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해탈하기 위한 다섯 가지 노력의 구성요소 「보디 라자 꾸마라 숫따」(20160128)

담마마-마까 2021. 9. 14. 09:00

https://youtu.be/IYJDDLWWHFk

* 해탈하기 위한 다섯 가지 노력의 구성요소 「보디 라자 꾸마라 숫따」(20160128)

 

오늘 제목은 「지금 여기에서 해탈하기 위한 다섯 가지 노력의 구성요소」 입니다.

중부경전에 나오는 건데 「보디 라자 꾸마라 숫따」라고 하는 겁니다.

【 Bodhi Rāja Kumāra Sutta [MN 85] 】

 

그런데 경전 구절이 좀 어렵게 써져 있어서 그걸 좀 쉽게 풀이를 해놓은 겁니다.

부처님한테 공양올리고 부처님한테 여쭤보는 것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답을 하는 형태로써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어보느냐면,

 

"부처님이 가르치고 광대한 이 도의 지혜. 과의 지혜, 닙바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원인이 갖춰지면 어떠한 원인으로 채워지면, 지금 여기에서 위없는 청정범행을 완성하여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열반을 스스로 알고 깨닫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습니까?"

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어떻게 하면 도와 과의 길을 가느냐,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가면 도와 과에 이르느냐, 그리고 지금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대해서, "노력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라고 풀이를 했습니다.

지금 청정범행을 완성하기 위한 길이기도 하고, 그리고 종국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그런 길이기도 합니다. 그 다섯 가지를 설한 경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도 한데, 반드시 갖춰야 되는 것들이다.

 

정확하게 노력하기 위한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 그 다섯 가지란...

 

첫 번째, 믿음 있는 사람이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는다!

 

두 번째는 큰 병도 없고 작은 병도 없고 조화가 잡혀있고, 지나치게 차지도 않고 지나치게 뜨겁지도 않고, 치우침이 없이 정진을 감내할 만한 소화기관을 갖춘 자가 된다!

 

세 번째, 간사함이 없고 속임이 없이, 자신의 스승에게도 다른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모든 법을 실천하는 동료에게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분명히 하는 자가 된다!

 

네 번째, 좋지 않은 행위를 버리고 좋은 행위를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며 머물고, 강한 힘이 있고 견고한 결의가 있어, 선한 가르침에 따라 책임을 방치하는 일이 없는 자가 된다!

 

다섯 번째, 일어나고 사라짐을 분명히 알아서 올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통찰의 지혜를 갖춘 자가 된다!

이 다섯 가지를 하면 해탈에 이른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얘기해 놓았습니다. 쉽게 풀어 썼는데도 말들이 조금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그걸 현대말로 조금 쉽게 풀이를 해놓은 게 지금 이 자료입니다.

 

첫 번째, 올바른 일을 믿는 것입니다.

수행에 믿음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것들을 믿는 것, 또는 스승이 가르친 것들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 그게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노력을 해나가는데 장애가 있다 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자신이 한번 돌아보라고.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아, 내가 지금 올바르게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하고.

 

올바르게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그길을 가고 있다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올바른 믿음을 가진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섭렵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를 확립해버리는 그런 경우도 생길 수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의 것들로서 확립이 돼버리면 다른 것들 스승의 가르침이나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좀 힘이 듭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수다원에 아직 이르기 전인데, 심념처 수행을 했다. 그런 분들한테 마하시 센타에 갈 것 같으면 심념처 수행방법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마하시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그럼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해왔던 심념처 수행방법대로 거기서도 그거 할려고 그럽니다. 스승이 가르치는 것들이 귀에 들어오지를 안 해. 그리고 수행지도하는 것들도 잘못했다고 곡해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됩니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수행을 했는데 또 심념처 수행처에 갔다 그럴 거 같으면 또 심념처 수행처의 지도방법들을 따르지 않을려고 그럽니다.

그거는 조금 문제가 있는 부분이라. 아직은 여러 가지 가르침,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믿고 그 방법대로 따라해야 되는 상태인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올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도 올바른 노력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바르게 노력해서 그것이 확립돼야 되는 것이지 자신의 방법으로만 고집을 해버리면 문제가 자꾸 생길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는 수행법, 만약에 다른 수행처에 간다, 아니면 다른 방법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걸 가르치는 스승들이나 그 방법들을 그대로 믿고 따라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믿음을 아직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믿음이 확립된 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다원에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수행방법의 차이 때문으로 인해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본인들이 그런 것들을 잘 이해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올바른 일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아니면 스승의 가르침이든, 그리고 그것이 수행이 아니고 일반적인 경전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계율에 대한 것이든,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냥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믿고 안 믿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또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계율적인 부분 같은 경우에는 시대가 바뀌니까 그것도 바뀌어야 된다든지 아니면 그 부분에 대해서 곡해해가지고 얘기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바른 노력을 하는 자라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계율적인 것이든, 경전적인 것이든, 수행적인 것이든, 아니면 선정에 대한 것이든, 이런 모든 것들은 부처님 가르침 속에 속해있는 것들이고, 또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이 부처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이게 "올바른 일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방법대로 할 것 같으면 가끔은 더디게 갈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성품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디 간다 해가지고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가는 것들이 다른 부작용들을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 길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도록 따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무조건 믿어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얘기했을 때 일단 받아들여가지고 그것들을 자기가 해보는 것, 해보면 이익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 인한 것들보다 그 방법이 이익이 적다고 하더라도 조그만한 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확인이 된 것들이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 방법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나서 그러고 나서 자신이 빠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지고 그 길을 더욱 해나가야 되는 것이지, 그 방법을 못 받아들여야 될 이유는 없다는 거라.

 

올바른 일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에히빳시꼬 빳짯땅 윈뉴히띠"라.

와서 보고 확인하고 그리고 그렇게 확인되는 것들을 따라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지금 내가 청정에 이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 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밑에 얘기하는 것이 올바른 일을 믿는다는 것, 그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다른 것들을 믿기도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 가르침 어떤 것이라도 나하고 조금 다른 부분이라 하더라도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이런 믿음들이 확립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꾸 자기 자신을 조사해보고 그리고 확인해보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자꾸 겪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 업에 대한 믿음,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은 믿음을 확립하는데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약에 안 될 때는 그것들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할 것 같으면 그냥 따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정통한 상가 스님들이 가르치는 것이다 할 거 같으면 그냥 따라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자신에 대한 믿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은 다른 가르침들 그것이 어떤 다른 스승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부처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걸 그냥 믿고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확립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노력해야 될 첫 번째 항목에 들어가집니다.

 

두 번째, 자신의 신체를 조심할 것!

경전에는 이해하기 좀 어렵게 돼있는데 딱 한 대목으로 얘기하면, 자신의 신체를 조심하라 하는 겁니다.

추우면 어떻게 해요? 걸쳐 입어야 됩니다. 그게 몸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런데 추운데 옷을 껴입지 않고 밖에 나갈 거 같으면 당연히 병으로부터 취약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기 같은 거나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신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몸을 보호하는 것이 몸을 아껴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몸이 있어야만이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또 수행해나가고 해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신체는 반드시 조심해야 됩니다. 특히 먹는 것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맛있는 거 먹고 그다음에 유기농을 먹어라는 것이 아니고, 먹는 적당한 양을 알고 그리고 좋고 싫음을 가지지 않고 먹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먹는 것들은 조심을 하게끔 됩니다. 먹는 것들 특히 조심하고 이러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신체를 조심해서 보호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자신의 신체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그것뿐 아니라, 몸으로 뭔가 움직이고 하는데, 특히 잘 찧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에 손이 찧었다든지 칼에 베었다든지, 신체를 조심 안 하니까 그런 겁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것들은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야만이 조심할 수가 있습니다. 움직이고 할 때 몸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들에 대해서 몸을 상해하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자신의 신체를 조심해야 될 때는 행주좌와에서 모든 것들을 움직일 때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걸어가고 뭔가를 행하고 할 때 그 행하는 것들을, 동작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자신의 신체를 조심하게 됩니다.

 

두 번째가 올바른 노력을 해나갈 때는 자신의 신체를 항상 조심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조심성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망치는 행위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이 음식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기후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든, 자신의 신체를 망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는 거고, 해탈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들을 등한시하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를 조심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마음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곧게 하는 것, 빨리어 문장에는 보면, 아사토(asatho)'라 해가지고 '간사함이 없다' 그다음에 '아마야위(amāyāvī)' 해가지고 '속이지 않는다' 하는 것들 두 개가 되어 있습니다. 간사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 것!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수행을 남에게 속여서 드러내는 경우들을 봅니다. 특히 문답할 때 자신이 그런 경험을 안 했는데 책이나 여러 가지를 듣고 그 얘기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겁니다. 그런 경향이 자꾸 지나치게 될 것 같으면 자신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도달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자꾸 확인할려고 그럽니다.

자기가 거기에 도달해야만이 그걸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 안됐으면서 자기 자신을 속여버리고 묻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도달한 것에 대해서만 자꾸 확인할려고 합니다.

 

다른 예를 들면은 오계를 지키는 것, 자신은 지키기 힘드는데 그러면 일반적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오계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나무랄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다른 사람이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을, 너는 왜 오계를 안 지키느냐고 나무라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드러나져야 되는 것이지 자신을 속여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게 인제 마음을 곧게 한다는 첫 번째 부분이 됩니다.

 

가끔 그럴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스님한테 매달 보시 잘하고 있습니다.” 내 기억에는 그사람이 딱 한번인가 보시한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매번 하는 것처럼 얘기를 합니다. 한번 한 것은 맞기는 맞는데 그런데, 그거는 뭐냐면 자신을 속여버리는 거라. 행위한 것에 대해서 공덕이 생겨난 것들은 그때 행위들로 인해서 공덕들이 일어난 것인데, 그런데 자신은 계속 그렇게 공덕을 쌓고 있는 것처럼 남에게 속여버리는 거라.

 

공덕도 마찬가집니다. 공덕도 계속 쌓지 않을 거 같으면 계속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자꾸 속이는 거라. 수행도 내가 계속하지 않는데도 남들한테는 나는 수행 계속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실제로는 집중수행처나 수행 조금 조금씩 하는 것들을 하다가 지금 현재는 중단된 상태인데도 수행 계속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계속 수행하고 있나?” “예. 잘 안 되지만 계속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알고 있는 거라. '아, 내가 계속하지 않았다' 하고.

 

그러면 정직하게 “스님, 나 그동안 수행 못하고 알아차림 없이 지냈습니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속이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쁜 행위들을 짓지 않는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을 속이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아마야와띠'

 

그다음에 그 속이지 않는 것들 잘못한 것들을 덮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했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그냥 덮어버리고 드러내지 않을려고 해서는 또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런 거는 잘합니다. 아이한테 잘못했으니까 한대 두드려 패고 나서 나중에 좀 조용해지면, “그래 내가 너한테 한대 두드려 팬 것은 잘못했다. 그런데 너도 그거 잘못했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바른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이 두드려 팼다는 것은 쏙 빼버리고, “너 그거 잘못했지?” 할 것 같으면 아이는 못 받아들입니다. 왜? 엄마도 잘못한 것이 있다는 거라. 화를 내면서 두드려 팼으니까. 그거는 부모로서 해서는 안되는 건데,

부모 자신은 그걸 알지만 그것은 덮어버리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만 자꾸 들추어버린다는 거라. 그거는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속여버리는 간사한 행위라는 겁니다.

 

마음을 곧게 한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마음은 항상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될 때 올바른 노력을 해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

나쁜데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게으름 부린다는 거는 빨리어로 '알라시양(ālasiyaṁ)'이라고 한다고 전에 한번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뭔가를 알아차리지 않고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겁니다. 게으름 피우고 있을 때는 자신은 올바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게으름 피울 수 있는 여유를 줘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할 때, 그때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겁니다.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잘못하고 있으면 '아, 이건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그 길을 안 갈려고 하는 거고, 잘하는 것이면 '아, 이것은 내가 잘하는 것이구나 하고 더욱 더 노력해야 되겠다' 해서 더 노력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나갈 때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들은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끔 되는 거고, 잘하는 일은 더욱 더 일으킬 수 있는 힘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알아차림이 없을 경우에는,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판단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 하고 나서 후회하게 되는 형태들을 취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올바른 노력은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올바른 노력은 확립된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바르게 노력해나갈 때 그때 여러분들은 지금 마음은 청정해지고 해탈로 나아갈 수 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가, 올바른 지혜를 가지는 것!

지혜, 지혜 하면서 지혜를 가지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얻을려고 할 것 같으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지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그리고 어떤 일들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들이 키워지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지혜롭게 뭔가 할려고 한다? 그것은 자기 견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지, 부처님이 가르치는 지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계율을 잘 지키고 뭔가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지니게 될 때,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계·정·혜'라고 그럽니다. 계율이 확립되고 그다음에 선정력들이 이루어지고 나야만이 지혜가 드러나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지혜롭게 모든 것을 안다?

예를 들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서 알아차린다, '음 그래 그것도 무상한 것이지'

계율과 집중하는 힘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은 그냥 말장난 밖에 안됩니다. 누가 돌아가셨다. '음 그것도 참 무상한 성품이다' 하면서 그냥 흘려버렸다, 자신은 지혜롭게 그것으로 인해서 동요하지 않았다고 할지 몰라도 해야 할 일들을 방치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친한 친구가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 무상한 것은 맞습니다. 그럼 본인이 해야 될 것은, 내가 그 친구한테 가서 그 친구의 가족들을 위로해주고, 거기 지금 내가 가야 할 일이 지금 해야 할 일인데, 그냥 무상하다고 하면서 그냥 그때를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무상·고·무아가 지혜의 성품으로 드러나지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것은 계율과 집중하는 힘이 바탕이 될 때 그 지혜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겁니다.

올바른 지혜를 얻는 것들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 지혜를 얻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지금 현재 청정범행을 완성하고, 또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올바르게 노력해야 될 다섯 가지입니다.

 

이 경전을 조금 쉽게 설명을 해놓은 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아, 이것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는 것들을 갖춰야 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들을 자꾸 갖추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부처님도 가까운 시일내에 해탈에 이르게 된다 하고 얘기하신 부분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