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가(Saṅgha)란 무엇인가(상가눗사띠) (20110307)
간단하게 합시다. 프린트물은 열 페이지죠! 저번에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상가눗사띠 부분입니다.
아눗사띠가 열 가지가 있죠? 그중에 세 번째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상가(Saṅgha)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처음에 바라나시에서 부처님이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했죠! 첫 설법을 한 것을 초전법륜경이다 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수행자가 "나는 부처님과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겠다" 하는 말을 함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그것을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출가제자가 갖춰지게 된 거죠. 여섯 명의 출가제자들이 갖춰졌는데,
처음 부처님이 법을 설한 날을 보통 '담마의 날'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살라하 뿌자(Āsāḷha Pūjā)'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리고 '상가의 날'이라고 할 거 같으면 '마가 뿌자(Māgha Pūjā)'라고 해서 우리 음력으로 치면 정월 보름날입니다. 곧 다가오죠? 그때가 상가의 날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법을 설하고 나서 마가뿌자 날까지가 몇 개월 걸렸습니까?
처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게 음력으로 사월 보름이니까, 그러고 나서 담마를 설한 아살라하뿌자는 음력 유월 보름입니다. 상가의 날은 정월 보름, 1월 보름이니까 몇 개월 지난 거에요? 7개월 지난 거죠! 그러고 나서 상가의 날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여러 곳에 설법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지게 됩니다. 그때 처음으로 부처님이 청정한 포살을 이끌게 됩니다. '위숫디우뽀삿타'라 해서 '계목-오와다 빠띠목카' 계목을 송출한 날도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상가의 날을 선언을 하게 되는 거죠. 그날을 기념을 해가지고 '마가 뿌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완전한 상가가 갖추어진 것은 실질적으로는 담마의 날 때 법을 설하고 나서 그 뒤에 꼰단냐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생겨나면서 상가는 구성이 됐는데 그로부터 7개월 후에 부처님이 완전하게 아, 인제는 상가가 갖춰졌다 하는 것을 선언을 하게 되죠. 그날을 기념해가지고 '마가 뿌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월 보름에 뭐가 있습니까? 아, 우리나라에서는 이월 보름이라고 그러지? 이월 보름날 부처님 열반일이라고 그러나? 성도일, 열반일 아마 그렇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건 내가 모르겠네. 아마 그 비슷한 날짜인가 그렇게 되는데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상가의 날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처음 꼰단냐가 상가의 일원이 될 때는 "에히 빅쿠"라 해서 누구든지 일반인이나 재가신자들이 바로 비구가 되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비구가 될 수 있었죠. 그러다가 조금씩 바뀌어나갑니다. 스무살 이상이 된 사람들 일반인이나 불교 믿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이 비구 되는 경우가 있고,
스무살 이하는 사미 단계를 거쳐서 비구가 됐는데 사미단계라 하더라도 오래도록 사미를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미를 거치고 나서 바로 비구계를 주는 형태를 띠고, 단지 스무살 이하냐 이상이냐에 따라서 사미 단계를 거치느냐 안 거치느냐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러다가 조금 세월이 지나면서 일반인이나 불자들이 신도 오계를 받고 그다음에 사미계를 받고 그다음에 비구계를 받고 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정착된 것이 뭐냐 하면 일반인들이 일정한 과정에서 불교신자가 되는 과정들을 이수를 해야 됩니다. 불교신도가 되는 과정이 하나가 들어가지고 그러고 나서 사미 과정을 거치고 비구계를 받는 것, 이런 단계로써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상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렇게 변천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은 상가(Saṅgha)라고 할 거 같으면 출가한 승려들을 지칭하는 말이 됩니다. 그렇죠?
율장에서의 상가(Saṅgha)의 의미는 출가자 집단을 지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상가(Saṅgha)의 의미가 출가자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죠! 일반 재가인이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상가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율장하고 경장하고 조금 차이가 나지게 되죠? 물론 경장에서도 상가의 일원이 되는 것들에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상가의 일원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진리를 체험하고 그렇게 결심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도와 과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정립이 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아리야 상가(Ariya-saṅgha)'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반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통 범부상가라고 해서 '뿌툿자나 상가(puthujjana-saṅgha)'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기도 했는데, 엄밀하게 얘기해서 상가는 '삼무띠 상가(Sammuti-saṅgha)'라 해서 출가자 상가를 지칭하게끔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재가인들은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것 외에는 어떤 제재조치가 없습니다. 오계를 안 지켰다고 해서 너는 다시는 절에 오지말아라 한다든지 너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하고 얘기하지는 않죠?
그런데 스님들의 계율은 그것을 안 지키면 반드시 제재조치가 따릅니다. 상가깜마라 해서 상가의 갈마에 따라서 잘잘못을 판별하고 거기에 따른 제재조치를 가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모임이기 때문에 모임에서 여러 가지들을 결정을 해야 됩니다. 결정하는데 재가인들에게 그런 결정권이 없다. 물론 일부 결정권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 '아니야따(Aniyata)'라 해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은 재가인들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고, 또 스님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상가에 대해서 저 상가에 다시는 시주물을 주지 말자 하는 그런 하의 갈마죠! 하의 갈마를 하는 것들도 재가인들이 하고 하는데, 전체적인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재가인들은 지금의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상가의 일원으로서 확립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말하는 사부대중이라 할 때 사부대중 전체를 상가라고 한다 하는 것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는 거죠.
어쨌든 출가자가 됐든 재가자가 됐든 상가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그 의미 자체는 그것이 테라와다 불교권이든 대승 불교권이든 어쨌든 청정한 삶과 화합하는 것이 기본조건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상가눗사띠 - 상가에 대해서 거듭거듭 관찰해서 마음새기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상가라고 할 때는 출가·재가를 떠나서 아리야 상가를 얘기하게 됩니다. 성스러운 도와 과에 이르른 자들 만을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 상가가 됐을 경우에는 그 상가는 반드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만약에 그 상가의 일원이 된다고 했을 때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리야 상가가 됩니다.
처음은 뭐냐 하면 담마를 잘 실천하고 있는가 아닌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 잘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는가?
실제로는 상가의 의무는 이겁니다. 수행 잘하고 부처님 가르침 잘 전하는 것.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출가자만 얘기하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이 이 두 가지만 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할 경우에는, 그것을 '외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한 스님이 해야 될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 말고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면 어떤 악한 마음도 품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보통은 자기의 이익이나 또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들이 전제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이 또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을 자꾸 권하는가, 아닌가? 같이 부처님 가르침 듣자, 수행하자 하는 것들은 이익을 가져오는 것들이지만, 같이 술 먹자 하는 이런 것들은 이익을 가져오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이익을 가져오는 것들을 자꾸 하도록 만드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이 뭐냐 하면 사람들을 대할 때 자애로써 대하는가? 멧따바와나를 간직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가.
이런 것들이 상가의 의무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몇 개나 그중에 하고 있는지 한번 체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정 상가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것들을 자꾸 실천해나가서 더욱더 나아가서는 아, 출가해서 그 길만 전념하도록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제조건이 돼야 될 것입니다.
자! 상가눗사띠 한번 보겠습니다.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우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Uj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냐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Ñāya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사미찌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āmīci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그렇게 돼있습니다. 네 가지가 돼있습니다.
적어도 상가일 것 같으면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실천해야 만이 상가라고 얘기한다 하는 의밉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이렇게 네 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야디당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에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Yadidaṁ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라고 해가지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제자라고 불려지는 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이 된다" 하는 그런 것들이 됩니다.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그 밑에 있는 게
아후네이요 빠후네이요 닥키네이요 안잘리까라니요
Āhuṇeyyo, pāhuṇ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라고 하는 그렇게 그런 자격조건을 갖췄으니까 그 결과로써 "아, 저런 분들에게는 공양올릴 수도 있고 합장공경 할 수도 있고 존경을 표하고 보시 올리기도 하고 환영할 수도 있는 그런 분들이구나" 하는 그런 결과물로써 얘길 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진 게 쉽게 말하면 이 상가눗사띠 라고 보면 됩니다.
현재 여러분들은 밑에 부분은 될 수가 없죠? 그렇죠? 그럼 여러분들이 지금 진지하게 해야 되는 것들은 뭐라? 앞에 부분입니다. 진지하게 수행해야 되고 정확하게 수행해야 되고 올바르게 수행해야 되고 여법하게 수행해야 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어떤 것이 진지하고 정확하고 올바르고 여법한 것이냐 하는 것들을 그 밑에 쭉 설명을 해놔놨습니다.
수빠띠빤노(Supaṭipanno), 맨 처음 부분입니다.
쭉 거의 한 페이지 가까이 설명을 해놔놨습니다. '수'가 어떤 의미고, '빠띠빤노'가 어떤 의미고, '빠띠빠다'가 어떤 의미고 하는 것들을 쭉 설명을 해놔놨습니다.
그래서 상가눗사띠를 수행하려는 수행자는 조용한 곳에 가서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모두고 수행하는 일에 수행의 대상에 잘 밀착시켜서 마음 깊이 되새기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상가눗사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빠띠빤노라는 것들을 잘 마음속에서 깊이깊이 되새겨야 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면 진지하게 수행을 잘하는 존귀하신 분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 바르게 잘 수행하여 물러남 없이 닙바나라는 담마를 향해 나아가는 분들, 붓다의 가르침을 공손하게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인 상가가 바로 '수빠띠빤노'이다 하는 것들을 가슴 깊이 자꾸 되새기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수행을 잘하고 있습니까? 저번 토요일에 대념처경 할 때 그 얘기가 나왔죠? 수행의 대상을 놓쳤을 때 놓친 것들을 빨리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이 옮겨가게 하는 것들, 이것이 노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했죠!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은 대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걷고 있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게 되고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서도 엉뚱한 것들을 생각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대상이 떠났으면 빨리 대상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서 대상에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것, 그 알아차림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그 속에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고유한 특성들을 알아나가게 되는 것, 이것들을 쉽게 말하면 "수행한다" 라고 얘기합니다. 이것들을 곧 똑바르게 잘 수행한다 라고 얘기합니다.
얼마나 내가 진지하게 해야 될 거라? 잠시 잠깐이라도 마음을 대상에서 놓쳐버리면 벗어나버린다는 겁니다. 진짜 진지하게 내가 이 길만이 오직 내가 따라가야 될 길이다 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진짜 진지하게 완전하게 수행을 할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잘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잘 수행한다는 것은 곧 진지하게 열심히 수행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수빠띠빤노라고 얘기합니다. 아, 나도 그렇게 수행을 해야되겠다는 마음을 자꾸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우주빠띠빤노(Ujupaṭipanno).
지금 프린트물에 있는 내용들은 되도록이면 안합니다.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읽어보고 하시기 바랍니다.
우주 빠띠빤노, '우주'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다, 곧다' 라고 하는 겁니다.
상가 일원이 완전히 되었을 때 그걸 '아리야 상가'라고 그럽니다. 네 가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솔직하다는 것, 그다음이 정직하다는 것, 그게 '우주'라는 뜻입니다.
바르게 내가 잘못한 것들은 아, 잘못했다고 내가 인정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잘못됐을 경우에는 그 길은 다신 안 가는 것이고, 바르다고 그럴 것 같으면 그 길 따라서 그냥 계속 가는 거라. 서울 가는 길이 경부선이 가장 빠르다고 할 것 같으면 경부선 타야 되는 것이지 호남선으로 가야 될 이유가 없다는 거라. 아예 그런 것들은 생각조차도 안 한다는 거라. 굽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 길이 바른길인 줄 아는데 왜 둘러서 가느냐는 거라. 가다가 벗어났으면 아, 내가 이게 아니구나 하고 퍼뜩 알아차려가지고 솔직해져가지고 정직하게 내가 바른길로 다시 들어선다는 거라. 그리 해야만이 둘러가지지 않는 것이지 안 그러면 우리는 자꾸 옆길로 샌다는 거라. 이 수행으로써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 길로 그냥 가면 되는 거라.
수행하다가 진척이 없을 거 같으면 아 또 다른 길도 보고 이길도 보고 저길도 보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왜 자꾸 돌아갈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결국엔 다시 또 돌아오게 된다는 거라. 그마만큼 자꾸 시간 낭비를 하고 에너지를 허비하게 된다는 거라.
아리야 상가가 될 거 같으면 적어도 똑바르게 간다는 거라. 벗어남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 수행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인데 부처님이 가신 길만큼 정확하고 똑바르게 간 길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우주빠띠빤노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냐야빠띠빤노(Ñāyapaṭipanno). 올바르게 진리 따라서 그 방법 따라서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올바르게 걸을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가장 선행되어야 되는 것이,
정신적인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 많이 있죠, 정신적인 번뇌들. 번뇌 망상에 쌓이지 않도록 자꾸 해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선한 공덕이 있는 행위들은 자꾸 스스로 노력해야 됩니다. 좋은 일이 자꾸 일어나고 내 스스로가 행복하게 되는 것들을 왜 노력을 하지 않느냐는 거라. 선한 것들,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들은 스스로 자꾸 노력을 하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올바른 방법으로 나아가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슬픔이나 비탄 절망이라고 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것들 그것이 감각적인 즐거움입니다. 그런 원인이 되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즐길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금 내가 그런 감각적인 즐거움을 즐긴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계속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것은 꼭 피가 통하지 않는다 해서 피가 통하지 않으면 내가 자꾸 노력해서 살금살금살금 주물러줘야 되는 것이지, 그 피를 통하게 하기 위해서 망치로 가지고 탁 내리칠 거 같으면 피는 통하겠지. 그런데 그 망치로 내려친 부분은 멍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나중에는 혈관이 더 막혀버립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그와 같다는 거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거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절망과 슬픔과 비탄들이라는 거라. 그런 감각적인 즐거움을 즐기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올바른 방법으로 나아갈려고 할 거 같으면 자꾸 진리를 실현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든 변하게 돼있고 어떤 것이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는 사실을 자꾸 되새겨야 됩니다. 내가 언제 죽음에 이를지 모르고, 내가 언제 늙고 병들지 모른다는 거라. 영원하지 않다는, 영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아,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으니까는 이번 주에는 화요일날 안 가고 목요일날 가야지. 그런 것이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스스로의 의지처가 자꾸 되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피난처나 어떤 보호자도 구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여기 있는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보호자나 피난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담마따라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담마가 여러분들을 보호해주고 여러분들의 의지처가 될 뿐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것을 피난처로 만들려고 하면 안됩니다. 힘들 때 오면 스님한테 좋은 말 듣고 그러고 나서 가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것들이 피난처가 될 수가 없는 거라.
단지 스님은 그런 피난처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수행이 똑바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점검해주고 바르게 이끌어주는 것으로써 존재를 할 수밖에 없는 거라. 하물며 스님도 그런데 다른 어떤 것들을 여러분들이 의지처로 삼을 거라? 여러분들 가족이 될 수도 없고 여러분들 재산이 될 수도 없고, 그 어떤 것도 피난처나 의지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내가 가진 것들이 내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것이 나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내가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라. 죽으면 빈손으로 간다고 그러죠? 아무것도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내 자신도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데, 내 주변의 것? 그것이 재산이 됐든 내 가족이 됐든 명예가 됐든 아니면 내 집이 됐든,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내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거라. 그렇지 않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것이든 나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내 스스로 나의 것은 내 몸과 마음뿐이라. 그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거라.
그다음이 뭐냐 하면 살아가는데 채울려고 하면 안됩니다. 즐거움으로 채울려고 하고 돈으로써 채울려고 하고 이런 것들로써 채울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런 것들이 채워지면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져버립니다. 진리 따라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질 않는다는 거라. 이런 것들이 올바른 방법들입니다. 올바른 방법 따라서 묵묵하게 그렇게 길을 걷도록 해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미찌빠띠빤노(Sāmīcipaṭipanno). 존경하기에 적절한, 그런 존경받기에 적당한 길을 걷는 자가 되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보통 출가자들은 머리카락을 깎습니다. 또 옷을 가사를 입어도 아주 단순한 이 가사를 입습니다. 다른 옷을 입지 않습니다. 또 먹는 것도 하루 한때 먹으면서 그 공양물에 만족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는 것이 적절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 내가 이 옷으로도 충분하게 추위로부터 더위로부터 보호할 수가 있고 내가 생활하는데 불편할 게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옷으로써 만족해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적절한 것이라. 머리를 아무리 멋을 지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이 머리를 길러 있음으로 해서 불편하지 않게끔 다른 사람들에게 흉이 되지 않게끔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여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오직 수행의 도구로써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배고프다는 오래된 느낌만 자꾸 제거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배부르게 먹고 살찌우기 위해서 먹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하면서 이차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적절하게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미찌'라고 그럽니다. '여법하게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수행도 경험이 없을 거 같으면 앞으로 나아가지지를 않습니다. 저 사람이 체험한 것들 나도 틀림없이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적절하게 그 체험들을 공유를 할 수가 있고, 내 스스로도 그런 체험들을 적절하게 법 따라서 체험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가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도에 들어가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앞서서 그런 여법하게 경험한 사람들을 따라서! 똑같이 그런 것들을 나도 경험하면서 도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사미찌빠띠빤노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런 네 가지가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겁니다.
이런 네 가지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나면 어떤 결과들이 있을까?
그것이 '테로담모'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의 담마를 갖춘 훌륭한 자가 된다'하는 뜻입니다.
모든 일들에 분쟁이 있을 때 여법하게 잘 해결하게 되고, 항상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것들이 자꾸 숙달이 되고, 또 수행하는 것이 무르익어가지게 되고, 또 항상 계율 따라 살아가지게 되고, 수행이 있고 법을 들을 자리가 있으면 그걸 빠지지 않도록 하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 따라 계속 나아가는 그런 자가 됩니다. 그런 열 가지들이 테로담모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갖추게 되니까 당연히 마음은 어떤 것에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싫은 일에도 좋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일이 없고 그런 외부적인 자극들에 대해서 휩쓸리지 않게 되고 '상카루뻭카', '모든 조건지워진 상카라에 대해서 우뻭카-평등한 고요하고 평정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를 하게끔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도에 들어서는 네 가지를 갖추면 그런 자리,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성인이라고 칭할 때 성인의 경계점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과정을 겪은 자만이 이제는 도와 과, 네 쌍의 장부와 여덟 무리의 성자들, 예류도 예류과 일래도 일래과 불환도 불환과 아라한도 아라한과라고 하는 장부가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야디땅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Yadidaṁ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밑에
아후네이요 빠후네이요 닥키네이요 안잘리까라니요
Āhuṇeyyo, pāhuṇ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라고 하는 "공양 받을만한 분이고, 환영할 가치가 있는 분이고, 공덕을 믿고 그것에 따라서 보시 올리기 적당한 분이고, 합장 공경할 만한 분이 된다"는 뜻이고,
"그것이 바로 무상한 복의 밭을 가진 자가 된다" 하는 게 '아눗따랑 뿐냑켓땅 로깟사' 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눗따랑 뿐냑켓땅 로깟사 띠
anuttaraṁ puññakkhettaṁ lokassā ti.
이게 인제 상가눗사띠 부분입니다.
상가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뒤가 율장에서의 상가의 의미에 대한 겁니다. 마지막 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가의 일원으로서 실패의 원인들은 뭔가? 네 가지로 정리를 해놔놨습니다.
계율에 대해서 심한 불만족이나 싫증을 일으키는 것.
수행을 잘하면 당연히 계율에 대해서 잘 호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계율에 대해서 아, 내가 저걸 꼭 지켜야 되는가 하는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또 그런 것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족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안됩니다. 아, 내가 그런 마음을 만약에 일으켰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아직도 멀었구나. 내가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일으켜야 됩니다.
그다음이 뭐냐 하면 이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지금 적어넣은 겁니다.
식탐, 주체할 수 없는 식탐. 먹는 것 조절이 용이해야 됩니다. 세끼를 먹고도 밤에 또 출출하다고 또 먹는다, 그건 식탐이 있는 겁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그것이 내 몸을 해롭게 만든다는 것인데도 그 식탐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식탐 때문에 또 먹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이 뭐냐 하면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해서 자꾸 커지는 욕망입니다. 감각적인 것들을 자꾸 쫓을려고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감각적인 것들이 일어나면 그것이 계속 커지는 거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다음이 뭐냐 하면 성적인 탐욕입니다. 다른 이성에 대해서 가질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서 탐할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네 가지가 바로 내가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자가 되는데 실패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들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계율에 따라서 살아라. 금지된 것 멀리하고 허락된 것들을 따라 하고 계율 따라서 자꾸 살아라 하는 거라.
그다음이 감각을 제어하라.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을 지켜라. 한순간이라도 기쁨이나 슬픔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제압당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내가 그것들을 제압을 하고 제어를 해야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나를 제압을 하고 하면 안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반드시 지켜라는 거라.
특히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잘 제어를 해야 됩니다. 어떤 것이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한꺼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보는 것이 있으면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들리는 것이 있으면 냄새맡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어하기가 수월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씩 제어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다음이 허물 없이 생활을 하라.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쁜 행위들을 하지 말고 올바른 행위들을 하라. 열 가지 선한 행위가 되고 열 가지 악한 행위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악한 것들은 하지 말고 선한 것들을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허물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을 사용할 때조차도 그것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사막에 가서 아주 목이 말라가지고 물을 마시는 때조차도 그런 필수품을 사용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필수품을 사용할 때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오랫동안 목이 탄 사람이 갑자기 물을 먹으면 그거 잘못된다는 거라. 꼭 필요한 거지만 그것조차도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보라는 거라.
이런 것들이 이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이게 상가눗사띠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상가의 의미를 잘 되새겨서 그런 상가의 일원이 된 분들이나 그런 분들이 될려고 노력하는,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을 자꾸 존경하고 그것 따라서 나아갈려고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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