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인생을 위협하는 유신견을 다스리는 열 가지 (20160310)

담마마-마까 2022. 1. 24. 09:00

https://youtu.be/s88kNh-pLgE

* 인생을 위협하는 유신견을 다스리는 열 가지 (20160310)

 

오늘은 인생을 위협하는 유신견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유신견이 여러분들 인생을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은 잘 못하죠?

그런데 되돌려서 생각을 해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다가 성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맨 먼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이 떨어져나가면 그다음에 계금취나 의심들이 더불어서 떨어져나가는 형태를 띠고 그래서 성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형태를 띱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나갈 때 가장 먼저 "자신이 어느 정도 진척이 돼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얼마만큼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또한 주변에 선우, 좋은 친구들 좋은 도반들이라고 판단하는 것들의 기준을 잡을 때도 얼마만큼 "그 도반이 유신견을 지니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유신견을 지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급격하게 마음이 감정이 많이 바뀌고,

그러니까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리고 뭔가 외부적인 대상에 대해서 급격하게 말이나 행동이 나오고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그런 것들이 잘 안 일어나게 될 때,

그리고 마음에서 얼마만큼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또 그 사람이 불교적으로 볼 것 같으면 얼마만큼 오계-도덕적인 행위들을 잘 실천하고 있는가?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얼마만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그런 것으로써 보통 판단들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인생에 위협되는 것들을 바꿔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것을 멀리 떠나도록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경전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스스로 마음에 자애의 마음들을 자꾸 지니도록 하라. 하고 그럽니다.

선한 마음들을 자꾸 지니고 있을 것 같으면 그래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협하고 하는 것들은 적어진다 하는 거고, 완전히 떨어질 순 없지만 그래도 많이 떨어져나간다 하는 거고. 그래서 자애명상 하는 것들을 자주자주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마음에 자꾸 충만되도록 그렇게 하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계를 자꾸 지키는 것들, 그래서 선하고 악하고 하는 것들에 대한 구분을 분명하게 할 줄 알아서 말이나 행위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항상 선한 것들을 할 수 있도록 자꾸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래서 대상 자체를 놓치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위협하는 것들은 많이 떨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자기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은 거의 그 두목이

'유신견'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견해'로 인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제거하는 것이 수행에서는 또 참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왕에게 공양을 지어서 요리해주는 요리사가 맛있는 걸 자기 왕에게 지어서 올렸어요. 그러면서 그 요리사가 기대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맛있게 정성스럽게 했으니까 그 왕이 “오늘 참 맛있었어” 하고 얘기해주길 바라게 되는 거라.

그런데 왕은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이게 맛있기는 맛있는데 맛있다고 할 것 같으면 쟤는 가지 요리가 맛있다고 하는 견해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그 얘기를 안 합니다. 그래서 그다음날 돼서 이 요리사가 아주 맛없게 요리를 해서 줍니다. 그러면 적어도 임금님이 오늘 왜 이렇게 맛이 없느냐 하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면은 자기 자신은 좀 더 맛있게 지을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 왕도 그것을 먹어보고 맛이 없는 것은 알고는 있었는데 맛없다는 소리를 또 안합니다.

 

그와 같이 몇 번을 그런 것들을 해줍니다. 이 요리사가 어떤 날은 아주 하잘것없는 것들, 어떤 날은 아주 고급진 것들 이런 것들을 해주는데 왕이 한번도 그 얘기를 하지를 않거든. 그런데 끝내 이 요리사는 자기 왕 임금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만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데, 왕은 그 말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가지고 그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됩니다.

아, 이걸 내가 말을 해주면 참 좋은데 그것으로 인해서 미치는 영향들을 자꾸 생각을 하다 보니까 말을 안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생각을 해봅니다.

'아, 내가 지니고 있다는 것, 이게 맛있다, 맛없다, 이게 비싼거다 아니면 아주 하잘것없는 거다 이런 것도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인데 내가 왜 여태까지 이런 것들에 매여가지고 이렇게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왕위를 버려버리고 출가해가지고 벽지불이 됐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숫따니빠따에도.

 

적어도 감각기관에 대한 것들을 잘 제어만 한다고 하더라도 유신견은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유신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첫 번째가 뭐냐면, "목적을 바꿔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갈애가 일어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것,

또 하나는 살고자 하는 충동에 대한 것,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다 아니면 내가 뭔가를 하기 싫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갈애,

이 세 가지를 보통 생명을 끊임없이 윤회시키는 갈애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목적을 바꿔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감각적인 것들이 일어나면 맛있다고 알 거 같으면, 맛있는 걸 안다고 하는 이것이 나를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나의 마음을 고요하고 청정하게 만들어주는 것인가? 하는 걸 자꾸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그렇게 되는 법은 없다는 거라. 맛있는 걸 맛있다고 알고, 맛없는 걸 맛없다고 안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말을 하고 또 행위를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바뀌고 해탈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내가 궁극적인 행복을 얻는다든지 또 내가 괴로움을 끊는다든지 평온하게 지낸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그런 것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든지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또 누구든지 죽고 싶어하지 않는 거고. 그런데 나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가지면은 다른 생명에 대해서 평등하게 지녀야 되는 마음들을 자꾸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들을 해도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거라.

 

내가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듯이 바꿔말하면 상대방도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 거고 모든 생명들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길 바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꾸 인식을 하고 관찰하라는 거라.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 끝은 없습니다. 그래서 만족할 수가 없는 것들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것을 원한다든지, 또는 그것을 가질수 없다 해가지고 아예 게으름을 부려버리고 할 일들을 하지 않게 된다든지, 이런 것들도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첫 번째가 목적을 바꾸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뭔가를 행할 때 그게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것이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 게으름 부리는 것들에 대한 것이든, 그런 것들이 일어날 때마다 아, 이것들이 내가 가는 방향 내 목적에서 바른 것인가, 아닌가? 바르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버려버리라는 겁니다.

 

가끔씩 스님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님한테 보시를 하고 싶다 해가지고 누군가가 보시를 합니다. 그러면은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보시를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은 그것보다 더 많은 보시를 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들여다 보면 그분은 그럴만한 보시를 할 만한 입장이 못 되는 거라. 보시가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두껍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본인은 그걸 모르는 거라.

실제 범어서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에 무슨회, 무슨회가 있다는데 그 회에 들기 위해서 뭔가를 다른 사람들이 보시하면 자기 자신도 그거를 보시하기 위해서 무리를 한다는 거라.

어떨 때는 주지스님한테 오백만 원을 갖다 냈는데 주지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이 일용직 노동자인데 저렇게 할 입장이 안 되는데 하고 있다는 거라.

 

그 얘기를 할 때 내가 순간적으로 느낀 것이 아, 사람들이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더욱더 두껍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의미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라.

물론 그 --- 무슨회에 들어가지고 나는 무슨회 회원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라.

또 그렇게 보시한 것들이 보시의 근본적인 의미들을 담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본인이 뭔가를 행할 때 아, 이것이 세 가지 갈애를 일으키는 것들인가 아닌가 하는 걸 잘 살펴야 됩니다. 그 갈애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은 행해야 되는 것이고, 그 갈애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은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행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하라는 거라. 그 목적을 바꿀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감정은 나누어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진·치입니다. 그러면 이게 탐욕인지 이게 성냄인지 이게 어리석음인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되는 거라.

아, 뭔가를 더 먹고 싶다. 그럼 먹고 싶은 욕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또는 내가 뭔가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 맛있는 것을 내가 조금 더 먹고 싶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그것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감정은 자꾸 나누어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 이것은 탐심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알지 못하면 그것에 빠져버립니다.

그것에 빠져버리면 더욱더 "라는 것들을 두껍게 만든다"는 겁니다.

 

내가 돈이 있어서 맛있는 걸 사먹는데 너가 왜 그런 것들을 간섭하느냐?

일견 맞습니다. 그것이 욕구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욕구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들이라는 거라.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맛있는 걸 사먹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먹을 수 있는 조건들이나 형편들이 될 때 그것은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는 그러지 말아야 되는 것이라. 그것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계속적으로 일으켜서 나라고 하는 것을 더 두껍게 만들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먹는데 너가 왜 그러느냐 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라.

 

탐·진·치가 일어났을 때는 그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들을 그냥 '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하고 알기도 해야 되겠지만 '아, 이것은 내가 버려야 되는 탐욕이다' 하고 분명하게 자꾸 인식하고, '이것은 내가 버려야 되는 성냄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고, '이것은 내가 게으름 피우는 마음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버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으면 지금 현재 듣고 말하고 하는 것들이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는 내가 행하고 하는 것들도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주관적이지를 않습니다. '내가 관찰했다', '내가 듣는다' 하고 알아차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항상 주관적이 돼버립니다. 내가 말하고, 내가 행하는 것으로.

대상을 자꾸 객관화시키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그렇게 관찰을 할 때 나와 남에 대한 관찰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자타에 대한 관찰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소리를 했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러면 내가 화가 난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그사람이 화를 냈다, 그러면은 그상대방이 화를 일으킨 겁니다. 조건이 같다고 할 것 같으면 살아있는 생명은 누구든지 꾸중을 들으면 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나만 잘해나가고 내가 바르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모든 생명들도 똑같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자꾸 인식할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싫은 소리 듣기를 바라지 않듯이 다른 사람들도 모든 생명들도 싫은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알아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들이 익숙해지면, 인제는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대상 그리고 모든 대상으로 그 범위들을 넓혀가야 됩니다.

자기 자신은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만약에 내가 평범하게 얘기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화를 일으켰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이 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이 내가 뭔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화를 일으켰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가 왜 그 얘기에 화를 일으키느냐고 대응을 하게 된다는 거라.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장소와 조건들과 대상이 맞아야만이 설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일반적인 얘기가 내가 화를 일으키지 않고 말한 것이라고 해서 그사람이 화를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본인도 아, 내가 뭔가 말하는 방법이 미숙했다고 판단해서 그것을 바꿀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화를 안 일으켰다고 다른 사람이 화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 반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내가 화를 일으키는 것들이 싫고 괴롭다는 것을 알듯이, 저렇게 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얼마나 괴롭고 힘드느냐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아, 내가 저렇게 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알 것 같으면 저기 자신을 자꾸 반성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 관찰이 능숙해질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자타에 대한 관찰을 자꾸 할려고 하는 연습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무리하지 마라.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무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감정이 일어났으면 감정을 더욱 더 확대시키고, 또 뭔가 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사기 위해서 뭔가를 자꾸 하고, 그 뭔가를 목표를 했으면 목표에 죽을동 살동 하고 하는 것들, 그것이 혹 나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보아야 됩니다. 무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자꾸 알아야 됩니다.

먹고 자고 또 생활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를 더욱 더 강화시켜주고 하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해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지금은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재산을 백억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백억을 얻었다. 한 세월 다 가버리고 나면 뭐 할 건데? 그동안에 왜 나는 수행을 못했고, 나는 왜 그동안에 남을 그렇게 마음 아프게 했을까 하고 후회 안 할 것 같으냐는 거라.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 특히 나를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나의 재산, 나의 명예, 나의 것이라는 것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로 인해서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스님은 올해가 지나고 나면 또 법납이 한 살 올라갑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그 법납이 한 살 올라가는 내년에는 무엇을 해야지 하고 목표를 잡아놔 놓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뭔가를 또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리를 하게 됩니다. 나의 성을 쌓기 위해서 더욱 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우리 선원은 땅 하나 없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선원을 마련해야지. 목표는 좋습니다. 그럼 내년이 됐습니다. 안 됐을 거 같으면 열심히 노력했지만 안 됐다 하고 놓아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무리하게 내년에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 그럴 것 같으면 문제가 생겨나버리게 됩니다.

자신에게 생겨나는 감정들 그런 것들을 확대해서 무리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유신견을 완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섯 번째가,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선한 것인지, 이것이 악한 것인지?

이렇게 보면 됩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행하는 것들은 악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필요불가결한 행위, 행복하게 되기 위한 행위, 도움이 되기 위한 행위, 그것들은 선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행위도 필요불가결한 것이고 행복하게 되기 위한 것이고 이익이 되기 위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나와 다른 이들에게 동일하게 이익이 되고 행복해져야 되는것이지, 나만 행복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될 것 같으면 악한 것들은 행하지 않을려고 해야 하는 것이고, 선한 것들은 자꾸 행할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선악을 구별할 줄 알고 그것에 따라서 행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다음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생명은 평등하다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가, 모든 생명들은 동일하게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은 평등하다고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아무리 조그만한 생명체라고 하더라도 그 생명체는 나와 똑같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거라. 살아있는 존재가 괴로움을 당하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런 살아있는존재들은 항상 행복하기를 바래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파괴하고 그것을 바꾸고 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들은 평등하다고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인제는 수행하는 부분에서 지혜에 대해서 발견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홉 번째가 "지혜에 대해서 발견하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들은 무상·고무·무아의 성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대상을 대할 때 무상·고·무아로써 자꾸 볼려고,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들을 벗어나는 조건은 없습니다. 수행의 대상도 무상·고·무아인 것이고, 살아가는 데의 대상들도 전부 무상·고·무아입니다.

그것을 수행을 통해서든 살아가는 생활을 통해서든 그것을 자꾸 발견할려고 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가 그렇게 지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발견하고 나면은, 집착함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집착함이 없는 것, 무집착의 삶을 살아가라.

어떤 것도 집착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고 알기 때문에 남들이 실수를 했든 남들이 나쁜 일을 했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설혹 내가 선한 일을 했든, 설혹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집착하지 않게 될 것 같으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집착들도 없어지는 거고, 존재할려고 하는 집착들도 없어지는 거고, 그리고 뭔가를 목표로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고 얻을려고 하는 것들도 없어지는 거고, 그러한 집착들은 서서히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윤회하는 것들은 집착하는 것과 마음의 번뇌가 있어야만이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존재를 하지 않으면은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자꾸 노력을 해야만이 적어도 수행을 하면서 「나라고 하는 견해」들을 제거를 해나가게 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나라고 하는 견해들을 점점 엷게 만들어나가지 못하면, 수행에서 나라고 하는 견해를 제거를 한 듯이 보여도 그것은 다시 또 나타납니다. 고요해지면 밑에 있는 것들이 잠재돼있던 것들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압니다.

'아, 내가 아직 유신견을 끊지 못했구나!'

 

수행을 통해서도 유신견을 제거를 해나가야 되겠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꾸 만들어나가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인생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인 유신견을 제거하는 방법들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세 번째 갈애에 마지막이라고 하는 갈애가 잘 이해가 안되는데 단멸론 하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스님 대답 : 단멸론은 죽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하고는 완전하게 틀립니다. 그래서 '아바야'라고 그럽니다. '존재하지 않을려고 하는 욕구다.' 그게 한자로 그렇게 써놔놓으면 단멸론 하고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거는 존재하지 않을려고 하는 욕구는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살기 싫다' 하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면 죽을려고 하는 것들을 얘기할 가수 있습니다. 그것도 일견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바와 딴하(abhava taṇhā)'라고 하는 것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살아있는데 살아가는 것들을 알지 못하고 게으름 부리는 것들은 전부 아바와에 속해버립니다. 내가 살아가는데 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을 쉬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 아바와가 되는 것들입니다.

게으름피우고 있는 것들이 전부 아바와의 영역에 속해버리게 됩니다.

그냥 흐리멍텅하게 살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 하고 마음먹는 것들도 전부 아바와의 영역에 속해버립니다.

그래서 꼭 그냥 죽고싶다, 살고 싶지 않다, 하고 마음을 먹는 것만이 아바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됐습니까? (예)

 

수행자 질문 : '바와', '위바와'로 표현하는 것은 같은 겁니까?

스님 대답 : 똑같습니다. 보통 '바와(bhava)', '위바와(vibhava)'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 바와'가 되고 '아 바와'가 됩니다. '위'가 떠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존재로부터 떠나고 싶다고 하는 것, 존재로부터 존재해 있는 것을 모른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있다고 알지 못할 경우에 그거는 위바와가 돼버리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알아차림을 못하는 것 같으면 위바와에 속하는 거고...

스님 대답 : 그렇죠. 알아차림을 못하는 것, 특히 게으름 부리는 것, 그리고 흐리멍텅하게 있는 것이 좋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

쉽게 말하면 좌선을 하면서 그냥 아무런 것도 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즐길려고 하는 것들, 그것도 전부 위바와에 다 속해버리게 겁니다.

대상이 뚜렷해야 되는 것이고, 대상이 변해가야 되는 것인데 그것 없이 그냥 그 속에서 즐겨버리게 되는 거라. 그것들은 전부 위바와에 다 속해버리는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됐습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