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8. 호흡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을 자주 변경해주는 것은? 편안한 느낌이 들 때는? (20090310)

담마마-마까 2020. 12. 6. 14:44

https://youtu.be/yDpb7qv9FAA

* 기초수행 문답 8 (20090310)

Q11. 호흡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것은?

Q11. 대상을 자주 변경해주는 것은?

Q12. 편안한 느낌이 들 때는?

 

좌선 수행하면서 잘못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수행할 때 호흡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것하고, 그다음에 호흡할 때 배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그게 힘들면 코로 옮겨오고 하는 것들, 또 코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또 배로 옮긴다든지 다른 부분으로 옮긴다든지 하는 이런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되는가 안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겁니다.

 

Q11. 먼저 첫 번째 호흡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것.

지금 어떻게들 하고 있어요, 수행? 좌선 수행할 때? 코끝이든 배든 관찰하는데 어떻게 해요? 숨을 들이쉬고 내시고 하는데 호흡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있습니까? 안 느낍니까? 어디를 관찰하고 있어요? 배에만 집중해서 관찰합니까? 또 다른 사람은? 코끝을 관찰하는 사람은? 코에만 집중하고 있습니까? 그럼 여러분들 중에는 이렇게 따라가는 사람은 없네? 그렇지.

그런데 통상적으로 수행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호흡을 이렇게 하다 보면 호흡이 여기에 머물르지를 못하고, 여기나 여기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 전체적인 게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 호흡의 길이가. 자칫 그렇게 하다 보면 그 호흡의 길이에 따라서 이렇게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거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걸 먼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호흡은 알아차립니까? 호흡이 대상이 될 때가 언제입니까?

몸이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 좌선 수행할 때 일차적인 대상은 호흡이죠! 그런데 가만히 좌선 수행 할 때 호흡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도 대상이 되고, 또 통증들이 일어나면 통증들도 대상이 되고, 그와 마찬가지로 호흡도 하나의 대상이다 하고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일차적인 대상.

그래서 호흡은 몸이 정지해 있을 때 먼저 알아차릴 대상이다. 여러 가지 알아차릴 대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언제 또 알아차립니까? 앉아서 가만히 있을 때 알아차릴 대상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멍해 갖고 이래 있다든지 그럴 때는 마땅한 대상이 없을 때는 호흡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다음에 또 언제 알아차릴 대상이 됩니까? 누워있을 때도 잠자기 전에 하는 게 뭡니까? 호흡을 알아차리죠! 누워있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또 하는 게 뭡니까? 잠잘 때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잠자고 막 일어났을 때 바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은 호흡입니다.

 

크게 보면 호흡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는 것은

좌선하고 있을 때 일차적인 대상으로써의 호흡입니다. 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다른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고,

그다음에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걸 대상으로 해야되지 만은 움직이지 않을 때 가만히 있는데 대상이 없을 때 마땅한 알아차릴 대상이 없을 땐 호흡이 대상이 된다 하고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앉아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누워있을 때도 알아차릴 대상이다.

또 서 있을 때도 서 있는 것이 오래도록 서 있게 될 때는 알아차릴 대상은 호흡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경행할 때 경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멈추고 나서는 '멈춤' 하고 나서 몸이 '서있음' 하면서 서 있는 상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일어나는 느낌들을 천천히 알아차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 알아차릴 대상들이 없게 되었을 때는 서 있을 때도 뭘 합니까? 호흡을 관찰하죠? 물론 서 있을 때 호흡을 오래도록 관찰을 하면 안됩니다. 어쨌든 서 있을 때도 오래도록 좀 서 있을 때는 알아차릴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막 깨어났을 때는 바로 호흡이 여러분들 알아차릴 대상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눠서 호흡이 알아차릴 대상이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인식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놓쳐버립니다. 안 그러면 다른 거 하면서 호흡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한다는 거라. 걸어가면서도 호흡을 알아차릴려고 그러고, 다른 행위하면서도 호흡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거는 절대 안됩니다. 그거는 반드시 호흡이 언제 알아차릴 대상이 되는가 하는 걸 먼저 명심해둬야 됩니다,

 

호흡은 여러분들에게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대상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호흡을 전체 이동 경로를 따라서 코에서 일어나서 가슴이나 배에까지 가는 길을 알아차리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호흡 전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호흡 전체를 알아차리는 것하고, 호흡 전체 코끝으로 들어와서 배가 불러오는 이 전체를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 전체를 알아차리라는 것은 하나의 점에 마음이 집중해 있는 상태에서 그 점에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을 통해서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고 하는 전체를 알아차리라는 것이지, 호흡을 같이 따라가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호흡을 따라갈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이 산란해지지는 않죠. 오히려 인위적으로 내가 호흡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집중력은 굉장히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마음은 안정됩니다.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호흡을 같이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서 특성들을 발견을 못해나간다는 겁니다. 수행은 반드시 두 가집니다. 집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 이 두 가지가 결합을 해야만 되는데,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집중력은 있을지 몰라도 알아차림의 힘들은 현저하게 떨어져 버립니다. 오히려 집중력보다는 집중력은 '카니까사마디'라 해서 찰나적인 집중력만 계속 요구되는데 오히려 깊이 들어가 버리는 거라.

그리고 그 집중력은 단지 알아차림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들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집중력이 알아차림을 끌고 가버리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현상을 발견을 못하는 거라.

호흡의 전체를 알아차려라 하는 것은 그 하나의 점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으면서 거기서 들어오는 숨이 길든지 짧든지 하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 호흡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호흡을 할 때는 어디에 두라고 했습니까? 느낌에다 두라고 했습니다. 느낌에다 두지 않으면 명칭에다 빠지기 쉽다 하는 겁니다.

숨이 닿는 곳 코끝이면 코끝이라고 하는 곳에 숨이 스치면서 닿습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여기 닿는 곳에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집중하는 것은 여기에만 집중을 해야 되는 것이지 따라 가버리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걸 거문고 줄에다 비유를 해놨습니다. 거문고가 있으면 채는 이렇게 움직일지 몰라도 이 몸체는 움직이면 안 되는 거라. 그 선은. 선은 가만히 한 점에 있어야 만이 이걸 움직일 거 같으면 시작과 끝부분을 알아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쭈루루룩 올릴 때마다 소리가 쭈욱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다 파악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이놈의 활도 움직이고 이놈의 선도 같이 움직일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소리는 절대 나지를 않는 거라.

 

반드시 호흡은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간혹 수행을 하다 보면 호흡이 따라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가끔씩 경험을 해보죠?! 그럴 때는 빨리 알아차리고 호흡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내가 집중해야 되는 것은 한 점이다' 하고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특히 그 요즘 이제 절수행법 해가지고 나온 책들이 있습니다. 전에는 절을 할 때 그냥 무작정 하라 그랬거든. 그냥 몇 분 안에 백팔배 아니면 천팔십배 이렇게 그냥 하라고 하면서 석거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면서 염불도 하고 염주도 돌리고 정신없이 하다가 그게 틀렸다는 걸 알거든.

그러니까 요즘은 절수행법을 어떻게 시키느냐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절을 한번 하고 나서 한번 구부리고 나서는 절을 구부리면서 내릴 때 숨을 갖다가 '후욱~' 들이쉬면서 코끝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머리를 해서 정수리로 통해서 이 뒤에 허리쪽으로 해서 단전까지 요렇게 올라오는 요걸 관찰하라고 합니다. '후욱~' 들이쉬면서 몸을 이렇게 구부리고, 그다음에 숨을 '쑤욱~' 내쉬면서 배로부터 해가지고 가슴을 통해서 코로 나오는 걸 관찰하라고 요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혹시 그런 거 가르침 받아본 사람 있어요? 예. 요즘은 그렇게 가르치는 거라. 이것도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라는 거라. 왜 그러냐면 이거는 힌두교적인 방법이지 절대 불교적인 방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호흡을 따라간다는 것은 솔직히 얘기해서 호흡을 따라간다고 해서 이걸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내가 호흡이 이렇게 간다 하고 길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실재적인 호흡은 가슴 이후에 부터는 관찰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겨우 가슴 밑에 횡격막이 움직이면서 횡격막이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이것만 있다는 것뿐인 것이지 사실은 가슴 밑으로는 전부 퍼져버리기 때문에 호흡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머리 위 백회부터 해가지고 등쪽으로 해서 꼬리뼈로 해서 이렇게 단전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단전에서 다시 또 올라와가지고 코로 뱉어낸다. 이 방법으로 한다는 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개념을 만들어서 그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러면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개념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집중력은 생깁니다. 집중력은 생기니까, 집중력이 생기면 좋아지는 것들이 뭐냐 하면 몸이 굉장히 개운해지고 몸이 건강해집니다. 그렇지만 그거 이상을 기대하지는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요즘은 절을 천천히 하면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들이쉬고 나서 가만히 앉아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렇게 몇 번 하다가 일어나면서는 숨을 내쉬면서 또 쭉 관찰하면서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있고. 전에 보다는 많이 향상되기는 했더라도 아직은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왜? 일어날 때는 일어나는 것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지, 숨을 내쉬는 것을 관찰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일어나는 것은 모르게 됩니다. 몸을 구부릴 때도 구부리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절대 구부리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구부릴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또 일어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어쨌든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게끔 되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는 거라. 그거는 극히 힌두교적인 발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육년 수행을 할 때 한쪽 다리를 '깸짱다리(나무자세)'라고 그러나? 한쪽 다리를 허벅지에다 붙이고 이렇게, 지금도 인도의 요기들 그렇게 하죠? 이렇게 합장하고 있으면서 숨을 '후-욱' 들이쉬면서 다리를 아니면 다리를 쭉 펴고 또 숨을 '후-욱' 내쉬면서 다리를 '쭈-욱' 올리고, 아니면 손을 이렇게 '쭈-욱' 올렸다가 '쭈-욱' 내리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거든. 부처님도 그거 했었어요. 안 하신 분이 아니고.

그렇지만 그거 틀렸다는 거라. 그 방법으로 지금 또 한국에서 똑같이 절수행법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거라. 여러분들은 꼭 마찬가집니다. 좌선 수행을 할 때 호흡의 길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우를 저지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절대 호흡에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추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수행은 처음 시작할 때 대부분이 호흡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 87년도에 갔을 때 가르친 게 뭐냐 하면 딱 이것만 얘기해줬어요. 뭐 다른 얘기도 안 해. 앉아서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 이것만, 불러오고 꺼지는 이것만 알아차려라 하고 딱 이 얘기만 해줘. 그러니까 어떻게 수행하는 지도 사실은 몰라. 어떻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건지를 사실은 잘 몰랐거든. 그래서 굉장히 헤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호흡이 들이쉬고 하는 길을 따라가게 돼버리는 거라. 또 내쉬는 길을 갖다가 따라가게 되고. 이거 하다가 보니까 굉장히 집중이 잘되는 거라. 집중도 잘되고 그동안 태국에서 뭐 음식도 안 맞고 기후도 안 맞고 해가지고 몸이 많이 축났었는데 몸도 많이 건강해지고, 그래서 '아, 이게 바른 갑다.'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한참 하다 보니까 그 이상은 발전이 안되는 거라. 분명하게 집중은 굉장히 잘되고 집중이 잘돼서 신통적인 부분들도 있고는 하는데 그거 이상은 안돼.

 

이게 차이가 뭐냐 하면 태국 같은 경우에는 태국 사람들에게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하라 할 것 같으면 진짜 그것만 해요. 배 여기만 딱 관찰해가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만 관찰을 하는데, 나는 한국 사람이다 보니까 한국적인 방식으로 이해를 하거든. '일어남' '사라짐'을 하라고 하니까 당연히 코끝 숨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를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부터 해가지고 숨이 요렇게 들어가는 거니까 그걸 따라가는 거라. 얼마나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개념에 빠져있느냐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멋모르게 그렇게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은 처음 시작할 때 하나의 대상을 선정하게 됩니다. 선정하기에 가장 수월한 것이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먼저 대상으로 해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호흡을 대상으로 하다 보면 각각의 대상들이 나타나죠! 그러면 더 많은 대상들, 서서히 더 많은 대상들로 알아차림을 넓혀나갑니다. 그렇게 되어져야지 그렇게 넓혀지지 않을 거 같으면 하나의 대상에 내가 붙잡혀 있는 경우가 돼버립니다. 그거는 수행이 아닙니다.

물론 수행이지만 위빳사나 수행은 아닙니다.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것,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눈에서 일어나는 것, 귀에서, 코에서, 혀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것,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먼저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요놈의 숨을 따라 가다 보면 다른 것은 전혀 감지를 못하는 거라. 왜? 인위적으로 내가 대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숨이라는 것은 일정 부분 이상은 내가 관찰을 못해. 안 내려가지고 안 올라와지거든. 그런데 그걸 억지로 따라가다 보면 당연히 인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인위적으로 마음이 붙잡혀 있으면 실재하는 것들은 당연히 못 보게 되는 거라.

 

어쨌든 수행을 시작하면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호흡에 마음을 자꾸 유지시킬려고 합니다. 호흡에 마음을 두면 이로운 점이 뭐냐 하면 집중이 됩니다. 집중력이 계발됩니다. 그 호흡이라고 하는 대상에 마음이 머무르게 됩니다. 머무르게 될 때까지는 좋아. 그런데 머무르게 되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해져야 되는데 고요해지지를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에 머무르기만 해서 내가 대상을 붙잡고 있는 형태입니다.

 

고요해지면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게 뭡니까? 대상의 변화라는 거라.

대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그 대상을 붙잡고 있는 거라.

여러분들 좌선 수행 중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아니면 코끝에서 '들이쉼, 내쉼' 하면서 관찰하는데, 한 시간 내내 그것만 하고 있어요.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그거 이상 아는 사람 손들어 봐. 솔직히. 아무도 없어요? 그래 안 그래? 그렇게 되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꼭 숨을 따라가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코끝에서부터 해가지고 배까지 또 배에서 다시 또 코끝까지 이것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호흡의 길이, 요 한 대상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내가 호흡의 시작과 끝을 인위적으로 맞추고 있는 거라. 맞추고 있으니까 꼭 마찬가지로 호흡의 길이를 따라가는 현상과 같이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호흡이 오토매틱화 돼버리는 거라. 시작하자마자 오토매틱되어서 끝날 때까지 오토매틱이 돼버리는 거라. 그거는 안되거든.

그 방법을 하나 얘기를 해줄게요.

 

호흡을 처음 시작할 때 첫 단계는 뭡니까? 일단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걸 알기는 알아야 될 거 아니라.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먼저 자각을 해야 됩니다. 먼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자각을 해야 됩니다. 코끝을 하는 사람은 코끝에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도록 해야 됩니다. 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배가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에 따라서 아주 미세하지만, 특히 나이가 들면 더 힘들어져. 그래서 나이가 들기 전에 빨리 수행하라는 거라.

어쨌든 배가 가만히 보면 변화하고 있거든. 약간이라도 배가 불러와지고 꺼지고 있다는 말이라. 숨을 쉬고 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거라. 왜그러냐면 횡격막이 수축하고 팽창하기 때문에. 횡격막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지만은 실제적으로 밖에서 표피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있단 말이라.

 

그러면 이걸 먼저 알아야 돼. 호흡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호흡을 하는 수행에서 첫단계라는 거라. 그걸 먼저 자각하라.

그걸 자각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두 단계로 나뉩니다.

숨을 들이쉬었으면 들이쉬었다고 알아야 되고, 내쉬었으면 내쉬었다고 알아야 됩니다. 코끝을 통해서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구나' 알고 내쉴 때 '내쉬는구나' 알고,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 것을 알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면 사라지는 것을 알고. 그게 인제 두 번째 단계입니다. 대부분 여기서 그냥 끝나버립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갖다가 '들숨' '날숨' 한다든지 '일어남' '사라짐' 한다든지 여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다음 단계에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달아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만이 요놈의 대상에 자꾸 마음을 붙일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는 거라. 달아나는 것을 모를 것 같으면 안 붙여.

달아난다는 것은 뭐냐 하면 호흡 자체에서 무의미하게 '일어남, 사라짐' '들숨, 날숨'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생각을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아픈 통증이 있다든지 이럴 때 달아난다고 하는 거라.

어쨌든 달아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요놈의 대상이 아니라 이 대상에다가 그대로 계속 마음을 집중하고 알아차려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이렇게 하나, 둘, 셋 세 단계로 먼저 나누어야 됩니다. 달아난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다음부터는 조금 더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다음 단계의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면 보통 책에서는 수식관을 하라 그럽니다. 숨을 들이쉴 때 '하나 둘 셋 넷 다섯' 내 쉴 때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렇게 수를 세기도 합니다. 천태지관법이나 천태소의지관법 같은 경우에는 그런 방법을 동원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 대상에다가 마음을 붙잡아두고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주기 위해서 '일어남' '사라짐'을 세분화해라 이럽니다. 들이쉴 때 '들이쉼' 하고 한 번만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들이쉼' '들이쉼' '들이쉼' '들이쉼' 하면서 연속적으로 알아차려 나가고. 내쉴 때도 '내쉼' '내쉼' '내쉼' '내쉼' 하면서 알아차리고, 배가 불러올 때도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하면서 연속적으로 알아차리고, 내쉴 때도 '사라짐' '사라짐' '사라짐' '사라짐' 하면서 연속적으로 알아차리고,

그래서 그 단계 단계를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는데, 그때 명칭을 붙입니다. 보통 명칭을 붙일 때 '일어남' '사라짐' '들이쉼' '내쉼' 하고 명칭을 붙입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숨을 들이쉬고 있고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단계에서 하나씩 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인제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고,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동안에 마음이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조금 더 세분화시켜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들이쉴 때 적어도 다섯 단계로 명칭을 분할 해줘라. 명칭을 분할 해주면 따라오게 되는 효과가 뭐냐 하면 적어도 마음이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한번 지금 여러분들이 해보십시오. 대부분 배를 예를 들면 '일-어-남'(천천히) 하던 것을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세 번 한다든지 세 번 해도 통상적으로 해보면 마음이 벗어납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다섯 번 정도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겁니다.

 

그런데 다섯 번이 넘어 만약에 열 번을 했다 할 거 같으면 너무 산만해져 가지고 대상 자체를 관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어차피 명칭이기 때문에 이것이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다섯 번을 붙이든 세 번을 붙이든 이것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의 느낌들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칭이 너무 반복적으로 많아도 문제가 돼버립니다. 산란해지고 산만해지기 때문에. 작아버리면 마음이 벗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통상적으로 세 번에서 네 번 다섯 번이 적당할 겁니다. 다섯 번 정도를 명칭을 붙이도록 해야 됩니다. 이때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명칭을 붙이더라도 명칭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때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의 세 가지 기본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천천히 하라'는 내가 뭐라고 했어요? 빤냣띠(paññatti) 라고 했죠! 명칭이라고 그랬죠! 실제적인 수행은 두 번째 세 번째부터 하라고 했죠! 두 번째 세 번째가 뭡니까? '일어나는 느낌을 생중계하라'

'일어나는 느낌을' 두 번째, '생중계하라'가 세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실제적인 수행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명칭을 붙이더라도 명칭을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절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거라. 명칭은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되도록 붙잡아두는 거라. 그거는 천천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붙잡아두기 위한 도구인 것이지 그것에서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느낌이라. 그래서 느낌을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경행을 할 때도 '발을 들어올림' 하고 알아차리다가 그것을 들어올리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 세분화시키라는 거라.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 올리면서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 명칭에 붙잡혀 있어버릴 것 같으면 그와 마찬가지로 '들어올림' 하면서 한번 명칭에 붙잡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 하더라도 들어 올릴 때마다의 느낌, 처음 들어 올렸을 때의 느낌하고, 두 번째 들어 올렸을 때의 느낌하고, 세 번째 들어 올렸을 때의 느낌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그 느낌들의 변화를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호흡도 꼭 마찬가집니다.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할 때 첫 번째 '일어남'과 두 번째 '일어남'과 세 번째 '일어남'과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일어남' 까지 느낌의 변화는 각각 틀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설혹 마음이 벗어날 때 아픔이 통증이 있다든지 생각이 일어났다든지 해서 벗어날 때 명칭도 즉각적으로 멈추게 된다는 거라. 즉각적으로 멈춰야 만이 그 새로운 대상 생각이든지 아픔이든지 여기에다가 바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려 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데도 일어난지도 모르고 나는 여기 호흡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는 거라. 그냥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명칭을 붙여주고 있다는 거라. 생각을 이렇게 하면서도 명칭에 끄달려가지고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는 거라.

 

마음을 명칭이 아니라 실제 경험되는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실재하는 느낌은 부드럽거나 스치거나 미는 느낌,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느낌, 그런 느낌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느낌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명칭은 마음을 대상에 붙잡아두기 위한 도구이다 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음을 붙일 때 그런 느낌들을 미세하게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당연히 명칭을 떼어버려야 됩니다. 명칭을 떼어버려야 만이 마음을 전심전력해서 그 대상에 밀착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명칭을 놓아버리고 호흡 그 자체와 함께 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호흡의 변화나 느낌을 보기 위해서 전심전력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면 명칭이 떨어지고 나서 그 호흡의 변화, 느낌들을 알아차리면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 하면 내가 느낀 것들 경험된 것들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사라져야 만이 다른 느낌들이 일어나는 거라. 느낌들은 똑같은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느낌은 변화가 있는데 그 느낌의 변화는 하나가 사라져야 다른 새로운 느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는 거라. 그걸 해야 만이 수행을 하는 것이 순조로워진다는 거라.

호흡수행은 이와 같이 진행을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일어나' '사라짐' '일어나' '사라짐' 할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십 년이 가도 꼭 마찬가지 상태가 돼버립니다.

 

조금 더 내가 노력하는 힘들을 강화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집중은 돼있는데 알아차리는 힘이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럴려고 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힘은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겁니다. 집중은 순간에 안 일어나도 됩니다. 꾸준하게 그냥 하나의 대상에 붙잡혀 있어버리면 집중은 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알아차림이 약하기 때문에 자꾸 붙잡히는 것에서만 끝나버리는 것이지, 순간순간으로 알아차리고 알지를 못하는 거라.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명칭을 잘게 쪼개라는 거라. 잘게 쪼개라 인위적으로라도. 어차피 명칭은 인위적인 개념이라는 거라. 그거를 잘게 쪼개라는 거라. 잘게 쪼개서 마음을 어쨌든 그 대상 전체에다가 처음엔 다 잡을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Q11. 그다음에 호흡이 인위적일 때 마음을 배에 관찰하는 대상에서 코로 옮기기도 하고, 아니면 코에서 아니면 배를 관찰하기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스님도 처음엔 그랬어요. 뭔가 해볼라고 하는데 안되거든 마음대로.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코끝을 관찰하는 데는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조금 더 예리합니다. 조금 더 알아차림이 적어도 그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 호흡이 느려지고 안정되니까 미세해지거든. 미세해지면 내쉬는 숨보다도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기가 더 수월해지는 거라.

 

그러니까 들이쉴 때는 요놈의 코끝에 했다가 그다음에 내쉴 때는 코끝에 하는 게 아니고 배가 불러올 때보다는 꺼질 때가 더 알아차리기가 수월하니까 배에다가 하고. 이러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이 왔다리갔다리 한단 말이라. 그러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수행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라. 실제로.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까 그거는 아니더라는 거라. 어차피 그것도 그냥 인위적으로 '들이쉼' '내쉼' 하는 것이나 인위적으로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거하고 별반 틀린 거 없더라는 거라. 그래서 내가 오토매틱화 되어 있을 때 호흡을 알아차릴 대상을 변경해주는 것, 이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변경해주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변경해주는 것이 없을 때는 또 어디로 가느냐는 거라. 실재적인 것을 알아차리면 좋은데, 대부분이 보면 또 만들어냅니다. 또 인위적인 걸 만들어내는 거라. 또 인위적인 걸 만들어내고 없으면 생각으로라도 만들어내는 거라.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코끝이면 코끝, 배면 배 일정하게 계속 한 곳을 관찰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내가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인위적이 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자신의 호흡의 길이를 정확하게 파악을 해나가야 됩니다.

 

일 분에 통상적으로 몇 번 호흡을 해나갑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한 번으로 쳤을 때? 선등님 같은 경우에는 열여섯 번 정도 됩니다. 나이가 어리면 한 열여덟 번 정도, 여러분들 저기 산향님도 인제 그럴 때가 넘었다. 왜 늙은 거 같애? 어쨌든 열일곱 번, 열여섯 번 그 정도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었을 때를 얘기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통상적으로 호흡하는 것이 그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한 3.3초에 한 번 '일어남' '사라짐'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게 한번 사이클을 이루어야 돼. 그걸 자기가 먼저 파악을 해야 됩니다.

 

통상적으로 성냥개비를 가지고 있다가 우리는 그렇게 했거든. 요즘은 성냥개비 없어도 더 좋은 것들이 있잖아. 타임워치나 누르는 것들 있잖아. 그런 것들 가지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한번 톡 누르고,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한번 톡 누르고, 이렇게 해서 일 분이 지났을 때 몇 번 호흡을 하는가를 먼저 파악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내가 통상적으로 열여섯 번, 열일곱 번, 열여덟 번, 그 정도 선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두 번 정도 적게 했다, 열네 번 정도 했다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인위적으로 하는 겁니다. 또 더 많을 경우에도 인위적인 거라.

 

대부분 더 많아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왜? 인위적일 때는 대부분이 호흡이 느려집니다. 호흡이 많이 거칠어질 것 같으면 빨라지는데 인위적이 될 때는 거친데도 내가 인위적으로 그 거친 것들을 제어하기 때문에 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상기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호흡을 정확하게 파악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파악이 되고 나서는 아, 이 정도에서 명칭을 붙이면 적당하겠다 하는 걸 먼저 감지 해야됩니다. 그러고 나서 명칭을 자꾸 붙이도록 해야 됩니다. 명칭도 어차피 인위적인 것들인데, 인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들을 갖다가 붙잡아가서는 안되는 거라. 자연적인 것에다가 인위적인 명칭을 갖다 붙일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거꾸로 돼서는 절대 수행을 못합니다.

 

명칭에다가 마음을 두면 사마디(samādhi)는 이를 수는 있습니다. 사마디는 이를 수 있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나마(nāma)는 나마로써 루빠(rūpa)는 루빠로써 인식하지 못하는 거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을 구분을 못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알아야 되는 거고, 정신적인 거는 정신적인 것으로 알아야 됩니다.

명칭을 붙이고 마음을 그 대상에 내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고, 호흡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인데 이 물질적인 것에다가 명칭이라고 하는 것을 딱 붙일 거 같으면 인위적으로 붙이기 때문에 절대 이것을 구분을 못해버리는 거라.

나마와 루빠에 대한 구분이 안 될 거 같으면 수행은 진전을 가져오지 못하는 거라. 그 나마의 특성, 루빠의 특성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것들은 만약에 지금 현재 인위적으로 계속적으로 되고 있다? 그러고 호흡의 길이를 내가 정확하게 모르겠다? 차라리 아예 붙이지마라! 명칭을 붙이지 마라! 단 일초동안에라도 그 실재적인 것들을 갖다가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걸 갖다가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라는 거라.

차라리 인위적으로 해서 계속 한 시간 동안 해도 전혀 수행의 진전이 없다? 그냥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 차라리 아예 명칭 자체를 붙이지마라는 거라. 그것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라는 거라.

 

수행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은

첫 번째는 고요하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대상에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들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알아차려야 만이 있는 대상 자체의 실재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결국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것은 두 번째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명칭은 대상에 집중하기 위한 수단인데 이놈의 명칭 때문에 실재하는 것들을 알지 못하고 파악을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명칭 붙이지 마라 라는 거라.

 

수행을 하다 보면 호흡에서 피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상에 가라앉아버리는 것. 그리고 대상을 생각하는 것!

가라앉아 버릴 경우에는 호흡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대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대상을, 호흡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명칭 자체라고 하는 개념에 붙잡혀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호흡을 해도 그냥 명칭만 가지고 놀다가 끝나버리는 거라. 호흡에서 반드시 피해야 될 건, 이 가라앉는 것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될 경우에는 아예 인위적인 부분을 떼어내 버리고 느낌을 생중계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만약에 인위적으로 될 때 대상을 옮기게 되면 내가 지금 호흡이 잘 안되고 있는 원인이 뭔가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왜 호흡이 거칠어졌는지, 아니면 명칭으로 인해서 그 실재하는 특성들을 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호흡 자체가 싫증이 나서 재미가 없어서 그러는지, 하는 것들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그것도 대상입니다. 명칭 자체도 대상이고. 호흡이 산란해지고 거칠어진 것도 대상이고 싫증이 난 것도 대상인데, 그 대상 자체를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옮겨가버리니까 다른 대상으로.

 

마음이 지금 현재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의 실재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왜?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정신적인 대상입니다. 그 정신적인 대상이 실재하는 것,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라. 아는 것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고 하는 것만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의 실재하는 성품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대상을 옮기면 안된다는 거라. 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왜 내가 이렇게 계속 인위적으로 되는가 하는 것을 살피고 알 필요성이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대상도 꼭 마찬가지가 돼버린다는 거라. 옮긴 대상도 꼭 마찬가지로 인위적이 돼버릴 수가 있고, 또 그게 안되면 또 다른 대상도 인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한번 정하고 나면은 옮기지 말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호흡 관찰하는 데서 일어나는 두 가지 잘못되는 부분 첫 번째가 뭡니까?

호흡의 전체 길이를 따라가지 마라. 코에서부터 해서 배까지 쭉 따라가고 또 따라나오고 하는 것은 일절 하지마라.

두 번째 수행이 잘 안된다 해서 인위적이라 해서 그 대상을 놓아버리고, 호흡이 일어나는 다른 곳에다가 집중할려고 하지마라. 대상을 인위적으로 해서도 안되지만 또 마음을 인위적으로 옮겨서도 안됩니다.

 

그다음 의문점 봅시다.

Q12. 호흡을 명칭 붙여서 알아차림 하다가 보면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답은 뭡니까?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는 대로 즉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명칭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엇 때문에 명칭을 붙입니까?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 집중을 계속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명칭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거 없이도 집중하게 되고 계속 유지시켜 준다고 할 것 같으면 명칭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인위적으로라도 명칭이라는 빤냣띠를 이용해가지고 붙여주는 겁니다. 알아차리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그것도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해보십시오. 편안한 느낌이 든다면 '편안함' '편안함' '편안함' 하면서 알아차리도록 해보십시오.

 

그런데 아까 명칭을 붙일 때 어떻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가급적 잘라서 붙이라고 그랬죠! 여러 개로 잘라서,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달아나버리게 됩니다. 아니면 명칭에 내가 붙잡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편안함' '편안함' '편안함' 하고 빨리 붙인다고 하더라도 편안함이라고 하는 명칭에다가 마음을 두면 안된다고 그랬죠? 실재 편안한 느낌을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명칭만을 따라잡아가고 있든지, 아니면 실재하는 특성들을 알아차려나가고 있든지, 처음에는 사마디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누구든지 다 사마타로 시작을 해서 위빳사나 전환을 합니다. 실제 수행이 그렇게 됩니다.

어쨌든 위빳사나로 전환하지 않고 사마타 쪽으로만 쭉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일단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요해지니까 어떻게 돼요? 생각도 느려지고 또 주위가 명확하지 않게 됩니다, 희미하게 되어나가 집니다.

대부분 여기서 사람들이 자칫 혼란을 일으킵니다. 수행하다 뭔 소리가 들리면 굉장히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수행 안 할 때는 그 소리가 똑같은 그냥 소리로 들리는데 수행할 땐 어떻게 돼요? 그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립니다. 실재적인 것들을 하다가 보면 이때까지 생겨났던 개념적인 부분들이 더 크게 다가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돼요? '아이고야' 하고 깜짝 놀래니까 실재적인 걸 하다가 고마 요 개념지은 거에 또 달아나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보면 틀림없이 편안한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요해지게 되게 돼있습니다. 집중이 당연히 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근심·걱정들도 별로 없고 생각들도 굉장히 느려집니다. 느려지다 보면 뭐 예민하게 쭉 흘러가는 느낌들이 그대로 알아차려지기도 합니다. 그거는 수행 잘되고 있는 겁니다.

 

잘되고 있는데 요놈의 문제가 뭐냐 하면 두려워하는 거라. '아니고 내가 이러다가 어찌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주변적인 요소에 의해서 강하게 영향을 받으니까 그 주변적인 것들에 끄달려들어간다는 거라. 소리도 개념입니다. 실재하는 소리를 그대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대로 그냥 소리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고요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되는데 개념으로 딱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그 소리를. 보는 것도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거는 안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태가 좋아질 때는 편안한 느낌이 들면 편안한 느낌도 개념으로 받아들일 거 같으면 그것은 소리 들릴 때와 마찬가지로 끝나버립니다. 수행이.

편안한 느낌이 들면 편안한 느낌도 대상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편안한 느낌이 들면 당연히 편안한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편안한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다른 대상이 일어났을 때 전에 해왔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게끔 자꾸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대부분은 수행을 이렇게 하고 있다가 다른 대상이 일어나든지 다른 대상을 만나면 그냥 전에 방식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개념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절대 그래선 안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좌선 수행하다가 일어날 때도 조건이 바뀐다 해서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그냥 그대로 수행을 하라는 거라.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렇게 수행을 하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개념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됩니다.

 

수행은 근본적으로는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억지로 붙잡아야 돼. 그런데 수행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붙잡지 않더라도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지는 거라. 그래야 수행이 무르익어집니다.

수행이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수행을 자꾸 억지로라도 해야 돼. 억지로라도 여기 와서 수행을 하고 억지로라도 집에서도 수행의 마음을 잊지 않고 수행을 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하나 바뀌고 다음 행위가 바뀌고,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바뀔 때마다 억지로라도 자꾸 그렇게 붙잡아두라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수행이 되어져 나갑니다. 그걸 반드시 명심을 해주어야 됩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것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을 통제할려고도 하지 말고 조절할려고도 하면 안됩니다.

마음이 편안한 기분이 든다? 이걸 통제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편안한 기분을 오래도록 유지할려고 합니다. 절대 안됩니다.

싫은 느낌이 든다? 통제하고 조절할려고 하면 빨리 던져버릴려고 합니다.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실재하는 것은, 조건지워진 것들은 항상 새로운 것들입니다. 항상 새롭습니다. 즐거운 것들도 항상 새로운 것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즐거운 기분이 쭈욱 1초 2초 이렇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들입니다. 전깃불이 항상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는 꺼져버립니다. 즐거운 느낌도 그와 같이 자꾸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느낌에 대한 부분은,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은 다음 시간에 더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명심해야 될 것은 그런 편안한 기분들 편안한 느낌들이 일어나지면 조건지워진 모든 것들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하고 먼저 판단을 해야 됩니다. 전기의 불꽃과 같은, 램프의 불꽃과 같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윗짱 나와라 상카라 딥바 잘라 사뭅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는 대로 즉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안정이 되어서 수행이 되어져 나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좌선 수행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