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선우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될 조건들 (20160317)

담마마-마까 2022. 1. 27. 09:00

https://youtu.be/kxAy14IIVr0

* 선우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될 조건들 (20160317)

 

「선우가 되면 갖추어지는 조건들」 다시 얘기하면

「선우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되는 조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선(善)이란 거는 뭐지? 선하다는 것, 착하다는 것 그런 의미인데, 여기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선우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들을 행하든지 간에 그것들을 평온함으로 이끌어주는 것, 해탈로 이끌어주는 것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를 말합니다. 지혜로 인도되는 것,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얘기할 때 선우(善友)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우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청정하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선한 행위들이나 남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것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를 말합니다.

선우를 다른 말로 부처님이다, 제일의 선우는 부처님이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든지 우리를 해탈로 인도하는 거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분이고, 고와 고의 소멸로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을 선우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통칭할 때 보통 '아라한(Arahaṁ)'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선우를 또 다른 말로 아라한 말고 '삽뿌리사(Sappurisa)' 라는 용어들을 많이 씁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삽뿌리사에는 출가자도 있을 거고 재가자도 있을 거고 그럽니다. 그런 선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 그런 용어들을 같이 쓰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선우라는 건데 그냥 좋은 친구라는 뜻이 아니고, 그 좋은 친구라고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 친구들을 얘기할 때 선우라는 용어들을 쓰게 됩니다.

 

보통 그런 노력을 하는 걸 경전에서는 '--(vāyāma)' 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와야마는 똑같은 노력인데 육체적인 노력을 얘기할 때 보통 와야마라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한다, 그럼 좌선 한시간 동안 경행 한시간 동안 어쨌든 간에 수행이 잘 되든 못되든 몸은 어쨌든 그 자세를 유지를 해야 됩니다. 한시간 동안 좌선을 하겠다 할 거 같으면 한시간 동안 꼭 좌선을 해야 되는 거고, 경행을 하겠다 할 것 같으면 한시간 동안 경행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매일 몇시간 동안 수행을 하겠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어쨌든 지키는 거라.

실제로는 몸은 그렇게 지키고 있는데 마음은 수행하는 것은 사실은 아니죠? 오만 생각 다하고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걸 노력한다고 얘기할 때 그때 빨리어 경전 용어에서는 '와야마(vāyāma)' 라고 그렇게 씁니다.

 

예를 들면 여기 선원에 청소를 하고 있다, 그것도 몸으로 하는 것들입니다. 청소를 하긴 했는데 자기는 별로 좋은 마음으로 청소를 안 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거는 노력에는 들어갑니다. 매일 내가 목요일날 오면 청소를 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걸 쭉 해나갈 때, 그것도 노력의 일종에는 들어갑니다.

그런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때 그러한 사람들은 선우를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그거조차도 하지 않으면 될 방법이 없다는 거라.

 

노력을 또 다른 말로 하는 게, '-라바띠(ārabhati)'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가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면 청소를 하는데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청소를 한다, 그러면 몸도 바른 노력을 하고 있는 거고, 마음도 청소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마음도 바른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동일하게 올바르게 노력하고 있을 때 그런 걸 '아라바띠(ārabhati)'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을 한시간 동안 좌선을 하고 있다, 그전에는 그냥 몸만 한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을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니고 대상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리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 생각이 일어나는 것들, 아니면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들, 이런 것들을 일어나는 즉시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몸과 마음이 결합됐을 때, 그거는 엄밀하게 얘기했을 때 인제는 그거는 수행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쭉 해나가면 어쨌든 선우로 나아가는 길로써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경전에서는, 저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죠? "사마디가 없으면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으면 사마디가 없다." 거기서 말하는 사마디는 올바른 수행을 얘기합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거고, 지혜가 없는 자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수행을 얘기할 때는 '아라바띠'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명하게 바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대상이 일어났으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그것을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끊임없이 분명하게 알아차려 나가서 그 대상이 변하는 속성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래서 대상은 항상함이 없이 변하고 있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

변하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거라. 변해가는 것들은 어떠한 것이든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그리고 그런 변하는 것들은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는 내 몸과 마음도 끊임없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이 점점 엷어져 가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떠한 경우든지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그럽니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은 사라져버리니까.

알아차리는 것이 일어났으니까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대상은 반드시 사라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소리 들리고 보고 듣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니까, 일어나는 것들은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있다는 것만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괴로운 느낌이 있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대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라고만 알게 되는 거라. 괴로운 느낌이 있다고 알 것 같으면 내가 그 괴로운 느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인데,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고 알 것 같으면 그 속에는 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어떠한 것이든 만족을 하게 돼있다는 거라. 적은 것이든 많은 것이든 어떠한 대상이든 그것이 설혹 나에게 슬픔을 주는 대상이든 아니면 기쁨을 주는 대상이든 어떠한 것이든 그 대상에 대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니까 그것에 만족하게 되는 거라. 대상은 어차피 변하게 돼있는 거고, 무상한 성품을 지닌 것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육근을 분명하게 방호하게 되고, 그다음에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생활들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는 분명하게 아, 이것이 선한 것이고 이것이 해야 될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될 것이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계를 잘 지키며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 상태로 변해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게 저번에 쭉 설명했던 부분들입니다.

 

적어도 그냥 육체적인 노력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똑같이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세 가지는 얻을 수가 있는 거라.

육근을 방어할 수 있고, 그리고 만족할 줄 알게 되고, 그다음에 도덕적인 생활들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빨리어 용어 중에 노력을 뜻하는 단어가 '아라빠'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라-빠 라고 합니다. 그거는 뭐냐면 그렇게 하고 났더니, 인제는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거라. 남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거라. 그런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남을 향해서 뭔가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한테 뭔가를 한다, 남에게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고, 이것이 수행하는 방법이다" 하고 친절하게 잘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그 말을 하는 줄 모르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또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요동치는 일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할 일은 저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해주는 것이라는 거라.

남에게 법을 설하고 뭔가를 행하고 하는 자비 이타행을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 '아라-빠'라고 합니다.

 

이타행을 하더라도 돌아올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이타행 하는 것들이 바른 것들이기 때문에, 그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나눔을 위해서 뭔가를 행하게 되는 것들, 그런 노력들을 하는 것들을 '아라-빠'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라고 하는 자아가 어느 정도 떨어져나가지 않을 거 같으면, 남을 위해서 뭔가를 행동한다고 할 때는 참 어렵습니다. 뭔가 돌아오는 걸 바라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속상해하게 되는 거고.

 

노력은 이런 용어들이 있지만 그것도 반드시 단계를 거치면서 이렇게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지금 아직 내가 감각기관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것들에 끄달려들어가지 않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전에 뭔가 남을 위해서 뭔가를 막 한다? 그건 대부분 보면 자기 생각이나 자기 관념하에서 뭔가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법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도 부처님 가르침을 그냥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장들이나 자기 생각들을 그속에 넣어가지고 전달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거라.

 

어쨌든 이런 노력의 3가지들을 얘기를 했는데 모두 다 노력에 들지만, 선우라고 얘기할 때는 적어도 마지막 부분에 해당이 될 때 그걸 선우라고 그럽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선우가 갖춰야 될 조건들은 끊임없이 갖춰야 되는 거고, 또 그 길을 끊임없이 그냥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선우가 갖추고 있는 조건들을 갖추어 나가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런 상태들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스님은, 그거 알파고인가? 컴퓨터 하고 이세돌 하고 바둑하는 걸 내가 보지는 못했는데 인터넷으로 그거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알파고가 끊임없이 진화한다면서? 왜 진화를 하는 거라?

데이타를 수집해가지고 그것들을 분류를 하고 판단해가지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처리를 하게끔 되는 거죠.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이 되면 그와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게 되는 거라. 여러분은 수행하면서 얼마만큼 데이타를 수집해갖고 똑같은 실수를 안 저지르고 있는 거라?

 

수행하는 것도 데이타를 모으는 것과 똑 마찬가집니다.

분노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분노가 일어나는 줄 몰랐어. 성이 난 줄을 몰랐어. 그런데 수행하다 보니까 '어, 내가 성을 내고 있네' 하는 걸 알았다, 그러면 데이타가 축적 된 겁니다.

그다음에는 좀 있다 보니까 성을 낸 것이 '왜 내가 성을 내게 되었지?' 하고 안 게, 처음에는 저놈의 자식이 뭔가를 말을 해가지고 내가 성을 냈구나 했는데 그다음에는 하다가 보니까 어, 성을 낸 거는 저놈이 뭔가를 했지만 성을 낸 것은 나라는 거라. '내가 성을 낸 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관찰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이 선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어버리면 내가 성을 내게 돼있다는 거라. 내 마음이 뭔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것이 성냄으로 바뀌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바뀌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뭔가 대상으로 인해서 그게 밖에 것이든 아니면 안에 것이든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성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어, 싫어하는 마음이 있네' 하고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수행할 때 다리를 관찰해보면 처음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알게 되죠? 그렇죠? 그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알고 나서, 그 고통스러운 느낌이 강해지면은 그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힘들어하는 거라. 그건 쉽게 말하면 분노하는 겁니다. 성을 내고 있는 거라. 성을 내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라.

몸과 마음에 대상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즉 대상에 접촉하는 것에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느낌이 우선인 것이지 그것이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무덤덤한 느낌이든 그 느낌이 우선인 것이지, 분노가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 좋은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싫은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럼 그다음에는 대상에 뭔가 싫어하는 느낌이 탁 일어날 것 같으면, '싫어하는 느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지, 그 뒤에 일어난 거 '성냈네' 하고 알아차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데이타가 계속 축적되고 수행을 해오니까 그렇게 바껴져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싫어하는 느낌도 가만히 관찰을 해보니까 이것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해가고 있거든. 싫어하는 느낌도 마찬가지고 좋아하는 느낌도 마찬가지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가만히 고정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싫어하는 느낌만 계속 있게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나지는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느낌이 강해지니까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분노로 바뀌어버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리를 관찰해보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더욱더 강해지니까 '아, 이거 도저히 못 참겠다' 하게 되는 것이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못 참겠다 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 좋아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마음들을 그냥 변하는 걸 그대로 관찰 해보면 분노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 그 마음을 그대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게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분노는 내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원인을 알았기 때문에 그 원인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하는 속성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속에 '아, 내가 성을 낸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로 인해서 성이 났다고 하는 것'은 아예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알파고도 아마 그와 같은 과정들을 계속 데이타를 축적할 것 같으면, 그와 같은 과정들을 겪을 수가 있다는 거라. 기계가 그렇게 하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성내고 아니면 욕심부리고 하는 것들을 일평생 지속한다, 그거 참 바보같은 짓들이라. 참 어리석은 거라. 쭉 이때까지 그렇게 경험을 수없이 해왔으면서 계속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거는 참 잘못 살고 있다는 얘기라.

그런 것들은 적어도 피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험하는 것들은 누구라도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내 다리를 누군가가 밟으면 나는 괴롭다고 아는 사람들은, 내가 남의 다리를 밟으면 그사람도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는 속성을 지닌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지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모든 생명들은 동일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바뀌어져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지속적인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적어도 데이타가 축적 돼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그냥 흘러보냅니다. 일어나는 대로 그냥 알아차리면 당연히 흘러가버립니다. 싫은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좋은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어떤 경우든지 느낌은 한번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속성을 지닌 것이지 그것이 연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느 생명이든지 그렇게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경험한 건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똑같이 경험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그러한 똑같은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똑같은 느낌들을 가지게 돼있다는 겁니다. "생명은 동일한 것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한다든지 남이라고 하는 개념들이 점점 엷어져가게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이렇게 알아차려나갔다, 그러면 느낌은 느낌일 뿐이지 그 느낌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단지 느낌은 한번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들을 압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분명하게 그렇게 압니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고 있다" 하고. 그런 견해를 분명하게 압니다. 딱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내 몸에 대한 집착을 어떤 것도 하지를 않게 됩니다.

그것이 "유신견이 끊어져 나갔다" 하는 겁니다. 내 몸이 존재하고 있다, 항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연히 유신견이 끊어지면 의심하고 하는 것들 아, 내가 이 길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이 길을 계속 가야되는가? 하는 그런 의심들을 잘 안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조건이 되더라도 그 형식적인 것들에 매이지를 않게 됩니다.

어떨 때는 좌선을 한 시간 해야 되는데 두 시간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를 않게 되는 거라. 내가 이렇게 수행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경행을 하고 있다? 그것에 개의치를 않게 되는 거라.

어떠한 형식들이나 형태들에 대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어떤 카테고리를 가지고서 그것을 범주에 넣지를 않게 되는 거라(계금취). 이것이 옳다, 이것이 그르다, 남을 비방하려고 하는 것들도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고, 또 자기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들도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고, 그런 것들이 계속 지속되게 됩니다.

 

그럴 동안에 나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고 있다는 것만 지속적으로 계속 알게 됩니다. 그것이 일정 부분 쭉 진행이 되다 보면은, 이제는 자기 자신이 의심하고 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사실은 유신견이 없어졌을 때 유신견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의심이 사라져버렸을 때 ", 인제는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보면은 ", 이때까지 내 몸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없어져버렸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 어떤 형식적인 것에도 매이지 않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상태를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이런 과정들을 겪게 됐을 때 그 사람은 자기 길이 분명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전에는 그냥 몸으로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 인제는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돼가지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청소를 하더라도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가지고 청소를 하게 되는 거고, 밥을 먹더라도 알아차림을 지니고 밥을 먹게 되는 거고,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변해가게 됩니다. 그러니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는 사람에게는 '아따삐 삼빠자노(ātāpī sampajāno)' 그럽니다. "열의를 가지고 분명하게 안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더욱 더 그길로 가서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열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계속적으로 몸과 마음으로써 알아차리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분리된 상태에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사실은 아따삐 삼빠자노 라는 것은 붙어서 오는 겁니다. 삼빠자노가 되는 상태에서 아따삐(열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바른 아따삐가 될 것 같으면 반드시 삼빠자노가 되게 돼있습니다. 대상은 일어났으면 사라졌다는 것을 그게 끊어짐이 없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삼빠자노를 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열의가 없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이렇게 됐을 때를 "아, 인제는 바른 노력을 하고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바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선우가 되기 위해서 바른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적어도 이 상태를 선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는 아직은 선우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 선우는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선우'의 다른 용어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선 '아라한'이라든지 아니면 '삽뿌리사' 라고 하는 성자를 얘기할 때 선우라고 한다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선우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갖추어나가게 될까?"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밋떼 바잣수 깔르야나(Mitte bhajassu kalyāṇa)"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한 사람들과 더욱 더 가까이 있을려고 노력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경을 읽다가 '아, 부처님이 참 위대한 분이다'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날 때가 있을 겁니다. 그걸 이를 때를 얘기합니다.

지금 선우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것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이상 가는 선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접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아, 내가 이 가르침이 진짜 나에게 맞는 것이고 이 길을 가겠다' 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할 것 같으면 그 선우와 교재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착한 사람들하고 교재하라는 것이 아니고, 경을 하나를 읽더라도 부처님이 직접 나한테 나타나가지고 경을 얘기해주는 것처럼 느낀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선우와 교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직접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행하는 것들이 부처님 말한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들을 내가 분명하게 인식할 것 같으면 나는 지금 선우와 교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꼭 부처님이 아니라도 그런 선우가 옆에 있는 것들이 여러분들에게는 좋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그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나 아니면 스님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스님들도 선우에 해당이 됩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일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선우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선우는 한사람이어야 됩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어도 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당연히 여러 사람이어도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접했을 경우에는 그 가르침을 그대로 부처님이 가르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또 저러한 스승으로부터 저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경우에는 그것도 똑같이 부처님이 나에게 직접 말해주는 것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적어도 두 사람의 선우가 내 옆에 있게 되는거고, 나는 두 사람의 선우와 교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떠한 수행법이든 그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선우가, 나의 스승이 여러 사람이 되는 거라는 겁니다.

 

처음에 스님도 수행법을 배운 것이 태국 남쪽에 있는 위벡 아솜이라고 하는 사원에서 배웠어요. 버마 마하시 스님의 직계제자가 태국으로 처음으로 파견돼가지고 나와가지고 위벡 아솜에서 수행법을 지도하고 있었거든.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하여튼, 그래도 나는 선근공덕을 많이 쌓았던지 가는 절이 거기였어요.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수행이라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거기서는 얼마 안 있었어요. 내가 출가하겠다 하니까 거기서는 출가 안 된다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치앙마이 쪽으로 옮기게 된 건데, 그래서 지금의 내 스승인 아짠 통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스님이 아니었으면 아짠 통 스님으로 인도가 안 됐을 거라.

 

그래서 나는 처음 법을 인도해준 스승인 그 스님에게 되게 고마워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 속에 스승을 떠올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스승도 떠오르고, 아짠 통 스님도 떠오르고, 또 다른 버마에서 집중적인 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의 수행 성과를 오르게 해준 우 빤디따 스님도 떠오르고 여러 스승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 스승들은 수행방법을 지도하는 게 다 다릅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전혀 문제가 안 돼 나에게는. 그 수행법이 심념처 수행법을 따르는 것이든, 아니면 수념처 수행법을 따르는 것이든 그것이 문제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걸 얘기할 때 "선우와 교재하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은 전부 여러분들에게는 스승이 됩니다. 그 가르침도 스승이 되고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도 여러분들에게는 스승이 되는 겁니다.

그 스승들은 여러분들을 속박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선원에서 떠난다고 해서 왜 가느냐고 물어보기를 해, 아니면 다른 데서 수행한다고 해서 왜 이 수행 안 하고 저 수행하느냐고 얘기를 하기를 해, 속박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스승이 자기를 속박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스승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겁니다.

 

한국 불교에서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스승과 제자 간이 그런 속박의 구조라. 그래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스승을 이 스승에게서 저 스승으로 옮겼다, 난리가 납니다. 속박돼있다고 보기 때문에. 스승은 어떠한 경우든지 제자들을 속박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때가 되면 언제든지 가도 됩니다.

그게 인제 선우와 교재하라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적어도 선우의 길을 따라갈려면 그것이 가장 먼저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수행법들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부처님이 직접 나에게 얘기하듯이 그런 존경을 가지고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숫다지와(suddhājīva)" 라고 합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삶이 올바르게 되나가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마음과 말과 몸으로 행하는 것들이 바른 것들이 되지 않으면은 삶은 청정하게 되지를 않습니다. 조그만한 실수라도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선은 작은 것부터 또 실천이 되게끔 됩니다. 아주 조그만한 시간이라도 내가 시간이 되면 잠깐 십분이라도 내가 남을 위해서 자애의 마음을 수행하겠다,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겠다, 청정한 삶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걸 벗어나서 청정한 삶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

무리 물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한방울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나는 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것들도 처음부터 악한 것들이 내마음에 가득 자리 잡는 법들은 없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침투해 들어오는 겁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어떠한 것이든 악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조그만한 것이라도 일어나지 않게끔 해야 되는 것이고, 아주 하잘것없는 것이지만 선한 것들은 자꾸 행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얘기할 때 숫다지와 라고 얘기합니다. 청정한 삶을 자꾸 살도록 하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아딴디따(atandit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요동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흥분하지 않고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과장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좋고 싫은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좋고 싫은 것들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는 것이지,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나고 성냄이 일어나고 또는 욕심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빠띠산타라 웃땃사(paṭisanthāravutyass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 경전 자체를 직역할 거 같으면 친절하게 행위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거는 다른 말로 얘기할 것 같으면 마음이 유연한 것들을 얘기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지적할 것 같으면,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되는 거고, 누군가가 잘못을 했을 거 같으면 그 잘못을 용서해줄 줄 알고,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친절하게 행동한다 얘기합니다.

막 남에게 마음을 내가지고 친절하게 뭔가를 행위하는 것들도 해당이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나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완전한 행위를 한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모를 것 같으면 그것은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 완전한 존재가 돼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잘못된 행위들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완전하게 돼있을 거 같으면 모든 존재들이 아직 불완전한 것들을 알기 때문에 가엽게 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내가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돼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더더욱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줄 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해줄 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거라. 그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경전에는 "유연성 부분은 두 가지가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가르침에 대한 태도입니다. 어떤 고정관념들이나 선입관을 갖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새로운 진리를 알면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버린다는 거라.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해버려야 되는 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는 생활하는 것. 욕심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들 이런 것들 두 가지를 유연함에 해당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선우가 되는 사람들이 갖추어지는 조건들」 중에서, 또 갖추어야 될 사람이 생각해야 될 조건,

다섯 번째가 "아짜라 꾸살로 시야(ācārakusalo siyā)" 라고 얘기합니다.

"예의범절을 지켜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거는 특별하게 얘기하지 않더라도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들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처음에 태국 갔을 때 그랬습니다. 그때 한 삼십년 전만 하더라도 스님들을 재가자들이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그게 바뀌어져 버렸는데, 그러다 보니까 스님들이 일반 재가자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자 막 출가한 스님들이라도 재가자들한테 “야!” “자!” 이렇게 했습니다. 높임말을 붙이는 법이 없어요.

태국말로 뒤에 "-카카" "-짜" 이런 단어를 붙여야 되는데, 그게 높임말입니다. 그런데 태국스님들이 재가자들한테 아무리 나이 든 재가자들한테라도 “밥 먹었니?” 하고 물어보지, “밥 먹었습니까?” 하고 높임말을 하는 적은 없어요. 그게 굉장히 이상했어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따라갔어요. 그렇게 언어가 길이 들은 거라. 그런데

어느날 큰 스님이 와서 “너 왜 나이든 사람한테 높임말을 안 하느냐?” 그러는 거라.

그래서 난 당연히 스님들이 재가자들한테 높임말을 쓰지 말아라 하던데요? 그러니까,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워가지고 있느냐? 네가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출가를 했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가는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이지, 부처님이 어디 제자들한테 그게 재가자이든 출가자이든 그렇게 낮춤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경전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그러면서 되게 혼을 내는 거라.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내 스스로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가지고 나는 누구보다 높다, 누구보다 낮다 하고 만들어나가고 있구나.' 하는 거라.

예의범절은 그런 것들을 부수어버려야 됩니다.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내 말을 들어야 되고 내가 하는 것들을 따라야 된다, 그러는 법이 어딨어요?

한 번이라도 이해할려고 해줬느냐는 거라. 그것들을 부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고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부서져나갈 때 아, 내가 예의범절이라는게 뭔가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걸 앗짜라 꾸살라 시야.

'앗짜라'라고 하는 것은 행위들입니다. '꾸살라' 선한 행위들입니다. '시야' 선한 행위들이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지켜나가라는 거라. 선한 행위라는 것은 내가 행한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든지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하게 돼야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마음이 되어야 되는 거고, 그 사람들에게도 기분좋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이익되는 것들 이로운 것들 그것이 선한 것들입니다.

그런 선한 행위들이 바로 예의범절이라는 거라.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이 "빠못자 바훌라(pāmojjabahhula)" 라고 그럽니다.

'바훌라' 라는 것은 많이 충만된 것들을 얘기합니다. '빠못자'라고 하는 것은 기쁨, "기쁨으로 충만된 것"을 얘기합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가? 또는 이 선원에서 이렇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불교를 만난 것이 얼마나 기쁜 건지 생각을 해봤습니까? 또는 내가 이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여기 와서 조그만한 시간이라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내가 행하는 뭔가가 얼마나 기쁜 건지,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그리고 모든 일들이 기쁨으로 충만되도록 하라는 거라. 기쁨을 주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결점만 찾고 불평불만만 자꾸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남을 비판·비난만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는 기쁨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꾸 기쁨을 찾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충만될 수 있도록, 어떠한 것을 하더라도 그것에 기쁨을 느끼도록 해야 됩니다.

설혹 남이 나를 때린다 하더라도 아, 저 사람이 나를 죽이지 않아서 얼마나 기쁜가?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전도를 내보낼 때 한 얘깁니다.

 

이런 것들이 적어도 선우라고 하는 분들이 갖추고 있는 조건이고, 여러분들도 반드시 선우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조건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꼭 그렇게 어려운 길만은 아닙니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고, 한발짝 한발짝 뗄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여러분은 고의 소멸에 이르는 괴로움을 넘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그 길을 그대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평소에 행복하다 평화롭다 이런 마음들이 굉장히 많은데, 혹시 그것이 좋아하는 마음의 갈애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답변 : 무엇으로 인해서 행복하다는 겁니까?

수행자 : 그냥 행복하고 평화롭다. 어떤 때는 행복한 것을 추구한다, 평화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런 것들이 항상 떠나질 않고 있는데...

 

스님 :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는 것은 참 좋은 겁니다. 그 마음이 충만되어 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마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염려되는 것들은 뭐냐면 자기 스스로 인위적으로 행복하다는 것들을 자꾸 관념화시키는 경우들이 간혹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되게 조심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은 누가 나에게 나쁜 소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 저것도 지나가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행복한 마음을 그냥 그대로 유지할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거든. 그런데 행복하다는 마음은 그때는 유지를 했는지 몰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이 한 말이나 행위들에 대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아예 떨어져나간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어떨 때는 자기 마음은 행복해 있는데, 그 사람을 생각하면 별로 좋은 마음이 안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행복해져야 된다'는 것을 관념화시켜놓고 거기에 마음이 붙잡혀있어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행복이 밑바탕이 되어있는 상태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밑바탕이 돼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이나 그런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변하는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변하는 것들을 볼 거 같으면 적어도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고, 그가 한 행위나 말이 변하고 있는 것들을 볼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은 아예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되게 됐을 때는 내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마음이 깨지지 않게 되는 거고, 당연히 그사람에 대해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져버리는 상태라는 거라.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질려고 하는 것은 참 좋은 겁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