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포살일 법문_사유와 사유의 대상(20160417.경주)

담마마-마까 2022. 2. 2. 09:00

https://youtu.be/5LwQWpmonYg

* 포살일 법문_사유와 사유의 대상(20160417.경주)

 

마하보디 선원 아침저녁 예불하죠? 빨리어로 할 때가 있고, 어떨 때는 한글본으로 해도 됩니다. 그거는 아침 저녁 예불은 순서가 반드시 정해져있습니다.

 

앞에 아침 예불 목록 차트 하고, 그다음에 회상해야 되는 게송 몇 가지 중에 아침에 해야 될 게 있고, 저녁에 해야 될 게 있고, 그러고 나서 경전 독송이 반드시 들어가지고, 경전 독송 할 때는 법을 청하는 게송을 하고 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그거 빼고라도 경전 독송할 때 '나모 땃사...' 하면서 삼귀의 삼창하고 경전 독송 하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는 회향 게송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불의 순서입니다.

 

그 순서대로 하다가 중간에 회향 게송을 하기 전에 좌선을 하고, 좌선이 끝나고 나서 회향 게송을 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행으로 인한 공덕들도 회향 게송 하면서 같이 회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적인 순서이기 때문에, 선원에서는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예불을 할 수 있도록, 사람이 없으면 스님 혼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은 「사유의 대상」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사유를 안 하게 될 때는 언제가 될까?

 

삼매에 들었을 때 사유를 안 하게 됩니까? 맞습니까?

1선정에 들었을 때는 당연히 위딱까(Vitakka, 尋)와 위짜라(vicāra. 伺)가 있으니까 사유를 하게 될 것이고, 2선정에 들 때는 위딱까와 위짜라가 없는 상태가 되면 사유를 안 하게 되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 그래도 사유는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선정에서는 사유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까?

(수행자 대답 : 알아차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유로 한다고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 알아차림이 자동적으로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가? 에 따라서 다르겠죠.

그런데 인제 2선정 이상이 될 때는 아무래도 그 알아차림이 자동적으로 돼나가겠죠? 자동적으로 돼나가더라도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린 것을 ...

 

삼매에 들어도 사유는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단지 멸진정 상태에 들었을 때만이 사유가 끊어지게 됩니다.

멸진정에 드는 것은 성자의 경지가 되기 전에는 안 되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유를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사유의 대상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 대상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지 못할 거 같으면 자칫 잘못하면 망상으로 넘어가지게 되는 겁니다.

사유하고 망상의 차이는 어떤 걸까?

주관적인 거, 객관적인 거, 개념화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된 것들은 망상의 영역에 속하지만은, 사유의 영역은 어떠한 경우든지 개념화는 됩니다. 개념화만 남아있지 그것이 주관적으로 되지는 않죠.

 

그래서 「사유의 대상」은 수행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에 속합니다.

 

수행할 때 대상이 있어야 되죠? 그렇죠? 수행 대상 없이 수행을 못할 겁니다. 그럼 수행의 대상은 올바른 사유의 대상이 될까? 알아차리는 대상, 걷고 있으면 걸어간다, 호흡하고 있으면 호흡하고 있다, 밥을 먹으면 밥을 먹고 있다, 그거는 틀림없이 사유의 대상이 되겠죠.

 

수행의 대상 첫번째는, 사념처에서 알아차릴 대상이 첫 번째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신수심법 수행 어떤 것을 하든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려야 되지, 그렇게 사유의 대상을 대상인 줄 모르고 놓쳐버리면 망상으로 빠져버리고, 그리고 대상을 놓쳐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사유의 대상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신···법 어떤 것을 하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상인데, 그 외에 것은 대상은 되지 않는 겁니까? 단언적으로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차릴 대상도 아니고, 사유의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이걸 혼동해버릴 것 같으면 수행대상으로 삼지를 못하고, 그냥 사유하는 대상으로,

생각의 경우를 한번 봅시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버릴 것 같으면 그 대상은 거기에서 끝나는데,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또 어떤 다른 요인으로 인해서 '아,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야, 쟤가 저렇게 생각하더라' 할 것 같으면 내가 또 생각하는 것이 바뀌어버립니다. 마음이 이미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에 가 있기 때문에, 지금 사유하고 있는 것들이 계속 증폭되고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유의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 지금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밖에 것들은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누가 어떤 생각을 했든, 누가 어떤 행동을 했든, 그걸 내가 생각하고 사유해야 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사유의 대상은, 부정관 수행 좀 해보신 분 있습니까? 이 몸은 청정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이다 하고 관찰하는 것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완벽하고 자기 자신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거 같으면 사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내 몸으로 이루어진 이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켜야 되는 거고, 뭔가 밥을 먹을 때, 먹는다고 알아차리다가 이것이 들어가가지고 소화돼서 대변으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킬 것 같으면 먹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맛있는 거 먹고 가려가면서 먹고 하지를 않으려고 그럽니다. 단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탐욕이나 아니면 집착하는 것으로서 흘러가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사유의 대상 두 번째는, 이 몸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정한 것으로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내 몸뿐 아니라 내 몸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것들도 다 부정한 것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유하게 만든다든지 청정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생각을 해버리면 안됩니다. 청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이 몸은 언젠가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더러워지게 돼있고, 부정하게 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부정한 것으로 계속적으로 관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두 번째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사유의 대상, 무상한 성품으로써 관찰을 하는 겁니다.

대상을 볼 때는 그것이 정신적인 현상이든 물질적인 현상이든 무상한 것으로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이 그릇이 지금 현재는 변하지 않는 거지만 이 그릇은 언젠가는 깨지는 것이다 하고 알고 있을 거 같으면, 설혹 내가 아끼는 그릇이 깨졌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해서 성냄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내 자식은 언젠가는 나를 떠나갈 존재고, 그리고 나하고는 별개의 존재이고, 그리고 저 아이의 생각이나 마음도 변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을 것 같으면, 설혹 아이가 나의 말을 거역한다든지 아니면 내 곁을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는 거라.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생명체이든 어떠한 것이든, 형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상한 것으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세 번째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사유의 대상, 멸진정에 들기 전에는 사유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사유하는 것들은 바른 사유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바른 사유의 3가지를 쭉 얘기를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세 가지를 통틀어서 하나로써 얘기를 하라고 할 것 같으면, 성냄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남에게 해꼬지 할려고 하는 것도 성냄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고, 욕심을 가지는 것들도 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남의 것을 가질려고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성냄이 밑바탕이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성냄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자애 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사유의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유할려고 할 때는 자애로써 하도록 해야 됩니다. 자애로써 말하고, 자애로써 행동하고, 자애로써 생각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애가 밑바탕이 되어있지 않은 사유는 하지 않을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이게 인제 기본적으로 사유하는 대상이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도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야 되는 것이고,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이것이 밑바탕이 되야만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것들에서 바른 사유로써 연결이 된다는 거라.

 

그런데 아까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사유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지 않아야 됩니다.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사유했을까, 안 했을까? 안 했습니다!

사유함이 없이 바로 행위들로 연결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사유하지 않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사유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기 위한 사유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사유하는 것의 결점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결점을 보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이 설혹 바른 사유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각들을 끊임없이 자꾸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 생각하는 것으로 인한 결점들,

예를 들어봅시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내가 대상에 다가가지게 됩니다. 다가가지면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든가요? 마음은 긴장되고 몸도 긴장됩니다. 수행 끝나고 나서는 되게 피곤합니다.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가가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유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끊임없이 사유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 결점들이 틀림없이 있는데도! 안 하고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느낌(vedanā)에서 끝나버려야 되는 것이지, 느낌 이외에 자꾸 산냐(sañña)로 넘어가지고 상깝빠(saṅkappa)로 넘어가지고 만냐냐(maññanā. 사유)로 넘어가지고 이런 사유의 영역으로 자꾸 넘어가지는 것들을 용인해버린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그냥 있는 즉시 느낌으로써 알아차리려고 하는 습관을 들여야만이 그 사유가 결점들이 드러나지 않게끔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수행을 할 때 내가 자연스럽게 되지 못했을 때 일어난 것이 내가 힘든 것을 알듯이, 생각을 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힘든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들을 자꾸 줄여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사유의 결점을 보지 못할 거 같으면 계속적으로 사유하는 방향으로 넘어가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심념처 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안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대상을 분명하게 이해할려고 하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냥 알아차림만 유지할려고 하지 말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시작된 것을 분명히 알려고 하고 끝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하고, 그리고 그다음 것이 뭔가 일어난 것을 분명히 알려고 하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없을 거 같으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사유하는 습관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대상을 그냥 뭉뚱그려가지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알려고 하는 습관들만 가지게 될 것 같으면, 자신도 모르게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을 방치해버리게 됩니다.

실제로는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는데도 끊임없이 내 마음에는 탐·진·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수행을 하면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는 방향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알 때는 반드시 분명하게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만이, 사유하는 습관들을 버릴 수가 있는 겁니다. 대상 자체만을 알아차리는 습관으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일상적인 형태로써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 걸어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편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걸어갈 때 발을 들 때는 드는 시작부터 해가지고 드는 것이 끝나는 것까지를 분명하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일상적인 속도로 그대로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밑바탕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걷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알아차림은 내가 지금 알아차릴려고 얼마만큼 마음을 기울이냐에 따라서 알아차림의 강도는 달라져버립니다. 의도적으로 그것을 강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계속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대상은 분명한 이해가 따르지 않는 대상은 그것은 탐··치의 영역으로 넘어가기가 쉽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고집이 자꾸 세지고,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남에 대해서 비판하고 원망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분명하게 알려고 하는 습관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견해를 바꿔주게 됩니다.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고·무아의 영역에 속해있습니다. 대상은 무상한 것이고,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에 대한 견해가 바뀌어버립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대상에 대한 견해가 바뀔 거 같으면 그냥 무상한 성품으로써 그것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한 이해가 뒤따르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견해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그다음은, 사유하는 습관이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바꾸게 하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든,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럴 때 보통 잘 쓰는 방법이 수행대상에서 사유하는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고 할 것 같으면 경전 암송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경전암송을 하면서 그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이런 것들이 바른 사유의 대상입니다.

 

지금 얘기한 범주 내의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또 수행에서 바른 대상으로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그냥 고거까지만 할게요.

 

 

< 질의 응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그러면 무색계의 비비상처도 사유가 떨어지는 뎁니까?

스님 답변 : 떨어지지 않습니다. 멸진정 외에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대상은 항상 있어서 그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변하는 성품으로 알게 됩니다. 변하는 성품으로 알게 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유의 개념에 속하게 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가 되어있다. 그럴 것 같으면 이것이 사유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것들이 다른 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멸진정에 들기 전에는 사유는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게 근절되지 않습니다. 단지 정지해있고, 그것이 드러나지지 않는 것뿐인 것이지 사유가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사유의 정지라고 봐야 됩니까?

스님 : 일시적인 정지입니다. 일시적인 정지인 것이지 그것이 없어지면서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태가 조금이라도 변할 것 같으면 바로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선정은 선정을 닦아서 그것을 자재롭게 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작은 자극으로 인해서도 그것은 선정은 깨져버립니다.

선정을 닦을 때는 그냥 그 선정에 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들고 싶을 때 들어야 되는 거고, 깨어나고 싶을 때 깨어나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선정의 이익들을 거기서 반조 할 수 있도록 되야 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닦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1선정에 들었다, 2선정에 들었다, 3선정에 들었다, 4선정에 들었다, 그것은 아주 깨지기 쉬운 것들을 내가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찟따(citta)만 일어나면 사유가 생긴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스님 답변 : 그것이 하나로써 고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사유하지 않는 것인데, 마음은 고정돼있을 수가 있습니까? 선정에 들어있다고 마음이 고정되어 있습니까? 정지해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고정돼있는 거하고 정지해있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유가 있는 영역에 속한다고 봐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사유가 끊어졌다고 해서 사유가 없는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멸진정 이외에는 사유가 끊어지지 않는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가끔씩 착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1선정 이외에는 사유하는 것이 없습니다. 위딱까, 위짜라가 없기 때문에. 그럼 사유가 없다고 판단해버립니다. 그런데 사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 그것이 정지해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유는 어떠한 경우든지 조그만한 자극에 의해서도 깨져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정지해 있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 상태를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2선정에 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때 사유하지 않고 오롯이 그 대상만 알아차리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왜 선정에 들어야 되는 것이고 선정에서 오는 이익이 뭔가 하는 것들을 알고, 내가 그것을 가져올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선정삼매 아무리 해봐야 큰 이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선정삼매 드는 것을 너무 치중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이익을 누리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몸이 피곤하다 할 것 같으면 선정에 들어서 몸을 조절할 수 있는 이익들이 있고, 뭔가 그런 이익들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고 할 것 같으면 선정이 자유롭게 자재하게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걸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 상태까지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그럴 것 같으면 그 힘은 굉장히 크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사띠의 힘들도 당연히 강해진다는 거라.

 

그러면 2선정에서 어떻게 위빳사나로 전환할 수 있느냐는 거라. 2선정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이 있어야지만 위빳사나로 전환할 거 아니라. 3선정에서 어떻게 위빳사나로 전환할 거라? 나올 수 있는 힘이 있고, 그것을 자재롭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이 위빳사나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러면 선정을 자재할 수 있는 것으로 인해서 가져오는 힘들은 굉장히 크다는 거라. 2선정 위에 위빳사나써로 알아차리는 것하고 그냥 일반적으로 알아차리는 것하고는 알아차림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은 선정이 꼭 필요 없다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라. 대신에 그 선정은 자재할 수 있는 상태까지 반드시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단지 한 번 몇 선정까지 들었다 하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사유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영역으로 봐야 되는 것이지, 지금 현재 정지해 있는 것이라고 해가지고 그 사유가, 내가 견해가 바뀌어버린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러면 2선정 3선정 4선정을 하고 나서 나는 사유가 끊어진 걸 경험했다,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익들이 있는데? 이익들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멸진정에 들기 전까지는 사유가 완전하게 끊어지는 상태가 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만이 지금 현재 어차피 불환과 이상의 멸진정에 드는 상태가 아닐 거 같으면, 사유를 하더라도 사유의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서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사유의 대상뿐 아니라 사유를 하더라도 바른 사유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상적으로 하는 것들이 탐진치의 영역으로 빠지기 쉽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해가 됐습니까?

 

수행자 질문 : 그럼 끼리야(kiriya) 마음은 사유가 없는 것으로 보면 됩니까?

스님 답변 : 맞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불환과 이상 아라한의 마음이 끼리야 마음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