까? 내가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와 경험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스로 확인하라." "스스로 확인하라."

확인되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된 것은 그것은 이해의 수준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연경이가 저기 있다. 만약에 부모 입장에서는 내 딸이다 하고 이해를 했다. 이해를 했다고 하는 거 가지고 연경이가 내 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거는 남의 애를 내 애라고 이해했을 때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연경이는 줄기차게 내 밑에서 같이 성장하고 커 오면서 내가 그걸 쭉 확인해왔단 말이라. 그러니까 내 딸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내가 확인한 거기 때문에 그거는 변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 남의 자식은 내 딸이다 하고 이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돼? 다른 사람이 그게 왜 니 딸이냐 할 것 같으면 흔들려버리는 거라.

 

'어, 그게 아닌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확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인해가지고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정말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수행에서는 포인트입니다. 그 확인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했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 확인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끊임없이 알아차리는데 알아차리는 기능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두 가지 기능이라고 했죠! 몸의 기능, 마음의 기능 두 가지입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기능을 다 알아차려야 됩니다.

예를 들면 몸에서 통증이 있다, 아프다. 몸이 아픈데 이것은 마음으로 압니다. 마음으로 아는데 몸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을 다 알아차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어, 내가 아프다고 알아야되지 만은 몸이 아프다는 것도 알고 마음이 그것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명칭을 붙여라는 거라.

왜? 명칭을 붙이면 '통증' '통증'하면서 그 대상에 명확하게 밀착을 하다 보면 어떻게 돼요? 몸이 통증이 있고, 통증이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안다는 기능을 확인하게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그냥 통증이 있을 거 같으면 그냥 일반적으로 알아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이해하는 수준에서 끝나버리게 되는 거라.

 

사띠를 할 때 그래서 훈련이 안된 사람은 반드시 명칭을 부여해라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명확하게 알아차린 것을 확인하는 작업들이 이 명칭의 기능으로써 일어나게끔 된다는 겁니다.

 

위빳사나라고 통상적으로 얘기하면 "명확하고 상세하게 이해한다, 관찰한다, 안다"는 그런 뜻입니다.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 알아차리는 마음의 기능이 사띠인데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 이 모든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사띠는 처음에는 어떤 기능들이 있느냐면 기억하는 기능들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막연하게 과거를 기억한다든지 과거를 회상한다든지 그런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 마음이 항상 현재에 있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현재에 와 있는 것들을 계속 기억하는 것. 그래서 그 기억하는 기능들이 먼저 있어야 되고.

 

그러고 나면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마음을 대상에 보내서 밀착시키는 기능들입니다.

대상에 탁 밀착되면 마음이라는 기능은 그 대상에 밀착됐기 때문에 다른 대상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마음은 하나의 대상만 취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대상에 밀착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선한 것일 때는 탐·진·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대상에 밀착되면 탐·진·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업으로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기능입니다. 마음의 작용.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기능, 마음의 의도를 사띠라고 하고. 그걸 '행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두 가지를 사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두 번째 기능들을 보통 우리는 '알아차림이다, 마음챙김이다, 주의집중이다 '하고 용어들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다시 표현하면 사띠라고 하는 행위는 마음이 아는 겁니다. '주시하는 기능과 아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완성되는 그런 것이다' 하는 걸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행하고 있는 것에다가 사띠를 두도록 해라.

내가 지금 걷고 있으면 걷는 데다가 사띠를 두고 밥을 먹고 있으면 밥을 먹는 데다가 사띠를 두고, 수행에서 앉아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면 거기에다가 사띠를 두고, 모든 현재 일어나는 것들에다가 사띠를 두라는 거라.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데 사띠를 두고, 항상 현재에다가 마음을 주시를 해서 거기에다가 밀착시키는 것들이 수행의 방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그 대상을 주시만 할 게 아니고 좀 더 명확하게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명칭을 부여해주는 겁니다.

명칭을 부여해주는 것과 부여해주지 않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쭉 걸어갔을 경우에는 대부분 보면 걸어가고 나서 내가 얼마만큼 걸어갔는지 하는 걸 잘 모릅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고 걸어가면 내가 얼마만큼 걸어갔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명칭으로 인해서 확인하는 작업들을 했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사띠하라 그럴 거 같으면 금방금방 떠오르는 것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될 거 아니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맞기는 맞습니다.

한 가지 기능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거 해가지고는 안된다고 하는 거라.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작업들이 뒤따라야 만이 명확해진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대상에 좀 더 밀착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래야 대상에 밀착을 해야 만이 망상들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대상들이 일어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만 알기만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망상에 파묻혀가지고 흘러가는데도 그냥 그걸 알기만 하는 거라. 사실은 스스로 자꾸 일으킨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 대상이 빨리 사그라지지를 않는 거라. 그게 이거 계속 따라가가지고 나에게 이익이 없다 싶으면 빨리 돌아와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났다는 거를 알아만차릴려고 하니까 어떻게 돼요? 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다 보니까 화가 더욱더 일어나게끔 되고 더 화를 증장시키게끔 돼버리는 거라. 명확하게 명칭을 부여해줘서 느낌에서만 끝나도록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화가 일어남' 하면서 명칭을 부여해줌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내가 알 것 같으면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부처님은 수행하는 방법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모든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명확하게 알아차려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명확하게 알아차려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좌선하고 경행할려고 하는 것보다 일상생활에서 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우선이 되지 않으면 집중력이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마음이 고요해지지를 않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서 좌선하고 경행하더라도 헛돌아버린다는 거라.

손을 하나 올리더라도 '손을 올림'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손을 올려버리고,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음' 하면서 '숟가락 듦' '올림' '입에 넣음' '씹음'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밥을 먹고,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자꾸 그렇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만이 집중력이 생기는 거라. 마음이 대상에 밀착하게 되고 고요하게 안정되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이런 선원에 와서 좌선 수행하고 경행 수행을 할 때 금방 대상에 몰입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항상 망상들이 일어납니다. 망상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망상으로 인해서 스스로 가치 판단들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수행을 할 때 통상적으로 우리가 하는 것들은 업을 짓는 행위들입니다.

나쁜 업이든 좋은 업이든 업을 짓는다는 거라. 살아가는 그 자체가 업을 짓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게 있습니까? 한번 있으면 얘기를 해보십시오. 어떤 겁니까? 업을 짓지 않는 거는? 없습니까? 그래서 수행에서 명칭을 부여해줄 때 "되도록이면 나누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아, 이게 탐심(貪心)이다. 이게 진심(瞋心)이다. 이게 어리석음(癡心)이다. 아니면 이게 불탐(不貪) 탐심이 없는 것이다. 불진(不瞋) 진심이 없는 것이다. 불치(不癡)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다. 하고 명칭을 부여해주라.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탐·진·치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욕심가지는 거고, 화내는 거고, 또 멍청하게 있는 것이고 이런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탐심이 없고 진심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아마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래서 관찰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그것도 부처님은 망상이라는 거라. 번뇌라는 거라.

탐심이 없는 것도 번뇌고, 진심이 없는 것도 번뇌라는 거라. 왜? 번뇌가 안될려면 그것을 명칭 붙여서 알아야 되는데 보통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거라.

예를 들어서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했다, 그럼 좋은 현상입니다. 선업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보통 어떻게 합니까? 빛을 경험하면 그 빛이라는 것을 명칭 붙여서 알아차리면 거기서 끝나버리는데 그것도 변해간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빛에 끄달려들어가 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번뇌가 돼버리는 거라.

 

열 가지 수행의 대상이 되는 번뇌가 있습니다.(dasa upakkilesa)

그런 빛(obhāsa), 그다음에 냐나(ñāṇa)라고 하는 지혜 부분도 번뇌에 해당됩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인해서 이해력이 커지면 경전이나 교리를 이렇게 읽더라도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어느 정도 수행을 하고 난 수행자들은 만약에 쌍윳따니까야의 어느 부분을 한번 쭉 정독을 합니다. 정독을 하고 나서 그걸 생각을 하면 그 구절이 그대로 다시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게 십 년이 지나도 오래도록 안 잊어집니다. 그런 이해력이 생긴다는 거라.

이것도 번뇌라는 거라. 왜? 자칫 잘못하면 거기에 집착하니까.

 

그다음에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알고 있는 기쁨(pīti) 그다음에 즐거움(sukha)이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편안함-빳삿디(passaddhi) 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도 번뇌라고 그럽니다. 끄달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다음에 임펙트-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해가지고 강한 자극 충격 어떻게 보면 강한 신심이 일어나는 이런 것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들도 그것 자체를 명칭 붙여서 알아차려버리면 변해간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집착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빡가호(paggaho) 라고 해가지고 강한 노력들. 수행하는데 내가 이길 외에는 없다 해가지고 강하게 노력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왜 그렇겠어요?

노력이 지나치면 당연히 들뜨고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져버립니다. 그게 번뇌라는 거라.

 

그다음에 우빳타나(upaṭṭhāna)라 해가지고 흔들림이 없는 것. 대상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 굉장히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타난 대상은 알아차릴 대상일 뿐인 것이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돼버리는 거라. 오롯이 한마음이 돼버린다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도 번뇌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평등한 것들 우뻭카(upekkhā)라 해서 평등한 마음들. 이게 번뇌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보통 착각합니다. 무덤덤한 느낌들, 대상을 놓쳐버린 느낌들을 우뻭카로써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이 느낌들을 알아차리지 못해버리면 어리석은 느낌으로 변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평등한 느낌도 제대로 그것을 알아차려야 되지 그렇지 못하고 집착해버릴 것 같으면 그 느낌은 무덤덤한 느낌으로 바뀌어서 어리석은 느낌으로 또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이것도 집착이라는 거라. 번뇌라는 거라.

그리고 모든 현상에 대해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것 니깐띠(nikanti)라고 하는 것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 열 가지들도 다 선한 업을 짓는 거지만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것도 번뇌로써 알아차려라.

탐·진·치라고 하는 것들은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탐·불치·불진이라고 하는 이것들은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거라. 그런데 이것 자체도 번뇌고, 그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서 명칭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해라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극복해야 될 대상이라고 알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다가 명칭을 부여해주도록 하십시오. 탐·진·치에는 명칭을 붙이기가 쉬운데 탐·진·치의 반대되는 것,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자애라든지 남을 아끼는 마음이라든지 너그러운 마음이라든지 또 이런 지혜가 일어나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은 보통 보면 명칭 없이 그냥 거기에 휩싸여 들어가 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똑 마찬가지로 탐·진·치로 연결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것도 반드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명칭을 붙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이렇게 명칭을 붙이다 보면 마음은 점점 더 대상에 밀착하게 돼서 집중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도 마음이 생각들이 많고 하기 때문에 금방금방 일어납니다. 금방금방 아프다가도 생각이 일어나는데 이 생각이 일어났다 싶으면 저 생각이 일어나고, 그러면 이게 탐심이 없는 마음인지 진심이 없는 마음인지 막 이렇게 명칭을 붙이다 보면 헷갈려버립니다. 명칭을 붙이라 해서 붙이기는 붙이는데 그거 잘 못하겠거든. 따라가다 보면 헷갈려버린다는 거라.

헷갈려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이 더 산란해져버린다는 거라.

 

그럴 때는 그 밑에 보면 '타이밍이 필요하다'고 적어놓았습니다.

홍수와 같이 무수하게 생각들이 일어나고 망상들이 흘러갈 때는 그 경우는 대부분이 탐·진·치입니다. 그럴 때는 명칭을 구분해서 붙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럴 때는 단순하게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명칭을 붙이도록 해주라는 거라.

그렇지 않고 그 망상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날 때는, 천천히 일어날 때는 그 대상에 맞게끔 명칭을 부여해주어라.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렸으면 '소리들림'이라고 명칭을 부여해주고, 소리가 들리고 나서 그 소리가 예쁘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일어났으면 '예쁘다'고 하는 명칭을 부여해주고 이렇게 명칭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명칭을 부여해줘서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 그 확인하는 작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 명칭을 부여해주니까 만약에 소리가 들렸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고요해졌으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내가 알아차리고 확인하는 것 이것만 해줘버리고.

만약에 '소리들림' 이라고 했는데도 소리들리는 것이 계속적으로 싫은 느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 '싫은 느낌'이라는 것으로 명칭을 다시 부여해줘야 되는 것이지 '소리들림' '소리들림' 하면서 붙잡고 있지 말아라는 거라. 이미 소리들리는 것이 싫은 느낌으로 바뀌었다는 거라. 그래서 명칭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붙이도록 그렇게 하라.

그런데 그게 너무나 빨리 변해갈 때는 구분하지 말고 그냥 '망상' '망상' '망상' 하면서 명칭을 붙이도록 하라.

 

사띠라고 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경우에는 우선 명칭 붙이는 훈련들부터 먼저 해야 됩니다. 그것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관계를 조금 더 명확하게 잡아내기가 힘듭니다.

명칭 붙이기 좋은 게 뭡니까? 앉아서 수행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할 때보다 일상생활을 할 때 명칭 붙이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접시를 잡고 닦고 내려놓고 할 때 얼마나 명칭 붙이기 좋습니까? 왜? 순차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위 자체도 순차적으로 하고 있고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순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명칭 붙이기가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자꾸 훈련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명칭 붙이는 훈련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이런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좌선 수행, 경행 수행하는 훈련들을 이제 배워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좌선 수행과 경행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두 가지 조심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집중적인 수행을 할 때. 그 부분부터 먼저 짚으면서 좌선, 경행하는 수행방법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앞으로 해야 될 게 뭡니까? 일상생활에서 어떤 것이든 명칭을 붙이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키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 대상 자체를 주시를 해서 그걸 알아차려서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마음, 그 사띠를 자꾸 계발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