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7. 수행할 때 조심할 것 두 가지. 수행을 실천할 때 중요한 사항 두 가지. (20090303)

담마마-마까 2020. 12. 5. 00:00

https://youtu.be/uzacXK2Mdjo

* 기초수행 문답 7 (20090303)

Q10. 수행할 때 조심할 것 두 가지.

Q.10 수행을 실천할 때 중요한 사항 두 가지. 위빳사나 수행의 세 가지 원칙.

 

위빳사나 수행은 이 수행법을 알고 나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도 마지막 이 몸을 버릴 때까지 수행을 해야 되겠죠!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6년 고행하면서 사마타 수행을 완성하고 마지막에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아있던 45년 동안을 위빳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이 수행법을 모르면 몰라도 알고 나서는 깨달음을 이루었던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해야 되는 게 이 수행이라는 겁니다. 이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반드시 조심해야 될 부분들이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추려 놓은 거니까 한번 보도록 합시다.

 

수행할 때 조심할 것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분석하려고 하는 것,

두 번째가 뭔가를 이룰려고 하고 뭔가를 발견할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수행을 실천할 때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스스로 아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게 되면 당연히 마음속에 들어오는 번뇌 망상들 화낸다든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난다든지 어리석은 생각들이나 일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방어를 해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계속 유지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석할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이게 제동이 걸려버립니다. '이게 뭘까?' 하고 분석할려고 하면 대부분 보면 개념으로 빠져버린다는 겁니다. 관념적으로 빠져버리면 당연히 탐·진·치에 물들게 된다는 겁니다. 살아가는 것은 실제적인 것들이고 수행도 또한 이 실재를 알아차려 나가는 것들인데, 분석을 할려고 하면 반드시 빠져지는 게 실재하고 반대되는 개념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분석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계획도 세워야 되고 또 지내온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서 정리를 해야 되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지나쳐버릴 것 같으면 그러한 경향성에 빠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수행을 할려고 할 때는 특히나 이런 선원에 와서 집중적인 수행을 하려 할 때는 반드시 경계를 해야 되는 것이 분석할려고 하는 것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려야 되는데 분석할려고 할 거 같으면 이미 과거나 미래로 빠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은 과거나 미래로 빠져가지고는 수행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계를 해야 되는 첫 번째가 스스로 분석할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분석은 돼나갑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의도적으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수행을 하다 보면 단계에서 스스로 그것들이 분석이 돼나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현재 머물면서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관념이나 개념에 빠지지 않게 되는데, 대부분 보면 어느 정도 수행을 하다가 좋은 현상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분석할려고 하고 그것에 또 매달리려고 하고. 또 나쁜 것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을 분석할려다 보면 멀리 배척할려고 하고 안 할려고 하고. 좋고 싫은 느낌들에 끄달려들어가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처음에 수행할 때는 이런 것들을 배제하라. 그런 것들을 완전하게 배제한 상태로써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뭔가를 이룰려고 하고 뭔가를 발견할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상태가 어느 정도 돼있는지 먼저 파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념적인 파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파악을 얘기합니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아니면 불교적인 수행법이나 아니면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념적으로 지식적으로 쌓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별로 큰 이익이 없습니다.

실제 내가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는가 하는 걸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들어오더라도 그 자극에 대해서 얼마만큼 대응 능력이 있고, 그것을 얼마만큼 부처님 법에 맞게끔 풀어내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들을 먼저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대부분 보면 자기 자신에 휩싸여버린다는 겁니다. 내가 이 정도 알고 있는데! 내가 이 정도 수행을 했는데! 나는 이거 알고 있으니까 스님이 법문을 얘기해도 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는 거라. 안 그러면 너무 쉽다, 아니면 너무 관념적이다, 이런데 빠져버리는 거라.

또한 자기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뭔가를 원하고자 합니다. '아 이거는 해야 되는데, 선정삼매는 경험해야 되는데, 멸진정은 경험해야 되는데'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둬버릴 것 같으면 우선 거기에 매달려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정직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현재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이, 그것만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 현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그것을 관찰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되는 것이지, 먼 목표를 잡아놓는다든지 아니면 지금 현재 나의 상태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관념에 휩싸여버리면 수행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수행할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것은 그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승은 스님을 통해서 그 말을 듣고 수행을 해나가고 또 원하는 바들을 이루기도 하고 하지만, 여러분들 스승은 엄밀하게 따지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말씀과 어긋나게 할 수 없는 게 스님들의 입장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출가 제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그 스님의 법문이나 말씀 중에서 수행해나가는 길들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들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그냥 재미있는 소리로, 아니면 교학적인 것들 산만한 것들만 나열해서, 그것을 주입하는 식으로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원래 부처님의 말씀하고는 어긋나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스승은 바로 그 부처님이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불교가 순수한 형태로써 2,600년이라는 기간 동안을 유지해 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조심을 해야 된다.

분석할려고 하는 마음에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숨어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먼저 내세워지게 될 것 같으면 수행을 바르게 해나갈 수가 없다.

그리고 뭔가를 이룰려고 하고 뭔가를 억지로 꺼내려고 하면 그것도 거기에도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들이 없어져 버려서 '나'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을 먼저 배제를 해야만 됩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수행을 해보면 그런 '나'나 '나의 것'이나 '나의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아는데 수행을 하기 전에는 보통 이것들을 염두에 두고 합니다.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내가 조금 더 많은 지식을 알고 많은 체험을 하기를 바라게 되고, '나'를 항상 전면에 염두에 두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는 당장은 그것을 알아차려서 체험해서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부분을 놓아두고 수행을 시작할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직접적인 것들이 돼야 되고, '나'라고 하는 것을 배제한 객관적인 것들이 돼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경험해서 얻어지는 것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 현실적인 것들이 돼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이 부분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객관적이고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것이다 하는 사실!

 

그걸 염두에 두고 나면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조금 더 수행을 쉽게 또 바르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것을 스님이 정리를 해놓은 게

첫 번째가 천천히 움직여라.

두 번째가 생중계하라.

세 번째가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려라. 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시간이라는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여기 올 때 차를 몰고 온 경우도 있죠. 차 몰고 올 때 어떻게 하고 옵니까? 라디오나 테이프들을 틀어놓고 차 운전을 하고 오는 경우들이 다반사죠! 안 그랬어요? 어떤 사람들은 라디오 음악 듣기가 좀 거하니까 스님 법문한 걸 녹음해가지고 그걸 내내 듣고 차 운전을 한다는 사람도 있기는 있대. 그리하더라도 그 부분은 경계를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들을 여러분들 잘 생각해보면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 소리를 듣는다는 것, 두 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두 개를 동시에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찰나찰나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찰나에 두 마음이 동시에 내어지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즉 운전하는 마음을 찰나에 낸 거하고 소리를 듣는 마음을 찰나에 낸 것, 두 개 동시에 병존(竝存)해서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거라. 시간은 그런 거라는 거라.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도 꼭 마찬가집니다. 한순간도 겹쳐지는 것, 한순간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시냇물도 엄밀하게 따질 것 같으면 각각의 개개의 것 다 다릅니다. 우리가 보면 크게 강물이라고 보지만, 그게 흘러간다고 보지만, 다 낱낱이 쪼갤 수 있는 것이고 찰나찰나 연결되어 있는 것뿐인 것이지, 그러니까 한물질 한 물질들이 아주 미립자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뿐인 것이지 겹쳐지는 것은 없다는 거라. 어떤 경우에서든.

 

마찬가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도 겹쳐져서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거라. 물질적인 것도 꼭 마찬가지고 이렇게 정신적인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두 개가 겹쳐진다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걸 염두에 둘 것 같으면 두 개 동시에 하는 것들은 일단 버려버려야 됩니다. 밥 먹으면서 신문 읽는다든지 뭐하면서 또 뭘 같이 한다든지 이렇게 동시에 하는 것들은 반드시 배제를 해나가야 됩니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말하고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하는 것들을 통상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하고 있을 때, 진짜 집중해서 그걸 말하고 있을 때, 누가 소리를 내고 말하더라도 사실은 그 소리가 사실은 안 들립니다. 원칙적으로 할 것 같으면, 말하는데 집중해서 거기에 쭉 하다 보면.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집중해서 말을 할 때 특히나 지금 만약에 여러분들이 듣는 것을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스님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스님의 소리만 들려야 되는 것이지 다른 차 지나가는 소리라든지 이런 소리가 안 들리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집중을 못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그 소리들이 들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착각을 하는 거라.

 

스님 소리도 듣고 밖의 소리도 듣고 동시에 듣는다고 생각을 하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동시에 듣는 것은 아닙니다. 요 소리가 들리고 그다음 소리가 들리고 순차적으로 들리는 것인데, 그게 하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듣는다고 착각을 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동시에 두 개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은 관념인 것뿐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실재는 반드시 하나에 하나만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워낙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이니까 참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물질은 빛의 속도로 빨리 움직이고 변화하는 거고, 마음은 그것보다도 열일곱 배나 빠르게 변화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한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잡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어쨌든 수행에서 그걸 발견해야 된단 말이라. 그래야 되겠죠! 그걸 발견해내지 못하면 수행의 이익은 크게 나에게 와 닿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 속도를 느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속도를 느리게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강제적으로라도 속도를 늦추라는 거라. 일반적으로 속도를 내가 움직이는 속도가 팔을 요렇게 하고 있다. 이게 일반적인 속도라고 할 것 같으면 이 속도가 만약에 이렇게 하는 동안에 일 초인데 일 초 동안에 찰나라고 할 것 같으면 열일곱 번이 일어난다는 거거든, 물질적인 게. 그걸 변화의 속도로써 볼 거 같으면 그거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또 17배나 더 빠르단 말이라 마음은.

그럼 이걸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일 초에 요렇게 할 걸 갖다가 십칠 초에 움직여야 된다는 말이라. 그래야 적어도 한 찰나에 일 초로 해당이 돼서 이걸 갖다가 알아차려 나갈 수가 있는 거라. 차례차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내가 천천히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그것을 잡아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 수행에서 이 진리를 발견하지 않으면 수행의 진척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에는 굉장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돌아다닐 경우에는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돌아다니는 마음들을 집중할려고 하는 대상에다가 붙잡아 둘려면 끊임없이 훈련을 해야 되는데 그 훈련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천천히! 슬로우 모션(slow motion)으로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수행의 첫 번째 단추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수행을 할 때? 경행을 할 때도 천천히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일반적으로는 그냥 쭉쭉 걷는데 어쨌든 천천히 하라는 거라. 그리고 밥 먹을 때도 천천히 떠서 올리고 입에 넣고 숟가락 내려놓고 이렇게 천천히 하고. 모든 행동을 할 때도 천천히 하는 거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도 일어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천천히 일어서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해야 만이 실재하는 것들을 잡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보통 때와 똑같이 빠르게 할 것 같으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현재 지금 초보의 입장에서는 그거를 모른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봤을 때는 우선 수행을 시작하려면 모든 것을 천천히 해야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수행을 배운 사람들은, 또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꼭 '아픈 환자처럼 행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인제 막 병원에 들어가 가지고 병 수술하고 나서 움직이기 힘들어서 어그적 어그적 천천히 하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라는 거라. 아마 이렇게 얘기해도 이 수행 끝나고 나면 오후 되면 빠릿빠릿하게 집에 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겠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수행의 포인트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거라. 천천히!

 

아난다 존자도 모든 것을 알아차려 나갔지만 동작에 마음이 가 있을 때 하고, 일어나는 특성들을 알아차릴 때는 다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리고 그것의 진리가 드러나는 속도가 다릅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경행을 할 때 움직임에만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상태 하고,

그러고 나서 만약에 아난다 존자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누울 때, 피곤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누울 때, 그냥 일상적인 속도로 누웠을거 같으면 아마 깨달음에 못 이르렀을 거라.

천천히,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움직여집니다. 지금 현재는 사띠로 인해서 대상에 마음이 일치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면밀히 알아차리려다 보면 내가 자연스럽게 천천히 할 수밖에 없는 거라. 천천히 몸을 뒤로 누이면서 앉으면서 머리를 갖다 대고 하는 동작을 천천히 했으니까 어떻게 돼요? 그 동작 동작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혹시라도 집에 가불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버리지 마라 라는 거라. 그래야 만이 한순간이라도 천천히 하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라. 그래야 탁 다가와지는 거라. 진리를 체험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 같지만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쉽게 다가와질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뭐라 그랬어요? 천천히 움직여라!

마음도 천천히 움직이고 행위도 천천히 움직이고 모든 것을 천천히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뭐가 기본이 돼야 됩니까? 사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것이 수행의 첫 번째 길목입니다.

 

두 번째, 두 번째는 뭐라 그랬어요? 생중계하라!

수행은 생중계하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슬로우 모션' 천천히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죠! 그렇습니까? 그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들이죠. 수행은 사실은 아닙니다. 맞습니까? 맞다고 해줘 봐. 실제입니다. 의도된 것들, 만들어진 것들은 실제 수행하고는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훈련은 돼나갈지 몰라도 그것은 수행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의도라도 그렇게 천천히 하라는 거라. 천천히 하다 보면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인제는 수행은 뭐냐 하면 사실상 실재적인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생중계하는 것부터 사실은 수행입니다. 안되기 때문에 천천히 하라는 겁니다.

 

아마 생중계하라 그럴 것 같으면 잘 이해를 못할 겁니다. 우선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앉아있으면 앉아있는 걸 알아차리고, 서있으면 서있는 걸 알아차리고, 또 걷고 있으면 걷는 걸 알아차리고, 또 내가 여기서 일어날 것 같으면 일어나는 것들을 전체를 다 알아차리고, 또 설거지할 거 같으면 설거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간단하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리하더라도 첫 번째 항목을 대입하려고 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렇게 알아차리더라도 천천히 하라. 그리하더라도 천천히 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실재적인 수행은 아닙니다. 실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생중계하는 것부터가 일반적으로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현상이 드러나지는 진리의 범위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지금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만 이해하십시오. 생중계라고 하는 것은 실제 지금 일어나는 것들을 다는 못 알아차리더라도 적어도 뭉뚱그려서는 알아차리도록 하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적어도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는 해야 안 되겠어요? 뭐 개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싸움박질을 하든 아니면 다툼을 하든 뭐 그냥 편하게 널브러져 게으름을 피우든 그런다고 해가지고 우리가 개보고 뭐라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났을 거 같으면 그러지는 말아야 됩니다.

분명히 구분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도 인간으로 태어난 자(者)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 영광을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으면 누리고 있는 만큼 행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겠어요?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그네들과 그런 동물들과 다른 부류들과 차이 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있어야 됩니다. 뭐로 가지고 차이 나겠어요? 적어도 내가 뭐 하는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라! 뭐 하는지는 알고 살아야 만이 그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지 그거 못하고 살 것 같으면 그거는 제정신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적어도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 되는 게 생중계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나중에는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겠지만 지금 현재는 여러분들이 그 부분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 그 생중계하는 것은 무엇을 생중계할 것인가 하는 것과 연결을 시키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뭘 생중계해야 됩니까? 실감(實感) 바로 감각느낌이라고 하는 것을 생중계해야 된다는 겁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많은 느낌들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 한번 팔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릴려고 한번 해보십시오. 알 수 있습니까? 큰 거 외에는 모르겠죠!

예를 들어가지고 스님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니까 팔을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해서, '팔'하고 알아차린다. '팔' 뭘 알아차릴 겁니까? 분명히 스님은 알아차리는 것을 실감·일어나는 느낌·감각을 알아차리라고 그랬는데 뭘 알아차리라는 거라? 지금은 잘 모르겠죠! 그래서 생중계가 현재는 여러분들에게 그것은 그렇게 해야 돼지 만은 실제로는 잘 모른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여러분들 만약에 여기서 손을 갖다가 쭉 비벼보십시오. 어떤 느낌들이 틀림없이 일어납니까? 일어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러분들의 피부에 많은 것들이 접촉하고 있습니다. 공기가 접촉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이 접촉하기도 하고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내가 조금 더 예리할 것 같으면 그 느낌은 알 수가 있습니다.

단편적인 예로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바람이 불면 그 느낌들이 일어난단 말이라. 그런데 바람이 없으면 그 느낌을 모르겠죠? 생중계하고 있어도 그것이 조금 더 예리하지 않을 거 같으면 모르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예리해질 것 같으면 그 느낌을 압니다. 생중계 할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그래서 느낌이라는 겁니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생중계 할 수가 없게 되는 형태들을 띤다 하는 겁니다.

 

자! 느낌을 생중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보고 있으면 보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겠죠? 생중계해야 되니까. 보이면 보인다고 생중계해야 되고, 그것이 만약에 보여지면 보여진다고 생중계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만약에 내가 여기 앞에 있는 스님을 본다 할 거 같으면 그냥 '봄' '봄' '봄' 아니면 '보임' '보임' '보임' 이렇게 밖엔 안됩니다. 실제적으로.

그런데 만약에 내가 조금 더 예리해져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보이겠죠. 그럼 '보임' '보임' '보임'하고 알아차리고 나서는 그 대상이 나에게 보여집니다. 그러면 '봄' '봄' '봄' 하는 게 아니고 '보임' '보임' '보임'하고 이제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그 보이는 것들이 보고 있는 것하고 보이고 있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보고 있는 것은 내가 마음이 대상으로 향해있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저 대상이 나한테 다가와지는 겁니다. 조금만 예리해져도 이 사실은 안단 말이라.

그러면 보는 것 하고 보이는 것 하고는 느낌도 분명히 다릅니다. 그거 알겠습니까? 볼 때는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까? 억지로 내가 대상에 가서 맞춰야 돼. 그러면 그거는 어떻게 돼요? 의도적이 될 수밖엔 없으니까 내가 볼 때는 느낌들이 잘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일어나기는 나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진 못합니다. 그런데 보여질 때는 거기에 대한 느낌들이 분명하게 일어나진다는 거라.

 

왜 느낌을 생중계하라고 하느냐면 사실은 느낌부터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살아있다고 하는 건데 그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대상이 나한테 다가와져서 나에게 영향을 미쳐야 만이 내가 알아차리는 겁니다. 아는 겁니다. 그게 사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대상으로 다가가는 것보다는 대상이 나에게 다가와서 부딪쳐야 만이 그것을 내가 아는 거라. 살아가는 인식을 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다가와 지면 당연히 나에게 그런 느낌들이 감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생중계할 때는 느낌으로써 알아차리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왜? 그래야 만이 내가 밖으로 나가서 대상을 볼려고 하는 것보다 그 대상이 다가와지는 느낌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대상으로 자꾸 하게끔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밖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빠져 나간다는 거라. 거기에서 각각의 것들로 흩어져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꾸 진행이 돼버린다는 거라.

보니까, 보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보는 건데 마음으로 해서 보는 거니까, 마음이 그냥 밖에 대상에 머무를 것 같으면 그 대상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자꾸 알음알이를 일으켜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좋고 싫은 느낌들도 일어나고, 그 대상에 대해서 개념화시키고 관념화시키고 이렇게 자꾸 바뀌어나가 버린다는 거라.

 

반드시 수행은 뭐라고 그랬어요? 내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밖으로 향해버리면 안 돼. 우선은 전부 안으로 들일려고 해야 돼. 안으로 들이려다 보면 반드시 그 대상이 보여지는 것들 들려지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야 돼. 그러니까 어떻게 돼? 눈을 예를 들더라도 내 눈을 통해서 저 대상을 보고 있지만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게 아니고 저 대상이 내 망막을 통해서 맺혀지는 이 내 눈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밖의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 게 아니고 내 눈을 향하도록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수행의 일차적인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생중계 하더라도 느낌을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느낌은 틀림없이 좋은 느낌들 싫은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보임' '보임' '보임' 하면서 명칭을 부여해 줄 것 같으면 적어도 그 보여지는 느낌들에 대해서 좋고 싫은 느낌들을 일으키는 게 아니고 보여지는 대상만 그냥 계속적으로 보게 된다는 거라. 보여지는 대상이 계속적으로 보여지면 어떻게 돼? 그 대상은 반드시 변해갑니다. 그러면 보여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지게 되니까 당연히 그 특성들을 내가 있는 그대로 느낌으로서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들은 그때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앉아있을 때, 걸어갈 때, 뭐 가렵다든지 아니면 잡념이 일어난다든지 모든 것들은 느낌으로써 생중계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고 느낌을 생중계하지 않으면 생중계하는 것이 표류가 돼버립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중계를 밖의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것이 흘러가버립니다. 표류돼버린다는 겁니다. 각각의 현상으로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예를 들면 배를 관찰하라니까 배가 '일어남' '사라짐' 느낌을 관찰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습니다. 실재적인 것을 생중계 못 하고 있다는 거라. 실재적인 것은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이라는 거라. 더부룩하게 불러와지면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팽창하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파도가 치는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돼야 되는데, 그것이 생중계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명칭을 붙여가 '일어남' '사라짐'만 하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이 어떻게 돼요? '일어남' '사라짐'만 하고 있으니까 이놈의 잡생각도 일어나고 잠에도 떨어지고 이렇게 표류하게 된다는 거라. 생중계를 하더라도 반드시 거기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생중계하도록 하라.

그래서 앉아있을 때 배를 관찰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할 때 그냥 단순하게 명칭을 붙이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

물론 처음에 안되니까 그거라도 먼저 하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대상을 알아차리고 날 것 같으면 그것은 느낌으로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대상을 보면 보고 나서는 바로 보이도록 해야 되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보여야 만이 거기서 느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럼 대상을 알았을 거 같으면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크게 나눠서 열여덟 가지가 일어나는 느낌들, 가벼운 것들이 '일어남' 하면서 배가 불러올 때 가벼운 느낌들이 점점 더 증가하는 건지, 아니면 무거운 느낌들이 증가하는 건지, 아니면 어떤 움직임들이 있는지, 아니면 불룩불룩하는 느낌들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생중계 하는 것이 표류하지 않게 되고 직접적으로 거기에 마음이 밀착돼서 부처님이 말한 특성들을 이해하게 되는 거라. 그게 사물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거라.

 

어떤 사물이든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해봤죠? 발을 들어올릴 때는 어떤 특성들이 있습니까? 가벼워지는 특성이 있죠! 그리고 움직이는 특성이 있죠. 발을 내려놓을 때는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무거워지는 특성이 있죠. 그것도 무거워지는 것도 점점 증가하는 특성이죠. 그리고 움직이는 특성들이 있죠? 이렇게 각각의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 특성들을 빨리 캐치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느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세 가지는 수행의 기본 원칙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 이것을 잊어버리면 수행을 못한다는 거라.

첫 번째는 뭐라구요? 천천히 하라! 두 번째는 생중계하라! 세 번째 감각을 알아차려라! 느낌을 알아차려라. 이 세 가지는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자! 그리할 것 같으면 예를 들어보자. 뭐 이렇게 허리가 구부러져 있다. 그럼 허리를 펼 때 이 세 가지 원칙을 한번 적용을 해서 펴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냥 후다닥 하지 말고, 먼저 천천히 해야 되겠죠? 천천히 '허리를 폄' '허리를 폄' '허리를 폄' 하면서 천천히 펴야 되고, 펴는 것들이라도 내가 허리를 직접 펴고 있으면서 허리를 편다고 해야지 이미 다 펴놔놓고 '허리폄' '허리폄' 하면 안되겠죠? 허리를 펼 때 그대로 있는 그대로 등골 하나가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십시오.

일반적으로 이리 펼 거 같으면 1초 걸릴 것 같다면 이걸 한 10초 걸려서 편다고 생각하고 실제 10초 걸려서 펴라. 펴면서 하나 나 움직이는 걸 쭈욱 알아차리도록 해야 하는데 한번 등골 펼 때 하고 두 번 등골 펼 때 하고 느낌이 반드시 다릅니다. 그 느낌의 강도가 반드시 다르다는 거라.

그래서 '허리를 폄' '허리를 폄' 하면서 여러분 의식을 어디로 두어야 된다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 느낌들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서 자꾸 펴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이게 위빳사나 수행이 시작이 되어나갑니다.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빨리빨리 움직이면 안되겠지! 한번 보겠어요 이! 밥 먹을 때 얼마나 빨리 먹는지 또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이! 스님은 여러분들이 저 사람이 '수행을 하고 있다, 안 하고 있다' 판단을 어떻게 하겠다고? 저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나 아니냐 하는 걸 알아차려야 되고, 천천히 움직여도 관념적으로 거기에 마음이 가 있지 않으면 금방 표가 나겠죠! 그러니까 천천히 움직이고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할 때 거기에 마음이 안 가 있으면 어떻게 해? 뒤뚱뒤뚱하게끔 되어버립니다. 저놈 저거 천천히는 하기는 하는데 생중계를 하지는 않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도 알아차리지 않고 있구나 하고 판단하겠죠? 겁나? 안 겁나지? 그런데 수행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라.

 

모든 것들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간사한 놈입니다. 이 머리라고 하는 것이, 뇌라고 하는 것이. 이걸 움직여주지 않으면, 요놈은 속성이 뭐냐 하면 편하고자 해. 여러분들도 앉아있으면 편할려고 하는 생각들이 일어나죠! 그게 요놈이 시키는 거라. 요놈이. 그러니까 어떻게 돼? 그냥 누워. 누워있으면 조금 더 편한 거 잠 잘라고 하고 그게 특성이라. 어쩔 수 없는 거라 그거는. 그러니까 요놈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수행이 안되는데 어떻게 할 거라.

사람들 살아갈 때 건강하게 잘 살아갈려면 어떻게 해야 돼? 머리를 회전을 안 시켜주면 치매 걸려.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화투라도 해가지고 이걸 자꾸 움직여 주는 거라. 꼭 마찬가지라 여러분들도.

 

수행을 할려면 어쩔 수 없이 요놈을 움직여 줘야 돼. 움직여 주는데 단순하게 그냥 '일어남' '사라짐' 하는 관념에 빠진다든지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요게 잘 움직이겠어요? 안 움직여지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때 일어나는 무수한 느낌들을 따라갈려면 요놈이 바삐 움직여야 되는 거라. 바삐 움직이니까 게으러질 생각을 못 내는 거라. 그래야 그게 수행이 돼나가는 거라.

 

자! 그렇게 하도록 하고 그래서 천천히 움직이고, 생중계하고,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라 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세 가지 원칙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음 항목을 가지고 하겠습니다. 수행해나갈 때 호흡을 따라가면서 해야 될 것이냐? 아니면 한 곳에 머물러서 해야 될 것이냐? 아니면 수행해나갈 때 호흡을 알아차릴 때 어떤 방식으로 알아차려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