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탁발공양 게송 (20110317)

담마마-마까 2021. 5. 23. 08:39

https://youtu.be/lSYOMyZytPA

* 탁발공양 게송 (20110317)

 

오늘은 탁발하는 날이니까 스님한테 공양올리기 전에 하는 게송이 있죠!

공양 올리기 전에 하는 게송, 또 공양 올리면서 하는 게송, 공양 올리고 나서 하는 게송, 또 부처님한테 공양 올리기 전에 하는 게송, 공양 올릴 때 하는 게송, 공양 올리고 나서의 게송이 있습니다.

 

마, 간단하게 한 번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왜 이리 복잡하니 싶지? 왜 그래 놨을까? 왜 이리 구분을 해놨을까?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공양 올리기 전에 좋은 마음을 가지고 공양 올린다 하더라도 공양 올릴 때 올리기 전의 마음과 똑같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 똑같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공양 올릴 수 있는 사람? 공양 올리고 나서도 돌아가면서 공양 올릴 때의 마음과 똑같이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돌아갈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잘 안됩니다. 올리기 전에도 여러 가지 마음들이 일어나고, 올릴 때도 또 여러 가지 마음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이 바리때에 공양물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도 아, 저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이다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는 경우들이 많아요. 어서 빨리 스님한테 이 바리때에다 공양물을 넣어주고 도망칠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스님 이 공양 맛있게 잡수십시오 하고 올리는 사람이 있고, 이 공덕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넣는 사람도 있고, 갖가지 마음들이 있단 말이라.

 

담마빠다에 보면 그런 게송이 나옵니다.

여기 앞에 꽃바구니가 이렇게 있습니다. 물론 시든 거지만은 꽃바구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꽃이 필요합니다. 그렇죠? 하나의 꽃을 가지고는 이 꽃바구니를 못만듭니다.

여러분들은 죽어야 될 운명에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죽어야 될 운명에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많은 선한 공덕을 쌓아라 하고 법구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의 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선한 공덕들을 만들어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은 공덕을 쌓는 것은, 탁발 올린다는 것은 하나이지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마음은 여러 가지 마음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올리기 전에 하고, 올릴 때 하고, 올리고 나서. 크게 나누면 그렇지만은 올릴 때도 갖가지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그냥 탁발 올리기 전이나 올릴 때나 올린 후나 이런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공양 올리라 할 것 같으면 대부분이 보면 그 마음을 이어갈려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스님 공양 잡수시고 빨리 깨달음에 이르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마음을 쭈욱 이어간다고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착각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항상 이어질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시시때때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를 못하게 됩니다.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고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그 마음이, 한번 일으킨 마음이 탁발 올릴 때나 올리고 나서나, 올리기 전에나 똑같은 마음으로 된다고 생각을 할 거 같으면 마음이 항상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공양 올리기 전에 하는 게송과 공양 올릴 때 게송과 공양 올리고 나서의 게송을 따로 분리를 해놔 놓습니다. 적어도 그 세 개 정도에는 각각 다른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갖다가 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 세 마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마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죠? 여러분들이 알 겁니다.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하나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공덕을 쌓는 것은 하나지만은 공덕을 쌓을 때의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무수하게 일으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꽃으로 인해가지고 저렇게 여러 가지 꽃이 되는 화환을 만들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죽어야 될 사람들일 것 같으면 반드시 그런 것들을 알도록 해서 선한 마음으로 일으키는 선한 공덕들을 많이 쌓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으로써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인해서는 선한 마음의 요소들이 일어납니다.

선한 의식에는 보통 보면 너그러운 것들, 아니면 자애로움 같은 것,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이 일어나집니다. 여러분들이 공양을 올리기 전에 대부분 보면 앞사람이 공양 올리러 나가면 똑같이 그 자리에 같이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 뒤에 설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선한 마음이죠! 남을 배려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공양 올리고 나면 그다음에 내가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만약에 저 사람이 아직 공양을 덜 올렸으면 내가 기다려주게 되고, 저 사람이 공양 올리는 모습을 보고 아, 저 사람이 참 선한 마음으로 바른 공덕을 쌓는구나 하고 자애로운 마음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선한 의식을 일으키면 선한 마음의 요소는 이렇게 자꾸 자꾸 가지를 치게 됩니다. 악한 불선의 의식이 일어났을 때는 그와 반대로 여러 가지 불선한 요소들이 일어나겠죠? 남을 혐오할려고 하고, 질투할려고 하고 배척할려고 하고, 또 욕심부리게 되고 하는 그런 여러 가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소들, 조건들이 지어지는 것은 내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에 따라서 그런 조건들은 각각이 달라지게 된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공양 올린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인해서 나는 선한 마음의 요소들을 여러 가지들로 일으켜나갈 수가 있고, 또 만약에 나쁜 일들을 저지르는 것에는 나쁜 마음의 요소들 여러 가지를 일으키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조건들이 자꾸 모이게 되면 나쁜 조건일 때는 우리는 보통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또 선한 조건이 모여도 어떨 때는 집착을 하게끔 됩니다. 욕심부릴 때는 욕심부리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불선한 요소들이 일어나집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이면 그것이 "집착"이 된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할 때, 만약에 예를 들어서 이런 탁발 올리는 선한 일을 할 때도 그것이 집착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미세한 것 같지만 그런 것들도 불선한 요소를 일으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조건들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도 손을 뻗거나 걸어가거나 밥을 먹거나 할 때도 그런 조건들은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선한 요소로써 이어지느냐, 아니면 불선한 요소로써 이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구분이 되게 됩니다. 집착하게 되면 아무리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선한 요소들은 계속 이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도 그냥 아름다운 소리라고 알아차려버리면 되는데 아름다운 소리에 대해서 내가 집착하게 되면 그 소리를 더 들으려고 하게 되고, 그래서 누가 그 소리를 꺼버릴 거 같으면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는 형태들로 인해서 선한 선심소가 되기도 하고, 집착을 하게 되면 불선한 심소가 되기도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탁발을 올릴 때도 내가 여기 탁발 올린 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면 내가 이렇게 공양 올린 공덕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하는 집착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서 내가 병이 낫기를 하고 하는 것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양 올린 여러 가지 바른 공덕들을 쌓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남에 대해서 자비로운 마음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로운 마음을 내면 되는데 그러한 자애로운 마음으로 인해가지고 저 사람이 나를 자비롭게 봐주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그건 집착을 하게 돼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 집착이 없는 상태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과 집착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와 같이 차이가 많이 나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공양을 올리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선한 공덕을 쌓고 하는 것의 목적은 어떤 경우든지 번뇌를 없애기 위한 것이고, 자기·자아(自我)·''라고 하는 것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갖가지 번뇌를 일으킨다든지, '나'라고 하는 것을 자꾸 가질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선한 공덕을 쌓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수시로 자꾸 변하기 때문에 그 변하는 마음들을 선한 요소들로 계속 일으켜주기 위해서 공양 올리기 전의 마음, 공양 올릴 때의 마음, 공양 올린 후의 마음이 동일하게 되도록 해주기 위해서 자꾸 스님들은, 그리고 게송에서는 분별해서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공양 올리기 전에는 이런 마음으로 하라. 공양 올릴 때는 이런 마음으로 하라. 공양 올리고 나서는 이런 마음으로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양올리기 전과 공양 올리고 나서의 게송을 여러분들이 유의있게 잘 보면서 그러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 그러면 이 세 가지를 다시 한번 구분을 해보겠습니다.

자타카(jātaka, 본생담)에 보면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 한 분 있었는데, 이 분은 자기 집의 정원에 있는 나뭇잎에 아침에 이슬방울이 도로록 맺혀 있으면 그 이슬방울도 남들이 먹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구두쇠였다는 거죠.

 

그런데 생일이 돌아왔는데 이 구두쇠 꼬시야에게 자기 부인이 제안을 합니다. 오늘 생일이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좀 베풀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생일상을 차려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자 그럽니다. 그런데 꼬시야는 그게 아깝거든. 그러니까 부인이 그러면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초청 안 해도 집안 식구들은 같이 먹도록 하자. 보통 적어도 생일이면 자기 식구들은 같이 앉아서 생일밥을 먹는단 말이라. 그런데 그것도 아깝다는 거라. 내 생일인데 왜 너희들이 먹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오로지 생일밥을 내 혼자 먹을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일밥을 혼자 받아서 남들이 모르는 숲에 들어가서 그 생일밥을 혼자 먹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개가 와서 그 모습을 봅니다. 개도 그 모습을 보고 먹고 싶어 할 거 아니라. 좀 주라고 하니까 이 구두쇠가 주기 싫거든. 그러니까 개가 이 꼬시야 장자의 손에다가 오줌을 싸버립니다. 오줌 뭍은 손으로 공양을 할 수가 없으니까 냇가에 가서 손을 씻고 오는 사이에 이 개가 또 그 밥에다가 오줌을 싸게 됩니다.

돌아와서 보니까 밥이 변해져있거든. 그러니까 개에게 막 몽둥이질을 하니까 개는 가만히 있나, 그냥 그 꼬시야를 물게끔 됩니다. 생일밥을 먹을려다가 결국은 생일밥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개하고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게 됩니다.

 

그때 문득 이 사람이 깨닫게 됩니다. 인색하다고 하는 것은 도를 지나쳐버리면 오히려 나에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죠? 그런데 실제의 여러분들 마음에 보면 그러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꼬시아가 이 인색함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를 하고 나서 그 꼬시아 스님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하나를 탁발을 받아왔으면 그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1/3만 먹고 나면 나머지는 전부 다 나눠줘버립니다. 내가 먹고 나서 남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나눠주고 나서 그중에 남은 것만 내가 먹게 됩니다. 뭐든지 그렇게 하고 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적을 경우에는 적게 나눠주고 많을 경우에는 많이 나눠주어라.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기쁨이 되지 못한다. 나누어 주는 것에 인해가지고 그 사람은 천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남에게 베푼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나'라고 하는 '나 중심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싸워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걸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양물을 지어와가지고 스님에게 공양 올릴 때는 내 것을 스님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지 내 건 다 놔두고 그중에 가장 맛없는 것 필요 없는 것을 만들어서 공양 올린다 할 거 같으면 그런 마음은 바른 마음이 아니라는 거라.

 

게송에는 분명하게 얘기를 해놔 놓습니다.

필요한 물품들을 공양 올린다는 거라. 내가 그러한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를 해서 그 물품들을 스님을 통해서 상가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거라. 그 공덕으로 인해서 내가 복덕이 증장되고 공덕이 많이 쌓아지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얘깁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겨나갈 때 우리는 남에게 너그러움을 가지게 된다. 베풀게 된다 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탁발을 올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기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일으키는 보시의 마음은 다음의 순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지금 내가 지은 행위는 다음의 결과로써 이어집니다. 좋은 원인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있게 되고, 또 좋은 결과로 인해서 좋은 원인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는 겁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원인·결과로써 이어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원인·결과가 끊임없이 이어질 때는 이생뿐 아니라 다음생까지도 좋은 원인·결과로써 이어진다 하는 것들입니다. 조건이 생겨났을 때 이러한 이해들이 생겨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이런 이해를 얻기 위한 조건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내가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선한 일들을 위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

그중에는 탁발을 깜빡하고 준비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런 마음을 내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남들이 한 일들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두 번째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방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는 인색합니다. 남들이 한 일에 대해서, 특히 잘한 일, 좋은 일에 대해서 인색합니다. '뭐 그걸 가지고 그러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내지 말아라는 거라. 내가 지금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남들이 행한 것들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들을 낳게끔 된다는 겁니다.

 

얘기를 할 때 남들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는 것과 언짢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좋은 말을 할 거 같으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고,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또 언짢은 기분이 들도록 하는 말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라.

남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고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또한 나의 선한 공덕들이 증장할 수 있는 길을 몸으로 자꾸 익히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하면 자기가 행한 공덕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나눌려고 하는 것. 그것이 세 번째 순번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물질로써 나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굉장히 공덕을 많이 쌓았습니다. 탁발을 하는 것부터 해서, 여러 가지 가사 보시를 하는 것, 그다음에 방사를 짓는 것, 여러 가지 공덕들을 많이 했는데 밤만 되면 이상한 소리에 시달리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왜 이렇게 밤만 되면 나는 이상한 소리에 시달립니까?”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여러 가지 공덕을 쌓고 나서 그것을 공덕을 회향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이러한 공덕들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들을 가졌느냐는 거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아귀계에 태어난 자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음들을 먹이로 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먹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코끼리는 풀이라고 하는 것이 먹이가 되고, 사람은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이 먹이가 되고, 천상계에 있는 것은 천상계에 맞는 먹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귀계에는 먹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으키는 생각이 먹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아귀계가 먹이가 없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배고프다고 운다는 거라. 그럼 그것이 나의 친척일 때는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런 소리가 들린다는 거라. 배고프다고, 나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그럼 적어도 빔비사라 왕이 지은 공덕들을 '아, 내가 공덕들을 회향합니다' 하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 마음으로 인해서 아귀계에 있는 중생들은 먹이가 되니까 배부르다는 마음을 일으키니까 '깍깍'하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마음을 못냈다는 거라.

 

보통 우리가 이런 보시를 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이러한 공덕들이 이생과 다음생에서도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또는 '이러한 공덕들이 돌아가신 나의 친척들에게도 회향되길 바라겠습니다' 하는 마음들을 가집니다.

그게 스스로 지은 선한 공덕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들이라 하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살아갈 때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선한 공덕을 짓기도 합니다. 누가 돌아가셨으면 제사를 지낸다든지 해가지고 그 공덕들을 짓기도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 공덕들은 누구 때문에 짓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짓죠. 그래서 '이러한 공덕들이 돌아가신 나의 친척들에게도 회향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짓는 선한 행위도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은, 좋은 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로 인해서 짓는 공덕들도 나눌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런 마음을 자꾸 가지게 됨으로 인해서 바른 공덕들을 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예류과에 도달한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것이 정신적인 현상이다, 육체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보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는 사람들은 일체 조건들이 떨어져 나간 상태를 처음으로 경험을 하게끔 됩니다. 열반의 상태들을 처음으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나'라고 하는 견해로부터 떨어져나가 버리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는 인색한 마음들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번 다시 인색해서 베풀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는 마음들은 아예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소유품에 대해서 인색한 마음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억누를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선한 일들을 쌓을 때 자기의 행동들이 여러 가지 동기들이 된다는 것을, 여러 가지 선한 요인들을 낳게 된다는 것을 자꾸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의 행위를 하는데도 여러 가지 선한 요인들, 너그럽고 또 자애롭고 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의 요소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요소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들이 선한 요인들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하나의 행위를 하는데도 끊임없이 많은 마음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라.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될 때 '나'라고 하는 견해들이 자꾸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내 마음은 하나의 선한 요인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선한 요인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다 라는 사실을 자꾸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감소되고 남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배려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양물을 바루 속에 넣을 때는 '내가 이 공양물을 바루 속에 넣습니다'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된다는 거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를 것 같으면 안된다는 거라.

 

공양물을 올리기 전에는 '이 공양물을 스님들에게 올리겠습니다. 바르게 마련한 이 공양물을 받으십시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거고,

 

공양 올릴 때는 이 공양물을 올리겠다는 거라. 내가 지금 선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겠다는 겁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킬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알아차리고 있으면 거기에는 선한 마음의 요소가 일어난다는 거라. 공양물을 올리면서도 내가 지금 뭘 올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을 것 같으면, 망상을 피우든지 아니면 마음이 다른 데 가있을 것 같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선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바리때에 공양물을 올릴 때 천천히 마음을 기울여서 공양물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에 대해서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물건을 크게 툭 떨어뜨려 놓지를 않게 됩니다. 그런데 공양물 올리면서도 얼른 내가 공양물 올리고 벗어나야 되겠다는 악한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빨리 올리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놓아도 툭 떨어뜨려 놓아버린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행위를 할 때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불선심소가 돼버립니다. 하는 행위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공양물을 올릴 때는 이 공양물을 분명하게 바루 속에 올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공양물을 올리라 하는 겁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는 번뇌가 침투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 같으면 온갖 번뇌들에 휩싸이게 된다는 얘깁니다.

 

공양물을 올릴 때는 공양물을 올리는 현상에다가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공양을 올린 후에 돌아갈 때는 돌아가는 발걸음에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두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리에 왔을 때는 '이 공양 올린 공덕으로 인해서 내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랍니다' 또는 '내가 이런 공양 올린 공덕들을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합니다' 하는 회향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거라.

 

이와 같이 공덕을 쌓는 것에는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공덕을 쌓는 것들도 있고, 남들이 공덕 쌓는 것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냈을 때 내가 공덕 쌓는 것들이 있고, 공덕을 쌓고 나서 다른 중생들에게 회향을 함으로 인해서 공덕을 쌓는 경우들이 있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게 됩니다.

하나의 꽃다발을 만들 때는 여러 가지 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의 탁발이라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선한 마음, 선한 공덕들이 필요하게끔 됩니다. 그런 선한 공덕들이 모였을 때만이 꽃다발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공양을 올릴 때, 올리기 전과 올릴 때와 올리고 난 후에 게송들을 하는 이유들입니다.

항상 마음은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마음들을 지속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다가 하나의 현상이 사라지고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