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야-나(yāna)_탈 것 (20110322)

담마마-마까 2021. 5. 25. 09:09

https://youtu.be/Fa_NKyro7mQ

* 야-나(yāna)_탈 것 (20110322)

 

스님 목이 조금 쉬었어요. 하도 어제 저녁에 진주가서 법회를 한다고 너무 오랫동안 해가지고 목이 조금 잠겼어요.

요즘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듭니다. 태국에서 있을 때 어느 스님이 똥싸고 뒤훔칠 시간도 없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야 요즘은 내가 그 꼴났다 생각이 듭니다.

갔다 오니까 또 일본 대지진 난 것에 대해서 테라와다적인 입장발표를 좀 해달라고 해서 그것도 밤새 만들고, 오늘 또 법회고, 그리해도 뭐 어쩔 수 없지 뭐. 할 수 없는건데, 목이 조금 안 좋아도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탈 것'들을 '야나(yāna)'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야나를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그래요? '승(乘)' '수레'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원래 야나의 의미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주는 도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갈 때 기차를 타고 가면 기차가 '야나'가 되는 것이고, 만약에 버스를 타고 가면 버스가 '야나'인 거고, 걸어갈 거 같으면 다리가 '야나'이게 되는 거죠. '야나'는 원래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코끼리 조련사는 인도 당시 때는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굉장히 고위직입니다. 하기 힘든 직종이고 물론 그마만큼 많은 보수도 받는 그런 직종인데, 코끼리 조련사라고 해가지고 다 코끼리를 잘 조련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조련하고 있는데 코끼리가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고 있는데, 마침 거기를 지나던 비구 스님들이 그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 비구 스님중에 출가하기 전에 코끼리를 조련하는 일을 했던 분이 한 분 있었어요.

 

그런데 스님들이 아무리 코끼리 조련을 잘해도 코끼리 조련사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코끼리 조련하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들이죠. 세속적인 일에는 일체 스님들이 관여를 하면 안됩니다. 관여를 하면 계율에 저촉이 됩니다. 내가 직접 코끼리를 조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조련사에게 직접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가르쳐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 스님들이 옆에 앉아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코끼리 조련은 요렇게 요렇게 하면 잘된다 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 소리를 코끼리 조련사가 듣게끔 하는 거죠. 그래서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잘 조련하게 됐어요. 그렇게 되니까 계율에는 저촉이 안 되는 거거든. 직접 얘기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부처님한테 와서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 스님들을 굉장히 뭐라 합니다.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이 '야나'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이나 수행자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타야 될 것들은 자기 마음밖에 없다. 물론 계율에는 저촉이 안 되었지만 왜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느냐 하는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말도 맞죠. 그런데 그 비구스님 입장에서도 그렇다고 모른 체 하기에도 안타깝단 말이라. 그래서 그 비구스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자리에서 부처님한테 잘못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가 뭐냐면, 부처님 친족 중에 '마하나마' 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친족이 멸족을 당할 위기에 있을 때 마지막에 친족 중에 일부를 구해냈던 분이 마하나마입니다. 자기 자신이 풀피리를 입에다가 물고 물에 들어갔다가 죽으면 시체가 떠오를 거거든요. 연못에 들어갔다가 떠오르는 시간은 몇분 되지를 않아.

그런데 내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떠오를 때까지 그 시간 동안은 친족들이 도망칠 수 있게끔 기회를 달라 해가지고 도망가게 하는데, 마하나마는 물에 들어가가지고 자기 머리를 바위에다가 묶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안 떠오르죠. 그러니까 많은 석가종족들이 탈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죠. 마하나마라고 하는 분은 그런 분인데, 그 분이 부처님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여기 선원에 오면 스님 법문 듣고 수행을 하고 하면 참 마음이 편안하고 참 좋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별로 그렇게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물론 게중에는 번뇌·망상에 많이 쌓여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집에서보다는 훨씬 더 편안하게 수행하고 밥도 먹고 법문도 듣고 그렇게 할 거란 말이라.

 

마하나마도 아마 꼭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라.

"부처님! 저는 여기 부처님을 찾아와서 법문 듣고 수행하고 할 때는 참 마음이 좋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걱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나는 여기서 계속 살 수가 없으니까 집에만 돌아가면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참 죽겠습니다."

뭐 때문에 죽겠느냐 하면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거라. 집에서는 애들이 애를 먹일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지 아니면 내가 집으로 가다가 차에 받혀가지고 죽을지 어떨지 그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집에 있으면서 드는 생각이 ‘아, 이러다가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가득 든다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단련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설혹 죽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도 더 나쁜 상태에는 이르지 않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뭐냐면 무엇으로 단련하느냐면, 그 경전을 그대로 읽어드릴게요.

 

""마하나마야! 사람의 마음은 긴 세월에 걸쳐서 삿다_믿음·확신입니다.

삿다에 의해서 단련하고 있다면,

또한 실라_도덕적인 행위에 의해서 단련하고 있다면,

그다음에 학문_배움에 의해서 단련하고 있다면,

또 베푸는 것에 의해서 단련하고 있다면,

지혜에 의해 단련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수·화·풍으로 되어있는 이 몸이, 비록 밥이나 곡물에 의해서 몸을 지탱하고 있지만, 또한 무상해서 항상 부서지고 망가지는 이 육체라고 하더라도, 죽음에 의해서 까마귀나 독수리나 개나 여우나 벌레 등이 먹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믿음과 계율과 배움과 베풂과 지혜에 의해서 단련된 마음은 항상 위쪽으로 향해서 나아가느니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믿음을 자꾸 훈련을 하고, 계율을 호지하는 것을 자꾸 훈련을 하고, 또 바른 것들을 배우는 것들을 자꾸 훈련을 하고, 또 남에게 널리 베풀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자꾸 훈련을 하고, 지혜를 훈련을 하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나쁜 상태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하나마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단지, 니가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만 자꾸 되새겨봐서 그렇지 못할 거 같으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니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피할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쨌든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죽는 것이 두렵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내가 이런 것들을 자꾸 수련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수련할 것들을 하지 않고 그것을 걱정한다 해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는 거라.

결국은 여러 가지를 얘기했지만 이것도 자기 마음의 제어 부분입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출가한 스님들이나 수행자가 의지해야 되는 것은, 야나 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제어다 하는 것과 똑 마찬가집니다.

 

일본에 지진과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테레비를 봐서 잘 알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죠? 과연 저것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굉장히 침착합니다.

그 침착함이 문제를 많이 해결해주는 것들을 봐와집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압빠데소 빅카웨 따모 웨디땁보"

"비구들이여! 정신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재난을 당했을 때 마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살아가면서 재난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꼭 지진이나 해일 등 그것들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이 드는 것, 재산을 잃는 것, 그다음에 친족 중에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 명예를 잃는 것 이런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걸 '세속적인 여덟 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익을 보는 것과 이익을 잃는 것, 명예롭게 되는 것과 명예롭게 되지 않는 것, 남들에게서 비난받는 것과 남들에게서 칭찬받는 것, 그리고 행복하게 되는 것과 불행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그걸 여덟 가지 세속적인 일들(세간팔법)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피할 수는 없다는 거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해야 될 것이고, 부처님 제자가 해야 될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일을 당한다 해서 비탄에 빠지거나 아니면 격한 감정에 휘말릴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는, 자기의 정신적인 부분이 오히려 더 힘들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침착함만이 자기의 것이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가 숲이라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숲에 들어와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숲은 아닙니다. 어느 누군가의 숲이겠죠.

그게 만약에 부산시의 소유 숲이라고 해봅시다. 그럼 부산시에서는 그 숲을 개간하기 위해서 어떨 때는 한쪽에 도로를 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이 여러분들의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냥 그것을 보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동의했고, 원한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이 꼭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왜 이 나무를 베어가느냐? 왜 여기에 길을 내느냐? 하고 이유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내 것,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단지 수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그냥 보고 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 나의 것이라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고민하고 괴로워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시청에서 필요해서 나무를 베어가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고민하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는 거라.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일들은 엄밀하게 따지면 내 것,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그 상태에 그때 당시 이르렀던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변해가게 돼있다는 거라. 변하는 것들을 두고 나의 것, 내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항상 마음을 평온하고 고요하게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단련하라. 마음을 단련하는 것만큼, 부처님 제자가 해야 될 일은 그 이상은 없다 하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는 비구들에게도 부처님이 질책을 하는 것이고,

또한 세속의 일에서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살아가는데 불행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해서 부처님이 얘기를 한 것도 한결같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조복하고 조련하도록 하라.

그럴 것 같으면 틀림없이 죽음 이후에는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지 않고, 또 살아있을 동안에도 괴로워하고 슬픔에 빠질 일은 없다는 겁니다.

정신력을 갖추고 있는 것, 마음을 잘 제어하고 있는 것들이 되어있으면, 어떤 경우 어떤 재난에 부닥친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거라.

알아차리면 그것은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나의 것,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수행을 하면서 또 생활을 해나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에 많이 부닥칠 겁니다. 그럴 때는 항상 마음을 내가 얼마만큼 마음을 잘 단련되어 있나 하는 것들로서 지침을 삼아야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나? 마음이 흔들리고 또 슬퍼하는 일이 있으면 '아, 내가 그런 확신이 아직 부족하구나' 싶어서 하루빨리 그런 확신이 들도록 스스로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스스로 확신이 들어서 '아, 이것이 바른 것이다. 이 길을 따라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러한 여덟 가지 세속적인 일들을 만났을 때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기쁨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번뇌의 원인이 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쁨이 일어나는 것은 보통 우리는 즐겁고 좋은 것이라고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은 번뇌의 원인이 된다고 그럽니다. 왜 그런지 스스로 조사해보고 아, 이것이 진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맞구나 하는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번뇌의 원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조사해보고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또한 도덕적인 행위를 정립하도록 자꾸 노력하라.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할 수 있는 장치들이 반드시 확립되도록 하라.

모든 일들은 외부적인 자극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자극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확립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려버린다는 거라. 즐거운 일 괴로운 일들에 대해서 거기에 감정으로 휩싸여버리게 되고, 그러면 마음의 침착성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스스로 부처님이 정한 계율에 따라서 살아가는 생활들을 자꾸 훈련해야 됩니다. '오늘은 오계 지켰으니까 내일은 안 지켜도 되겠지' 이런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나갈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스스로 그것이 확립이 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며칠 전에 다른 곳에 법회가 있어서 거기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고속도로라고 하는 것이 산짐승들이 마음대로 뛰어다니지 못하게끔 만들어놨습니다. 산짐승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때 위험을 무릅쓰고 고속도로로 뛰어듭니다.

멀리서 달려나가는데 저쪽에 보니까 뭔가가 뛰어드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그게 뭔지를 전혀 모르는 거라. 그래서 천천히 속도를 유지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뒤에 오는 차들은 왜 저 차가 속도를 빨리 안달리고 천천히 달리느냐 하면서 빵빵거려요. 그런데도 거기가 일차선 도로이기 때문에 그대로 천천히 달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앞에 갔는데 노루가 이렇게 뛰어들어오고 있는 거라. 내 속도대로 그대로 달렸을 거 같으면 노루가 틀림없이 부딪쳤을 거라. 그런데 노루는 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거라. 저쪽으로 방호막이 있으니까 뛰어넘어 가지도 못하고 거기가서 탁 부딪치고 다시 또 돌아오고 다시 또 돌아오고.

 

미리 위험을 예상하고 비상등을 켰기 때문에 뒤에는 빵빵거리긴 빵빵거리더라도 앞질러가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노루가 그렇게 있는 것을 보고 다들 그렇게 멈추어서서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럽니다. 어떻게 멀리서 그렇게 서서히 속도를 줄일 생각을 했습니까? 위험이 감지되니까 속도를 줄이게끔 되는 거라.

도덕적인 행위가 스스로 몸에 정립이 되면 지금 당장 위험한 것들, 또 나에게 해로운 것들,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닥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조절을 하게끔 됩니다.

그것이 긴 세월에 걸쳐서 확립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오늘 당장 누군가가 저녁에 같이 어디 술 한잔 하러 가자. 그러면 스스로 내가 그걸 예방할 수 있는 능력들을 만들어라는 거라. 저 사람은 저 시간 될 거 같으면 항상 앉아서 고요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거 같으면 그 친구는 나에게 술 먹으러 가자는 소리는 안 한다는 거라. 이미 내가 그 예방책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리고 저 사람은 술먹으로 가자 해도 가지도 않는다고 생각될 거 같으면 부르지도 않는다는 거라.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배우는 것을 자꾸자꾸 단련하라.

배우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해서 그걸 유학(有學)이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계속적으로 배워야 됩니다. 계속적으로.

그런데 그 배우는 것이 세속적인 것을 배워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해탈에 이르는 길들을 배워야 되는 겁니다. 불교 공부를 하더라도 그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고, 내가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이지, 단지 지식적인 것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그거는 장애가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를 배우고 나면 그다음 것이 배울 것이 있고, 그 배운 것이 나의 수행에 도움을 주고 그것을 조사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되도록 자꾸 돼야 됩니다. 그래서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라고 하는 것들이 그 배움의 기초에는 확립이 되어있는 것들을 자꾸 배우도록 하라. 그래서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른 가르침을 가까이 하도록 만들어라 하는 거라.

그러면은 지금 당장 수행하는 것이 소홀해진다고 하더라도, 자꾸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내가 빨리 공부해야지, 내가 하루빨리 탐·진·치가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야지 하는 것들을 자꾸 되새겨 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베푸는 것에 의해서 긴 세월 동안 단련을 하라.

자기 것을 나눠준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 나눠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정신에 비해서 그 공덕은 훨씬 미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항상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일으킨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물질적인 것을 나눠주는 것보다도 훨씬 수승하다 하는 거라.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항상 온화하고 항상 자애로운 마음, 그런 말들,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리해야만이 물질적인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피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왜? 내 마음은 항상 나누어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익숙해지면 물질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를 않습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지혜에 의해서 마음을 단련하라.

여러 가지 지혜들은 있습니다. 그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상을 피하고 그 대상을 묻어버린다 해서 지혜는 개발되지 않습니다.

삼매를 개발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또한 몸을 건강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개발할 수 없다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왜? 대상을 묶어두기 때문에! 대상을 눌러주고 있기 때문에, 지혜는 개발되지 않는다는 거라.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게 돼있다는 거라. 내가 묶어두고 눌러둔다 해가지고 그것이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러면 지혜를 개발할려고 할 거 같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눈에 보이는 것이면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귀에 들리면 귀에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마음이 변해가고 있으면 마음이 변해가는 감정들 마음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될 때, 그때야만이 지혜는 개발되게끔 됩니다.

아, 이것이 마음이구나!

이것이 육체구나!

아, 이것이 변해가는 속성이구나!

아, 이렇게 하니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는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앉아서 고요하게 호흡하고 있으면 호흡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들로 인해서 지혜는 개발되어지고 또 발전해나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은 긴 시간에 걸쳐서 자꾸 스스로 마음을 단련하도록 하라. 그렇게 단련해나가면 어떤 경우 어떤 것에 조우 하더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안정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단련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대상들을 만나게 됐을 때도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밖에 없다는 거라. 아,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라.

 

설혹 내가 지금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그 어려운 것에 대해서 한탄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무엇이 부족해가지고 이런 어려운 것이 닥쳤을 때 마음이 침착하지 않고 안정감을 잃어버렸는가 하는 것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면 부족한 것을 자기가 스스로 메워야 되는 거라. 긴 세월 동안 이렇게 스스로 노력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