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문답9. 사띠하다보면 편안한 기분이 들 때? 수행을 하는데 즐거운 상태가 되지 않을 때? 감정이 무덤덤해질 때? 수행 중에 괴로움이 있을 때? (20090407)

담마마-마까 2020. 12. 8. 13:03

https://youtu.be/8254aEQi9YM

* 기초수행 문답 9 (20090407)

Q12. 호흡을 명칭 붙여서 사띠하다가 보면 마음의 상태가 좋아져서 편안한 기분이 느껴지는데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Q13. 수행을 하다 보면 즐겁다고들 얘길 하는데 나는 즐거운 상태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Q14. 전에는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되어 즐거운 느낌이 있었는데, 수행을 시작한 후에는 좀 더 평온한 마음이 되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요?

Q15. 수행 중에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 느낌에 대한 관찰이 주가 됩니다. 거기에 대한 의문점들, 거기에 대한 답변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대부분이 모양이나 형태, 개념들을 중심으로 해서 합니다.

그래서 배를 관찰할 때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명칭을 붙여서, 개념을 붙여서 관찰을 하게 되고, 또 관찰할 때 실재적인 배를 관찰할 때도 배의 모양,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배의 모양, 아니면 배가 변하는 형태들을 먼저 관찰이 되어나가 집니다.

 

그러다가 보면 수행이 무르익어가고 집중이 조금 되다 보면 그러한 형태나 모양들도 변해가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올 때 어떤 느낌들, 단단한 느낌이라든지 팽창하는 느낌이라든지 움직이는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관찰이 되어나가집니다.

그런 것들이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어지니까 조금 더 꿰뚫어 보듯이 집중을 하게끔 됩니다. 대부분 수행을 할 때는 그런 형태로 돼나갑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경행을 할 때도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개념을 붙여서 관찰을 하게 되고 그래서 발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형태들을 먼저 관찰을 해 나가집니다.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일치돼 나가지고 나면 그 뒤에부터는 어느 발을 들어 올릴 때 가벼운 느낌이 증가하는 거라든지 움직이는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관찰을 해나가지고 조금 더 섬세해지고 그래서 실재적인 것이 분명하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수행이 지속되다 보면 이렇게 '빤냣띠'라고 하는 개념·모양·형태라고 하는 것들이 '빠라맛타'라고 하는 실재적인 특성들로 바뀌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실재적인 특성이 현저하게 알아차려지면 개념적인 것들, 모양이나 형태들은 숨어버립니다. 그래서 명칭 붙이는 것도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고 배를 관찰할 때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올 때의 각각의 느낌들, 배가 꺼질 때의 각각의 느낌들을 알아차려지게끔 됩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개념이나 형태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타 쪽에 가깝게 됩니다. 그런데 고요한 특성들을 알아차려져 나갈 것 같으면 위빳사나 쪽에 가깝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사마타의 이익과 또 위빳사나의 이익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만이 아, 내가 지금 해야 되는 게 뭔가 하는 것들을 파악을 해나갑니다.

개념이나 형태에 변하지 않는 대상에다가 몰입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 또 거기서 이루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것들을 파악을 하게 되고, 또한 실재적인 특성들이 변하는 속성이라든지 실재적인 특성들의 이익들을 알고 또 거기서 도달해나가는 것들을 알 것 같으면 담마를 좀 더 빨리 볼 수 있게끔 됩니다. 내가 지금 수행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돼나갑니다.

이게 인제 일반적으로 수행을 해나갈 때 보통 진행되는 상황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부분은 다들 이해를 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하는데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수행이 잘 될 때도 있고 못될 때도 있습니다.

잘 될 때는 왜 잘되고 못될 때는 왜 못 되느냐면 대부분이 보면 통제하려고 하고 조절하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은 잘 안 돼나갑니다. 그 부분을 놓아버리고 나면 통제하지도 않고 조절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려나가고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수행이 더 잘 돼간다고 하는 것을 아마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수행은 집착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망가져버립니다. 물질적인 것도 오래 머무를 수가 없고 마음도 대상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데 그걸 붙잡고 아니면 들어오는 걸 거부할려고 밀어내다가 보면 인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수행은 절대 인위적으로 해가지고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은 인위적으로 관찰을 해야되지만 대상을 관찰하는 마음도 인위적으로 돼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든 대상이든 마음이든 자연스러워야 된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워야 만이 수행은 무르익어 간다 하는 것, 이 부분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꼭 마찬가지로 수행을 해나갈 때 느낌을 관찰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고통스런 느낌도 있고 또 즐거운 느낌들도 있고 무덤덤한 느낌들도 있는데,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이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해야지 거부할려고 또 집착할려고 하면 그 느낌을 명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감각적인 접촉이 일어나고 나서 첫 번째로 일어나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완성하겠다 아니면 마음을 명확하게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이 느낌에 있습니다. 이 느낌은 좀 다행스러운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이 먼저 앞섭니까? 느낌이 먼저 앞섭니까? 느낌이 먼저 앞서죠! 만약에 생각이 앞선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우리는 이걸 수행대상으로 할 수가 없을 거라. 느낌이 일어나서 생각이 일어난다는 거라.

또 생각은 뭡니까? 좋은 생각도 있고 나쁜 생각들도 있고 그럽니다. 이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 거 같으면 생각도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거고, 생각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끔 됩니다. 참으로 느낌이 생각보다 앞선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즐거움이든지 어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들도 만족하고 불만족하는 것으로 바뀌기 전에 느낌만 그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만 관찰할 것 같으면 적어도 과하게 만족하고 과하게 불만족하는 상태로써 넘어가지질 않게끔 만들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 예를 들어서 고통스러운 느낌이 앞서고 나서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그걸 거부할려다 보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고 싫은 생각들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사띠 함으로 인해서 분노도 일어나지 않고 싫은 느낌들도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분노나 고통스런 생각 싫은 생각으로 인해서 말, 거친 행동들 또 억제하지 못하는 말들, 이런 것들을 방어해 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생각보다도 느낌이 앞선다는 것은 천만다행인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주로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이번 시간에는 한번 알아보도록 합시다.

 

Q12. 호흡을 명칭 붙여서 사띠하다가 보면 마음의 상태가 좋아져서 편안한 기분이 느껴지는데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편안한 기분, 사띠 하다가 보면 마음이 좀 편안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혹시 여러분들 느껴봤는지 모르지만 생각이 느려집니다.

그거 혹시 느껴봤어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전에는 생각이 필름 돌아가듯이 빨리빨리 착 돌아가는 게 이게 굉장히 느려집니다. 그러다가는 생각 자체가 멈춰버려집니다. 어쨌든 멈추진 않더라도 생각도 느려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노력의 힘들이 떨어지니까 주위를 관찰하는 것이 희미해져 버린다는 거라. 어떨 때는 비몽사몽 하게 되기도 하고, 그걸 가지고 경계가 나타나서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하기도 하고 하는데, 그런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고. 어떤 경우는 생각이 느려지고 나서 멈추고 나서는 또 주위가 아주 명쾌하고 밝은 상태가 됩니다.

 

어쨌든 두 가지 경우들이 있는데 두 가지 경우 공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은 뭡니까? 마음이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으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집중되다 보니까 당연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라.

편안해지다 보니까 전에 같으면 오만 생각들이 일어날 때는 한 시간 앉아있으면 좀이 쑤시는데 인제는 수행시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그리 긴 줄을 못 느끼게 되는 거라. 수행이 잘되든 안되든. 그건 둘째치고. 어쨌든 고요하게 앉아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경행을 해도 편안하게 이렇게 경행을 해나가게 되고. 물론 그것이 완전하게 지금 내가 사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도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집중만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로 바뀌어 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좌선 한 시간 끝나고 나서 경행하라고 종 땡 치면 경행 하기 싫어지는 거라. '아, 난 조금 더 앉아있고 싶은데' 경행하다 경행이 잘되고 고요해지고 집중이 잘되면 '아, 나 조금만 더 경행하고 싶은데' 하는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수행은 아까 뭐라 그랬어요? 취하거나 거부하면 안된다고 그랬죠? 그런데 이미 편안한 마음이 일어나고, 여기에도 얘기했지만 마음의 상태가 좋아져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대부분 보면 요걸 취할려고 한다는 거라. 편안한 느낌, 즐거운 느낌에 머물려는 욕망이 일어나집니다.

 

그 밑에 답은 느낀 감정을 즉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어떻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까? 거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이라고 알 때까지 알아차려라.

 

언젠가 스님이 얘기를 했죠? 편안한 느낌, 즐거운 느낌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 편안한 느낌이 있으면 그 편안한 느낌을 뚜렷한 것을 꿰뚫어 보듯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 편안한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요한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도 꿰뚫어 보듯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느낌, 또 그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도 일어났다가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그 느낌에 머물르게 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봐버린다는 거라.

느낌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그 느낌을 만들어나갑니다. 편안한 느낌으로 인해서 편안한 마음을 항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견해가 생길 뿐 아니라 또한 무상하지 않고 그냥 항상한다고 생각을 견해를 가지게끔 가지게 된다는 거라.

 

편안한 느낌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라고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괴로운 느낌인 걸 알아차릴려면 변하지 않으면 괴로운 걸 알 수가 없습니다. 편안한 느낌도 편안한 느낌을 아는 마음도 화살같이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걸 괴로운 느낌 괴로운 마음으로써 알게끔 된다는 거라.

그럴려면 편안한 느낌 편안한 마음이 됐을 때, 고요한 기분이 됐을 때는 그것을 좀 더 강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강하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느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느낌이 너무나 빨리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 이것이 고통스럽구나 하는 사실을 아는 거라. 그래서 고통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을, 즐거운 느낌이 고통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그렇게 알아차려야 만이 그 편안한 느낌이나 고요한 마음에 안주할려는 욕망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편안한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 같으면 그때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자극이 들어갈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큰 자극으로 들어옵니다. 고요할 때 한번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면. 누가 소리를 평상시로 소리지르는데도 크게 들립니다. 크게 들리니까 이걸 내가 마음을 관찰하지도 못하고 그 느낌을 관찰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그 대상에 머물러 있다 보니까 이 대상에 대한 반응도 빠르는 거라. 그러니까 누가 한소리 했는데도 금방 그냥 짜증이 벌떡 일어나는 거라. 전에 보다도 오히려 평상시보다도 더 빨리 반응을 해버리는 거라. 외부적인 자극하고 접촉이 되면 몸 전체가 반응을 해버린다는 거라. 몸 전체가 놀라서 그냥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다는 거라.

 

이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이나 그런 고요한 상태 마음의 상태가 됐을 때는 반드시 그걸 조금 더 강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조건지워진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 어떤 조건지워진 것들도 항상 모든 것은 새로운 것들이라는 거라.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 촛불 켜놓은 것들 이것이 항상 켜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거라. 내 몸이 있다는 견해, 내가 항상하다는 견해 쪽으로 빠져버린다는 거라.

 

고요한 느낌, 또 그 느낌은 일어나는 즉시 조금 더 강하게 강한 노력으로 인해서 즉각즉각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안정되게끔 됩니다. 그냥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만 즐겨가지고는 절대 수행을 못합니다.

수행은 내가 처음에는 하는 것이지만은 수행을 하다 보면 수행이 되어져 나가집니다. 수행이 되어져 나가야지 만이 내가 순일하게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그다음 밑에 한번 보겠습니다.

Q13. 수행을 하다 보면 즐겁다고들 얘길하는데 나는 즐거운 마음 상태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수행하는데 즐거운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 봐봐. 솔직하게, 아무도 없어? 괴로워? 그러면 괴롭다는 사람 손들어 봐봐. 수행하는 게. 괴로운 사람도 아무도 없고 그럼 뭔데? 그냥 무덤덤해? 뭐 아무것도 모르겠어? (수행자 대답)

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돼? 즐거울 때는 어떻게 해? (수행자 대답)

어떻게 그럼 가늠해? (수행자 대답)

잘 되는구나 해가지고 기분 좋다고 이러고 있지? (수행자 대답)

그러면 아이고 뭐 수행해서 별 진척이 없고 그러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럼 또 어떻게 해? 그러고 나서는 수행 안 해버려? (수행자 대답)

 

수행은 하다가 보면 즐겁게 되기도 하고, 괴롭게 되기도 합니다. 그거는 뭐 틀림없는 사실이라.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 그런데 그럴 때 어쨌든 이런 마음도 있고 저런 마음도 있을 때 어쨌든 수행을 해나가야 되니까,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느냐는 거라. 이 질문 자체는.

답을 뭐라고 적어 놨어요?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언제나 현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현재에 머물면 낙담하거나 망상하지 않게 된다.

즐거움에 빠지지도 않고 ‘아이고, 수행 왜 이리 안되나’ 하지도 않고, 그런 마음 상태가 돼야 만이 마음이 항상 깨어있게 됩니다. 마음이 항상 밝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느낌들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변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화살과 같이 변한다는 거라. 그 느낌을 아는 마음도 화살과 같이 빠르게 변하는 거라. 그런데 그 느낌에 머물러버릴 거 같으면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항상 현재에 머물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변하는 현상들을 즉각즉각 알 수 있도록 현재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항상 밝게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해줘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서 감정들이 일어나서 불안정한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그 부분을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세속적인 즐거움도 문제지만은 수행에서 일어나는 즐거움도 문제가 됩니다.

그것도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변하는 속성으로써 자꾸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만들지 않도록 자꾸 마음을 활기 있게끔 만들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차라리 만약에 수행이 잘 안된다 할 것 같으면, 수행하는 평상시 때 마음을 좀 밝고 활기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좀 많이 움직여야죠!

많이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이다가 그것 가지고도 안되겠다 싶으면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세속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요즘 봄철이니까 꽃구경 갑니다. 꽃구경 갔다 오고 나면 그날은 기분 좋아가지고 입이 이만큼 찢어져 있습니다. 한 며칠은 가겠지? 그렇죠! 왜 그렇게 됩니까? 마음이 활기 있으니까, 밝고 활기 있으니까 그렇게 돼나가는 거라.

수행도 마찬가지라. 수행도 그렇게 마음에 활기가 있지 않으면 수행 지속해나가지 못하는 거라. 어떤 경우든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느낌에 묻히지 말고 거부할려고도 하지말고 마음은 항상 활기가 있게끔 만들어나가주어야 됩니다.

 

Q14 : 전에는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되어 즐거운 느낌이 있었는데, 수행을 시작한 후에는 좀 더 평온한 마음이 되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요?

 

전에는 즐거운 것들 아름다운 것들이 있으면 즐거운 느낌들이 있었는데, 수행을 하다 보면 무덤덤하게 느껴지고 감정이 없어지는 거라. 이렇게 꽃이 피어있어도. 꽃구경 가면 어떻게 합니까? "아, 예쁘다" 하고 이리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거 봐도 지 생각에 묻혀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예쁘다 소리도 안 하고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

 

수행을 하다 보면 이런 형태들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꽃을 보더라도 무덤덤한 느낌으로 바뀌는 거라. 좋은 경우 이렇게 되면 좋은데 마음이 침체돼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바뀌었다 할 것 같으면 문제가 되는 거라.

 

예쁜 거는 예쁜 거거든. 마음으로 이걸 예쁜 걸 알아차렸으면 "그것도 예쁜 거네."

예쁜 거는 예쁜 걸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예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려는 마음이 먼저 딱 앞서는 거라. 그러니까 예쁜 걸 보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예쁘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알면 좋은데, 그러지 않고 '아, 저거는 무상한 것이고 저거는 곧 더러운 것 추한 것으로 바뀐다'고 개념으로만 파악을 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예쁜 걸 보더라도 예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평온해져서 감정의 물결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바르게 알아차릴 경우에는 무상하게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경우 하고, 그렇지 않고 개념적으로 무상하게 알아차려서 그걸 받아들이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거하고 그렇지 않고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거하고 이렇게 차이가 나버리게 됩니다.

 

반드시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는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한 상태로써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예쁜 거 보면 '아, 예쁘다' 하는 것이 낫지, 뭐 그냥 아닌 것처럼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그 사실에 대해서 적어도 조금 더 사띠하고 관찰할려는 마음이 일어나지는 것이지 내가 인위적으로 바꾸어놔 놓을려고 할 것 같으면 이거는 수행할려는 마음 자체를 아예 차단해버리게 되는 거라. 절대 그렇게는 하면 안됩니다.

 

맨날 스님이 아, 참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 모든 걸 보고 아, 참 무상하다. 지는 무상한 걸 갖다가 거기서 느끼지도 못하면서. 그러고만 있을 거 같으면 자칫 잘못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안 그러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결과들을 낳게 돼버립니다. 반드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아, 예쁘다' 하고 알았으면 그냥 '예쁘다' 하는 걸 알아. 그게 오히려 훨씬 낫다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힘을 얻습니다.

힘을 얻어야 만이 오래도록 사띠를 이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평온함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평온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내가 무슨 특별한 것을 얻은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머물러 가지고는 절대 특별한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머릿속에다가 기억을 해두도록 해야됩니다.

 

대부분 보면 그럴 때는 중립적인 느낌에 있기 때문에 그 중립적인 느낌으로 인해서 머무를 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집니다.

중립적인 느낌도 그 특성은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중립적인 느낌 무덤덤한 느낌으로 바뀔 때는, 쉽게 말하면 꽃을 보고도 예쁘다는 생각도 안들고 더러운 걸 봐도 더럽다고 느껴지지도 않고, 명확하게 수행으로써 이루어지는게 아닐 거 같으면 중립적인 느낌이 일어났다고 봐야 됩니다.

 

중립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는 그 중립적인 느낌을 즉각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 느낌의 특성, 고유한 특성, 개별적인 특성을 자꾸 알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고유한 특성은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이라.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되는 거라. 실제적인 대상 자체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도 알아야 되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알아야 되는 것이고. 이런 고유한 특성과 그 개별적인 특성들을 자꾸 알려고, 그 특성들을 알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고요한 느낌 무덤덤한 느낌에 머무르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 느낌에 머무르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조차도 아, 사라져버린다고 알 때까지 그걸 더욱더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괴로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보다도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날 때는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느낌 자체도 변하는 것 뿐아니라 마음조차도 반드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야 만이 이 무덤덤한 느낌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혹시 수행하다가 몸이 굉장히 차가워진 것을 느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한 여름에 수행을 하고 있는데 몸에서 물방울, 아주 차가운 물방울이 스르르륵 맺히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무덤덤한 느낌을 완전하게 파악을 하면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조사를 해봤는지 모르겠는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걸 느낍니다. 맥박도 느려지고 체온도 떨어지고 또 호흡도 느려지는 걸 감지를 합니다. 점점 더. 점점 더 그게 느려지고 떨어지는 걸 감지를 합니다. 그게 뭐냐면 특성들 그 일어나는 무덤덤한 느낌들의 특성들을 완전하게 파악했을 때 일어나지는 겁니다.

 

파악은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몸의 현상에 대해서 아, 이것이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끔 되고, 그 몸의 현상에 대한 것을 관찰하는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분명하게 보게 됐을 때, 그 특성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됐을 때 마음뿐 아니라 몸에서도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몸이 그렇게 맥박이 떨어지고 호흡도 느려지고 체온도 저하된다고 해가지고 마음조차도 활기가 없습니까? 오히려 마음은 더 활발하게 움직여집니다.

이렇게 바뀌는 게 수행의 기본적인 형태란 말입니다. 그러면 꽃을 봐도 즐거운 느낌이 안 일어나고 무덤덤한 느낌으로 그냥 계속 지속해나가고 있다? 그러면 이거는 뭔가 잘못돼고 있다는 거라. 그빨리 그것을 파악을 해야 만이 이 무덤덤한 느낌에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여기에 적어놓기는 '차라리 그렇게 무덤덤한 느낌에 묻혀있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알아라' 그게 오히려 더 훨씬 낫다는 거라. 그게 더 수행에는 이익이 있고 나중에는 도움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라.

 

Q15. 수행 중에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몸에서도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고 마음에서도 고통스러운 걸 느끼고, 이럴 때 우짜면 좋노? 빨리 그냥 고통스러우니까 다리 그냥 촥 펴버렸으면 좋겠는데 스님은 펴지도 못하게 하고 한 시간 동안 어쨌든 소리도 못 지르게 하고 꼼짝도 못하게 하고 죽을 판이라. 그러니까 몸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니까 관찰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엉뚱한 딴 생각만 하고 있는 거라. 이거하고는 별개의 것들을.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라.

 

고통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있고, 또 정신적인 고통이 있고, 또 그 고통이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욕망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육체적인 고통스러운 느낌이라 해서 마음조차도 고통스러워진다 해서 아, 이거 고통스러운 거 안 일어났으면 하고 그런 욕심을 내지만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이걸 벗어나려고 하는 데서 일어나는 고통이 또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또 네 번째는 뭐냐 하면 알아차리지 못해서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받는 고통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그렇지않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려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망으로부터 일어나는 고통이든 그걸 명확하게 알아차리면 거기서 끝나버리고 더 이상 받지를 않는데 어리석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라. 알아차리지 못해서 받는 고통들이 있다는 말이라.

고통은 보통 네 가지로 통상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어쩌지를 못합니다.

그거는 뭐 이 몸을 받았으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안 늙을 수 없고, 내가 안 죽을 수 없듯이 내가 이 몸이 고통스럽지 않게끔 될 수는 없다는 거라.

누가 칼로 여기를 이렇게 뚝 찔러버렸다, 그러면 육체적으로 고통은 있게 돼있습니다. 그 고통이 없게끔 할 수는 없다는 거라.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우니까 어떻게 돼요? 찢어진 데는 피가 나게끔 됩니다. 그 피 안 나게끔 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해요? 그 육체적인 고통을 정신적인 고통으로 안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요? 상처가 났으면 의사들은 상처를 꿰매는 겁니다. 꿰매야 만이 피가 안 나는 거라. 정신적인 고통으로 넘기지 않을 수는 있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세 번째 이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고통은 더 이상 받지를 않는다는 거라.

 

고통이 일어났으면 고통도 항상하지 않고, 고통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로써 즉각 알아차리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으로써 바뀌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 정신적인 괴로움은 일어나지지 않는다는 거라. 고통이라는 느낌을 무상한 것으로써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무상한 것으로 알아차리면 적어도 그 무상한 걸 내가 원하지는 않는 겁니다. 갈망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통 괴로움은 없다는 거라.

 

수행에서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앉아서 좌선하고 있습니다.

지금 벌써 한 시간 정도 지났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면 수행을 많이 안 해본 사람은 다리가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들 경험을 해봤지만 이 고통스러운 느낌은 어떻게 와집니까? 처음엔 막 쥐가 나죠! 쥐가 나다가 보면 조금 더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불덩이 같이 뜨겁다는 거라. 이 불덩이 같이 뜨겁다가도 그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감각이 없어지죠! 그런데 여기 감각이 없어지고 나서 그다음에는 다시 또 고통스러운 느낌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게끔 됩니까? 또 일어나지죠!

 

일어나지는데 조금 더 예민하게 보는 사람이면 똑같은 자리에서 일어나집니까?

절대 똑같은 자리에서 안 일어납니다. 옮겨가집니다. 1mm라도 옮겨가지게 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고통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불덩이 같이 바뀌었다가도 요놈이 그다음에는 반드시 옮겨갑니다.

뜨거움의 특성은 움직임의 특성과 맞물리게끔 됩니다.

산불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지가 불이 그 자리에서 그냥 계속 타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건 그냥 꺼져버리게 됩니다. 산불이 계속 나는 거는 옮겨가기 때문에 계속 산불이 일어나지는 겁니다.

 

뜨거움이 일어나는 것은 뜨거움이 지속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옮겨가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는 거라. 옮겨가지 않을 거 같으면 이것은 뜨거움이 지속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옮겨가다가 보면 그때사 인제 몸에 감각이 없어집니다. 불덩이 같고 뜨겁다가 이것이 옮겨가는 사실만 알 거 같으면 적어도 감각이 없는 상태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거라.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됐다고 하더라도 감각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지 않고 다시 또 일어난단 말이라. 그래서 또 뜨겁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난단 말이라. 그때 되면 그전에 고통스러운 느낌 하고는 다르죠? 강도가 훨씬 크죠! 커지는 것이 그때는 도저히 안 움직이면 안 될 정도가 됩니다. 이미 뜨거운 정도가 아니고 이건 타고 있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때는 이 느낌이 바뀐 형태를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대상을 보면 대상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이 대상이 이미 시각으로 들어와버릴 것 같으면 선등님이다, 누구다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밀어내버리는 것으로 이미 바뀌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뜨거움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런 걸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상태로써 변화해가는 걸 분명하게 관찰할 것 같으면 혹시 여러분들 그럴 수 있는 경우들도 있는데, 아주 시원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것이. 왜 시원해지겠습니까? 불이 이렇게 확 타고 있는데 그걸 물로 갖다가 확 끼얹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연기가 확 오르면서 불이 확 꺼져버리죠! 그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런 몸에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시원해진다는 거라. 어떨 때는 뒤통수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확 지나가듯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현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관찰을 하다 보면 그렇게 바뀝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조금 더 예리하게 관찰을 해야 됩니다.

고통은 어떻게 와집니까? 그냥 한꺼번에 '촥-' 와지는 경우 봤어요? 절대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파도처럼 와집니다. 파도처럼. '확' '확' '확' 와지지 이게 마냥 '쉬이이이이익' 와지는 법은 없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파도처럼 와집니다.

잠이 많이 올 때 혹시 경험을 해본 사람 있는지 모르지만, 잠이 올 때 눈꺼풀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눈꺼풀이 '떼 떼 떼 떼' 합니다. 이게 왜 '떼 떼 떼 떼' 해지게 됩니까? 파도처럼 와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떼 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쭈욱 밀어 올 거 같으면. 반드시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와집니다.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것은 뭡니까?

밀려오는 것이 끝나는 것이 있고 다음 것이 밀려오는 것이 있다는 거라.

생멸이 반드시 있게끔 돼있다는 거라. 고통은 반드시 생멸을 거듭하게끔 된다는 거라. 고통을 관찰할 때는 생멸을,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고 관찰을 자꾸 해야되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이 실재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관찰할 수가 있지, 그렇게 해야 만이 이 실재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정신적인 괴로움 없이 아픔을 경험할 수가 있는 거라. 경험을 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눈꺼풀을 봤을 때 '떼 떼 떼 떼' 하는 것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거라. 그렇게 경험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생멸하는 것을 모르는 거라. 다리에 저리고 아픔이 오고 하더라도 그 아픔은 반드시 파도처럼 온다는 사실을 명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반드시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자꾸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기쁨이 일어나더라도 꼭 마찬가집니다. 기쁨도 그와 같이 파도처럼 와지게끔 됩니다.

한 번에 확-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번에 확- 오는 경우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내가 마음으로써 괴롭다, 마음으로써 즐겁다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머무르게 되기 때문에 한꺼번에 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

괴로운 느낌도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도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으로 안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생멸의 현상으로 자꾸 관찰해야 되듯이, 즐거운 느낌도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받지 않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무상한 것으로 생멸의 현상으로써 받아들여야만 된다는 거라.

 

느낌이 일어날 때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됩니다.

놓아둔 상태에서 관찰을 해야 이걸 명확하고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지, 이걸 꿰뚫듯이 관찰한다? 아니면 내 것처럼 붙잡을려고 한다? 이래서는 절대 그 느낌을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사실을 알고, 파도처럼 밀려오더라도 그것은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 가라앉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 중에 몸에서 아픔이 있든지 싫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싫다'라고 생각하지 말아라는 거라. '싫다'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이미 덩어리로써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거부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말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 그냥 하나의 현상이라고 받아들이라는 거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통증은 그렇게 와지는 거라, 고통은. 하나의 현상으로 자꾸 받아들여야 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알 수가 있지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으면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돼버린다는 거라.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 고통하고 싸울려고 하면 안된다는 거라.

정신적으로 발전할 거 같으면 싸우게 된다는 거라. 하나의 현상으로 볼 거 같으면 싸우지 않고 그걸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되는 거라. 싸우게 되면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돼요? 자세 바꿔야 돼. 다리 펴야 돼. 싸우지 않을 거 같으면 자세를 펼 일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써 계속해서 관찰을 해야 됩니다.

 

'삿타까 삼빠자나(satthaka sampajāna)' 라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아는 것에는 이익이 있어야지 이익이 없으면 바꿔라' 하고 얘기합니다.

앉아서 고통을 관찰하고 있는데 아무리 관찰해도 이놈의 고통을 관찰할 수가 없다, 파도처럼 오는 거를 알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리를 펴야 되겠죠? 펴면 안됩니다! 그러면 져버립니다!

 

어떤 경우든지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고통을 계속해서 관찰함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고통을 극복해나갈 때 그 이익을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관찰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이익이 없다 해가지고 그 다리를 펴라는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는 통증에서 그럴 때가 될 때까지 그래도 관찰해나가야 됩니다. 지금 현재 수행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자세를 바꾸게 되면 관찰하는 것까지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고통을 그냥 싸우지 않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데까지 그래도 관찰을 해나가게 되면 적어도 하나의 이익은 있습니다. 집중할려고도 하고, 또 사띠가 지속하진 않더라도 사띠를 유지해 나갈려고 하고, 또 인내할려고 하는 마음들도 생겨나고, 그래서 이 위빳사나 지혜가, 이렇게 해보니까 잠시라도 이것이 고통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그런 지혜라도 일어나지는데,

요놈을 탁 바꿔버리면 앞에 것이 다 없어져버리는 거라. 사띠도 꺼져버리고, 집중력도 해이해져 버리고, 인내하는 것들도 없어져버리고,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는 것들도 안 일어난다는 거라. 바꾸지 말아라는 거라.

 

경전에 보면 '번뇌가 제거될 때까지 자세를 풀지 않고 수행하겠다는 자! 그런 자만이 꼬살라 숲을 행복하게 하는 자다.'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숲이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숲이 좋아한다는 거는 뭡니까? 그걸 자세를 풀지 않고 내가 이 번뇌·망상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절대 자세 풀지 않고 수행해나가다 보면 그런 상쾌하고 고요한 맛을 느끼기 때문에 숲이 좋아한다는 겁니다.

통상적으로 그걸 힌두교에서 말하는 고통, 고통이라고 얘길합니다. 그런데 그거하고는 다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라 해서 고통도 떠나고 즐거움도 떠나라 해서 중도를 가라고 얘길했다 해가지고, 지금 고통이 있다고 해서 그걸 벗어나버려서 다리를 펴라고 얘기를 한 게 아니라는 거라.

 

다른 경전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죽을 만큼 치명적인 암에 걸렸다. 그게 어떤 암이든. 그런 암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도 참아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다리? 결코 병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는다 해가지고 다리 병신 안된다는 건 너무나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치명적으로 죽을병에 걸려도 그걸 참아내라고 하는데, 이거 견뎌내고 참지 못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중도를 벗어난 것이다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단지 고통도 하나의 현상으로써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현상은 반드시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게 고통의 성품입니다. 그런 성품으로 자꾸 받아들이도록 노력을 하다 보면, 그리하다 보면 그렇게 알아차리기도 할 것이고, 어떨 때는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알아차릴 때는 적어도 그런 이익은 있다는 거라.

사마디도 성숙 돼 나가는 거고, 사띠도 더 증장되어 나가는 거고,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도 일어나지는 거고 하는 거라. 그 이익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왜 관찰하라고 하겠어? 계속 지속적으로.

 

매순간 변하는 고통의 정도를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파도처럼 와지게 되면, 여러분들도 파도를 봐서 알겠지만 그 파도는 동일하게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번은 요만큼 쳤으면 또 그다음번에 요만큼 치고 또 그다음엔 이렇게 치고 다 다르게 돼있습니다. 고통의 정도도 반드시 다르게끔 돼있습니다. 고통이 파도처럼 오면 그 고통의 정도도 반드시 다르게 돼 있다는 거라. 그 고통의 정도를 파악만 할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이미 고통은 나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발전하지를 않는 거라.

 

고통을 파악을 할 때는,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파도처럼 파악을 하고, 그 파도처럼 파악을 하는 것도 각각이 다르다는 사실로써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러니까 통증의 정도를 즉각즉각 알아차려 나가서 아, 이번에는 요마만큼 통증이 왔구나. 그다음 통증 오는 것은 요마만큼 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통증이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보면 통증도 한곳에 지속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변화됩니다. 위치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끔 된다는 거라.

통증은 반드시 위치를 그렇게 바꿉니다.

바꾸는 사실을 알게끔 되면 그때부턴 수월해지는 거라.

알아차리면 요놈이 통증이 멈춰! 멈추면 아, 그걸 관찰하는 마음도 멈춘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는 거라.

그럼 인제는 이 고통은 고통스런 느낌일 뿐인 것이지 그 이상 발전하지 않는 거라. 그렇게 될 때까지 자꾸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 통증은 영원하지 않고 그 통증을 관찰하는 마음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끔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어집니다. 재미있어지면, 수행에서 재미있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활기가 있어집니다. 그러면 그 고통도 점점 더 빨라집니다. 관찰하는 마음도 점점 더 빨라집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고통이 내가 도저히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화살같이 빠르다는 사실을. 그래서 '고통은 화살과 같이 보라'하고 얘기합니다.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통제할 수도 없는 무아(無我)인 것으로 안다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괴로운 느낌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것들, 성내는 것들,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됐으니까 16번부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느낌에 대한 것은 앞으로 지속해서 계속해 나갈 부분들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은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