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업의 법칙-랏타빨라 출가이야기 (20110224)

담마마-마까 2021. 3. 31. 09:13

https://youtu.be/wCd2q0Qq0HM

* 업의 법칙-랏타빨라 출가이야기 (20110224)

 

새해에 올해 운세 점치러 갔다 온 사람 한 번 손들어 봐봐. 아무도 없어요? (수행자 대답)

내 앞에 어떤 일이 생길 때 좋은 일이 생기면 아, 참 나한테 행운이 있구나. 나쁜 일이 생기면 참 나에게 불행이 닥쳤다 하고 보통 얘기들을 합니다.

 

업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길 안 하죠? 업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죠? 조건지워지는 것이고,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 당시 때도 물론 그랬지만은 법문을 듣고 나가다가 차에 치어서 교통사고가 났다. 그러면은 아이, 내가 그 선원에 가는데 재수가 없어가지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경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에 그런 핑계들을 대고 있다는 거라. 외부적인 것에다가. 그것도 그렇지는 않죠? 내가 지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난 결과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이게 「업의 법칙」 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나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는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 업을 짓는 것도 내가 짓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이 짓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어떤 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업의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운에 대한 것들은 잘 보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까 매일 인터넷으로 오늘의 운세를 본다든지 아니면 일 년 중에 점을 치러 간다든지 이런 것들은 거의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는 업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믿기 때문에 점을 본 사람들은 없네. 작년까지만 해도 꽤 본 거 같은데. 안 그러면 봤어도 손을 안 들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그래서 모든 것은 자신의 행위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업의 법칙을 믿습니다. 좋은 행위, 좋은 행동들, 그리고 좋은 수행들 이런 것이 좋은 업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둑카(dukkha)라고 하는 고통·불만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들도 믿게 되는 거고, 그것을 또 이해하게 됩니다.

 

고통으로부터 한 번 해방되어 본 적 있어요? 어떤 해방들이 있어 왔습니까? 물론 육체적인 고통이 있을 때 그 육체적인 고통을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알아차려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경우도 있을 거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고 할 때도 그것을 알아차려서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했을 거라.

그러면은 고통으로부터, 둑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완전하게 해방, 언제든지 해방되 있는 것이 열반이고 닙바나(nibbāna) 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을 믿는다 하는 것들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언젠가도 한번 출가에 대한 이야기를 스님이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스물다섯 번째 안거를 꾸루국에서 지내셨습니다. 여러분들 요즘 토요일에 배우고 있는 대념처경도 그 꾸루국에서 있었던 거죠?

이 이야기도 꾸루국에서 있었습니다. 꾸루국에서의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수행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랏타빨라라고 하는 스무살 짜리가 있었어요.

출가를 하고 싶거든. 부모님한테 얘기해도 출가를 허락 안 하는 거라. 불교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부모님들의 동의가 없으면 출가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 동의를 얻어야 되는데 동의를 안 해주거든.

(수행자 질문 : 결혼을 안 한 사람이 받습니까?) 그렇죠.

(수행자 : 나이를 가지고 정해진 게 아니고요?) 예. 나이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스무 살이 안되면 사미계를 받는 것이고, 스무 살 이상이면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비구계까지 다 받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랏타빨라가 장남이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대를 했겠어요? 스님도 장남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도 일년간 나를 찾아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다고 그래요.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니까.

 

랏타빨라가 그렇게 반대를 하니까 랏타빨라가 단식에 들어가버립니다. 삐쩍 말라서 죽기 일보 직전이니까 부모님이 그때사 허락을 합니다. 차라리 애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출가하는 것이.

그래서 랏타빨라가 출가해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젊은 나이라는 게 그마만큼 참 소중한 겁니다. 여러분들은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공부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꾸 나이 먹어서 공부할 것 같으면 공부가 안됩니다. 그것은 안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바로 즉시 하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일찍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보면 대부분이 보면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한살이라도 나이가 어린 사람들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아라한과까지 가는 경우가 참 드뭅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어쨌든 랏타빨라는 금방 깨달음을 이루었거든. 그래서 랏타빨라가 아, 그래도 나를 낳아준 부모님에게 좋은 업을 쌓아주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까 좋은 업은 어떤 거라고 헸습니까? 내가 좋은 행위를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바른 수행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좋은 업이라고 그랬습니다.

좋은 행위를 하도록 할려면 스님이 어떤 것들을 해야 되겠어요? 오늘 이렇게 탁발을 받았듯이 탁발을 받으면 돼. 그러면 탁발은 스님이 받지만 탁발을 하는 사람은 일반 재가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를 하게 되는 거고 음식물이든 뭐든, 그럼 그런 게 좋은 행위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 집 앞에 탁발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랏타빨라를 못 알아봅니다. 머리 길러있던 사람이 머리를 짧게 깍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승복을 걸치고 있으니까 못 알아보는 거라. 부모님이 탁발해줄게 없다면서 거절을 해버립니다. 그때 마침 그 집에 있던 유모가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버릴려고 가져오니까, 랏타빨라 스님이 그거 버릴 거 같으면 내 바리때에다 버려달라. 나는 그것도 먹을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유모가 바리때에다 그 음식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그 스님 얼굴을 보니까 이 집에 살았던 도련님이거든. 급히 들어가서 부모님에게 연락합니다. 앞에 있는 스님이 당신의 아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급히 나와서 그때사 탁발을 할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랏타빨라 스님을 회유를 합니다. 인제는 집에 들어온나. 들어와서 결혼하고 집에 살아라. 하고 간청을 합니다. 탁발하러 간 스님에게 탁발해 줄 생각을 안 하고 자꾸 그런 간청을 하는 거라.

아마 지금도 일반 부모의 입장은 그럴 겁니다. 출가한 스님을 만나면 출가한 스님에게 내가 좋은 공덕을 쌓을려는 생각은 안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스님을 환속을 시킬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처음에는 다 그리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랏타빨라 스님이 '아, 무지다.' 부모님의 마음이 무지해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하는 사실을 절감을 합니다. 눈이 탁 닫혔다는 얘깁니다. 부모님의 목적 때문에 그 좋은 기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닫아버린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가끔씩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경우들이 있을 겁니다. 본인의 목적 때문에 아이가 원하는 것, 또 아이가 잘하는 부분을 못본다는 거라.

그걸 랏타빨라 스님이 "아, 부모님이 무지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들어와 가지고 있는데 왕이 이 랏타빨라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당신 몇살입니까?”

“스무살입니다.”

“거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서 출가하는데 당신은 왜 스무살에 출가했습니까? 부모님이 안 계십니까?”

“나의 부모는 누구고, 어디에 살고 있습니다.”

아주 잘살고 있는 분이거든.

“어? 대부분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어가지고 가난해가지고 출가를 하는데 당신은 그것도 아닌 거 같고, 그럼 어디 몸에 병이 있습니까?”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출가들도 많이 합니다.

“아니오. 나는 병 같은 거는 전혀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면은 혹시 당신 주위에 친척들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서 만날 혼자서 지내다보니까 외로워가지고 그런가 해서 친척들이 없습니까?”

“친척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외로워서 쉽게 말하면 따돌림을 당해서 출가를 하게 되는데, 사회에 살기 힘든 성격이라든지 그런 형태라는 거죠. 그것도 아니다는 거라.

“그거 이상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왕이 이런 의문을 가지니까 랏타빨라 스님이 하나씩 얘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내가 지금 스무살이라 해서 항상 스무살이 돼 있는 건 아니다.

선등님이 육십이다. 육십이 항상 육십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자꾸 늙어간다는 거라.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늙어간다는 거라. 늙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냥 늙어만 갑니까? 병이 생기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항상 아픔들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거라. 그럼 죽음을 맞이하면 끝이냐? 또 자기 인연 따라서 자기 업에 따라서 또 태어나서 그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살아간다는 거라. "둑카의 순환이다" 그 과정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거냐는 거라.

 

가끔씩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참 저게 괴로울 것이다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괴롭겠어요.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거기를 밟고 돌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이 삶이 꼭 그렇다는 거라.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거라.

나는 지금 젊은 스무살이지만, 그 둑카의 순환을 알기 때문에 그 둑카의 순환을 멈추고 싶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수행하기 위해서 출가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는 어떤 마음들을 가지고 수행합니까? 지금 내가 나이가 들어서 할 일이 없으니까 이것이라도 하자 해가지고 합니까? 아니면 몸에 병이 있어서 몸의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합니까? 아니면 외로워가지고, 내가 지금 성격이 좀 이상하니까 그걸 좀 온화해지고 다른 사람들하고 어울리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합니까? 그건 아니라는 거라. 둑카의 순환을 끊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이것들을 위해서 나는 출가를 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재산도 꼭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내가 가진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은 실제적으로는 내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붙잡을려고 아둥바둥 한다는 거라.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붓다 담마 상가에 예경 올리는 것들, 그리고 보시하는 것들, 계율을 지키는 것들, 수행하는 것들 이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유용하게 쓰여서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 재산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 못하고, 또 나의 부속물들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한다는 거라.

 

그것들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할 것 같으면, 계속 윤회하는 순환 속에서도 그것들이 계속 나를 따라가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죽을 때 그것들이 못 따라간다는 거라.

아무리 나에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고, 잘생긴 남편이 있고, 처자식이 있어도 죽을 때 누구 하나 나를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나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해서 마음속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보시를 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 그런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업(業), 좋은 업만이 나의 유일한 재산이라는 거라.

 

그런데 돈이 있다고 내가 출가를 안 하고, 돈이 있다고 내가 수행을 안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현생밖에는 이익이 없다는 거라. 윤회 안 한다는 보장이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돼. 윤회 안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그 둑카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나의 재산을 만들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 나의 재산을 만들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병이 드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아플 때 누구 하나 내 아픔을 대신 해주지 못합니다. 내 친척이 아플 때 그 친척의 아픔을 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든 나의 친척이든 누구든지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병이 들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러면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것은 자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라.

좋은 업을 쌓는 것, 좋은 행위로 인해서 좋은 업을 쌓는 것들입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아, 내가 오늘 하루 동안 내가 좋은 행위를 할 수 있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라는 거라.

설혹 내가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좋은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음에서 자애로움을 가지는 것, 병문안 온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아픈 마음보다는 아, 참 저사람이 나를 위해서 얼마만큼 좋은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좋은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갈애에 의해서 감각기관들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좋은 행위들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갈애는 끊임없이 원합니다. 끊임없이 '조금 더 조금 더' 하게 됩니다. 그게 갈애의 속성입니다. 내 것들, 나의 것들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자꾸 베풀려고 할 때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내 스스로의 집착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고 출가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집착을 자르는 행위들이 좋은 업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좋은 행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실제 나이가 몇살입니까? 몇살이나 됐을 거 같애요? 스무 살입니까? 서른 살입니까? 아니면 육십 칠십이 넘었습니까? 얼마만큼의 나이를 지금 여러분들은 먹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 나이를 모르면 어떻게 해? 모른다는 거는 말이 안 되는 거라.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들을 보면 자기 나이를 알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어서 내가 얼마나 욕심부리고 화내고 하는 것들을 제어하고 절제를 하는가에 따라서 나이가 정해지는 겁니다. 얼마만큼 여러분들은 감각기관을 잘 조절을 하고 잘 제어되어서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거라.

 

나이가 들면 아무리 조절하고 싶어도 조절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이드신 분들은 보면 육체적으로 자다가도 오줌을 싸기도 하고 조절이 안 되는 거라. 제어가 안돼. 생각도 제어가 안 되는 거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생각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의 나이는 자꾸 조절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자꾸 조절을 해나가고 제어를 해나가느냐 마음속에서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을 얼마만큼 잘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아, 지금 내가 몇살이다 하는 것들을 자꾸 측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만약에 나의 마음속에 탐·진·치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바꿔야 됩니다. 부단한 노력으로써 그런 것들을 없앨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수행하면서 한 시간 좌선해라 할 것 같으면 한 시간 좌선을 못해서 굉장히 힘들어하고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다리를 폈다가 반복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앉아 있을 때 그 한 시간 동안의 괴로움은 아주 잠깐입니다. 여러분 윤회하면서 겪는 괴로움은 거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큽니다. 거 왜 윤회의 고통의 괴로움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 잠깐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느냐는 거라.

 

마음의 의지입니다. 의지를 반드시 강하게 해야됩니다.

아, 내가 이것은 꼭 다스려야 된다. 화가 일어나면 나의 둑카의 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반드시 다스리겠다는 의지력을 강하게 내야 됩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자꾸 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에 져버린다는 거라. 의지력이 약해가지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데 그 의지력이 강하면 탁 거기서 끊을 수가 있는데 그리 못한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면 의지력이 강하면 탁 거기서 멈출 수가 있는데 못 멈추고 계속 일으킨다는 거라. 다리가 아프면 아프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느낌 때문에 마음에서 일으키는 반응들이 크니까 그걸 못 참는다는 거라.

그마만한 의지도 없어가지고 어떻게 수행해가지고 이 둑카의 연결고리를 끊고 이 순환하는 것을 멈추겠다고 하는 거라?

의지! 올바르게 의지를 가지고 이것을 끊겠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일으켜야 됩니다.

 

그다음에 수행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 예를 들어서 코끝을 알아차리고 있다.

알아차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접촉하고 있는 것 이 점에다가 마음을 두고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가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또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했을 때 피부에 닿는 감촉-느낌을 알아차리기도 하고,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딱딱하고 부드럽고 뜨겁고 하는 사대요소를 알아차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대요소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나가면 가끔씩 “스님, 상기가 됩니다”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왜 상기가 될까?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요소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뜨거운 요소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모르고, 뜨겁다는 것만으로 알아차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붙잡게 되는 거라. 집착하게 되는 거고.

그럴 때는 그러한 수행을 딱 멈추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들에 단순하게 자연스럽게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집중력은 커져버립니다.

집중력이 커지면 다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호흡에서 일어나는 사대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렇게 균형을 맞춰줘야 됩니다.

 

접촉점에다가 딱 마음을 갖다 붙여놔놓으면 거기서 스쳐지는 느낌만 또 알려고 합니다. 느낌만 알 거 같으면 그것도 머리가 아파와집니다.

접촉점에 마음을 고정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고정돼 있어선 안됩니다.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끊임없이 마음은 움직여줘야 됩니다. 마음이 일을 하게끔 해야 되는 것이지, 마음이 멈춰버리면 수행에서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일하도록 만들어 줄 것!

그리고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알아차릴 것!

이 두 가지를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그다음에 유의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 마음이 항상 선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야 됩니다.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붙잡을려고 한다든지 '아, 아닌데' 하는 마음이 일으키면 안됩니다. 아예 수행을 못해나갑니다.

 

아이가 있다. 갓난아기가 운다. 아빠가 가서 달래면 아이는 더 웁니다. 그런데 엄마가 가서 달래면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칩니다. 왜 그럴까? 자주 보던 사람이고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그거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저 사람이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가 해를 끼치는가' 하는 걸 아이는 안다는 거라. 엄마는 아이를 달랠 때 아이를 자비롭게 대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자비로운 마음 없이 그냥 달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는 거라. 자애가 밑바탕이 안 돼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달래니까 아이는 그걸 금방 알아차린다는 거라.

 

수행에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은 반드시 중단해야 됩니다. 아, 나에게서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 또는 나에게 탐심이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수행을 중단하고 그것들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거라. '아, 이게 악한 마음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악한 마음이 사라지게 만들고 나서 대상에다가 마음을 기울여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에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보듯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대상을 관찰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대부분 여러분들 수행할 때 그렇게 하죠? 수행하기 전에 대부분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나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려 나갑니다.

그 기본 패턴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항상 마음에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들을 유지시켜 주는 상태에서 대상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