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아-유까(āyuka)가 되는 길 (20160428)

담마마-마까 2022. 2. 8. 09:00

https://youtu.be/UnGmcHGMd6k

* 아-유까(āyuka)가 되는 길 (20160428)

 

「'아-유까(āyuka, 장수하는 사람)'가 되는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아-(ā)가 장음입니다. 가끔씩 스님이 축복 게송을 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그렇게 얘기합니다.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nno sukhaṁ balaṁ)

"짯따로 담마 왓단띠" 담마 따라서 실천하고 그렇게 담마 따라서 살면,

"아유 완노" 수명이 오래도록 유지가 되고,

"수캉 발랑" 건강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마 스님뿐 아니라 테라와다 스님들은 누구든지 와서 삼배를 드리고 아니면 공양을 올릴 때, 또 탁발을 나갈 때 이럴 때 항상 그렇게 많이 축원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전에 테라와다 교단 이사장 할 때 사무장을 했던 수마나 한테서 문자가 왔어요. 오늘 지금 여주에 교도소에 가는 길인데 오늘 되게 기분이 좋다는 거라. 왜 좋으냐 하면 다른 때는 교도소 가서 법회를 보고 그리 하더라도 그 사람들 먹을 것들을 풍족하게 가져가지 못했는데, 겨우 주는 게 햄버거 같은 거나, 그것도 잘해야 햄버거고 안 그러면 초코파이 같은 거나 이런 건데 오늘은 삼계탕을 해가지고 갔대. 삼계탕을 마련할 돈을 어디서 마련을 했겠지.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가면서 너무 기분이 좋다는 거라.

그래서 “참 잘했다” 그랬어요. 남과 남에게 같이 베풀 줄 알면서 그 베푸는 걸 기뻐할 줄 알면은 너는 오래 살 거다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참 잘했다 하면서 속으로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길을 걷다가 어부를 만났어요. 그래서 어부한테 직접 들으라는 듯이 아난다에게 물어봅니다. 아난다야 네 이름이 뭐냐? 아난다입니다. 사리뿟따한테 사리뿟다야 너는 이름이 뭐냐? 사리뿟따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름 다 있죠? 아마도 이름 나쁘게 지은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마 '곧 죽을 사람'이라든지 '불행할 사람'이라든지 이런 이름 짓는 경우가 없죠! 다 좋은 뜻으로써 이름을 지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워지라는 사람 이름,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라는 사람 이름, 어떤 사람들은 오래도록 살아라는 이런 이름들이지 나쁘게 이름 짓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이름값을 하고 있습니까?

 

그 어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부에게 부처님이 너는 이름이 뭐냐? 아리야 입니다.

'아리야'는 성스럽다는 뜻인데, 지금 고기 잡는 거는 성스러운 거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잖아.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 여러분들 이름에 걸맞는 일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걸맞지 않는 이름으로 지금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서 다른 경전에 보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한 짯따로 담마 왓단띠 그런 겁니다. 잘 실천하고 그것을 따라서 수행하고 그걸 잘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오래도록 살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담마빨라 라고 하는 마을에서 부처님이 설했던 건데, 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오래도록 살 수가 있습니다. 아까 수마나 전 사무장 얘기를 들었지만 그분은 자신이 배운 것들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두려운 마음 없이 그냥 그대로 대하면서 있는 그대로 대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의 마음들을 가지면서 '내가 그 사람들에게 뭔가 베풀 수 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아' 하는 거라.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기뻐할 것 같으면 진짜 마음속으로 같이 기뻐해주고.

 

여러분들은 법을 왜 듣습니까? 왜 듣고 왜 실천하는 거라? 법을 듣고 실천하는 것은 적어도 어떤 상황에 도달하더라도 그런 두려움 없이 또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법을 잘 따라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아, 내가 이 법이 참 좋구나' 하는 것들을 아는 것들이 뭐냐면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하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항상 고요한 마음 평온한 마음을 지니고 모든 이들을, 모든 대상들을 항상 평등하게 대하는 것, 좋은 것들 싫은 것들 이런 분별하는 것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대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러한 대상들로 인해서 마음속에 대상이든 마음밖에 대상이든 그런 대상으로 인해서 특별히 즐거워하거나 특별히 괴로워하거나 하는 일 없이 그냥 대상을 대상으로써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하면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특별하게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한다든지, 특별하게 내가 뭔가 선행을 하려고 한다든지, 이러한 마음이 없어도 그냥 행위 자체를 하는 것들이 선한 것들을 하게 되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지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됩니다.

사실은 그럴 때가 돼야 만이 "법을 따라 살아간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아유까'라고 하는 수명이 오래도록 유지돼서 살아가는 사람들, 장수하는 사람들을 얘기하죠!

장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중에 맨 첫 번째가 뭐라고 하느냐면,

 

선한 사람들의 법을 듣고 그 법을 실천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곧 오늘 죽을 사람이라도, 사형을 집행당하는 사람이라도 사리뿟따 존자를 만나서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듣고 수다원에 이르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아, 내가 이것은 나쁜 것이다 해서 나쁜 것들을 버려버리고, 그리고 그 법을 들을려고 해서 마음을 기울여서 법을 들어서 수다원에 이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경전에 많이 나옵니다.

 

법을 설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들이 항상 이익되고 도움이 되고 또는 행복하기 위한 것들 이런 것들을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법을 설하는 사람들은 남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좋은 것들은 좋은 것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남에 대해서 사량분별을 일으키질 않습니다.

또는 하는 행위들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면서 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에서 실수가 없을 뿐아니라 하는 행위 자체가 항상 선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남을 도와줄려고 하고 또는 뭔가 도움되는 것들이 있으면 자기가 손해보더라도 그렇게 할려고 그럽니다.

 

어느 날 가게 앞에서 싸움이 붙었어요. 지나가면서 이렇게 들으니까 뭐 때문에 싸움이 붙었는가 보니까 골목 안에 있던 사람이 가게 앞에 쓰레기를 자꾸 내놓는 모양이라. 얘기를 들어보니까 골목 안에는 쓰레기차가 와도 그거를 수거를 안 해가니까 골목 밖에 큰 길가에 쓰레기를 봉투에 넣고 내놓는데, 그 앞에 가게에서 보니까 그것이 더럽거든. 그러니까 두 사람이 싸움이 일어나는 거라.

그거 잘잘못 판별할 수 있습니까? 물론 다 자기들의 견해는 있습니다. 안으로 쓰레기차가 안 들어올 거 같으면 구청에 신고해라. 몇 번 신고하고 나면 당연히 그 사람이 와서 쓰레기를 가져갈 것이다. 그리하면 될 것인데 왜 남의 집 가게 앞에 내놓느냐? 가게 주인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 주인 말고 저 안에 골목 안에 있는 사람의 얘기는 그렇게 해봤다. 그렇게 해도 어떨 때는 가져가고 어떨 때는 안 가져가더라.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신고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흐트러 놓은 것도 아니고 쓰레기봉투에 담아가지고 골목 앞에다가 내놓는 것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 둘 다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꼭 그 앞에 가 아니라도 담벼락에 살짝 붙여놔두더라도 차가 지나가면서 골목 끝이니까 보일 수가 있는 것이고 가져갈 수가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쪽에서는 골목 담벼락 안쪽에 놓아두었을 때는 크게 문제가 없는 건데 거 간단한 걸 왜 저리 싸우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거라.

자신이 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는지 아닌지 하는 것들을 까먹어버리고 본인의 이익과 행복만을 바라기 때문에 그런 거라.

 

여러분들이 적어도 선한 사람들의 영역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들이 설혹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기꺼이 행할 수 있는 마음이 돼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행위뿐 아니라 마음가짐도 꼭 마찬가집니다.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을 가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해코지하고 하려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고, 또 남에 것에 대해서 욕심부리고 없는 것에 대해서 짜증부리고 하는 것도 없고, 또 해야 할 일들을 자꾸 뒤로 미루고 게으름 부리고 하는 것들도 없이, 그런 마음들이 없이 탐·진·치가 없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설하는 법들은 항상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익이 있고 도움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좀 더 향상되고 청정해지고 그리고 도와 과에 이르는 발판이 되기 때문에 자꾸 기꺼이 같이 가서 법을 청해 듣고 또 법을 따라 실천할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유까라고 하는 장수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오래도록 살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선한 사람들 가까이 있으면서 그것들 따라서 자꾸 실천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리 하더라도 항상 그분들 옆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우선 그 법을 따라서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해야 될 것은 열 가지 선한 법자꾸 실천해야 되는 거고, 열 가지 선하지 않는 법들은 자꾸 멀리 할려고 해야 되는 겁니다.

 

가끔씩 교단에서 일들을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어느 법회든지 가면 계를 설해줍니다. 그러면 계를 마음 깊이 새겨가지고 오늘은 반드시 오계 아니면 팔계는 반드시 지키겠다 하고 마음 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받을 때뿐입니다. 돌아서고 나면은 내가 오계 받았다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리고 오계를 지켜야 된다는 것조차도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볼펜 하나라도 잃어버릴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아쉬워합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잃어버리면 아쉬워하는데, 정신적인 것들을 내가 마음에 담은 것들을 그걸 잃어버리는 것은 왜 아까워하지를 않느냐는 거라.

계를 받아 지닐 때는 "내가 오늘 오계 지키겠습니다" 하고 정신적인 것들을 받아지녔는데, 그것들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해서 잃어버렸을 때는 그것들에 대해서 아쉬워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또는 오늘도 탁발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음식이나 여러 가지들을 보시했습니다. 보시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은 보면 스님 탁발하니까 그냥 공양올린다고 생각을 합니다. 보시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한 마음을 지녀서 어떤 경우라도 선한 마음을 지닌 채 그 보시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돌아서고 나면 그 마음들도 잃어버립니다. 내가 보시했다는, 탁발공양 올렸다는 생각도 잃어버리고 또 내 물건에 대해서 내가 올린 공양물에 대한 애착을 또 가지게 됩니다. 선한 마음을 지닌 채 올렸으면 그 선한 마음을 끝까지 유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진정한 보시가 되는 겁니다.

 

또는 법을 들었으면 그 법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야 됩니다. 새겨졌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는 거라. 새겨진 것은 없어지질 않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새길려고 하지 않고 그냥 담아만 두는 거라. 담았다가 추르르 흘려버리고, 담았다가 추르르 흘려버리고.

법은 가슴에 새겨야 되는 것이지, 법은 그냥 지식으로 쌓아둘려고 하고 그걸 뭔가 다른데 내가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법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항상 그 마음을 자꾸 지녀야 됩니다. 내가 행한 것들에 대해서 내 자신만의 것으로 삼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회향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러한 공덕들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이러한 공덕들로 가족들이 평안하기를"

왜 그걸 여러분들만의 이익으로 자꾸 만들려고 하느냐는 거라. 오로지 여러분들만의 힘으로 그것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같이 회향할 줄 알아라는 거라.

 

또 살아가면서 내가 행한 것들에 대해서 진실함을 자꾸 되새겨야 됩니다.

「메추라기 서원경」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다리가 있어도 걷지 못하고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날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꼼짝없이 이 숲에 불이 나면 그 불길에 타죽어야 된다. 그런데 나는 그래도 내가 바른 일을 한 것들이 있다는 거라. 남에게 해꼬지 안 하고, 살아가면서 자기 욕심 안 부리고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진실의 힘으로 인해서 내가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실제로 그 불길이 그 주변을 싹 돌아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 갑니다.

 

진실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선한 일을 했을 때의 진실의 힘만 큰 것이 아니고, 선하지 않은 일을 했을 때도 진실의 힘은 큽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비가 안 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누군가가 '아, 내가 수행공덕으로 인해서 여기에 비가 오기를, 이것은 진실한 겁니다.' 하고 얘기했다 칩시다. 그런데 비가 안 왔어.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 참 내가 나라를 잘못 다스려가지고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참 잘못한 겁니다. 이것은 진실한 겁니다. 여기에 비가 오기를' 했는데 비가 왔다고 칩시다.

 

진실은 선한 것들만 진실 바라밀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하지 않은 것이라도 그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진실 바라밀은 성숙돼 나간다는 거라.

살아가면서 좋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면 선하지 않은 일들을 했을 때 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아, 내가 선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뉘우치면서 '아, 내가 그래서 이런 것들이 선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들이 진실한 것이다, 그리고 선하지 않은 일들을 아는 것도 진실한 것이다'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진실 바라밀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여러 가지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을 오래도록 살게끔 해준다는 거라. 장수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열 가지 선업」을 자꾸 쌓을려고 해야지 선하지 않은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선하지 않은 것도 선한 것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것은 선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자기 자신이 그것들을 안 하겠다고 다짐하게 될 때, 참회하게 될 때 그럴 때 그것은 선한 바라밀로써 되도록 하게 되는 말들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전 사무장이었던 수마나와 같이 "함께 기뻐하는 마음들."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으면 참 잘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들이 두려운 거라. 더불어 기뻐하는 일들을 꼭 좋은 사람들하고만 해야 될 이유가 뭐 있어요? 도둑이라고 하더라도 그 도둑이 뉘우치면서 "나는 다시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기뻐해 줄줄 알아야 되는데, 마음은 '저놈이 또 언제 도둑질할 줄 알아서'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행위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도 스님이 수마나를 자꾸 칭찬하는 이유가 뭐냐면 살인죄를 저질러 가지고 종신형을 받았다가 20년 만에 퇴소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오니까 어디 갈 데가 어딨어? 친척이고 가족이고 뭐고 다 흩어졌는데. 머리 하나 뉘울 데가 없는 거라. 수마나를 찾아갖는데 수마나가 기꺼이 아, 그래요? 내가 방 얻어드릴게요. 자기가 사는 집 옆에다가 500만원 들여가지고 방을 얻어주는 거라. 그러면서 그 사람이 바르게 일용직으로 시작을 해가지고 버젓한 직장을 가지는 것까지 보게 되는 거라. 그 사람의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이지 그 사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가지기를 그러한 행위를 한 사람 자체를 미워하고 멀리할려고 한다는 거라.

더불어 기뻐할 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대상은 한정이 없어야 됩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이든 아니면 좋은 일을 한 사람이든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든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든 한정하지 말고 같이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기뻐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찾아주게 됐을 때 진정으로 그 기쁨들은 더 증대되게 됩니다.

 

그다음에 "베풀려고 하는 것들에는 마찬가지로 한정됨이 없어야 됩니다."

베푸는 것들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한정돼있다든지 아니면 자신보다도 더 못한 사람에게 한정이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베푸는 것들은 한정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베푸는 것은 한정될 수가 없습니다. 자애를 펼칠 때도 한정시켜서는 안됩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래야 됩니다. 베푸는 것들도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나의 것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기꺼이 베풀 줄 알아야 됩니다. 설혹 도둑질을 해가지고 가져갔다 하더라도 기꺼이 그것을 잘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물건들은 베풀 줄은 아는데 자기 자신은 베풀 줄을 잘 모릅니다. 마음으로 베푸는 것들도 그 물질적인 것들을 베푸는 것보다도 훨씬 큽니다. 또는 혈액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든지 자기 신체 중에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든지 이것들도 큰 베풂입니다. 그런데 점점 개인화가 되다 보니까 참 잘 안 된다고 그럽니다. 베푸는데 물질적인 것, 자기 신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들을 또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 자꾸 베풀려고 하는 마음들, 속박됨이 없는 마음들을 지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 얘기했듯이 "짯따로 담마 왓단띠" "법을 따라서 실천하는 자"

법은 여러분들에게 참으로 많은 이익들을 줍니다. 법이 가져다주는 이익들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는 데도 법을 따라서 실천할려고 하질 않습니다. 수행을 배웠으면 끝까지 나는 수행을 계속 해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도 알아차리는 것들을 놓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오고 그것으로 인해서 실수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법을 따라 실천할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조그만한 알아차림만 알아도 그것들을 계속했을 때 오는 이익들이 참 많은데도, 법은 한량없는 창고와 같습니다. 그 창고를 분명히 봤으면서도 그 법을 실천할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법은 여러분들에게 항상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줍니다. 그래서 법을 실천할 수 있는 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더 높은 상태로서 나아가게 됩니다.

수명도 마찬가지고 건강도 마찬가지고 또는 수행의 진척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법을 따라 실천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꾸 돼야 됩니다.

 

또한 아유까, 장수할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우선시 해야 되는 것은, 쓰레기를 모으는 행위들을 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이는 것들은 버려버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법이 없어야 됩니다.

생각이 모이고, 원망하는 마음이 모이고, 또는 미워하는 마음이 모이고,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모이고, 도둑질하는 마음이 모이고, 이렇게 모이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오래도록 살게 하지 못합니다. 모아두는 것들은 전부 다 버려버려야 됩니다. 흩어버려야 됩니다.

생각도 모아두지 말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즉시 알아차려서 그것들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욕심 없이 살 수 없고, 성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범부 중생에게는!

 

그렇지만 그것이 오는 위험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들이 모이도록 만들어버리면 안됩니다. 모여버리면 여러분들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여러분들을 조절하게 됩니다.

쓰레기는 어떠한 경우든지 모으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쓰레기와 마찬가지다 하고 생각을 하고, 그것들은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고 버려버려야 됩니다. 자꾸 버릴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들을 아유까 오래도록 살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어려운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법을 따라서 실천하기도 어렵고 또 여러분들이 좀 더 나은 상태, 나은 마음의 상태를 지니고 유지하기도 참 힘듭니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살려고 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래도록 살더라도 그렇게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분명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하면서 하루라도 분명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알아차림을유지하면서 사는 것들이 훨씬 이익이 되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아유까가 되는 길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응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장수한다 · 오래 산다고 하는 그 의미는 우리 세속적인 장수하고는 조금 틀리는 의미로 봐야 됩니까?

스님 답변 : 세속적인 장수의 의미가 거기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하는 장수하는 조건들은 오래도록 살아도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는 것들입니다.

오래도록 살아야 그래도 여러분들이 뭔가 좋은 일들을 좀 더 할 수 있고, 좀 더 나은 정신적인 상태로서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내일까지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오래도록 살아야만이 그럴 가능성들이 더 훨씬 많아집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오래도록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살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