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살아가는 것은 감각에 대한 의존이다. (20160218)

담마마-마까 2021. 9. 23. 09:00

https://youtu.be/BD1GZRHLRls

* 살아가는 것은 감각에 대한 의존이다. (20160218)

 

오늘은 「살아가는 것은 감각에 대한 의존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자이나교를 살아계실 때 많이 비판했습니다.

자이나교에서 그런 비판들을 듣고 부처님을 비판한 게 뭐냐면, "부처님은 만날 행복 행복 얘기를 하는데 행복으로 인해가지고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행복으로 칠 것 같으면 빔비사라 왕이 더 훨씬 크지 부처님이 더 크겠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먹는 거 마음껏 먹지 못하고 절제하면서 먹는 것보다 더 크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즐거움은 오히려 빔비사라왕이 더 크지 고따마가 더 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즐거움으로부터는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비판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이나교는 고행을 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고행으로 인해서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부처님이 많이 비판을 합니다.

"지금 사는 것이 괴롭다 하고, 과거의 업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다. 그 과거의 업을 씻어내기 위해서 지금 내가 그 괴로운 일들을 오히려 더 해야 된다. 그래서 더욱더 몸을 괴롭혀가지고 과거의 업을 씻어낸다는 거라. 그래서 더이상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그리고 더이상 업이 쌓이지 않도록 하게끔 한다" 하는 것이 자이나교 같은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수행을 하더라도 고행위주로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자이나교 수행법하고 비슷하게 돼버리는 형태가 됩니다. 자이나교가 같은 경우에는 한톨로 밥을 먹고 하루를 지내고, 아니면 한 발로 서서 기도하면서 수행하고 하는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과거의 업을 소멸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다.

 

부처님이 그걸 되게 비판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비판을 하느냐면 "그러면 과거의 업을 지었다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과거에 업을 지은 것을 알고 있어야 될 거 아니냐? 그럼 너는 과거에 업을 지은 것을 알고 있느냐는 거라. 과거에 업을 지었으면 얼마만큼 지었느냐는 거라. 얼마만큼 지었기에 얼마만큼 고행을 해야만이 그걸 다 없앨 수 있느냐는 거라. 과거를 볼 수 있어야만이 그게 가능한 것인데 무조건 과거의 업을 소멸하기 위해서 지금 고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부처님은 얘길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가지고 그리고 그것을 지금 얼마만큼 노력을 해가지고 고행을 해야만이 씻을 수 있다"는 것이 있어야만이 그것을 씻을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서 무조건 과거의 업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지금 고행을 참고 견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치에 안 맞지 않느냐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물어봤을 때 자이나교 어느 누구도 그것에 답한 사람이 없거든. 여러분도 알 수 있습니까? 과거에 어느 정도 업을 쌓았어? 그리고 그것을 소멸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해야 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뜬구름 잡는 식으로 해가지고는 그 과거의 업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몸의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오히려 지금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조그만한 즐거움을 얻고, 그다음에 좀 더 큰 즐거움을 얻고 해서 나중에는 완전한 즐거움을 얻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일부러 몸을 괴롭혀가면서 업을 소멸한다는 명목으로 괴롭힐 이유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부처님을 자이나교에서 아까 얘기하듯이 비판을 하기도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얻는 즐거움이 많을까? 스님이 얻는 즐거움이 많을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라고 하겠지.

그런데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이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 그것들을 감각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즐거움 하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거라. 또는 삼매에 들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을 감각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거라.

아무리 맛있는 거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감각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은 항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거라. 그것은 즐거움이 계속될 수가 없고, 그 즐거움이 지나칠 거 같으면 항상 그건 괴로움으로 바뀌어버리는 형태가 된다는 거라.

 

그런데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이나 삼매를 경험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이나 아니면 선정상태를 한시간 아니면 몇시간 아니면 며칠간 누리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 그것들은 그것들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은 다시 되돌려서 그대로 살아나온다는 거라.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는 거라.

 

어떤 경전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작은 즐거움을 버려야만이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들을 버려야만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다고 해가지고 일부러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괴롭혀가지고 거기서 궁극의 즐거움을 얻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이치에 맞지 않다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오히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잘 알아차려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즐거움들은 그것이 설혹 지금 조그만한 즐거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즐거움으로 바뀌어져 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감각적인 즐거움들을 자꾸 누리다가 보면 그것은 이걸 누리면 또 다른 것을 찾게 되고, 또 다른 감각적인 것을 찾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옳은 것은 되지 못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여러분들이 사실은 산다고 하는 것들은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이 몸과 마음으로 사는 건데, 이 몸과 마음은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그대로 분명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겁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눈을 통해가지고 내가 접촉해서 그 감각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고, 뭔가를 만질 수 있는 물건을 손으로 만져서 그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라.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감각이 없으면 그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시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 감각을 전부 다 버려버리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어느 누가 그거 버릴 수가 있겠느냐는 거라. 그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살아가는 것이지. 단지 분명하게 먼저 인식을 해야 되는 것은 아, 내가 사는 것은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그대로 감각으로써 느끼는 것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내가 살아가는 것은. 단지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부적인 대상들을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보이는 것들을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꽃이다' 아니면 '누구다' 아니면 '저건 싫은 사람이다' 이렇게 인식을 할 것 같으면 그게 '위빨라사' 전도몽상과 같이 전도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인식하는 것으로 인해서 전도되기도 하고, 마음이 왜곡돼가지고 전도되기도 하고, 또 내가 견해 잘못된 견해들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 사실을 바르게 보지를 못하는 것,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항상 전도되게 돼있다는 거라. 그렇게 전도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 감각을 다스리는 것이 어찌 보면 수행의 첫 번째 부분이라고 봐도 관계가 없습니다.

 

경전 곳곳에서는 "감각을 제어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감각을 제어할 수 있을까? 감각인 줄을 먼저 알아야 되는 거라.

 

뭔가 보면 본다고 알아야 되는 거고 손이 닿았으면 닿았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걸 알지 못 할 것 같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맛봤으면 맛봤다고 알아야되는 것이지 그것을 알지 못 할 것 같으면 그냥 맛있다고 알 거 같으면 그것도 전도돼버립니다. 왜 그러냐면 이걸 먹었을 때 일어나는 느낌들이 나는 그전에 맛있다고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인식은 '산냐'로 인해가지고 전도돼버린다는 거라. 그냥 그게 닿았다고 씹는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맛있다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맛있다고 알 것 같으면 뇌에서는 마음을 또 전도시켜버립니다. '더 먹어라' 하고. 그러니까 그걸 더 먹게 되는 거라.

 

감각을 제어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그것들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할려고 해야 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그대로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본다', '듣는다', '느낀다', 이렇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 느낌을 그대로 알려고 하는 것들이 먼저 선행돼야만이 가능해진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우서 전도되는 것들을 막아나갑니다.

 

그다음에 감각을 제어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알고 나면 그것들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이것은 분노다', '이것은 내가 욕심부리는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내가 게으름부리는 것이다', 하는 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진·치라고 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어, 내가 뭔가를 맛봤는데 맛봤다고 알지 못하고 맛있다고 알아차려서 더 먹을려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몸속에서 뭔가를 더 원하는 탐심이 일어났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러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알아서 그 탐심을 자꾸 다스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먹는 걸 가지고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탐·진·치를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럼 탐심이 일어났으면 탐심이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려가지고 그 탐심을 다스려야 되는 거라.

그게 인제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탐··치를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먹을려고 하는 욕심 탐심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먹는 걸 일단 중지해야 되는 거고, 탐심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여러분들 가끔씩 그런 거 하죠? 화가 확 일어났다, 그러면 화를 다스릴려면 어떻게 해요? 화로 인해서 말이 확 튀어나오는 것들은 안 하고 꼬옥 입술을 깨물고 참아야 됩니다. 그 수밖엔 없습니다. 지금 현재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말로써 바로 팍 튀어나오게 됩니다.

탐심이 일어났으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서 탐심이 일어난데서 딱 멈추어있지 못할 거 같으면, 그걸 관찰하든 못하든 멈춰있지 못할 거 같으면 그냥 손가락 보다가 다른 걸 그걸 또 먹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탐심이 일어났다 하고 탐심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은 거기에 그냥 멈추어있어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을 딱 중단을 해보라는 거라.

탐진치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을 딱 중단하라는 거라.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그것은 가능한데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러면 내가 사고하는 것들도 있고, 계획하는 것들도 있고, 어떤 거는 망상이 일어나는 것들도 있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다스릴 거라?

그것은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사고하는 것인지, 망상하는 것인지. 사고하는 것이면 실행의 힘들이 있게 되는 것인데, 망상하는 것이면 실행하는 힘이 없습니다. 실행할려고 하는 의지 자체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망상과 의지는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의지가 일어나는 것들은 그대로 알아차려주고 그대로 나아가는 것을 진행되는 것을 보면 되는데, 망상은 반드시 거기서 멈추어야 됩니다. 그래서 망상과 사고는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되는 거고.

 

만약에 망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망상이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 망상이 일어났을 때 나에게 쓸모있는가 없는가를 먼저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쓸모없는 것이다는 거라. 쓸모없으니까 망상이라고 그러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망상 안 하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망상에서 오는 피해들을 자꾸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괜히 시간 보내고 있다는 거라.

그런 식으로 해서 망상을 떨어뜨리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고, 수행이 좀 진척되면 망상이 끝까지 진행이 되는 것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봐버릴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별거 아니구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구나' 생각할 거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적어진다는 거라. 그렇게 구분을 하도록 하면 됩니다.

 

아까 세 번째까지 얘기했습니다. 일단 탐진치가 일어났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멈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멈춰라.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제어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감각은 어떠한 경우든지 제어가 돼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멈춘 상태에서 먹고 싶다는 마음이 탐심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봐서 탐심이 사라지는 것들을 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라져야만이 아, 이것도 먹고 싶은 마음도 요렇게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봐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걸 "완전하게 제어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멈추고 나면은 그것이 사라지든 안 사라지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은 없기 때문에 이차적인 피해는 줄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면 탐심이 일어난 것들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 것들을 끝까지 계속 볼려고 해보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마음은 멈춘 상태에서는 그 대상과 떨어져있게 됩니다. 먹고 싶어하는 마음이 저기에 있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떨어져서 그걸 보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네' 그리고 그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다른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바뀌어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감각들을 제어를 해나갑니다.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식으로든 이렇게 제어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감각에 의존하는 것들을 방어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설명을 해놨느냐면 만약에 그렇게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삶을 제어하지 못할 거 같으면 바다에 사는 게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게를 잡아와가지고 솥에다 찌면은 솥에 물이 끓기 전에는 미지근합니다. 그러면 게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거기서 즐겁게 노닐고 있는데 이 물이 뜨거워지면 게는 결국엔 삶아져서 죽게 된다는 거라. 감각에 의존하는 것은 그와 같다고 얘기합니다.

 

본인이 계속적으로 윤회를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그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버린다는 거라.

게가 솥뚜껑에 갇혀가지고 지금 현재 즐겁고 행복한 것에 끄달려 들어가가지고 편하게 있다가 죽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인 생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거라.

그걸 "솥 안에서 노는 게의 여유와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현재 맛있는 거 하나 먹었다고 해가지고 맛있고 아, 참 즐겁다 하는 것은 그것은 여유부리는 거라는 거라. 지금 솥 안에서 내가 끓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거기서 놀고 있는 게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산따 찟땃사 빅쿠노"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행자가

"삼마 담마 위빳사또" 올바르게 현상들을 관찰하게 될 때 그럴 때만이

"아누마시 라띠 호띠" 인간의 레벨을 뛰어넘는 그러한 기쁨들 즐거움들을 느낄 수가 있다. 하는 거라.

 

'위빳사또' 분명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게 될 때, 그 알아차리는 것들이 변해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거기서 분명한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지게 되는 거라.

그전에는 살아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에게는 기쁨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어?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이것이 굉장히 큰 즐거움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릴 때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고 할 거 같으면 앞에서 얘기했지만 마음이 평온해져 있지 않으면 대상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평온하고 고요하게 먼저 만들어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살아가는 것은 색·수·상·행·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질적인 이 몸, 그중에서 호흡이라고 하는 것,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그대로 관찰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느낌, 뭔가가 닿았다, 경행을 해서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했을 때 닿고 떨어지고 하는 그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은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인식하는 것이 일어났으면 아, 내가 이거 분명하게 인식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는 거라.

내가 뭔가를 행할려고 할 때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먼저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색·수·상·행·식 모든 것들은 살아가는 것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입니다. 이 몸과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할 것 같으면 기쁨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경전에는 "오온의 생멸을 관찰할 때마다 기쁨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 왜 기쁨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길로 계속 갈 거 같으면 ', 내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 볼 것 같으면 '아, 이것으로 인해서 참 기쁨들이 일어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법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이 길만 쭉 따라가면은 마지막 종착점에 도달한다는 확신을 딱 가지게 됩니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할 때마다 기쁨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온에 대한 관찰들을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는 것은 오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오온에 대해서 내가 의존을 하면 할수록 감각에 얽매여져 버리게 됩니다. 그 감각을 잘 제어할 것 같으면, 지금 감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나에게 기쁨을 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그게 수행의 출발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한 상태에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것 색·수·상·행·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날 때 '아, 인제 나는 수행을 시작했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행의 출발점이 그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날 것 같으면 스스로 바르게 살아갈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은 물론 경전에는 출가한 스님들한테 얘기했으니까 '빠띠목카' 라고 그랬죠.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를 시작할 때 먼저 삼귀의 오계를 주는 겁니다. 오계를 지켜나갈려고 하고, 끝까지 그것을 지키고 다섯 가지가 완전해지도록.

그리고 감각기관을 더욱 더 제어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산뚯티' 만족하는 것,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만족하는 상태가 되는 것.

 

계율을 지키고,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된다 할 것 같으면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계속적으로 더 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불사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는 여러분들은 수행의 문턱에 들어서게 됩니다.

 

경전에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자는 수행할 수가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수행을 할 수가 없다. 대상을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오지 못한다는 거라. 지혜가 없는 사람이 수행할 수 없듯이, 수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지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두 개가 양립되어 있는 것처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극장에 뭔가 영화를 보러 간다. 그 극장 안으로 그 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요? 입장권을 가져야만이 그 홀 안으로 들어가집니다. 입장권을 가진다는 것은 지혜가 있는 겁니다. 지혜가 있을 경우에는 그 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영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알아차릴 방법이 없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려야만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으면 수행할 수 없는 거고, 지혜가 있으면 수행을 하게 되는 거고. 대상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보면 본다고 알고,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고, 먹고 있으면 먹고 있는다고 알게 될 때 대상을 알게 됩니다. 그걸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입장권을 사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수행을 하지 않는 거라.

그래서 지혜가 없는 사람은 수행을 할 수 없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지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대상을 대상인 것으로 분명하게 알 때 '아,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윤회한다는 것은 참 힘든 겁니다. 그렇지만 그 윤회를 끊는 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윤회의 경로를 건널 수가 있는 겁니다. 뗏목을 발견했다 해서 뗏목에 매달려있다 해가지고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그 뗏목을 열심히 저어야만이 저쪽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 뗏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내가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거 같으면 저 길로 건너가지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뗏목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저 길로 건너가는 방법조차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영원히 그 길을 못간다는 거라. 감각에 의존해가지고는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살아간다는 것은 감각에 의존하는 병에 걸린 거와 마찬가지지만, 그 감각이 여러분들을 해탈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항상 의심이 가는 용어인데요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기도가 종교생활에 밀접한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 불교에서도 보면 스님들 가운데 “기도 많이 하세요. 기도하세요.” 뭔가 어색하게 들리는데 불교와 기도의 관계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용어가 적합한 용어입니까?

 

스님 답변 : 이렇게 보면 됩니다. 다른 것들을 의지해가지고 뭔가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발견해서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겁니다. 그게 불교적인 겁니다.

그럼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기도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떤 부처님이나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기도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불교적이라고 봐주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만약에 다른 부처님을 의지해가지고 그 기도를 성취할려고 한다 할 것 같으면 전자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불교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겁니다.

그래서 보통 부처님한테 기도해가지고 소원성취한다 하는 것은 불교적으로는 맞지 않는 겁니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을 등불로 해서 자기 자신이 그 문제를 헤쳐나가는 방법들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하고 보면 됩니다.

 

단지 스님들이 가끔씩 테라와다 스님들도 여러분들에게 축원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 축원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에게만 하는 축원이 아닙니다. 그 축원 어디에도 '누구누구가 행복하기를' '누구누구가 건강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된다고 할 경우에는 차별이 없어져버리는데, 그럼 누구는 수능합격하게 해줄 거 같으면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한사람은 누가 떨어져야 되는데, 그럼 한사람은 불행하게 되기를 하고 바라는 거와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그런 식의 기도는 특정한 대상을 정해놔놓고 뭔가 한다는 것은 그것은 불교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대신에 특정한 대상을 정한다 하는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 할 때, '자기 스스로가 행복하기를' 또 자기뿐 아니라 그것이 넓혀가가지고 그것이 됐을 때 넓혀져서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이 선원에 있는 모든이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 자기가 완성이 됐을 때 그것들로 인해서 퍼져나가는 형태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용인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부적인 것을 대상으로 해서 기도를 성취한다는 것은 불교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됐습니까?

 

수행자 질문 : 그러면 사시기도에 대해서 이해를 잘해야 되겠네요?

스님답변 : 그것은 전부 부처님에 대한 예경입니다. 그것이지 부처님한테 예경한다 해가지고 부처님이 나에게 소원들어주라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마만큼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들을 그대로 표현을 한 것들입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지혜라는 말이 일반적인 지혜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하고는 틀린 겁니까?

스님 답변 : 일반적인 지혜는 내가 세상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그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지식이라고 봐야 되겠죠? 그 지식은 각각의 나라마다 기준이 다 다를 거고 판단하는 것들이 다를 겁니다.

그런데 불교적인 지혜는 동일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래서 무상·고·무아에 대한 성품으로써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을 불교적인 지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됐습니까? (예)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