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삽뿌리사(Sappurisa) (20110308)

담마마-마까 2021. 5. 21. 08:44

https://youtu.be/w-6z8zj_BbU

* 삽뿌리사(Sappurisa) (20110308)

 

오늘은 삽뿌리사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삽뿌리사(sappurisa)가 뭡니까? 뿌리사(purisa)는 사람들, 중생을 뜻하죠. 사(sa)는 무슨 뜻입니까? 수카(sukha)할 때 수(su)가 무슨 뜻입니까? '잘'이란 뜻이죠. 그래서 선한 사람들을 얘기할 때, 그리고 바른 사람들, 참된 사람들이라고 얘기할 때 삽뿌리사라고 하는 용어를 쓰죠.

 

삽뿌리사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하면 '뿝바까리(pubbakārī)' 라고 하는 겁니다. '최상의 후원자', 아낌없이 베푼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하면 '까딴뉴까따웨디(kataññu-katavedī)' 라고 얘기합니다. 언젠가 까딴뉴따(kataññutā)에 대한 걸 한번 얘기한 것 같은데, '은혜를 알고 그 은혜의 감사함을 아는 것', 그래서 은혜를 아는 것하고, 그 감사함을 아는 것 그렇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보통 삽뿌리사의 두 가지 조건, 삽뿌리사가 되면 갖추어지는 것들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뿝바까리(pubbakārī)' 라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바오자나 히따야, 바오자나 수카야'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되는 그런 행위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행복을 위해서 하다 보면 당연히 자기 자신도 이익이 있게 되고 행복이 있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서 출가를 했을 때 1년차 됐을 때는 잊어먹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매일 같이 탁발을 나가야 되는데, 거기는 우기철 되면 언제 비가 올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 우기철에는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더라도 탁발하는 시간이 길면 우산들을 가져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한쪽 팔에다 우산을 끼고 탁발을 나가죠.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발의 동작에 마음을 두면서 왼발 오른발 하면서 탁발을 하고, 올 때 돼서 돌아와서 보면 우산들이 없어. 어디서 "스님 축원 좀 해주십시오" 하면 앉아서 "삽비-띠요- 위왓잔뚜~" 하면서 우산 옆에 놔놨다가 잊어먹고 들어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보면 돌아와서 보면 나는 우산이 없는데 다른 스님이 그걸 내 우산을 가지고 있어. 그러면서 "이거 니꺼지" 하면서 그걸 줘. 그래서 우산을 잊어먹은 적은 별로 없어. 그래도 나는 번번이 우산을 잊어먹는 거라.

 

또 어떨 때는 탁발을 하고 나가는데 특히 내가 있었던 왓람쁭 수행센타는 마을에서 굉장히 떨어져있기 때문에 탁발을 하는 거리가 나가는 데만 해도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어둑어둑 할 때 나가야 되는데 나가다 보면 발 밑에 뱀을 밟기도 하고 어떨 때는 뾰족한 돌이나 가시 같은데 찔리기도 하고 그럽니다.

혼자 나갈 때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있는데, 나이가 든 출가한지 오래된 스님들 뒤를 따라가면 발을 찔리고 뱀에게 발을 물릴 일이 없는 거라.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거든. 왜 그런가 하고 스님들에게 물어봤어요. 스님들은 어떻게 하기에 그거 만날 안 잊어먹고 오느냐고, 자기 거 안 잊어먹는 것은 둘째치고 남 잊어먹는 것까지 다 챙겨오고 그러느냐고.

 

그 스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탁발을 나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생각을 한다는 거라. 아, 내가 오늘 우산을 가져간다.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이 우산을 가져 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잊어먹지 않도록 해야되겠다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출발을 한다는 거라. 그러면은 자기 자신이 우산을 안 잊어먹는 것도 있지만은 다른 사람이 잊어버리고 간 우산도 눈에 보인다는 거라. 그럼 그거 챙겨가지고 오는 거라.

 

삼매에 들었을 때도 삼매에 자재하게 되면, 자유롭게 입출이 가능하게 되면, 뭐라고 스스로에게 마음의 결의를 하고 들어갑니까? 아, 내가 한 시간 후에는 삼매에서 일어나겠다 하고 마음을 두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의 비슷하게 한 시간 후에 삼매에서 탁 깨어나진다는 거라. 또는 큰스님이 나를 부를 때는 내가 반드시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겠다 하고 마음을 두고 하면 다른 사람 소리는 일체 모르는데 큰스님 소리는 금방 알아듣는다는 거라.

 

여기에 위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스님도 새벽에 어두컴컴하게 될 때는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그쪽으로 안 지나가는 거라. 돌아서 가더라도. 그러니까 가시 같은 것이 발에 밟힐 일이 별로 없다는 거라. 너도 나중에 출가한지 5년째가 지나고 10년째가 되고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 그게 바로 뿝빠까리 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하게 되는 것. 나에게는 그분이 최상의 인도자라. 가장 뛰어난 인도자라! 그래서 그 스님 하는 것만 따라서 하면 되는 거라.

아니나 다를까 나도 세월이 지나면서 5년차가 되니까 두타행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한 관념에 빠졌던 것들이 점점 떨어져나가게 되고, 그러면서 또 10년이 지나고 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되고, 이러면서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아, 인제 그때사 이해가 되는 거라. 아, 이게 뿝바까리 구나. 자기 자신의 사소한 이익이나 행복을 위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뿝바까리가 되지 못한다는 거라.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하루 빨리 담마에 눈을 뜨게 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바르게 도덕적인 행위들을 정립을 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빨리 지혜롭게 되어서 닙바나에 도달하게 될까? 하는 것들을 항상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럼 그런 길로만 인도를 한다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하면 '까딴뉴 까따웨디(kataññu-katavedī)' 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은혜를 아는 것과 그 은혜를 아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연경이는 엄마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감사할 줄 아나? 아직 많이 모르겠어? (대답) 음. 음. 뭐 미래까지 자꾸 생각할라 그래? 지금 감사할 줄 알고 하면 되지.

대부분 보면 앞에 '뿝바까리'는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듯이 하는 마음들이고, 두 번째 든 '까딴뉴 까따웨디'라고 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대해서 잘 보답하게 되는 것. 어찌보면 테라와다 불교의 전통은 여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첫 주째 됐을 때 뭘 했을까? (수행자 대답)

아니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아, 이 보리수 나무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을 주었는가, 참 고맙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보리수 나무에 대한 감사함으로 일주일을 보냈다고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다음에 6주째가 되고 했을 때, 법을 설할려고 했을 때, 맨 처음 법을 설할려고 했던 대상이 누굽니까? 알라라깔라마 하고 웃다까 라마뿟따 라고 하는 두 스님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를 수행에서 인도를 해주었던 스승이었죠.

 

왜 그런 마음을 냈을까? (수행자 대답)

물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겠죠. 그런데 '까따웨디'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이 법을 설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물론 기본 조건은 그런 분들이 나의 법을 들어서 이해할 능력이 안 될 거 같으면 아무리 감사한 마음이 있어도 별로 이익이 없겠죠. 그런데 그거는 이미 갖추어진 거고, 많은 선인들, 그때 당시만 해도 육사외도라 해서 여섯 선인들 지도자가 있었고,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그 두 분이었을까 하는 거라.

 

부모님이 날 낳아주었으면 부모님이 날 낳아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은 알게 되죠. 그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것만 그랬습니까? 자기 곁을 떠난 다섯 수행자에게도 법을 설해줬습니다. 자기 싫다고 떠난 사람인데도 그 사람들을 이익되고 행복하게 이끌기 위해서 가는 거라.

 

이런 것으로 볼 때 불교의 전통은 바로 이' 까딴뉴 까따웨디'라고 하는 '은혜를 알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함을 아는 것', 여기서 온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게 선한 사람이 갖추어야 될 두 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듣고 알고 하면서 가지는 큰 행복이 뭔가 하고 얘기를 해보라 할 거 같으면 대부분 보면, “부처님 법을 바른 담마를 자꾸 듣는 것이 참 나는 좋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기는 오면 그래도 부처님 원음들을 들을 수 있다는 거라. 그게 나는 참 좋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걸 얘기해봐라 하면 대부분 보면 “아, 그래도 스님들을 보면 참 존경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아, 내가 이 법을 접하게 되고, 이 법에 대해서 알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이 길을 계속 따라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아, 인제는 다른 것들을 찾을려고 하는 것들이 없이 이것으로써 만족한다는 거라. 그래서 이 만족감을 계속 누려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아, 지금 내가 현재 아직은 부족하구나.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들도 일어난다는 거라.

이런 것들이 보통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면서 얻어지는 축복, 이익들, 행복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마음들이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은혜를 알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는 것.

 

부처님 당시 때, 어느 상인이 만날 장사를 가기 전에 항상 스님들에게 와서 삼귀의 오계를 받고, 스님께 탁발공양도 올리고, 매번 이렇게 하고 나야 장사를 떠났어.

그런데 이 배가 풍랑을 만나서 난파된 지경에 이르른 거라. 다른 사람들은 “신이여 우리를 살려주시오” 하면서 막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뭘 하느냐면 가만히 보니까 이 망망대해에서 이 파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거든. 그 판자 조각 같은 배가 그 파도를 견딜 수 있지를 못한다고.

'그래, 우리는 다 여기서 죽겠구나' 생각하고 뭘 하느냐면, 그래도 내가 살아오면서 뭘 했는가 하는 것들을 되돌아봅니다. 만날 장사 나가기 전에 스님 앞에 가서 삼귀의 오계 받고 탁발공양 올리는 것들 그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나 고맙거든. 아, 그래도 내가 담마 따라서 살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또 실천하면서 얼마나 큰 이익이 있었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 우리 스님 참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무슨 특별한 게 있는가 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다 죽게 생겼으니까 살려달라고 그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고요하게 있으니까 당신에게 안 죽는 부적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이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장사를 오기 전에 이렇게 삼귀의 오계를 받고, 그리고 스님께 탁발을 올리고 잠시라도 앉아서 수행을 했다. 나는 그 공덕이 있기 때문에 절대 죽고 나도 나쁜데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이 태어났으면 죽게 돼 있는 건데, 내가 인간보다 더 나쁜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뭘 내가 걱정할 게 있느냐? 지금 우왕좌왕 한다고 해서, 아니면 신에게 나를 살려달라 해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왕 죽게됐으니까 그렇다고 자기들이 신에게 얘기한 것들을 신이 들어주는 것도 아니니까 이제 그사람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제 죽게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나와 같이 해라. 삼귀의 오계를 받아지니고, 고요하게 앉아서 잠시 동안이라도 수행을 하라."

그래서 그 오백명 되는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수계를 합니다. 일부분 한 백명씩 먼저 삼귀의 오계를 삼창하게 하고, 또 다음 백명씩 삼귀의 오계를 하게 하고 그러는 사이에 배는 점점 침몰해서 백명이 수계를 했을 때는 발목까지 물이 잠겼다가, 그다음에는 허리까지 잠겼다가, 결국 오백명이 수계를 다 받아서 앉아서 고요하게 있는 상태에서 배는 침몰을 해버립니다. 물론 오백명이 다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죽자마자 태어나는 게 천상세계에 탁 태어났는데 그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뺑 둘러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형태로 툭 태어났다는 거라.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 얘기를 했죠? 갓난 애기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자기들이 아, 내가 무슨 복이 있어가지고 이렇게 태어났는가 하고 가만히 돌아보니까, 저 가운데 있는 저 사람 말을 듣고 삼귀의 오계를 받아지니고 또 잠시나마 수행한 거 때문에, 혼미하지 않게끔 내가 죽음을 맞이한 것 때문에 내가 이런 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고마워하게 됩니다. 그 잠시 잠깐 딱 한 차례 은혜를 입은 것 때문에. 그러면서 이것들을 그냥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될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끔 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가서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아, 그래도 내가 이런 덕이 있었습니다. 하면서 얘기합니다. 한사람이라도 나에게 진짜 좋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이런 큰 이익이 있었습니다. 하고,

어느 사람은 나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마음이 똑발라지고 착해졌다는 거라. 악한 것이 없어졌습니다. 악한 생각이 안 일어난다는 거라. 오계를 받고 수행할 동안에 누가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느냐는 거라.

그리고 또 한 천인은 부처님한테 뭐라고 하느냐면 이런 것들은 절대 어리석은 사람한테서 얻을 수 없는 지혜라는 거라. 그 죽음의 순간에 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삼귀의 오계를 받을 생각을 어떻게 했겠느냐는 거라. 그거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한테서 절대 얻을 수 없는 지혜를 나는 얻었다는 거라.

 

또 한 천인은 죽음을 맞게 됐으니까 얼마나 슬프냐는 거라. 그런데도 나는 슬픔 없이 죽었다는 거라.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은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는 거라.

또 한 천인은 내가 여러 천인들이 있고 했는데도 내가 가장 빛났다는 거라. 그 선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천상에 태어났는데 천상에 태어나도 내가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된 거라.

또 한 사람은 내가 그런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거라. 나쁜데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라. 또 한 천인은 몸과 마음이 행복하게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한 사람의 선한 사람이 일으키는 것들은 이런 여러 가지 이익들을 불러왔다는 거라. 삽뿌리사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삽뿌리사가 되는 것들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었던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든 누구든지 삽뿌리사가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가장 큰 삽뿌리사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꾸 수행할려고 합니다. 여기에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못견디고 나가버립니다. 비슷한 성향, 비슷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끼리는 서로 잘 법에 따라서 이끌어주게 됩니다. 설혹 그중에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에 닥치고 곤란한 일들이 일어나도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야 될 일들을 다 하게 됩니다.

그게 삽뿌리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삽뿌리사가 해야 되는 다섯 가지

처음이 '까딴뉴' 그다음이 '까따웨디',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함을 알고,

세 번째가 '깔르야나밋따' 선한 도반이 되는 것,

네 번째가 그 선한 도반들에게 잘 법에 따라서 이끌어줄 때 '달르하빠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잘 이끌어주는 것. 법을 따라서 이끌어주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은 삽뿌리사의 조건이 못됩니다.

그다음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 일처럼 행하는 사람, '닥킷따다사까야 까로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그걸 성심성의껏 내 일처럼 다 해주는 것.

 

이 삽뿌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져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못 갖추면 삽뿌리사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걸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아까 얘기했듯이 두 가지로 정리가 된다 하는 겁니다. 뿝바까리와 까딴뉴까따웨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최상의 인도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악한 것들은 자꾸 절제하고 멀리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계를 자꾸 지키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을 자꾸 하고, 그런 일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선한 것으로 자꾸 바꿀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삽뿌리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삽뿌리사가 되면 일어나는 다섯 가지 특징 중에 어떤 특징들이 일어났습니까? 스님이 처음 출가했을 때 우산을 잃어버렸을 때 그 우산을 자기 것인 양 챙겨서 갖다 주는 것, 내가 혼자서 발을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발을 다치지 않게끔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사람, 그런 분들이 바로 삽뿌리사에 들어가는 것들입니다.

 

어려운 일이, 곤경한 일이 닥쳤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바른 방법으로 일깨워줘서 죽고 나서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내가 이런 수행법을 만나고 이마만큼 또 성장한 것에 대해서 고마워할줄 알고 만족할 줄 알고 또 그런 대상들에 대해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 내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바른 담마에 귀를 기울이게 될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자가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수행자가 갖추어야 될 덕목이다 하는 사실을 반드시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