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2016년 붓다의 날_붓다의 탄생과 유훈 및 깨달음 (20160521.경주 마하보디 선원)

담마마-마까 2022. 2. 13. 09:00

https://youtu.be/HRGu1msr8Io

* 붓다의 날_붓다의 탄생과 유훈 및 깨달음 (20160521.경주 마하보디 선원)

 

물 한잔 안 주나? 올해가 불기 몇 년이라요? (수행자 대답 : 2559년)

2559년, 어떤 데는 2560년 그러죠!

불기가 바뀌는 때는 언제부터 바뀌어요? (수행자 대답 : 붓다의 날)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이후로는 원래 원칙적으로 할 것 같으면 불기가 탁 바뀌어버립니다.

오늘은 2559, 내일은 2560년이 되어야 맞죠! (수행자 대답 : 예)

 

요즘은 서기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까 올해는 전체가 2559년, 내년에는 2560년 이렇게 합니다. 어떤 데는 불기를 2560년으로 하는 데가 있고, 어떤 데는 2559년으로 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부처님이 입멸한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한 해를 43(BC 543)년 어떤 데는 44(BC 544)년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차이 때문에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거는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쨌든 불기의 시작점이 있습니다.

사실은 오늘이 시작점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은 아니라는 뜻이죠? 불기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날을 기준으로 해서 불기가 변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 입멸하신 날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또한 부처님이 성도하신 날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게 3개의 날을 기해가지고 그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가지고 그걸 "웨사카 붓다의 날이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오늘 생일인 사람? 없어요? 경전을 다 들여다보면 그런 "3대 경사스러운 날"일 뿐아니라, 오늘은 또 부처님이 출가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시고 나서 처음으로 본인의 고향인 까삘라왓투로 가서 법을 설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데는 "4가지 경사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큰 축제의 날입니다. 웨사카 붓다의 날이! 부처님의 날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처님한테 예경드리기 위해서 여기에 왔죠?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그리고 법을 설하시고 한 것들은 우리들한테 참으로 축복된 날이고 행복한 날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여러분들한테 뭔가를 바랬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바램대로 지금 따르고 있는가?

그렇게 완전하게 아라한을 이루신 부처님이 우리한테 뭘 바라는 게 있겠어? 바라는 것이 없겠죠. 그렇지만 그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계속적으로 전해졌으면 하는 그런 바램들을 틀림없이 가질 수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A를 얘기했는데 누군가가 A라고 안 하고, B라고 얘기한다 할 것 같으면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는 A를 얘기했어"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겠죠.

 

부처님도 법을 남김없이 설하시고 나서 '그 법이 그래도 계속 전해지기를' 하는 그런 바램을 틀림없이 가졌을 겁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런 바램을 가질 수가 있을까?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은 해탈에 이르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빨리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괴로움의 끝을 봐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거고!

그렇게 봤을 때는 적어도 이런 세 가지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바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노년이 돼서 부처님의 몸에 병환이 생깁니다.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 같은 것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 이 허리 통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지금 내가 이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는 결의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통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강한 것이었습니다.

과거 전생에 씨름선수였는데 상대방 선수를 넘어뜨리다 허리를 부러뜨린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12가지 잘못이 있다 하는 부분이 주석서에는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허리를 그렇게 부러뜨린 잘못으로 인해가지고 이생에서 마지막 열반에 이르기 전에 그 과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보는 너무 커가지고 죽기 전에는 고통이 끝나는 법이 없는 거라. 그 정도로 강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걸 멈추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아라한과의 선정에 들어가지고 '아, 내가 열반에 이를 때까지 이 고통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결의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과의 선정에서 나오고 나서 다시 또 결의를 하는 거라. 그런 과정을 겪어서 마지막 부처님이 가시는 길에서 그런 고통스런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노년에 부처님은 이미 80에 이르렀고, 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목숨을 어떻게 더 지탱할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주석서나 경전에는 사람들이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래는 한량없이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한량없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해진 수명 내에서 만약에 지금 현재 사람들이 아무탈 없이 120살까지 살 수 있다, 아니면 1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100살까지가 마지막 멕시멈입니다.

부처님이 80세였으니까 부처님 당시 때는 아무런 일이 없을 때 살 수 있는 것이 딱 100살까지라고 그렇게 주석서에 나옵니다. 그럼 한 20년 더 살 수 있겠죠. 한정없이 계속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그 20년 동안 더 살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도 참 좋지만 부처님 스스로도 돌아보니까,

'아, 그래도 내가 설한 법은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것도 없이 다 누구에게든지 법을 설해놓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잘 실천하고 잘 따라가지고 마음이 청정해진 상태에 있고, 또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이 법을 만난 것으로 인해서 참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인제는 부처님이 안 계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누구든지 실천해서 나와 같은 그런 도와 과에 이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인제 "나는 삼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스님이 가끔씩 경전을 읽으면서 옛날에 가슴이 참 울컥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삼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 고통스러운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라한과의 선정에 들어서 매일 결의를 해야 되니까 매일 결의를 하고 내가 이 힘든 과정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부분에서 옛날에는 부처님이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그 대목에만 이르면 마음이 좀 울적하기도 하고 그런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삼개월 후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을 했던 것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그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켜주고 있는 거라? 안 그러면 다시 부처님을 살려내야 돼. 다시 이 자리에 살려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그렇게 열반에 들었을 이유가 없는 거라.

 

여러분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가고 배우고 있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됨이 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암송을 하고 다음 세대에도 전하기 위해서 참 열심히 공부들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덕분으로 지금 경전들을 배우고 있는 겁니다. 그런 출가한 스님들의 노력이 없었을 거 같으면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여러분들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 있는 스님들은 그 후배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은 그냥 주는 밥 따다 먹기만 하면 되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배우고 또 익히고 하고 있느냐는 거라.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수가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은 무엇 때문에 설했습니까?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한 겁니다.

 

경전에는 붓도 보다야 담망 데세띠(Bddho bodhāya dhammaṁ deseti.) 그렇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했다.

부처님이 스스로 좋아서 법을 설하고 싶어서 설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그 법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가엾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한 거라.

여러분들은 법을 들으면서 법을 익히고 배우고 하면서 지금 점점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느냐는 거라. 오늘 번뇌가 스무 가지가 일어났는데 내일은 열아홉 가지로 줄어들어 가고, 마음은 오늘 보다도 내일이 더 맑고 깨끗해지고 그리고 가벼워져가고 있느냐는 거라.

적어도 깨달음으로 나아갈 거 같으면 그길로 가야 될 거 아니야? 마음도 증장되고 도와 과의 과정들도 점점 더 밟아가지는 거고. 왜 그러냐면 그렇게 가는 길은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그길만 쭉 가게 되는 거라.

 

가끔씩 여기 첫 번째 부분을 하면서 스님도 가끔 게으름 부릴 때가 있었습니다. '아, 오늘 안 배우면 뭐 내일 하면 되지.. 저쪽에 스님 법문하는데 그거 안 가고 오늘 내가 할 일 있는데 그거 하고 말지...' 점점 더 그런 마음들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더 가까이 접하고 또 그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으면 가서 배우고 실천하고 하는 것들을 습관화 자꾸 하고, 해야만이 그 길로 들어설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점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디에서든 법을 설하는 곳이 있다, 아니면 바르게 법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자꾸 찾아가는 습관들을 길러야 됩니다.

지금 원래 가지고 있는 마음들을 거슬러서 마음을 내지 않을 거 같으면 그 길로 들어설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꾸 배우고 익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적어도 설한 것들은 완전했고 감춰둔 비밀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대로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배우고 익히고 할 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3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을 결의를 한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못하고 있으면 어떡하느냐는 거라. 자꾸 배우고 익히고 하는 것들을 등한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아세위땁바(āsevitabb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참 이런 붓다의 날은 어찌 보면 귀찮은 날입니다. 스님 태국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무슨 행사가 그렇게 많은지 공부 조금 할라고 그러면 저기 가자, 여기 가자 하니까 어떨 때는 귀찮아. 그래서 그거 안 갈라고 빼기도 하고 이런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마음이 그때 고요해지고 하니까 '아이, 가자. 가지 뭐' 이렇게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세위땁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거냐면 지금 붓다의 날을 보면 정해집니다.

 

붓다의 날은 뭐 때문에 해야 됩니까 여러분들에게? 흥청망청 놀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죠? 부처님 가르침 되새기면서 그것을 따라서 갈려고 결의를 하고, 또 그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양로원이나 이런데 가서 보시도 하고, 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들ㄹ도 나누어주려고 하고, 그리고 조금 더 밝게 길을 다니라는 의미에서 등불도 켜는 거고,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설하는 스님들에게 오늘 같이 공양도 올리는 거고, 이러는 것들이라는 거라. 직접 그런 것들을 실천하기 위한 날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그럽니다. “그렇게 실천해봐야 별로 나한테 공덕이 돌아오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귀찮습니다.” 지금 돌아올 것만 생각하고 그걸 할 거 같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 나타날지 모릅니다. 행해진 것들이 결과를 나타내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선한 마음으로 뭔가를 행했을 거 같으면 언젠간 나타나고 하겠지. 그런데 왜 그걸 금방 따먹을 듯이, 뭐 한국 사람들 아니라고 할까봐 가지고 빨리빨리 뭔가를 바라느냐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을 하는 것들이 주목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실천하고 나서 뭔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하고 실천한다 할 거 같으면 그건 잘못됐다는 거라.

 

붓다의 날이 있다, '아, 스님들한테 공양올려야 되겠다' 하고 마음 먹었을 거 같으면, 설혹 내가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든 또는 탁발을 올리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당하든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거라.

또는 내가 그런 공덕을 쌓기 위해서, 실천하기 위한 길에서 나에게 조그만한 손해가 온다고 하더라도 왜 그걸 따지고 있느냐는 거라. 선한 마음을 내기 위한 장소들, 또 그런 일들은 자주자주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의미들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배우고 익히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거 같으면 한쪽짜리 발을 가진 마차와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항상 제자리에서 맴돌게 돼있는 것이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봤을 때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걸 실천 잘하고 있다는 거라. 열 가지 바라밀을 세 가지로 나눠서 삼십 가지 바라밀들도 잘 실천하고 있고, 또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살아가는 것들도 계율을 지키고 남에게 집착하는 마음 없이 또 그 사람들을 용서할려는 마음들도 가지고 잘 나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인제는 내가 굳이 없어도 충분하겠다' 하고, 그래서 '아, 내가 삼개월 후에 열반에 들것이다' 하고 결의를 하게 되는 거라.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지금 따르고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바라는 대로 지금 행해나가고 있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부처님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것도 반쪽짜리 밖에 되질 않습니다.

성냄이 많을 때는 성냄의 종류가 몇가지다 하는 것은 경전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걸 다시 또 쪼개보면 여덟 가지가 된다, 열 가지가 된다 분명하게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성냄이 일어납니다. 불뚝 일어나는 그런 성냄은 없을지 몰라도 남을 보면은 '지가 뭐라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느 거라. 그것도 성냄이 일어나는 거라. 그걸 통제할 줄 몰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냄이 일어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거라. 좀 더 성냄에 대해서 주의 깊게 공부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도 성냄이 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거는 뭐냐면 그것이 일어났을 때 참 나에게 안 좋은 상황이 닥쳐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 일으킬려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수행을 통해가지고 성냄이 일어나는 원인을 분명히 보게 되고, 성냄이 변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볼 거 같으면, 그 성냄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돼버립니다. 그럼 어느 순간에 나에게는 성냄이 딱 떨어져나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성냄과 관계되는 것들은 결부를 하지 않게 되는 거라. 결합을 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것도 없고 질투하는 것도 없어지고 의심하는 것들도 없어지고 이런 식으로 바뀌어나가게 되는 거라. 그럼 본인은 '아, 나에게는 인제는 성냄이 없구나' 하고 분명하게 탁 알게 되는 거라.

그게 결과입니다. 성인에 이르렀을 때는 본인이 그 상태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면서 그런 맛을 알지를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반쪽짜리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내가 수행해서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론상으로 알 거 같으면 원인·결과는 그냥 이론에 그쳐버립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고 있을 거 같으면, 그전에는 그것이 물질적인 현상인지 정신적인 현상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걸 분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원인·결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는 '아,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고, 그 상태를 넘어선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설혹 다리에서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신적인 고통으로까지는 연결되지를 안 해. 그게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가능한 거라.

하나의 결과는 그다음 원인이 되게 되고, 그 원인은 또 다른 결과를 낳게끔 된다는 거라.

 

여러분은 과연 이 사다리를 몇개의 단계 정도까지 지금 통과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일주일 수행하고 또는 여기 와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나서 편하고 좋긴 한데 집에 가면 도루묵 되는 거라. 계속 이렇게 쳇바퀴만 돌고 말거냐는 거라.

안 힘들어? 그게?

하나의 상태를 넘어서 버릴 것 같으면 다시는 그 상태에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는 가야될 거 아니라.

 

부처님이 봤을 때 부처님 제자들은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는 거라.

'바웨땁바(bhāvetabbā)' 그것들을 완전하게 개발을 한 상태입니다.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는 거라.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서 또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이끌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굳이 부처님이 안 해도 돼.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말고 여러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고 거느리고 있다는 거라. 충분히 부처님이 인제는 내가 완전하게 열반에 들 수가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거라.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마찬가지로 그 조건들을 충족을 시켜주고 있느냐는 거라.

 

오늘은 붓다의 날입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건 기대를 과연 우리들은 지금 현재 충족시켜주고 있느냐는 거라. 적어도 그것만 돌아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냥 부처님 열반하신 것 슬퍼하고, 부처님 태어나신 것이 기쁘고, 성도하신 것은 참 축복할 일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은 오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열반하셨지만 그 제자들인 우리들은 부처님의 기대대로 바람대로 그것들을 꾸준히 끊임없이 그냥 갈고 닦아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오늘 돌아봐서 내가 그걸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몸은 이 자리에 있지만 부처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적어도 부처님 제자답게 부처님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