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만이 명예롭다. (20160121)

담마마-마까 2021. 5. 2. 12:12

https://youtu.be/lF0SnqeF0dY

*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만이 명예롭다. (20160121)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만이 명예롭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가끔 테라와다 불자가 아니고 대승불교권에 있는 분들이 그런 얘기를 좀 합니다. “어, 스님 누구 압니까?” “잘 모르는데요” “그 사람은 스님한테서 수행 배우고 그렇게 했다던데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어떨 때는 내가 이름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배울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내가 이름은 몰라도 기억을 못해도 언젠가는 배운 적이 있겠지 하고 넘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출가한 스님들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나를 잘 알아. “아! 그 스님 내가 잘 알지요!” 그렇게 얘기하는 경우들을 듣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재가자들은 내가 못 알아볼 수가 있는데, 재가자들은 솔직히 내가 그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이가 몇인지 이런 것은 아예 염두에 안 두기 때문에 그건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만 아는 것뿐이지,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의 경우에는 다르거든.

출가한 스님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은 기억을 할려고 그렇게 하는 편이라서. 출가한 스님들이 “누구 스님이 스님을 알던데요. 스님 참 훌륭한 분이고 그래서 그 스님 가르치는 것을 내가 잘 따라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게 뭐 일 거 같애요?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남에게 좀 드러낼려고 할 때, 좀 명예롭게 되고자 할 때, 그런 얘기를 가끔씩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수행이나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 합리화를 시킬려고 할 때,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어, 저거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습니다. 부처님은 경전의 비유대로 할 것 같으면 저 멀리 히말라야 산속 오지에 깊숙이 있어도 그분이 거기 있다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는 거라. 그마만큼 부처님이 거기에 있다 하는 소리가 여러 사람들을 통해가지고 알려지게 되겠지. 그래서 “아, 저기에 부처님이 있다” 하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있는 것만 해도 마음이 좀 든든해가지고 생활하는데 좀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멀리 있어도 꼭 태양이 밝게 빛나는 거와 같이 항상 그렇게 존재가 드러나지도록 그렇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부처님을 아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 아는 거라. 그래서 “나는 부처님이 계신데 가서 법문 들었어!” 아니면 “부처님이 가르치는 수행 내가 따라했어!” “하고 있어!” 아니면 “부처님한테 탁발 올리고 보시하고 왔어!” 그게 인제 자랑거리인 거라.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나도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 들어야지' 어떻게 해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할 거고.

그런데 그런 자랑을 자꾸 하다가 보면 생겨나는 것이, 사실은 그것이 자기의 자랑거리가 아닌데, 그것은 부처님의 자랑이지. 부처님의 자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뭐냐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법대로 그 길을 가고 있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이 명예롭게 되는 것이지, 가지 않으면서 그 부처님을 만났다는 것 또는 법을 들었다는 것, 부처님한테 보시를 했다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명예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도 사실은 그랬다고 경전에는 기록이 돼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세상에서 "빤냐와로 스님 안다" 하고 그걸 내세우고 하는 그거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스님, 누구 제자요?” 하고 물어보면 “빤냐와로 스님한테 배워서 빤냐와로 스님 제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럴 경우에 그사람이 행하는 것이 빤냐와로 스님이 가르친 것하고는 영 틀리게 행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 그사람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고 “빤냐와로 스님이 뭘 잘못 가르쳤나?” 이렇게 얘기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또는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 역시 빤냐와로 스님이 참 잘 가르쳤구나”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부처님은 왜 누구한테는 잘 가르쳐주고, 누구한테는 잘 못 가르쳐주고, 어떤 경우에는 간단하게 얘기하고, 그리합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실제 그렇거든. 부처님은 출가제자들에게는 엄격하지만 아주 자상했습니다. 아주 자세하게 수행법이나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일러줍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완전하게 이해하고 납득해가지고 그 길을 탁 걸어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그렇게 해주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일반 재가자들한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잘 이해가 되도록 법을 아주 쉽게 잘 설해줍니다. 잘 설해주기는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가지고 재가자들이 그걸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관할 밖이라고 생각을 하는 입장이었거든. 그중에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가서 도와 과에 이를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거 듣고 흘려버리듯이 그냥 싹 다 잊어먹게 될 거고, 그렇지만 부처님이 할 일은 그냥 그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연민심으로서 그렇게 해주는 방식을 취했고.

 

그런데 인제 논쟁을 할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이 아예 입을 안 열었어요. 입을 안 열든지 아니면 토론을 해서 그 사람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도록 아주 호되게 얘기하듯이 합니다.

“너의 견해는 틀렸다!” 하고 해서 그 견해가 바뀌어지는 것을 보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부처님도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법을 자상하게 잘 설해주기도 하고 못 설해주기도 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칫 오해를 하는 수가 있습니다.

스님 같은 경우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을 해줬는데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걸 그렇게 알아듣는 게 아니고 자기 식대로 해석을 해갖고 요렇게 알고 있게 되는 거라. 또 어떤 거는 뭔가를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실제로는 보면 알맹이는 쏙 빠져버리고 껍데기만 남아가지고 형식만 취하고 있게 되는 것들을 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자세하게 하는 거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냥 선한 일 하면서 나쁜 것 행하지 말고 그리고 마음을 좀 더 청정히 하고 그러다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은 수행을 하고 또 공덕을 쌓는 일들로 인도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견해 자체가 틀린 경우에는 “니 견해가 틀렸다”하고 분명하게 논박을 하는 형태들을 취하기도 해고, 그래서 어찌 보면 그 방법이 또 다른 방법으로는 바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경전에 비유로써 그런 얘기를 합니다.

논이 세 개가 있다고 치자. 하나는 아주 기름진 논이고, 하나는 그냥 적당한 논이고, 하나는 자갈투성이 논이다. 너보고 거기다 씨를 심고 곡물을 재배를 하라 그럴 것 같으면 어느 논에다가 하겠느냐는 거라. 어느 누구든지 다 기름진 논에 가서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 농부와 마찬가지로 가장 기름진데 하고, 기름진 게 없어지고 나면 그냥 적당한 논에 비료 좀 넣고 해가지고 다시 하는 거고, 그것조차도 없을 거 같으면 척박한 땅을 개간을 해가지고 그 땅이 척박한 것에서 비옥한 땅으로 바뀌도록 하고 나서 거기다가 씨를 심어야 되는 것이지, 바뀌지 않으면 척박한 땅에다가 씨를 심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거는 척박한 땅은 먼저 바꾸어준다는 거라. 견해가 틀린 사람이라면 견해를 바꿔줘야 되는 형태를 취한다는 거라. 그와 같다는 거라.

 

빨리어 경전 용어에 '앗타 상히따(attha saṁhita)'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본인에게 이익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스님 법문 듣는 것이 이익 된다 할 것 같으면 법문을 자주 들어야 되는 것이고, 수행하는 것이 이익된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는 거고, 또 보시를 한다든지 공덕 쌓는 것들이 이익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공덕 쌓는 것들을 열심히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익된 것들은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잘못돼있다는 거라.

예를 들면은 수행을 하더라도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법대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하는 것들이 맞는 건데 그 방법으로 안 하고 자기식대로 수행을 한다는 거라. 고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수식관을 한다든지 이렇게 해버리는 경우, 또는 보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보시를 할려고 하는 것은 아낌없이 줄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건데 그래서 보시할려고 하는 마음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 건데 주기 싫어가지고 억지로 보시를 했다 그런 거라든지, 그런 것들은 실제로는 수행을 하고 공덕을 쌓고 여러 가지들을 하지만 이익이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빨리어 용어에 '앗타 상히따' 라고 그럽니다. '이익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하라'는 거라.

부처님이 고행은 하나의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지 고행이 수행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이 수행법은 사마타는 40가지가 있고 위빳사나 수행은 이런 것이다 할것 같으면 그 방법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자기방식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그걸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이익이 없다는 거라. 그걸 앗타 상히따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을 아는 것, 혹은 빤냐와로 스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명예롭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해야 되겠지. 그런데 부처님을 아는 것이나 빤냐와로 스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자신이 더 명예롭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거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우고 자기를 더욱 견고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라.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내세워서는 안 되는 거라. 자기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게 앗타 상히따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앗타 상히따가 들어가는 경에는 거의 대부분이 보면 "효능이 있고 효과가 있다"고 하는 '삽발라'라고 하는 단어들이 보통 들어가집니다. 이익된 것들 가치있는 것들을 할 것 같으면 당연히 자기에게 효과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뭔가 스님의 가르침을 접하다 보니까 자기에게 여러 가지 효과들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지 그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이익이 있는 일에 해당이 안 되게 된다는 거라.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여러분들 마음이 점차 더 청정해지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이 선한 것들을 자꾸 행하게 되고, 그래서 불선한 것들은 자꾸 멀리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계를 지키고 삼매를 이룰려고 하고, 그리고 무상·고·무아라는 지혜가 점점 일어나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게 될 때, 그때 그 사람은 계정혜에 따라서 나아가게 되는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게 바른 것이지 누구를 알고 있다고 해가지고 자기 자신이 명예롭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설혹 부처님도 그리했듯이, 스님이 어떤 경우에는 법을 많이 설명을 해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짧게 설명해줄 때도 있습니다. 자세하게 설해주어야 될 사람에게는 자세하게 설해주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단 하나의 게송만으로도 충분할 경우에는 하나의 게송만으로도 된다는 거라. 그걸 대기설법이라고 그럽니다.

대기설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거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것들입니다.

게송 하나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게송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지 못한 것이지, 그것이 부족한 것들은 아니게 됩니다.

 

불교가 발전을 해오다가 보니까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서 한 5세기 정도 지나고 나서, 그러니까 BC 1세기 전후로 해가지고 각각의 경전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내세웠던 것이 "이것은 부처님이 너무 어려워서 누구에게도 설하지 않은 것들이 인제 드러난 것이다. 아니면 어떤 천인이나 다른데 가서 설한 것들을 다시 들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짧은 하나의 구절이든 아니면 긴 구절이든 그것 자체는 그 나름 하나하나는 다 완벽한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보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리고 완전하게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법을 통해서 마음이 기쁨을 느끼고 또 마음이 고요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법을 듣는 일을 자주자주 해야 되는 것이고, 수행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오욕락에 대한 것들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수행을 통해서 내가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수행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항상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누구를 알고 있다든지 내가 어느 위치에 있다고 해가지고 아니면 내가 재산이 많다고 해가지고 명예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명예롭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명예롭게 돼있을 때 그분은 어디 있어도 빛이 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까이 있어도 물질을 식별할 수 없듯이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이미 명예롭지 못한 거라.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그 사람을 떠올림으로 인해가지고 '아, 마음이 포근해지고 저분이 가신 길 저분이 설한 길을 내가 따라가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설하신 분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히말라야에 있다고 하더라도 명예로운 거라.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빛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다고 해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명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자꾸 택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