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타심통에 대하여 (20160512)

담마마-마까 2022. 2. 9. 09:00

https://youtu.be/HqBR6urlTnk

* 타심통에 대하여 (20160512)

 

오늘은 타심통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특별한 지혜, 특별한 능력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또는 색계선정 수행,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알기도 합니다.

그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죠? 위빳사나 수행에서 내가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그걸 알 때는 어떻게 압니까?

 

내가 만약에, 앞에 선등님이 있다, 선등님을 볼 때는 어떻게 봐야 되요? 선등님이라고 보는 게 아니죠? 보여진다고 알아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래서 그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형체인지 누구인지 명칭이 뭔지 이런 것은 전혀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대상으로 해야 되는 거라. 보여지는 것으로써 알아야 됩니다.

들리는 것은 소리가 저쪽에서 들리는 것이 있다면 그 밖에 것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어요? 내 귀에 두고 있죠! 보여지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내 눈에 대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보여지는 것은 밖의 것이 보여지는 것이고, 밖의 소리가 들려진다는 거라.

그래서 밖의 것의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아는 것을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밖에 보이는 대상이라고 해서 그걸 '보여진다'고 알아야지 선등님이라고 알아서는 안된다 하는 거라 개념화되버린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선등님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위빳사나 방법으로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어, 화가 나있네' 하고 아는 거고, 또 '게으름 부리고 있네' 하고 아는 겁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지, 지금 화가 나있는데 뭐 때문에 화가 나있는지, 아니면 화를 내는 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맞습니까?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밖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알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까? 충분히 아라한이 가능하죠! 그것은 신통의 부분은 아라한으로 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하는 그 정도인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또 밖의 몸과 마음을 알 수 있는 게 아까 얘기했지만 신통의 부분, 사마타 수행에서 신통의 부분입니다. 욕계에서 사마타 수행을 하는 상태에서 신통이 일어날까?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봅시다. '저놈의 자식이 뭘하고 있나' 하고 읽는다고 해봅시다. 읽을 수 있을까?

다른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에게 “안녕하세요, 스님?” 하고 인사를 한다, 그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는 별로 스님한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생각을 지닌 채 말은 그냥 “안녕하세요?” 이렇게 한다고 해봅시다. 내가 그걸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겠어요?

내가 그런 경험을 해봤을 경우에 '아, 저렇게 저런 몸짓을 하고 저렇게 말하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는 생각이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한다'고 알 경우에만 '아, 저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인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적어도 내가 저 사람보다도 뛰어난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마음을 읽을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여기서 '자, 여기에 부처님이 있습니다' 하고 상상을 해보라고 합시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진짜 눈을 감고 하다 보면 부처님을 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신통이 있어서 부처님을 본 겁니까? 신통력으로 부처님이 나타나는 거라? 그렇게 보기는 힘들죠?

한 곳에 마음을 오롯하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삼매에 들은 상태에서 삼매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도 특별한 능력을 지니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욕계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는 그것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적어도 색계 이상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삼매에 든 적이 없는 사람은 신통이 생겨날 방법이 없다 하는 겁니다. 삼매를 자유롭게 한 사람만이 신통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삼매를 자유롭게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원을 세웁니다.

'아, 내가 부처님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 '붓다눗사띠'를 한다, '아라항'을 하든지, '삼마 삼붓도'를 하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부처님 명호를 일심으로 쭉 해서 내가 삼매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삼매에서 탁 깨어나고 나서 내가 다시 마음에 '아, 내가 부처님을 친견해야지' 하는 마음을 다시 서원을 가지고 다시 또 삼매에 듭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다음 삼매에서 깨어나고 나서는 부처님이 탁 보입니다. 삼매에 들었을 때는 부처님을 볼 수가 없는 거고.

 

쉽게 말하면 서원을 세운 상태에서 삼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다시 결정심을 내서 부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삼매에 들고나서 깨어날 때 부처님을 볼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식할 때 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신통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다 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되게 겁나는 얘깁니다. 실제 그럴 수 있습니까?

앞에 위빳사나 수행을 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있지만, 그게 성내는 마음인지 아니면 삼매에 들은 마음인지 아니면 노력할려는 마음이 있는 건지 욕심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있는 건지 그것은 알 수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생각을 읽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예를 들면 생각은 얼마나 빠를까? 굉장히 빠르게 변합니다. 이 속에 모래가 있다, 그럼 모래를 한 줌 딱 쥐었다, 한 주먹 딱 쥐자마자 이 모래가 몇개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걸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이 모래가 몇개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수만 개가 되는데.

자기의 생각이 그마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을 관찰해서 수행한다는 것은 그래서 대부분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몸에 대한 관찰을 먼저 하고,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고 나서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면,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라 그렇게 보통 시킵니다. 그런 상태가 되지 않고 마음에 대한 관찰을 바로 해버릴 것 같으면 위험성이 항상 따르게 됩니다.

마음의 흐름을 알아야 되는데,

마음의 흐름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휩쓸려가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보통 성이 났으면 성이 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데,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면 '어? 이 성이 왜 났지?' 하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것은 마음에 대한 관찰을 잘못하고 있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 그래서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확연하게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할 것 같으면 마음의 흐름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을 분명하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마음을 알게 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타심통은 어떤 거라? 너가 화가 났는지, 아니면 욕심을 지니고 있는지, 네 마음이 고요한 상태인지 그것을 아는 것을 타심통이라고 보통 얘길 안 합니다.

타심통은 어떤 것을 얘기합니까? 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것은 부처님에게나 가능한 얘기지, 부처님 이후에 아라한들도 그러한 방법으로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라한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삼매의 상태에서 자신의 사고가 탁 멈췄을 때, 그것이 멈추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 향했을 때, 자연스럽게 향해지는 겁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의 생각들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적어도 삼매를 자유롭게 하는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방법은 없다는 거라.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떨 때는 스님이 내 생각이 뭔지를 아는 것 같아가지고 겁이 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절대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걸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나 이런 것을 보고 '생각의 흐름'은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흐름은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하고 있는 생각 내가 집에 가스불을 켜두고 왔나, 안 켜두고 왔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그건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단지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찰나 간에 삼매에 들었다가 찰나 간에 빠져나오고 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그 사선정까지 탁 들었다가 나오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닐 것 같으면, '그 생각 자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게 없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을 읽을 것이다' 하는 것은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독심술을 한다, 그거 전부 가짜라는 거라. 불가능 하다는 거라. 특히나 독심술을 한다는 분들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보면 대부분 욕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뭔가 이익을 취할려는 마음들, 그리고 뭔가 결점이나 이런 것들을 알아낼려고 하는 거라.

 

욕계의 마음에서 어떠한 경우든지 생각 자체를 읽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조차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적어도 색계의 마음이 되어있을 때 선정의 상태에 드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있습니다.

 

또는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대상에 대해서 내가 대상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알아지게 될 때, 라고 하는 것들, 자아관념이 없어질 때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명확하게 그것을 인식하는 상태에서는 그게 가능한데, 그것은 색계의 마음 이상이 될 때야 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 '이심전심' 그것은 어느 쪽에서 보면 됩니까?

 

스님 : 이렇게 보면 됩니다. 누군가 뭘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어? 그 사람이 뭘 생각하고 있다' 하는 것을 분명히 탁 알고 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나'라고 하는 관념 개념들을 가지지 않고 그 사람에게 마음이 향해 있을 때, 그 사람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그 생각만 찰나 간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걸 이심전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가능합니다.

그것도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나'라고 하는 관념이 없이 마음을 그 대상을 향했을 때 그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생각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의 흐름은 어떤 경우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생각을 읽을 수는 없다 하는 거라.

만약에 그랬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대념처경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해놓으면서, 생각, 생각에 대한 관찰은 그렇게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적어도 자신의 마음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야 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범부 중생이다. 여러분을 비유를 들면 안 되겠지만 어린아이가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능력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경험해봤고 그것보다도 더 큰 마음을 지니고 있는다는 거라.

적어도 마음이 내가 밖에 대상을 향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려면 적어도 그마음보다도 더 커야 됩니다. 더 성숙해 있어야만이 그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어머니들은 아이 마음을 멀리 있어도 나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향할 것 같으면 아이의 마음을 탁 이해를 합니다. 순간적으로.

그런데 아이는 어머니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어머니의 마음을 탁 관찰하기가 힘이 들어. 안 되는 거라.

 

경전에서는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타심통이라고 하는 것은, 욕구가 있으면 욕구가 있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 또는 내가 사마디에 들었으면 사마디에 든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 또는 마음이 더욱더 성장했으면 성장했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 이런 것들을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타심통이라고 얘기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마음은 알지만 그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단지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마음을 먼저 서원을 세우고 나서, 삼매에 들어서 사선정까지를 경험했을 때, 사선정에서 나오고 나서 처음에는 바로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원을 세워야 됩니다.

아, 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을 분명하게 가졌을 때, 그러고 나서 다시 또 삼매에 들어서 사선정까지 자유롭게 될 때, 그 선정에서 깨어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생각의 흐름까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이 집중하는 힘이 굉장히 컸을 때 내가 지금 1분 전에 한 얘기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집중하는 힘이 컸을 때는 그 집중이 잘된 상태에서 집중하는 힘이 큰 상태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할 때 1분 전에 한 말을 분명하게 기억을 합니다. 하루 전에 말한 것들도 내가 사띠가 쭉 이어온 상태에서 삼매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루 전에 한 것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자신이 한 것조차도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자신의 생각이 하루 전에 뭘 생각했는지조차도 알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내가 분명하게 사띠를 그 시간동안 지니고 왔을 때, 그리고 그 사띠가 아주 강해졌을 때 자기 생각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삼매가 자유롭게 되어서 사선정까지 들었을 때 자기가 그 사람을 향해서 마음을 내어서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가끔씩 그럽니다. 사람들이 '아, 내가 아라한에 이르렀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또는 '내가 마음이 항상 청정하게 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강하게 지닙니다. 그런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수행을 쭉 해나갔을 경우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서원을 얘기합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할 경우에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힘이 드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는 거라.

왜? 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미국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럴려면 여러분이 미국인의 사고방식이나 미국말 영어를 할 줄 알아야만이 그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걸 모를 경우에는 그걸 할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찰나 간에도 수천 차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 방법은 사실상은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대신에 여러분은 무얼 알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의 기분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 저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니면 저사람이 뭔가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건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사람에게 마음을 향했을 때,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두고 그사람에게 마음을 향했을 때 그 기분을 읽을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그 기분을 읽지 못하면 잘못 판단을 한다는 거라.

 

아이가 우는 게 무슨 기분으로 우는 것인지를 모를 것 같으면, 똥을 쌌는데 밥 먹을 걸 줄려고 한다는 거라. 지금 현재 애가 밥 먹을 타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 배고파서 운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버리고 이 아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을 거 같으면, 이 아이가 지금 똥을 싸가지고 불편하기 때문에 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을 건데 그걸 모른다는 거라.

그러한 조건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상대방의 기분조차도 알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기분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읽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 수행이 중요하고 나의 일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라.

또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읽을려고 하더라도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치에 물들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을 그사람에게 향했을 때 그 기분을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엄마는 아이의 기분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는 엄마의 기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지금 현재의 감정 상태가 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상태에 도달해서야 만이 그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라한의 마음을 읽을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삼매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삼매에 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많이 저지르고 또는 도둑질을 많이 한 사람들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도둑질을 많이 해보지 않았을 거 같으면, 그 마음을 그 기분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 도둑질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맞춰줄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고, 그 마음을 여러분들이 돌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 기분을 맞춰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술을 잘 먹는 사람한테 옆에 가가지고 그사람의 기분 맞춰줄려고 자기가 술을 먹다가 그냥 자기가 술에 취해버리는 그런 거라든지, 아니면 그 사람의 기분을 맞춰줄려고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 사람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들이라든지.

자신의 능력의 범위가 아니라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 기분조차도 맞출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오히려 바른 방향으로 인도를 해주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는 거라.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운동을 하고 나서 맥박을 체크 해보면 맥박이 훨씬 많이 뛰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몸이 고요해지게 될 거 같으면 마음도 고요해지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먼저 몸부터 자꾸 다스려야 됩니다.

 

「몸의 침묵」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이 바른 방향으로 고요해지게 될 것 같으면 마음도 따라서 다스려진다는 얘깁니다. 마찬가지로 말하는 것들도 다스려지게 된다는 얘깁니다. 몸이 자꾸 날뛰게 될 거 같으면 한곳에 있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다니게 됩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몸을 쓰는 일들 몸을 움직이는 일들을 하질 않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하는 것들도 쓸데없는 말들로 해서 말을 하는 일들을 삼가하게 된다는 겁니다.

몸과 말과 마음이 고요하게 침묵에 이르게 될 때, 그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요함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요동치는 것들이 줄어들면 번뇌는 줄어들어갑니다.

몸이 요동치는 것들이 줄어들면 번뇌도 줄어들어갑니다.

말하는 것이 요동치는 것들이 줄어들면 번뇌도 줄어들어갑니다.

생각하는 것은 전부 번뇌의 종류들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들 요동치는 것들을 고요하게 자꾸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쓸데없이 망상하고, 쓸데없이 뭔가 몸을 움직이고, 뭔가 친구를 찾고 하는 것,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될 때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요하게 될 때 자신의 생각의 흐름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현재 일어나는 것들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 때,

그것이 탐욕의 마음인지, 성냄의 마음인지 분명하게 알 때,

그것을 빨리 잠재우게 되는 거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더 나쁜 일들을 방어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신통이 있든 없든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그러한 몸과 말과 마음이 요동치는 것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른 성자들은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는 거라.

내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는 그 어떤 것에도 휘말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사람이 독심술을 한다고 하든, 아니면 신통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전혀 무관한 일이 돼버립니다.

 

타심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입니다.

타심통은 적어도 사마타 수행을 하는 분들에게는 사선정까지가 자유롭게 됐을 때 그러한 서원을 세운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타심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는 '나'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그 대상이 와서 부딪치게 됩니다. 내가 들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들리게 되는 거고, 보여지게 될 때 그럴 때 밖의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밖의 몸과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의 위빳사나 수행자에게는 타심통과 같은, 그리고 그와 같은 밖의 대상들 명색들을 분명하게 아는 능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밖에 것들에 대해서 요동치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어서 고요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성자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한 이치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 있을진 몰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수행자 질문 : 그러면 스님, 마음을 관찰한다 했을 때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의 흐름을 통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관찰해야 되는 것입니까?

스님 답변 : 마음이 일어났으면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 마음이 일어났으면 '아, 그마음이 일어났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그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것들을 방어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그것이 가라앉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실패를 하는 것이 뭐냐면, 그 생각이 일어난 것들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확대되어버리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은 그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큰 대상이 나타나면 그 마음이 쏠릴 때 대상은 어느 정도 약해지게 됩니다.

그런 과정들을 겪기 때문에 마음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서 그것을 지켜본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그걸 따라갈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단지 지켜보면 그 흐름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걸 알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그걸 따라갈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 상태를 관찰하라는 것인지...

스님 답변 : 그거는 심념처에서 어느 정도 수행이 됐을 때, 그때는 쉽게 말하면 그걸 따라가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 그리고 마음의 상태가 내가 지금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 그거는 대상 하고는 관계없이 다른 대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거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났을 때 마음의 상태나 느낌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때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좋은 방법이 되는데, 그걸 따라가버려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스님께서 금방 법문하실 때 "생각은 알 수가 없고 마음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생각과 마음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잘 안됩니다.

스님 답변 : 자기 말고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생각과 마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보통 생각의 흐름을 마음이라고 저는 이해해 왔는데, 두 가지로 나눠서 말씀하시니까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님 답변 : 마음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생각의 흐름'들이 생겨나는 것들은 그것은 '마음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요소가 '마음'을 일으킵니다. 맞습니까?

 

수행자 질문 : 생각 말고 따로 마음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스님 답변 : 마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걸 조건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만약에 내가 화내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그 화내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이 '마음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은 '화내는 마음'이 생겨난 겁니다. 이것을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화를 내는 마음이 있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음과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생각들이 많이 모였을 때 그 안에 흐름을 형성했을 때, 어떤 특정한 전체적인 느낌을....

스님 답변 : 마음은 어떤 경우든지 조건지워지는 겁니다. 마음의 요소에 인해가지고 조건지워지는 것들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특정하게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마음의 요소에 인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마음의 요소가 바뀔 것 같으면 이 마음도 바뀌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하고 마음의 요소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생각의 흐름이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의 요소가 생겨난 겁니다.

 

그러면 그 생각의 흐름은 자기 자신 것은 내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것은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하도 빠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읽을 수는 없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그 사람의 마음은 분명하게 내가 알 수는 있다는 거라. 그래서 화가 났을 경우에는 화가 났다고 하는 그 마음은 안다는 거라. 다른 사람의 마음은.

그런데 그 화가 난 것이 뭐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그 생각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단지 추정할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 거 말고 다른 사람의 것을 알 때는, 그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아는데, 그 마음이 생겨난 원인이라든지 이런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걸 생각의 흐름이라고 그러는 거고, 그다음에 그것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됐습니까?

(수행자 대답 : 모르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금 삼매에 들지 않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낼려고 해서는 그것은 맞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알려고 하는 것은 그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만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화가 나있으면 화가 나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 저 사람이 왜 화가 났을까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화가 난 것을 “너 왜 화났어?” 하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저 화낸 것은 뭐라고 자기가 유추해가지고 할 것 같으면 틀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라. 그 사람의 마음은 생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생각의 흐름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뭣 때문에 화가 났을 것이다' 하고 자꾸 판단하고 그걸 '알았다고' 한다는 거라.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단지 그사람의 밖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특히 삼매를 자유롭게 하는 상태가 아니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관념을 버리고 그 사람의 마음이 현재 무슨 마음이다 하는 것만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해야만이 그 사람의 기분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 얘깁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