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문답 법문

수행관련 문답 『 붓다의 길따라 선원교재 』Q1~Q10

담마마-마까 2021. 12. 7. 17:10

* 수행관련 문답 『 붓다의 길따라 선원교재 』

 

1. 수행에 대해

 

Q1 : 수행을 하다가 장기간 수행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까?

 

A1 : 수행하여 일시적으로 마음의 성장을 느껴도 긴 기간 집중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고 번뇌에 물들어 생활하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일단 수행을 시작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경지까지 수행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제일 단계인 예류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이루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하게 수행에서 경험한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게 번뇌에 물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더러워진 상태가 되어도 그것을 빨리 깨달아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현세에서 깨달을 수 없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오는 세상에서 수행을 시작하면 잊은 경험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세에서 깨닫지 않아도 좋다,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시험해 보고 싶지만 그럴 짬도 없다,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사악한 견해, 사악한 사유가 됩니다.

 

Q2 : 수행하는 것보다는 불교에 관한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책의 감명 깊은 내용으로 자신이 조금씩 바뀐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행 이외에 지식적으로 세상의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습니까?

 

A2 : 불교에 관한 책은 사람의 삶의 방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목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면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한 것이지요. 수행을 하지 않아도 붓다가 말씀하신 진리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싶고, 납득하고 싶다는 강한 신념으로 경전 등을 공부하든지, 진리를 아는 사람과 대화하여 의문 나거나 납득 가지 않은 것을 납득 갈 때까지 질문하면 예류과에 도달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쉬운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도의 지적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으로는 진리에 눈뜨기 어렵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더러워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부처님은 사람의 이해는 역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상인 개념을 공부한다 해도 자신의 지식을 진리와 비교하면 역상인 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은 바른 것이기에 전심전력하면 지식적인 역상 사고가 사라져 진리의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알면 누구라도 깨닫는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지구가 둥글다」라고 하는 것 같은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불만족이며, 실체가 없는 현상인 것이다. 순간순간 인연에 의해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혹은 「사는 것은 근심이다. 갈애에 의해 근심이 생긴다. 갈애를 끊는 것으로 근심이 없어진다. 그 방법은 팔정도이다.」 라고 하는 것도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을 살려 이 진리를 이해하면 예류과의 경지에 반드시 도달합니다.

 

Q3 : 재가 생활은 욕구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그러나 욕구가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또 괴롭습니다. 재가 생활을 하면서 깨달음을 목표로 하려면 어떻게 잘 균형을 취해 가야 할까요?

 

A3 : 욕구가 있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은 욕구의 노예입니다.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갖고 싶으니까」라고 하는 변명으로 어떤 나쁜 일이라도 합니다. 깨닫지 않는 한 욕구도 사라져 주지 않습니다.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에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다른 사람도 도와가면서 살 수 있는 좋은 습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이라면 얼마가 있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되어 있고 위험합니다. 욕구의 노예입니다. 생활이 성립될 정도로 수입이 있어 여분이 된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사용한다고 하는 목적으로 산다면 욕구의 노예는 아니고, 욕구를 잘 사용해 사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어도 「아만심이 높아져서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 이루어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라는 진리를 뇌리에 항상 기억하며 생활하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Q4 :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A4 : 아무것에도 지고 싶지 않다. 승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십시오.

 

 

2. 깨달음의 구체적인 수행법

 

Q5 : 깨달음이 무엇이고, 그것에 이르기 위한 사띠 수행법은 무엇인가요?

 

A5 : 수행자가 경험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깨달음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더러워진 번뇌를 없애기 위해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시야에 넣어두지 않아도 sati의 실천을 계속하면 마음이 성장해 가는 것은 확실합니다.

 

「해탈, 깨달음」이란 언어의 범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개념을 뛰어넘는 원이기에 「깨달음이란 이러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거나 이미지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사고의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이미지를 만들거나 하는 깨달음은 망상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더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더러움을 관찰합니다.

일어나는 탐진치를 관찰하고, 탐진치가 나타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층 더 날카롭게 관찰(sati)합니다.

집중력이 충분히 강화되면 모든 것이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져 가는 것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추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이 사띠의 실천을 계속합니다.

 

그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7각지, 5력 등입니다.

 

매일 1시간 이상 경행(걷기 수행)을 실천하십시오.

좌선 수행도 1시간 정도 할 수 있도록 실천하십시오.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 「불이를 체험하고 싶다」, 「범아일여를 체험하고 싶다」 등의 개념을 전제로 해서 무엇인가를 집중하여 생각하면 이윽고 환각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열 명이 있으면 그 형태가 10 종류가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 선입관, 이미지 등의 덩어리입니다. 거기에 또 공부하거나 해서 새로운 개념, 이미지 등을 늘려 갑니다. 사띠는 이러한 선입관을 없애는 과정입니다.

마음은 정보를 합성하고 나서 인식합니다. (불교 용어로 빠빤짜라고 말합니다.) 합성하기 이전 정보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으면, 무상이나 괴로움, 무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로의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이미지를 만들지 말고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즉, 알기 쉽게 설명하면 사띠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사띠로부터 시작됩니다.

 

Q6 : 한국 선방에서는 수행할 때 반드시 결가부좌 하도록 강조하는데, 테라와다에서는 위빳사나 수행할 때 특별히 앉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A6 : 「깨달음을 이룬 모든 사람들이 특정한 가부좌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면 앉는 방법은 몹시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앉아 수행하는 것은 불교에 한정되지 않는 인도 제종교의 습관이었습니다.

수행을 실천하는 방법을 말할 때 부처님은 「먼저 가부좌를 하고...」라고 말씀하셨지만, 「제법이 무상이다」라고 하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집중력과 지혜이지 앉는 방법은 아니라고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테라와다에서 앉는 방법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가부좌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단지 다리를 꼬고 싶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 짤 수도 없고 억지로 짜도 아파서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가부좌하지 않았다고 유죄판결 내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가부좌를 하고 수행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한쪽 다리는 엉덩이 가까이 있는 안쪽 허벅지에 붙이고, 다른 쪽 다리는 한쪽 다리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앞쪽 바닥에 나란히 두고 앉는 방법인 쉬운 자세를 권합니다. 이 자세가 오랜 기간 동안 불편함 없이 앉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위해서 너무 편해서도 안 되지만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 수행의 지속을 이룰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Q7 : 좌선할 때 눈은 뜨는지, 감는지, 또는 반만 감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것이 대승이나 초기 경전에 있습니까?

 

A7 : 「반드시 눈을 뜨라」고 초기경전에 쓰여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눈을 감아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의 더러움을 없앨 수 있고, 진리를 만날 수 있고, 악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고, 해탈에 능히 이를 수 있다면 「눈을 떠도 되고 감아도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해탈할 수 없다는 것 등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번뇌를 없애서 해탈을 체험하고 혜안을 얻는 길 등도 부처님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은 많은 분들도 같은 결과를 체험해서 「이 길이 효과적이다」라고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실천의 과정에서 마음이 약한 상태, 더러움의 상태로부터 선한 상태, 청정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 길은 팔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유감스럽게 팔정도에는 눈을 뜨고 감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테라와다의 수행 스승들은 일반적으로 조용하게 좌선할 때는 「눈을 살포시 감아라」(떠도 상관없지만 닫는 것이 편합니다). 그리고 관념적인 사고를 멈추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마음의 진행과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부처님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승불교인 조동종의 도오겐 선사의 좌선의식 중에는 「눈은 항상 뜨라」고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고, 대승경전의 쭐라빤다까 경에는 「... 열심히 정좌해서 차수하고 눈을 감아라....」고 엇갈리게 쓰여 있지만, 대승 경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스님은 테라와다 불교를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 지식, 경험 이외의 것에 대해 추측으로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봅니다.

 

Q8 : 수면 중의 수행에 대해 경전에서 언급한 것은 없습니까? <졸음을 물리치는방법>

 

A8 : 수면 중의 수행이라는 개념은 경전에 전혀 없습니다. 밤에 잠잘 동안에도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는 시간마저 아껴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숫따니빠-따(경집) 331번 게송에 이와 같이 말하여 있습니다. 「일어나서 앉아라. 잠을 자서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괴로워하고 고통받고 있는 자가 어찌 잘 수 있겠는가?」

원문에 āturānaṃ hi kā niddā (아-뚜라-낭 히 까- 닛다-) 「환자인데 자고 있을 틈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빨리 노력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번뇌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자는 것과 같으니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고 수행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졸음이 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는 상응부경전 1권 198페이지에 쓰여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몸과 마음의 활발한 상태를 방해하는 번뇌 중에서 혼침과 수면이 있습니다.

마음을 증장시키는 것은 자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면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부처님은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 정리 작업도 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하면 당연히 수면 시간 줄어듭니다. 육체의 피로를 취하기 위한 시간만 잠을 자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불면증」이 아닙니다. 수행을 진지하게 하면 짧은 시간이라도 완벽하게 숙면합니다. 수행자는 잠에서 이따금 꿈을 꾸어도 고민하지 않고 마음이 번뇌에 더러워지지 않고 끝내야 합니다. 확고하게 수행하는 마음을 지닌 채 잠이 들면 잠속에서 꿈인 것을 확인해 버리기도 합니다.

 

번뇌가 많아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장시간의 수면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도 피로가 가시질 않으면 숙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띠를 실천하는 사람은 단시간에 숙면합니다. 그날 그날의 노동력에 따라 수면 시간의 길이가 정해집니다.

 

행주좌와로 철저하게 사띠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식이지만, 누워서 사띠하는 것은 실제로는 피해야 합니다. 결과는 자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수행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 되어 밤에 누어 잠들 때까지 사띠하며 수행하는 것은 그때뿐입니다. 눕고 나서도 배에 손을 가볍게 올리고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확인하여야만 합니다.

 

불교에서는 「수면 중의 수행」, 「꿈속에서의 수행」 등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지혜의 개발을 위한,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번뇌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수행 중에 졸음이 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인데, 이런 졸음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다만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오는 졸음은 2, 3회 명칭을 붙여 수행을 계속하면 없어집니다. 그러한 경우는 별로 신경 쓸 것은 없습니다.

 

2번째의 졸음은 몸이 지쳐 수면 부족이 아니라도 일어나는 졸음입니다. 사람에게는 행동하고 싶지 않다. 힘쓰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마음의 약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게으름 피우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수행에 의해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번뇌의 일종입니다. 이런 졸음과는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졸음에 져서 자버리게 되면 수행의 향상은 없습니다. 이런 졸음이 자리하게 되면 수행의 대상이 명확하지 못하여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마음이 혼미해지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게으름으로 인해 몸은 흐트려지고 굽어지게 되어 제 위치를 벗어나게 됩니다.

졸음에 지지 않고 수행을 계속하려면 위빳사나의 효과를 이해하는 것, 즉 이 수행으로 윤회를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이런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번뇌에 물들지 않아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서 즉시 대상을 관찰하겠다는 결정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2번째의 졸음은 사라집니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겨냥과 지속적인 알아차림으로 졸음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이 지쳐서 오는 졸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 경우는 노력하다가 별다른 효과가 없으면 잠시 자도 괜찮지만, 게으름으로 인해 오는 졸음은 반드시 물리쳐야만 합니다.

 

Q9 :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A9 : 우선 수행의 목적을 생각해 봅시다. 접촉(觸, 팟사 phassa)이라고 하는 것은 안, 이, 비,설, 신, 의라고 하는 6개의 인식기관에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고 하는 정보가 접하는 것입니다. 접했다면 느낌(受, 웨-다나-, vedanā, 감각)이 일어납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실감도, 영혼이나 영혼이 있다고 하는 개념도, 좋고 싫음의 문제도, 다른 온갖 인간의 괴로움도, 「느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기능을 이해한 사람은 어떠한 느낌(venadā)에도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 상태가 깨달음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열반이든가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목적하는 해탈은 이런 것입니다.

 

다음에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사띠를 실천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느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명칭 붙인다고 하는 것은 안, 이, 비, 설, 신, 의에 접하는 색, 성, 향, 미,촉, 법을 명칭 붙인다는 것과 접촉하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느낌(venadā)도 명칭 붙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계속하면 인식 과정이 명확하게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귀가 있고 소리가 있다. 이 2개가 접촉하면 청각이 일어납니다. 소리는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니까,청각도 순간적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소리 그 자체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단순한 물질적인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소리가 흐름이면 내가 들었다는 느낌도 순간적으로 흘러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위빳사나의 구조는 이러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걷는 것, 먹는 것 등의 기능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확인해도 답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것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것을 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화내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와 경험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 주십시오. 그것이 위빳사나 수행인 것입니다. 접시를 씻고 있을 때도, 요리를 만들고 있을 때도, 먹고 있을 때도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접시를 씻을 때는 선원에서 하는 것처럼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접시를 잡음, 씻음, 닦음, 놓음」이라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마음으로 확인합니다. 평상시 하고 있는 것을 2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확인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집중 수행인 좌선과 경행 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일상의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이 여러 가지를 정말로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확인하지 않고 행하는 것과 확인하면서 행하는 것의 차이를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사띠하며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지, 그 순간 여러분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관계없습니다.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걷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청소나 세탁을 하는 것, 일을 하는 것, 그러한 매일매일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확인하고 주의해서 알아차릴 수 있으면 훌륭한 수행자가 됩니다.

서 있을 때는 여러 가지 잡념을 전부 마음속으로부터 없애버리고 「서 있음, 서 있음」, 보고 있을 때는 「보고 있음, 보고 있음」, 소리가 들리면 「들림, 들림」이라고 지금 있는 사실만을 확인합니다.

어떤 종류의 소리라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귀에 닿는 것이 「소리」라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소리라는 것이 귀에 닿았을 뿐입니다. 그것이 까마귀의 소리인지, 인간의 소리인지, 떠들썩하다든지, 기분 좋은 소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뇌세포입니다. 뇌세포와 관계없이 「소리 들림, 소리 들림」 혹은 「듣고 있음, 듣고 있음」이라고 가만히 그 소리를 사띠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인 것입니다.

 

인간은 대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하면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험한 일일까요? 부처님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행하고 있을 뿐인 사람은 대단히 지혜롭고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침착하고 훌륭한 인간임을 여러분을 잘 압니다.

조금 알기 쉬운 예로 업무 중 계속 골치를 썩이며 생각해도 전혀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 머리를 릴렉스시키고 기분을 편하게 한 순간에 일이 잘 진행되기 시작하는 그런 일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성장을 크게 방해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민, 괴로움은 「망상」이라고 하는 「가치 판단」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바보 녀석」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단순한 소리인데, 「자신을 비웃는다→실례를 범했다→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내가 해석했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해석하고 판단하지 않았으면 화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해석해서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알고 다만 그것을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라고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명칭 붙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순간순간에 실제로 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등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과거의 일이나 장래를 생각하는 것, 유령이나 도깨비 등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 그러한 마음의 기능을 알기 쉽게 「망상」이라고 하는 말로 명칭 붙여야 합니다. 수행은 침착성과 집중력이 있어야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격렬하게 회전하면 침착성도 집중력도 사라져 버립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 즉시 그 망상 자체를 「탐욕이 있음, 화냄이 있음, 어리석음이 있음」으로 나누어 명칭 붙일 것을 권합니다.

 

탐,진,치,는 우리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들 사고의 대부분이 탐,진,치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망상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취향의 사고입니다. 망상으로 생각해서 즐거운 일입니다. 화냄의 망상은 어둡고 싫은 기분이 되는 사고입니다. 자신의 취향과 반대의 감각입니다. 어리석음의 망상은 좋고 싫음의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 없이 다만 흘러가는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흐르는 사고 등을 말합니다.

 

불탐, 부진, 불치의 사고는 관찰하기 어려우며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탐,진, 치가 불탐, 부진, 불치의 가면을 쓰는 일도 자주 있습니다. 불탐의 망상은 자애의 사고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고, 걱정해주고, 뭐든지 해 주고 싶은 기분입니다. 불진의 망상은 분노의 반대인 사람의 잘못을 이해할 수 있는, 허용할 수 있는 상태의 기분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상냥함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을 시끄럽다고 생각하면 분노의 망상입니다. 싫은 기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기분 없이 그 사람의 소리가 꽤 크다, 「큰 소리 들림」이라고 명칭붙여서 안식하는 것이 불진입니다. 불치의 망상은 쉽게 말하자면 위빳사나를 실천할 때 명칭 붙이는 것 자체가 불치의 망상입니다. 이른바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을 선악의 판단 없이 「탐욕, 분노, 소리 들림」 등으로 인식을 하는 일이 불치입니다. 또 모든 것은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둑카이다, 등의 사고도 불치입니다.

 

이와 같이 명칭이 생기게 되면 순간순간 마음이 침착해져서 집중력이 늘어납니다.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자신의 망상을 탐, 진, 치, 불참, 부진, 불치로 나누어 명칭 붙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혼란스러우면 지치게 됩니다.

 

시작하는 타이밍이 필요합니다. 우선 홍수와 같이 무수하게 망상이 흘러갈 때 그 경우는 탐, 진, 치의 어떤 것일 거라고만 생각합sl다. 다음에 대상을 사띠하는 데 천천히 사고가 흐를 때는 명칭 붙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그 소리를 아름답다거나 예쁘다고 느끼거나 합니다. 그 경우는 「소리 들림」이라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욕구가 일어났다고 확인합니다. 이 2개의 타이밍을 기억해 두십시오.

망상을 구별해 명칭 붙이는 것이 가능해지면 구별해야 하지만 할 수 없으면 「망상, 망상」만으로 명칭 붙여도 좋습니다.

 

Q10 :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까?

 

A10 : 수행할 때 조심할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1가지는 스스로 분석하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그래서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석하려고 하는 마음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간사하게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하면 무엇인가가 보이고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거기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수행할 때 「억지로 무엇인가를 꺼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꺼내려고 하면 「나」라고 하는,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수행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경험적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행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천천히 움직여라, 생중계하라,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천천히 움직여라. 몸을 보통의 스피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천천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치 디스크 환자나 달팽이처럼, 수행자가 천천히 행동할 때 순간적으로 지금, 바로 그 수행 대상에 머물러 알아차려 관찰할 수 있고 담마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중계하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마음으로 확인하는 것, 그것을 중단함 없이 면밀하게 알아차립니다. 마치 나무와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의 사띠와 다음의 사띠, 이전 사마디와 다음의 사마디 사이에 조그마한 틈도 생기지 않고 면밀하게 이어지도록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실천하면 잡념이 사라져 순간순간 집중력이 생겨납니다.

 

세 번째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림 하는 것, 손을 들거나 걷거나 앉거나 할 때마다 몸의 느낌이 바뀝니다. 생각할 때도 격렬하게 감정이 변해갑니다. 이러한 변화를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수행하면 알아차림의 힘은 성장할 것이고, 담마를 발견하지 못한 수행자는 담마를 보게 되어 확연히 사물의 실체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삼원칙에 근거해 수행하는 것이 위빳사나- 실천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