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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문답3. 깨달음·열반·해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띠 수행법은 무엇인가? (20090203)

담마마-마까 2020. 11. 29. 18:35

https://youtu.be/0Lju5-VJbkY

* 기초수행 문답 3 (20090203)

Q5. 깨달음·열반·해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Q5. 사띠 수행법은 무엇인가?

 

··· 알아차리는 것이 지속돼 나갈 수가 있습니다. 교재를 보고 또 스님을 보고 또 귀로써 또 듣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오늘은 두 번째, 구체적인 수행법에 대한 첫 단계가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대부분 와서 물어보는 것이 깨달음 아니면 열반·해탈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물어보고, 그 열반에 이르기 위한 오직 하나의 길이 사띠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그 사띠 수행법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험되어지지 않고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해탈이나 깨달음·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의 범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신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간혹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해서 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토론을 해서 사람들을 애를 먹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하고 자기의 견해와 다르다고 해서 기분나빠하기도 하고 또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을려고 하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스스로 불선업을 쌓는 일들을 하게끔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권 내에서는 "아, 니가 깨달았다." 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스승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여러분 중에 어느 한 사람에게 "니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형식이 되느냐면 내가 그 깨달음을 체험하고 이루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깨달음을 이뤘다 하는 걸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됩니다. 내 스스로 내가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표하는 경우가 돼버리게 됩니다.

 

부처님도 닙바나·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말은 일체 금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그걸 이루었다고 해가지고 자격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마음에서 이미지화 하거나 또 그것에 대해서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그것에 도달할려고 마음을 먹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세속적인 망상·개념을 하나 더 만드는 경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목표로 할 경우에, 해탈을 목표로 할 경우에, 열반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그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더러움을 관찰하고 알아차려 나갑니다. 일어나는 탐진·치라고 하는 것을 관찰하고 또 그 일어나는 탐·진·치가 나타나는 원인, 과정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있게끔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날카롭게 알아차려라. 사띠하라" 하고 얘길 합니다. 물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이 사띠 수행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사띠를 잘 할 것 같으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sati)라고 하는 말부터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 말은 '관찰한다. 기억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대상에 보내서 그 대상과 일치되게끔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에 밀착되는 순간은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업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마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작용·의도들을 말합니다. 그 행위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의도에 인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도 이런 의도에 인해서 행위를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을 사띠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사띠 뒤에 일어나는 것을, 이것을 아는 것을 식(識)이라고 하는 '마음이 안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보통 사띠(sati)를 한국말로 풀어 쓸 때 '알아차림'이나 '마음챙김'이나 '마음새김'이나 '주시''관찰주의함집중함' 이런 용어들로써 쓰고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사띠라고 하는 것을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쨌든 이 사띠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려서 안다'고 하는 의미들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주시해서 안다.' 또 '마음챙겨서 안다' 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기억하는 것과 대상에 마음을 밀착시키는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것, 현재 존재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항상 현재에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 마음에 와닿는 것을 계속 기억하고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면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띠를 놓치고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생각을 하거나 또 이렇게 하다 보면 한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도 즉각 현재 일어나는 생각,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계획들을 알아차리면 사띠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사띠라는 것은 과거에 흘러가서도 안되고 미래에 흘러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집중해서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끊임없이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흐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은 한순간도 머무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새로 일어나기 때문에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속성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금 일어나는 것, 지금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저항하지 말고 함께 흘러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대상을 쫒아갈려고 하지 말고, 대상이 마음에 와닿도록 해서 그것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알아차림의 가본적인 훈련방법입니다.

집중력이 점점 더 커지게 되면 모든 현상들이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끔 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지게 됩니다. 끈질기게 사띠를 실천해야 만이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이 됩니다.

조건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배워왔던 칠각지나 오력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이 포함된 37조도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말고,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띠할려고 해야 됩니다.

한 시간 이상씩 매일 경행수행을 실천할려고 하고, 또 한 시간 이상씩 좌선수행을 끊임없이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연속돼야 만이 그런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가끔씩 '아, 부처님을 보고 싶다'든지 아니면 '나라는 것을 체험하고 싶다'든지 '범아일여를 체험하고 싶다'라고 하는 개념을 전제로 해서 수행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개념이고 선입관일 뿐입니다. 하나의 이미지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마음은 정보를 합성하고 나서 인식합니다. 불교 용어에서는 그런 것을 '빠빤짜(papañc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망상·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 빠빤짜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띠를 잘하는 경우입니다.

 

정보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경우를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안·이·비·설·신·의라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우리는 갖추고 있습니다. 눈을 통해 무엇이 들어올 때 우리는 빛을 본다고 우리는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빛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 빛 속에 있는 먼지나 티끌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루빠(rūpa)라고 하는 색(色)일 뿐입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공기는 루빠(rūpa)가 아니기 때문에, 색(色)이 없기 때문에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열면 밖에 있는 색이라고 하는 루빠·물질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았다 라고 순간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 개의 조건, 눈과 물질과 그것을 인식하는 눈의 기능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는 '팟사(phassa)·임펙트(Impact)·접촉했다' 라고 얘기합니다. 접촉이 생기면 분명하게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직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릅니다. 단지 접촉했다는 것만으로서는 ‘사람이다, 꽃이다, 건물이다, 책이다’ 하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그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 '웨다나(vedanā)' 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 생겨남으로 인해서 그제서야 우리는 '안다'라고 하는 기능 '산자나(sañjānā)'라고 하는 기능이 나타나게끔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것을 '내가 알았다'라고 인식을 합니다.

'눈에 색이라고 하는 것이 접촉해서 보인다고 하는 인식이 생겼다'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사실대로 이해하지 않고 '내가 보았다'라고 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나'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어서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내가 본 것은 단지 내가 느낀 것뿐이지 그것이 고정 불변하는 진실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밖의 대상을 보아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아닐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본 대상하고 다른 사람이 본 대상은 각자가 느낀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얘기들을 합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이렇게 반응이나 사고방식이 각각 틀립니다.

 

어쨌든 여섯 개의 감각기관에 외부의 정보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이 접촉하게 되면 거기에서 인식하는 기능이 생겨납니다.

그것으로부터 '느낌'과 '안다'라고 하는 기능이 일어나게끔 되는데 이 '안다'라고 하는 기능이 일어난 다음에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위딱까(vitakka)'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냥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눈을 닫고 있다가 갑자기 탁 열면 눈에 밖에 있는 색·대상이 탁 들어옵니다. 눈에 탁 들어온 것이 만약에 꽃이면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딱까(vitakka)'라고 그럽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기능을 위딱까(vitakka)라고 얘기합니다. 꽃이라고 인식한 순간에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위딱까라고 하는 것이 탁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꽃이라고 인식을 하면서 망상을 그때부터 만들어냅니다. '빠빤짜(papañca)'라고 하는 것. 우리는 위딱까는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 욕구나 성냄 미움 슬픔 후회 이런 감정이 일어나서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빠빤짜' 라고 얘기합니다. 즉 망상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들입니다. 실제로는 없는 것인데 실제화해서 그것을 고정해서 생각하는 것들은 빠빤짜라고 얘기합니다.

 

꽃은 그냥 꽃일 뿐인데 꽃을 보면 그냥 기쁘고 슬프고 또 어떤 때는 질투가 나기도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몇 사람이 똑같은 꽃을 보았지만은 한 사람은 밝고 예쁘다 하고 한 사람은 또 화려하다고 그러고 한 사람은 또 색깔과 모양은 좋은데 꽃잎이 너무 얇다 이렇게 각각의 말들을 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대상을 합성해서 현상화해서 말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각각의 경우가 그래서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대상을 보면 이런 개념이라고 하는 망상이 아주 크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이 빠빤짜의 계략에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라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위딱까는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를 구별해서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은 예쁘다 더럽다 하는 기능들이 망상의 세계 빠빤짜가 나타납니다.

수행을 할 때 꽃을 봤으면 '꽃'이라고 명칭을 붙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위딱까'의 기능에서 '빠빤짜의' 기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딱까에서 바로 빠빤짜로 넘어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상을 볼려고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라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닙빠빤짜(nippapañca)' 그렇게 얘기합니다. '니(ni)'를 부정형으로 붙여서 닙빠빤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망상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해방된 것들 그런 것들을 키우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귀에 소리가 접했을 때 어떤 소리가 들려도 '들림'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멈춰버리라는 거라. 들리는 소리가 '아, 누구의 소리다, 스님의 소리다, 싫은 소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좋다, 싫다'로써 연결돼서 그것에 대해서 불평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안 그러면 '시끄럽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래서 화가 일어나고 이렇게 빠빤짜가 계속 연결이 되게 됩니다. 다만 '들림' '소리'라고 하는 그 사실에서 멈춰버리라는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의 초기에는 명칭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대상이 일어나면 먼저 반드시 명칭을 붙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합성되기 이전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고 해야 만이 그 대상에서 무상·고·무아를 발견할 수가 있게끔 됩니다.

이미 빠빤짜의 개념으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는 그것을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즉시 그 이전의 개념 위딱까로 돌아오도록 명칭을 붙여버리면 됩니다. 그럼 현재의 위딱까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게끔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혹시라도 망상으로 넘어가고 하더라도 즉시 명칭을 붙여서 위딱까의 기능으로 되돌려야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사띠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의 기본 포인트입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음이 빠빤짜로 넘어갔든 넘어가지 않든, 마음이 산란해있든 그렇지 않든 다시 마음을 사띠하는 쪽으로 되돌려놓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산란해버리면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고, 마음이 고요해있으면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빠빤짜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면 마음은 산란해져 버립니다. 판단하고 구별할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은 끊임없이 일을 하게끔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머무를려고 하지도 않고 그 대상들을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하지도 않게끔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이 흔들리고 복잡해지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일어난 것들은 대상에 불과하다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빠빤짜가 일어났든 아니면 다른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다 보면 위딱까 쪽으로 넘어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를 지속할 수 있게끔 됩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얘기하면 사띠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수행을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고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 깨달음에 다가갈려고 끊임없이 노력은 해야 되겠지만 그 깨달음을 개념화시키고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사띠를 하다 보면 깨달음에 이르는 조건들이 무르익고, 깨달음에 이르는 조건들이 나타나게끔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드러나지는 것이지 내가 가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자! 오늘은 사띠 알아차림의 첫째 시간을 얘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