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5. 수면 중의 수행, 잠을 자면서도 수행이 가능한가? <잠,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20090217)

담마마-마까 2020. 12. 2. 13:33

https://youtu.be/opZzEaF98Hw

* 기초수행 문답 5 (20090217)

Q8. 수면 중의 수행, 잠을 자면서도 수행이 가능한가?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

 

오늘 할 페이지 한번 펴보십시오. 수면 중의 수행에 대한 것들입니다.

대승불교권에서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다가 보면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고 또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고 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염불수행하는 경우들도 그런 얘기를 하고, 화두참구를 하는 경우들도 그런 얘기를 하고 합니다.

잠을 자면서도 화두를 들고 있고, 잠을 자면서도 정근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든 관세음보살이든 그런 걸 들고 잠을 자고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합니다.

그게 사실 가능한가 하는 부분입니다.

 

위빳사나 수행하는 남방불교권에서는 물론 위빳사나 수행할 때 잠은 잠일 뿐이고 수행은 수행이다 하고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것은 틀린 부분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론 위빳사나 수행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하는 곳이 있습니다. 파욱 센터나 이런 곳들은 사마타 수행을 합니다. 똑같은 사마타입니다. 단지 대상이 코끝에 있는 호흡을 보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거고, 아니면 한국에서 화두라고 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대상만 다르다는 것뿐인 것이지 수행은 꼭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적어도 파욱 센터나 여러 다른 센터들에서 잠에 대한 언급들을 틀림없이 해야 됩니다. 잠을 자면서도 그 대상을 오롯이 붙잡고 있어라 하는 얘기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밖에서는 전혀 그런 언급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니밋따를 본다고 하더라도 니밋따가 완전해져서 변하지 않는 상태가 돼있을 때까지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하물며 잠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놓아버려야 만이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붙잡고 있으면 절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잠을 자면서 대상을 붙잡고 있는다는 것은 대상도 사실은 못 붙잡고 있고 잠도 제대로 못잔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사마타 수행을 하는 여러 센타에서도 잠을 자면서 대상을 붙잡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될 부분입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들이 경전 상에도 있는가? 그런 내용들은 경전 상에도 전혀 없습니다.

 

자는 시간마저 아껴서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좀 열심히 해본 사람은 금방 느낄 겁니다. 호흡을 관찰하다가 잠이 들면 잠자는 시간이 그게 얼만지도 모르게 금방 지나가버립니다. 금방 아침을 맞습니다. 아침을 맞고 나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최고 먼저 인식되는 게 뭡니까? 즉시 나타나는 게 또 호흡입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까지 호흡을 했고 잠을 깨고 나서 처음 시작을 호흡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잠이라는 것은 전혀 인식을 못합니다. 마음이 잠을 대상으로 했지만은 잠이라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사이는 빈 경우가 돼버리게 됩니다.

잠을 잘 때는 이렇게 잠을 자는 게 가장 이상적인 잠을 자는 겁니다.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죠?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누워가지고 배에다 손을 올리고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잠을 자라. 실제로 그렇게 자보면 잠자고 나서 금방 깬 듯이 잠에서 또 깨어난다는 거라. 그 시간이 설혹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이 언제 가는지 모르게 금방 깨어난다는 거라. 밤에 시간이 안 가서 뒤척인다든지 나쁜 꿈을 꾼다든지 이런 경우가 없이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가 그대로 깨어나는데 아주 개운하게 깨어납니다.

 

잠을 잘 때의 마음은 잠을 대상으로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는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마음이 인식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잠재의식이라든지 꿈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간혹 사마타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 막연하게 몽중일여가 어떻고 오매불여가 어떻고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관념적이 얘깁니다.

왜 그러냐면 부처님은 잠을 잤을까 안 잤을까? 부처님도 잠을 잤습니다. 최소한 잤을 때는 두 시간, 평상시는 네 시간을 잤어요. 경전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부처님도 잠을 주무시는데 부처님은 뭐 몽중일여가 안돼서 잠을 자겠어요? 아니면 오매불여가 안돼서 잠을 자겠어요? 그건 그렇지 않다는 거라.

 

잠을 자면서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은 잠 속에서 꿈을 꾼 것들, 내가 화두를 들고 있으면 화두를 꿈을 꿀 수도 있고, 아니면 석가모니불 하고 들고 있으면 석가모니불을 꿈에서 보든지 그렇게 꿈을 꾼 것을 실제로 본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다 관념적인 부분이라는 겁니다. 그걸 자랑으로 생각해서 몽중일여라 자랑을 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알고 보면 굉장히 부끄러운 얘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행이라는 것은 탐심을 버려버린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게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내가 꿈에서도 대상을 들고 있었다? 그거는 뭡니까? 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 그걸 자랑으로 한다는 것은 탐심이 있다는 얘깁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내가 탐심이 있다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경우가 되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얘기라. 어리석음으로 눈을 가리도록 하면 안됩니다. 잠은 잠일 뿐이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졸릴 때 대부분 기를 쓰고 안 잘려고 합니다. 기를 쓰고.

그러죠? 수행할 때 졸리면 기를 쓰고 안 잘려고 하죠! 그러면 안됩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수행대상과 싸울려고 해서는 절대 못 이깁니다. 수행대상을 피할려고 해서도 안되고 수행대상과 싸울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물론 싸울려고 하지 마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그냥 잠에게 져버리고 잠을 자버리면 되는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거는 아니죠! 잠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려서는 또한 안됩니다.

 

잠이 오는 경우들도 두 가지 경우들이 있습니다.

진짜 몸이 피곤해서 잠이 오는 경우가 있고, 또 한 경우는 뭐냐 하면 습관적입니다. 앉았다 수행한다 하면 뭐 그냥 꼬박꼬박꼬박. 몸이 그리 피곤하지도 않는데 그냥 잔다는 겁니다. 이런 두 가지의 경우들이 있습니다.

앞의 경우에 몸이 굉장히 피곤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야될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최대한 노력하다가. 그런데 두 번째 경우 게으름으로 인해서 습관적으로 잠이 온다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물리쳐야 되는 겁니다.

 

그 두 가지 경우에 대해서 스님이 밑에다가 쭉 써놨습니다. 그것을 한번 보도록 그렇게 합시다.

잠은 내가 수행할 때 잠을 잤느냐 안 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잠을 잤든 안 잤든 간에 내가 알아차리고 있었는가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숫따니빠따(Sutta Nipāta)에 보면 게송이 있습니다.

 

Uṭṭhahatha nasīdatha, ko attho supitena vo.

웃타하타 니시-다타, - 앗토- 수삐떼-나 오-.

Āturānañhi kā niddā, sallaviddhāna ruppataṁ.

-뚜라-낭히 까- 닛다-, 살라윗다-나 룹빠땅.

 

일어나서 앉아라.

잠을 자서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괴로워하고 있는 고통받고 있는 자가 어찌 잘 수 있겠는가?

 

-뚜라-낭히까-닛다-(Āturānañhi kā niddā).

 

내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환자인데 잘 틈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라. 잘 틈이. 내가 지금 몸에 병이 들었다고 할 거 같으면 빨리 그 병부터 치료를 해야 되는 것이지 그 병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거라. 윤회라고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데 그걸 빨리 벗어날려고 하지 않고 게으르게 잠만 잘 수가 있느냐는 거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것들을 줄이라 하는 거라. 그리고 그 시간을 수행에 힘쓰라고 하는 겁니다.

 

통상적으로 쌍윳따니까야에 이 잠이 오는 것들을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를 해놨습니다.

쌍윳따니까야에 「빠짤리야마나숫따」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인데 목련 존자가 수다원까지 이르렀어요. 수다원까지 이르렀는데도 수행만 하면 잠이 와 죽겠는 거야. 꼬박꼬박 자거든. 부처님이 하루는 가서 물어봅니다. 목갈라나야 잠이 그리 오느냐? 예 부처님, 잠이 와서 죽겠습니다. 앉아서 수행하면 잠이 와서 꼬빡꼬빡 하는 거라. 여러분들 수다원 정도 됐으면 잠이 안 올 거 같죠? 아닙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잠이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잠을 안 자고 한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목갈라나야, 잠이 오면 잠을 물리쳐라." 내가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줄테니까 그대로 한번 따라해 봐라.

 

먼저 졸음을 일으키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라.

잠이 올 거 같으면 대부분 보면 그 원인이 있어 잠이 옵니다. 그런데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대부분 보면 잠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 잠이 오기 시작하면 아무리 그걸 알아차릴려고 하더라도 그 잠을 못 알아차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실제적으로는 잠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그 잠이라고 하는데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라.

사실은 잠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거든요. 물질적인 것도 변하고 정신적인 것도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변하는데도 변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잠이라는 하나의 큰 굴레를 씌워버리는 거라. 1분 전에 오는 잠이나 지금 1분 후에 오는 잠이나 똑같은 잠이라 생각해서 마음은 어떻게 되느냐면 그 잠이라는 데 머물러 있는 거라. '잠' '잠' '잠' '잠이 옴' '잠이 옴' 그러면서 생각이 거기 머물러 있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머물러 있어버리니까 잠은 더 오게 되는 거라. 관찰한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관찰은 안 하고 생각을 거기에 머물러버리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하느냐? 잠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잠이 올 때는 처음엔 눈꺼풀이 닫히는 느낌이 있을 거고, 그다음에 무거워지는 느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무거워져 올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아예 내리누르는 그런 느낌들이 있을 것이고, 내리누르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눈꺼풀이 따가운 느낌들도 있을 거고, 그다음에는 눈꺼풀이 아예 고통스러운 그런 느낌들도 있을 거고, 이렇게 잠이라고 하는 느낌들도 변한단 말이라. 그럼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같이 변해주어야 되는데 그걸 못 따라오고 그냥 통칭거려 가지고 '잠'이라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명칭을 붙일 때도 '잠이옴' '잠이옴' '잠이옴' 이렇게 붙이지 말고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 오면 '눈꺼풀이 무겁다' '무겁다' 하면서 알아차리고, 따가운 느낌이 있으면 '따갑다' '따갑다' 하면서 알아차리고 이렇게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생각을 그 잠이라고 하는데 머물르지 말아라 하는 거라. 머무르니까 자꾸 잠이 온다는 거라.

그게 처음에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한테 얘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잠이라고 하는 '' '잠이옴' '잠이옴' '잠이옴' 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이라는 거라.

관념이고 또 그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그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거라. 그래서 생각과 관념이라는 것을 버려버려라. 빨리 벗어버리고 변한다는 속성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졸음을 일으키는 생각에 마음이 머물지 않도록 해라.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조금 이로운 게 뭐겠어요?

자세를 좀 흔들어본다든지 아니면 자리를 좀 움직여 본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마음을 그 잠으로부터 빨리 다른 대상으로 이동해 주라는 거라.

'잠이옴' '잠이옴' '잠이옴' 해가지고 1~2분 해가지고도 계속 안될 거 같으면 대상을 바꾸라는 거라. '무거움' '눈꺼풀이 무거움' '무거움' '따가움' '따가움' 이런 대상으로 자꾸 마음을 이동시켜 주는 거라. 잠이 오는 경로에 따라서 자꾸 마음을 이동시켜주는 거라.

 

그리해도 안될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자세를 바꾸든지 아니면 대상을 여러 개로 자꾸 만들어 줘라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 하고 단순하게 하지 말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하면서 앉아있는 느낌을 관찰하고, '닿음' 하면서 닿아있는 대상 눈꺼풀이 닫혀있으면 눈꺼풀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다시 '일어남' '사라짐' '앉음' 하고 '닿음' 할 때 입술이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손이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엉덩이뼈가 바닥에 닿아있는 느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포인트를 자꾸 변화시켜 주라는 거라.

 

자세를 바꾸기 전에 대상을 자꾸 옮겨주라는 거라. 그렇게 해야 만이 마음에 활기가 생겨서 그 잠이라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에 얘기한 게 졸음을 일으키는 생각에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리해도 잠이 오면 내가 가르친 담마를 생각하고 다시 숙고하고 그리고 반복해서 암송하라.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게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잣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거기 뭐라고 적어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잣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담마에 대한 회상!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조사·확인해가지고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맞으면 그것을 실천하라.

 

가끔씩 스님은 수행 초기 때 잠이 올 때 이 게송만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르르 흘렀어요.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저렇게 말씀하셨을까.

어디 감히 성인들이 내것이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조사해보고 확인해보라 한 적이 있느냐는 거라. 다들 와서 그냥 믿어라.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 믿으면 어떻게 될 것이다. 이걸 따라 할 것 같으면 사후세계를 보장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지 "니가 한번 조사해봐라." 이걸 진짠지 아닌지 한번 니가 조사해 봐라 하고 얘기한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에히빳시꼬...' 하는 그 게송만 생각만 하면 이미 마음에서 감동이 북받쳐 오르는 거라. 그걸 하라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그걸 다시 숙고하라는 거라. 되씹어보고 곱씹어보라는 거라. 어째 저렇게까지 말씀하실까 하면서.

 

마음을 자꾸 활기있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반복해서 암송하라. 잠이 오면 잠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겁니다. 한번 오고 나서 떨쳤다 싶은데도 또 좀 있으면 또 오거든. 마음을 활기차게 확 해주기 전에는 이게 안 떨어져. 그래서 부처님이 두 번째로 가르친 게 가르침을 생각하고 숙고하고 나서 반복해서 암송하라. 반드시 반복해서 자꾸 계속 그 게송을 외워서. 완전하게 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한번 해보십시오. 그 게송에 대한 걸 마음에 담아있다가 그리고 그 구절에 대한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을 하고 나서 그 게송을 가지고 있다가 잠이 올 때 계속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이렇게 하면서 그걸 자꾸 숙고하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활기가 돌게 하고 노력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그리고 생각을 마음을 새롭게 자꾸 만들어주는 원천을 삼도록 하라 하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한테 얘기했던 두 번째 경우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목갈라나 존자가 지금 현재는 수다원까지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수다원까지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을 잘했기 때문에 수다원까지 이른 거라. 그런데 지금은 이놈의 잠에 빠져갖고 잠에 허덕이고 있단 말이라. 내가 지금 수다원까지 이르렀는데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이 잠에게 진다는 게 있을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네가 옛날에 과거에 잘해왔던 일들을 기억하라는 거라.

참 힘들게 수다원까지 이르렀던 과정들을 낱낱이 되짚어보고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부처님의 진리로 인해서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그걸 생각하면 당연히 여기까지 이르렀으면 마지막 아라한까지 이르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 그런데 여기서 내가 잠에 져가지고 아라한까지 못간다는 것은 말이 되느냐는 거라. 지난 과거들을 자꾸 기억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 자리에 오기 전에는 각각의 불교들을 접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 수행법을 접하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자꾸 접하고 나서는 그래도 내가 조금 더 화내는 것들이 적어지고, 조금 더 바르게 살아갈려고 하고,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 대상을 만나도 급격하게 내가 반응을 하지 않게 되고. 물론 다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죠. 그래도 일부 중에는 그렇게 바뀌어왔을 거라. 그걸 생각하라는 거라. 얼마나 이 좋은 것이냐. 목갈라나 존자에게도 부처님이 세 번째로 그걸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귓불을 잡아당겨라.

여기 귓불 있죠? 잠이 오면 왜 이 귓불을 잡아당기는지 압니까? 나도 이걸 과학적인 것은 설명을 하지 못하겠는데 귓불을 잡아당길 것 같으면 혈액순환이 상당히 잘된다고 그럽니다.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혈액순환이 잘되면 뇌를 쓸 수 있는 것이 조금 더 용이해진다고 그럽니다. 지금 현재는 밥을 먹고 나서 만약에 배가 불러있다 할 거 같으면 이놈의 혈액이 요 배에 다 뭉쳐있는 거라. 요거 소화시키기 위해가지고. 머릿속에는 적다는 거라 피가. 그러니까 이놈의 머리는 배 소화시킨다고 이미 다 가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머리는 골빈 형태가 돼있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을 알아차리는 건 요 배가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이 머릿속에 있는 여기에서 알아차려야 되는 건데 이걸 못하니까 자꾸 꾸벅꾸벅 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네번째로 뭐라고 그러느냐면 귓불을 자꾸 잡아당겨라. 귓불을 자꾸 잡아당기고 그리해도 안 되면 팔다리를 자꾸 문질러라. 왜? 혈액을 순환을 시키라는 거라. 마음으로써 대상을 자꾸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는 거라.

 

대부분이 보면 잠을 잘 경우는 대부분이 많이 먹어서 그렇습니다. 많이 먹어서. 잔뜩 먹어놔 놓으니까 이놈의 요거 배에서 요거 소화시킨다고 볼 일 다 보니까 이거 안되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보면 밥 먹고 나서 좌선할 거 같으면 거의 백프로, 여기 있는 여러분들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저 밖에 테라와다 불교권에 있는 스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다 꼬박꼬박합니다. 여기도 목요일날 수행할 때 열한 시 반 되어서 점심 먹으면 한참 먹고 나면 열두 시 반 되거든. 그럼 한시부터 수행한다고 앉아있으면 이렇게 스님이 앉아가 있지만 눈이 뒤에 다 달려있거든. 보면 백프로 다 자. 왜 그러냐면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거라.

먹는 것을 내가 정상적으로 먹는 것에서 다섯 숟갈을 빼라고 얘기합니다. 다섯 숟갈이면 여러분들 식사에서 적어도 삼분의 일에서 반을 빼야 됩니다. 아이고, 이것도 먹은 기가? 할 정도로 될 정도가 사실은 적당하다고 그럽니다.

어쨌든 귓불을 잡아당기고 팔다리를 문질러라. 그게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에게 얘기했던 네 번째입니다.

 

그다음에는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얼굴과 특히 눈에 찬물을 끼얹어라.

도저히 인제는 앉아가지고 안되거든. 일어나가지고 갑작스럽게 차가운 걸 탁 할 것 같으면 정신이 퍼뜩 든다고.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찬물로 눈을 씻어라는 거라. 외부적인 자극을 줘서라도 잠을 몰아내라는 거라. 왜? 잠이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몸이 피곤해가지고 오는 잠이 있고, 또 하나는 습관적으로 경향성을 띠는 잠이 있고.

대부분 보면 여러분들이 피곤해가 있으면 얼마나 피곤하겠노? 그리고 수행하는 목갈라나 존자 같은 경우에는 뭐 그렇게 노동을 해? 뭘 해? 뭐 그렇게 몸이 그렇게 크게 피곤할 일이 없단 말이라. 그럼 대부분이 보면 경향성 습관적인 거라. 안되면 그냥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잘려고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 빨리 일어나라는 거라. 일어나가지고 정신이 번쩍 들게 눈을 갖다가 자꾸 맛사지라도 해주고. 찬물로 맛사지를 해가지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빛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자각을 하라.

밤 같으면 하늘에 별과 달이 총총하게 떠 있을 겁니다. 그걸 자꾸 보라는 거라. 대상을 옮겨주면서. 별도 이쪽저쪽 이쪽저쪽 하면서 그 밝은 것을 자꾸 보면서 눈에 자극을 주라는 거라. 이런 공간일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감았다가 떴다가 할 거 같으면 빛이 갑자기 탁탁탁 들어옵니다. 눈에 지극이 들어온다는 거라. 자극이 들어가면, 어떤 경우든지 자극이 들어가면 잠은 안 옵니다. 그래서 밝은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에 밖에 나갔을 경우에는 별이나 달이나 하는 것을 자꾸 세도록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뭐냐 하면 인제는 도저히 앉아가지고는 안되겠으니까 일어나서 경행을 하라는 거라는 거라.

그런데 경행을 해도 잠이 많이 오면요 걸으면서도 잡니다. 여러분들 군에 있을 때 완전 군장 해가지고 걸으면서 자보기도 아마 했을 거라. 걸으면서도 잔다는 거라. 그러면 어떻게 경행을 하는 게 좋겠어요?

뒤로! 뒤로 경행을 하라. 뒤로 경행을 하라 그럴 거 같으면 거기서 자는 사람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진짜 피곤한 경우라. 그러면 그거는 자야 돼. 뒤로 경행을 하면 뒤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뒤로 경행하면 거의 백프로 다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도 도저히 안된다. 그럼 인제 부처님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때는 그냥 자라. 자더라도 그냥 자지 말고 반드시 천천히 누우면서 눕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 옆구리가 바닥에 닿도록 해서 자라는 거라. 등을 편안하게 할 것 같으면 '내가 조금 있다 일어나야지' 해도 안돼. 잠자는 시간이 아닐 거 같으면 등을 대면 안됩니다. 옆구리가 땅바닥을 향하도록 해서 잠을 자는데 마음속으로 강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삼십 분 후에 아니면 한 시간 후에 반드시 깨어나서 수행하겠다'는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됩니다. 그렇게 먹지 않고 누워버리면 그거는 몇 시간이고 그냥 자버린다는 거라.

이게 부처님이 수다원인 목갈라나 존자에게 잠을 물리치는 방법을 얘기를 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좀 주의해서 좀 봐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 여러분들도 수행할 때 잠이 올 겁니다. 잠이 오면 그 잠을 자꾸 관찰할려고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 그러면 잠 하고 싸울려고들 합니다. 그거는 안됩니다. 대부분 좌선 수행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눈을 감고 있단 말이라.

 

맨 먼저 해야 될 것은 눈을 반드시 떠야됩니다. 눈을 번쩍 빨리 떠야됩니다.

눈을 떠야 만이 처음에 오는 잠을 잠재울 수가 있습니다.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눈은 감은 상태에서 자꾸 그걸 관찰할려고 하다 보면 대상에 빠져버립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잠은 단계적으로 오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그걸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은 똑같이 단계적으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냥 '잠'이라고 뭉뚱그려버리고 머물러 있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잠에게 지게 돼있는 거라. 그러니까 반드시 맨 처음에 해야 될 것은 눈을 반드시 번쩍 떠라.

눈을 뜨면 감았을 때보다 마음이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왜? 부딪치는 대상들이 많으니까. 앞에 보이는 대상들도 있고 또 들어오는 대상들도 있고 대상이 자꾸 많아지는거라. 그러니까 약간의 힘을 얻는다는 거라. 감았을 때보다. 그래서 반드시 처음에 잠이 올 때는 눈을 떠라는 거라.

 

눈을 뜨고, 그다음 해야 될 것은 명칭을 붙이고 끈질기게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눈을 뜨고 나서도 잠이 오면 그 잠이 오는 것들을 낱낱이 자꾸 명칭을 붙이라는 거라. 그냥 '잠이옴' '잠이옴' '잠이옴' 하고 자꾸 명칭을 붙이지 말고,

눈꺼풀이 무거우면 눈꺼풀이 '무거움' '무거움' '무거움' 눈을 뜨고 있어도 무거운 거라. '무거움' '무거움' '무거움' 하면서 계속 끈질기게 관찰하라.

따가우면 '따가움' '따가움' '따가움' 하면서 끈질기게 계속 관찰하라.

아프면 '아픔' '아픔' '아픔' 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송곳으로 파듯이 쑤시면 '쑤심' '쑤심' '쑤심' 하면서 끈질기게 관찰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관찰을 해야 만이 그 잠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해도 안 될 경우는 어떻게 해야 돼요?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떴다가 감았다가 이렇게 자꾸 반복해야 됩니다. 물론 그걸 알아차려야 됩니다. 내가 눈을 감았으면 감았다고 알고 떴으면 떴다고 알고, 그러고 나서 앞에 대상이 보이면 대상이 보인다고 알고, 다시 또 마음을 복부에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고, 그러다가 다시 또 눈을 떴으면 눈을 떴다고 알아차리고, 앞에 보이는 대상이 있으면 보이는 대상이 '보임' '보임' 하면서 알고, 자꾸 마음을 대상을 옮겨주라는 거라.

 

그렇지 않고 잠이 좀 얕게 오는 잠이다 할 것 같으면 아까와 같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 '일어남' '사라짐'만 하지 말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첫 번째',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두 번째',

닿음 포인트를 적어도 네 개 이상을 갈 수 있도록 마음을 활기차게 만들어줘야 됩니다.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꼬리뼈 이런 네 가지에서 적어도 여섯 가지 정도씩은 적어도 닿음 포인트를 자꾸 해줘야 됩니다.

'앉음' '닿음' 이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을 때는 이렇게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렇게 해주기도 하고,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중간에 끊김이나 멈춤이 있을 때 '앉음' '닿음'을 해줍니다.

 

그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지금은 후자에는 여러분이 해당이 안되기 때문에 잠이 올 때는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일어남' 할 동안에 '앉음' 하면서 관찰해주고, '사라짐' 할 동안에 '닿음' 하면서 닿아있는 느낌들을 관찰하고 이렇게 계속 반복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얘기해서 몸이 피곤하지 않는데 잠이 오는 것은 습관적인 겁니다.

또 앉아가지고 수행하는데 자꾸 망상하는 것은 대상에 마음이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대상을 꽉 움켜잡지 못하기 때문에, 어렴풋하게 이렇게 하니까 망상을 피우고 있는 거라. 반드시 이 두 가지는 명심을 해야 됩니다.

 

스님도 수행 초기 때는 이 잠 때문에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했을 거 같애요? 앞에다 뾰족한 걸 여기다 꽂아놔요. 나무 앞에 딱 가가지고. 처음에는 나무에 부딪치는 거라. 나무에다 툭 툭 부딪치고 그렇게 했어. 잠 많이 올 때는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여기가 부어가지고 아파 죽겠는데도 잠이 와요. 뾰족한 걸 갖다가 대놔 놓았습니다. 대놔 놓고 잠이 오면 어떻게 돼요? 잠이 오면 꾸벅하게 되는 거지. 꾸벅하면 어떻게 돼요? 뾰족한 게 그냥 콕 찔러버리는 거라. 정신이 번쩍번쩍 들거든. 그런 마음들을 가지지 않으면 이 잠은 못 물리칩니다. 잠은 습관적이구나 하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마음을 그렇게 먹지 않을 거 같으면 잠을 물리칠 수가 없다는 걸 알고.

 

몸과 마음이 활발한 상태를 방해하는 번뇌 중에는 이 혼침이라는 것과 수면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수행은 자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잠은 잠일 뿐이다 하는 걸 알고, 물론 육체적으로 많이 피곤할 때는 자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억지로 용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후자, 수행을 회피할려는 마음 나태해도 괜찮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앉아 좌선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자기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라. 그럼 내가 자도 다들 눈 감고 있으니까 내가 꾸벅거리는 걸 모르겠지. 나태해져 버리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을 줄기차게 하다가 보면 잠을 자꾸 안 자게 되고 수면시간들도 줄어들게 됩니다. ? 위빳사나 수행은 알아차림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정리해주는 기능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계속하면 수면시간도 줄어들게 되고 번뇌도 그마만큼 적어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자꾸 알아차리는 마음들이, 사띠하는 마음들이 강해지면 잠은 잠인데 대부분 보면 그 잠을 자고 나면 아침에 꿈을 꾸었으면 꿈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라. 그런데 희한하게 자면서 그게 꿈인 걸 갖다가 인식을 해. 자면서 그게 꿈인 걸 인식한다는 거라. 불가능할 거 같죠? 진짜 그렇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그뒤부터는 꿈 자체가 없어. 잠은 그냥 잠일 뿐이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됩니다. 노력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은 앉아서 수행하는 것, 걸어가면서 수행하는 것, 서 있으면서 수행하는 것, 누워서 수행하는 것,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로 나누어서 수행들을 합니다.

서 있을 때 수행은 '서있음'하고 관찰하는데 그 시간은 통상적으로 5분을 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서있음' 하고 관찰하는 것들이 하고 나면 바로 서 있을 때 움직이는 대상은 배이기 때문에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되도록 5분을 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경행을 하다가 이쪽에서 저쪽 가서 저쪽에서 완전히 멈췄다 그러면 '멈춤' 하고 알아차리고 '서있음' 하면서 서 있는 상태 몸의 느낌들을 알아차립니다. '서있음' 하고 나서는 서있음 상태의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나면 강한 느낌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돌아서 다시 경행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서 있는 상태에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관찰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5분 이상은 넘으면 안된다는 거라.

왜? 서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알아차리기가 그마만큼 힘이 들고, 이미 서 있는 상태에서는 그마만큼 용을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심전력해서 그것을 관찰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반대로 누웠을 때는 전심전력 관찰하지 않아도 관찰 잘 됩니다. 그렇죠!

배에다 손 올리고 있을 거 같으면 '일어남' '사라짐' 잘됩니다. 금방 알아차립니다. 대부분 보면 그다지 노력을 안 합니다. 그리해도 잘 관찰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고마 폭 잠에 들어버리는 거라. 실제로 잠잘 시간이 아닌데도 누워서 사띠한다고 하면서 그럼 결과는 뭐냐 하면 잠자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반드시 눕지 않아야 됩니다. 아까도 도저히 몸이 피곤할 거 같으면 옆구리를 대도록 해서 눕도록 해야 됩니다. 옆구리를 대어서 누어야지 잠을 자는 것은, 눕는 거는 피해야 됩니다.

행주좌와로써 알아차림 사띠수행을 하지만 수행을 할 동안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누우면 안됩니다. 그 수행은 피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은 부처님의 수행법 중에서는 수면 중의 수행이나 꿈속에서의 수행은 경전 어디에도 없고, 그런 수행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뜨고 마음의 눈을 뜨고 진리를 발견하고 번뇌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하고.

수행 중에 졸음이 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몸이 피곤했을 때 오는 졸음, 두 번째는 몸이 피곤하지 않는데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라. 행동하고 싶지 않고 또 힘써서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마음. 게으름 피울려는 현상들로 인해서. 대부분 보면 이것들입니다.

만약에 그런 경우들이 많다. 앉으면 무조건 그냥 꾸벅꾸벅 잠이 온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원인이 있습니다. 대부분 반 이상은 많이 먹어서 그럽니다. 먹는 게 많으면 뇌로 가야 할 피가 이 소화시키기 위해 위로 다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졸음이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을 반드시 줄여라.

 

그다음에는 앉아있는 자세가 너무나 편합니다.

저번에도 좌선하는 자세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냥 이렇게 다리를 갖다 붙이는 자세를 스님이 추천을 해주고 그것을 반드시 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한 삼십 분 한 시간 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거든. 굉장히 편해. 자세가 편하니까. 노력할려는 마음이 떨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자세를 바꾸라는 거라.

만약에 습관적으로 자꾸 잔다고 할 것 같으면 자세를 바꾸라는 거라. 이렇게 무릎을 꿇고 뒤에서 이렇게 보면 이 사이에 엉덩이가 들어가도록 하든지, 안 그러면 이렇게 붙이고 나서 이 사이에 엉덩이가 들어가도록 하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좌선을 해보도록 한 번 해보십시오.

수행 초기에 잠이 많이 오면 그 경향성을 빨리 탈피하기 위한 도구로써 자세를 그렇게 잘 취합니다. 그래서 자세를 바꾸어서 수행을 하도록 해보십시오.

 

또 하나는 스님이 추천하고 싶은 거는 뭐냐 하면 주위에 좋은 도반들이 있어야 됩니다. 좋은 도반들이.

끼리끼리 뭉친다고 그러죠? 놀기 좋아하는 놈들은 놀기 좋아하는 놈들끼리 뭉치고 또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앉아서 만날 존다고 할 것 같으면 똑 그런 사람들만 주변에 이렇게 모여 있어. 빨리 좋은 도반들,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들을 자꾸 만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고 그래서 그 사람이 옆에 있을 거 같으면 나도 안 졸아. 나도 안 졸아.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좋은 도반들을 자꾸 주변에 두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추천해주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적절하게 경전을 독송하라 하는 것입니다.

환희심을 일으킬 수 있는 경전 게송들을 반드시 몇 개들은 암송해서 그 내용 의미들을 깊이 있게 파악을 해서 잠이 올 때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꾸 활용을 해야 만이 습관적으로 잠이 오는 것들을 피할 수가 있고 그것을 빨리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라한이 돼야 만이 이 혼침·망상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해도 어쨌든 지금 현재 수행할 동안에는 물리쳐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런 방법들을 자꾸 동원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밑에도 얘기했지만 수행해서 이 윤회를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 이런 수행을 지속해나가면 번뇌에 물들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게 수행의 이익입니다. 그 수행의 이익들을 자꾸 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대상을 빨리 관찰하겠다는 마음, 그런 결정심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야 만이 경향적으로 습관적으로 잠이 오는 졸음들을 물리치고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수행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