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이다 (20160602)

담마마-마까 2022. 2. 15. 09:00

https://youtu.be/3uZvCElN6jg

*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이다 (20160602)

 

우리 송천님은 가솔린차 아니고 경유차죠? (아닙니더. 휘발유찹니다.)

휘발유차에요? 안 그래도 요즘 경유 값이 오른다는 얘기가 있던데, 아무래도 미세먼지가 많이 나오는 것 때문에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걸 접하면서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자동차에 들어가는 연료는 다 태워져서 나오는 거죠? 어쨌든 그 연료가 에너지가 되서 차가 굴러가게끔 이렇게 해줍니다. 그런데 다 태워지지 못 할 경우에는 항상 미세먼지나 연기나 아니면 여러 가지 식으로 그 연료의 일부 찌꺼기가 그렇게 빠져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짓는 모든 것들이 그런 연료와 같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그런 미세먼지나 찌꺼기를 계속 배출해야 되는 거라? 아니면 뭐 몸이 따라가더라도 그런 영향을 안 받고 갈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배출을 해야 되는 거라?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쁜 것은 아닌 것들..

 

스님도 가끔씩 기름을 넣었을 때 어떤 주유소에 가면 기름을 넣고 나면 뒤에 꽁무니쪽에 보면 조금씩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게 불완전하게 연소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지, 휘발유차인데도. 그럴 때는 일부러 속도를 거의 일정하게 달립니다. 일정하게 달리면 그 나오는 연기가 거의 없어져요. 급가속한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연기가 많이 뿜어져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거의 속도가 비슷한 상태에서, 아마 남이 뭐라 하든 간에 비슷한 속도로 그 연료를 다 쓸 때까지 계속 달려줍니다.

 

여러분이 짓는 행위들은 전부 업이 됩니다.

그런 짓는 행위들이 내뿜는 연료와 같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좀 더 조심스러워 해야 될 겁니다. 직접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설혹 나쁜 연료가 차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차를 일정한 속도로 쭉 유지해나가면 그런 내뿜는 것은 적어지고 또 없어져버립니다.

설혹 악한 마음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잘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연료가 소모되듯이 그냥 그 조건에 인해서 사라져버리고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를 거 같으면 그냥 평상시 자기가 운전하던 습관대로 그냥 쭉 하게 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수행주제는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하는 것으로 잡아놨는데,

가끔씩 스님이 요 밑에 온천천에 포행을 나갑니다. 여기보다 공기가 깨끗하고 또 거기 물이 있고 하기 때문에 쭉 걸어가지고 저쪽에 어떨 때는 연산동 그쪽까지 갔다가 와요. 어떨 때는 한 두시간 걸려요.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면서 참 많은 것들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잘 보고 가면서 뛰어갈 것 같으면 안 넘어질 건데 뭐 정신없이 그냥 가다가 어찌 잘못돼가지고 탁 넘어졌어요. 넘어져서 막 울더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애가 크게 안 다쳤다 싶으니까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가버리는데, 마침 스님이 지나가다 봤는데 그 뒤에 어머니 되는 분이 따라와가지고 아이한테 그러는 거라. “아이고, 내가 잘못했어. 너를 봐야되는데 못봐서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하니까 아이가 뭐라는지 알아요? 지가 넘어져놔놓고 “엄마 때문이야!” 그러는 거라.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 '왜 엄마 때문이야? 지가 똑바로 보지 못하고 가다가 넘어져놔놓고' 나 같으면 그렇게 넘어진 것이 크게 다친 것이 아닐 거 같으면 “아이고, 엄마가 잘못했어” 하고 그렇게 아이를 달랠 것이 아니고 “봐라. 너가 똑바로 보지 못하고 가니까 그렇게 넘어지지 않느냐? 넘어지면 무릎을 까인다든지 다친다. 왜 다치는 일들을 하느냐? 똑바로 보고 잘 뛰어가라” 하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대부분 엄마들은 그렇게 안 하는가? 그냥 아이 달래기 바빠서 그냥 그렇게 얘기를 하는가?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이래서 사람들이 잘못된 견해를 어릴 때부터 심어주게 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왜 자기 탓이지 남의 탓이라? 걸핏하면 우리는 자기가 잘못해놔놓고 다른 거 핑계대기 바쁩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 와놓으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볼려고 하질 않고 남에게 자꾸 그 잘못을 뒤집어 씌울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절대유일의 신'이라는 개념에 빠지게 되고, 또 더 나아가게 될 것 같으면 '영혼'이라는 개념에 빠지게 되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개념화시키고 또 사회에 대해서 그 잘못을 얘기하게 됩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그랬어요. 이 사회가 잘못된 것들은 "사회가 잘못됐다" 했어요. 그래서 사회하고 그리고 다른 이들하고 투쟁하고 싸우는 것에 바빴었어요. 그런데 출가하고 나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잘 됐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자신이 먼저 잘못했다 하고 나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부터 바뀌어져야 사회가 바껴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신은 옳고 정당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고 사회의 잘못만 자꾸 비판하다 보니까 문제가 풀리질 않더라는 거라.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입니다.

수행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자꾸 만나게 됩니다. 어떨 때는 성냄이 있으면 '아, 내가 이렇게 성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닌가?' 수행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수행하다 보니까 자꾸 만나진다는 거라.

또 성냄의 종류가 각각 다른 양태로써 드러나진다는 거라. 그걸 보면서 '아, 이렇게 성내는 거 하나 다스리는 것도 참 힘들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인제 성냄이 탁 떨어져나가는 걸 자기 자신이 알게 됩니다.

 

아마 자기 자신을 만나기 가장 좋은 게 수행일 겁니다.

가장 냉정하게 자기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바뀔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이 바뀌려고 하지 않고 남 탓이나 사회의 탓으로 자꾸 돌릴려고 할 것 같으면 굳이 수행해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바뀔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점점 자기자신을 자꾸 수행에서 만나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아주 가난하게 사는 분이 있었어요.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빌어먹고 살다가 어느 스님을 만났어요. 스님이 봤을 때 너무 안타깝거든. 그래서 차라리 너 그렇게 살지 말고 그냥 출가해라. 출가해가지고 수행만 열심히 해라. 그러면 된다.

그런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출가를 했으면 반드시 수행을 해야 되는 거고, 출가하지 않고 사회에 있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보호해서 자기 자신이 먹고 살아야 되는 일들을 해야 되는 거고.

그런데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될 경우에는 더 노력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노력하는 방법이 틀렸고 가는 길이 틀릴 것 같으면 그게 잘 안됩니다. 쉽게 포기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분도 아마 마찬가지였겠죠. 그래서 계속 그렇게 빌어먹는 방법으로 살아가게 되니까, 그 방법은 아니다 싶어서 어느 스님이 출가를 시켰는데,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는 좋지! 굳이 애써 벌어야 될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때입니다. 그거 안 하는 대신 뭐 해야 되요? 출가하고 나면 수행해야 되는 거라.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되는 거라.

수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수행이 잘 될 때는 모르는데, 수행이 안 될 때는 진짜 하기 싫습니다. 누가 여기에 한 시간 동안 앉아있으라고 할 것 같으면 뭔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하지 하기 싫을 때는 거기 못 앉아있는 거라.

 

아마 이 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너무 하기 싫은 거라. 뭐 해도 별로 결과도 없고, 언제 도와 과에 이를지도 모르고 하니까 그게 싫어서 다시 또 사회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사회에 나가서 빌어먹더라도 내가 노력해가지고 벌자 하는 생각이 들고 하니까.

그럴 때마다 숲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경책합니다.

'다시 너가 그렇게 힘든 사회생활로 들어갈려고 하느냐?'

아마 모르긴 해도 사회에서 사는 것이 출가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겁니다. 자기 자신만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관계들이나 가족 간의 문제나 여러 가지의 일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가 훨씬 힘들 겁니다. 그렇다고 정직하고 바르게만 한다고 해서 잘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더구나 힘듭니다.

그런데 수행은 그런 거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자신하고만 하면 됩니다. 정직하게 자신이 한 만큼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숲에 가서 '아, 그래도 내가 수행을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잡고 다시 또 돌아오고, 그것이 계속 자꾸 번갈아 가다 보니까 다른 스님들이 물어봅니다.

“니 또 어디 가노?” “내 스승님 만나러 갑니다.”

그분에게는 그 숲이 자기에게 스승이라.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 스님이 숲에 안 가게 됩니다. “니 요즘 왜 안 가노?” 하니까 인제 스승이 필요 없어졌다는 거라. 내가 번뇌가 전부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인제는 다시 숲에 갈 일이 없어졌다는 거라. 그래서 스승을 찾을 일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다. 다른 어떤 것도 자신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됩니다.

 

본인이 선택한 길입니다. 여러분들도 만약에 출가했다면 출가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야 됩니다. 재가생활을 할 거 같으면 재가 생활의 길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누가 출가를 하지 마라 그랬어, 뭘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

갓 결혼을 해서 가족이 생겼으면 그 결혼한 것도 누가 시켰나? 자기가 선택한 거라. 그럼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은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겁니다.

 

그 스님이 숲에 간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그 숲에 가서 자신을 돌아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돌아보고 있습니까?

'아, 내가 좀 더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현재의 위치, 아내면 아내, 남편이면 남편, 자식이면 자식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말씀에 맞게끔 내 할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거라. 안 될 때마다 자꾸 돌아보라는 거라.

육방예경이나 여러 가지 경전에서 부처님이 그때 그 상황에 맞는 의무들이나 해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재가자로 살아가면서 또는 출가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을 최선을 다해서 가고 있느냐는 거라. 그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느냐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그 아이도 나중에 크고 나서 길을 가다가 두리번거리다가 넘어졌다 할 것 같으면 그때는 엄마 탓을 안 할 겁니다. '아이고, 내가 또 정신 못차리고 딴데 보다가 넘어졌다'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 자꾸 돌아봐서 자기 자신을 경책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게 수행입니다.

 

수행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끔 합니다.

돌아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일방적인 혼자만의 수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은 누구나 똑같은 길로 들어가게 되는 거고, 또 똑같은 결과를 받게끔 되는 겁니다.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한 결과를 낳듯이 자기 자신이 한만큼 그대로 드러나게끔 되는 겁니다.

수행은 이마만큼 경지에 올라간 것 같은데 일상 생활에서는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거보다도 훨씬 못한 생활들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실제 수행은 그렇게까지 안 갔다는 얘기라.

지금 자신이 돌아보면서 자신이 하는 것들을 보면 자신의 수행 정도를 알 수가 있다는 거라.

 

수행할 때는 모든 번뇌들이 드러나지지 않고 잠재해있기 때문에 '아, 인제는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보이면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거기서 마음은 고요한 상태가 돼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항상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고요하다 하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렇게 됐다고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고요한 마음이 상태가 유지되어야 된다는 거라.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경고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아직 항상 평온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구나' 하고 경고하게 될 것 같으면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꾸 다른 핑계를 댑니다. '네가 나의 고요를 깨뜨렸다' 하는 거라. 실제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고요하게 되는 것이지 남들이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가르침을 잘 설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실제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고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인 것이지 부처님이 체험한 것을 여러분이 대신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뭔가 잘못될 거 같으면 왜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핑계거리를 자꾸 찾을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렇게 온천천에서 본 것처럼 어릴 때부터 세뇌당하는 그런 훈련들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어른이 됐으니까 자기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자꾸 세뇌시켜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일은 자신이 행해야 되어서 자신이 해결해야 되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세뇌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식으로든 자기 스스로 자신을 관찰을 해야 됩니다. 내 속에 들어온 연료는 어떤 식으로든 이걸 써야 됩니다. 자신이 지은 업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받아야 됩니다. 왜 안 좋은 매연을 자꾸 뿜어낼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연료는 자동차에 넣어놓으면 올바른 연료로 쓰여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칫 잘못하면 폭발을 하게 됩니다. 또는 나쁜 곳에 쓰여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짓는 행위는 어떠한 식으로든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선한 행위를 했을 때 선한 결과를 받게 됩니다.

아무리 지금 현재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잘 알아차리면 불선한 마음은 사라져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바뀌어져버리게 됩니다. 연료가 아무리 나쁜 것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따라서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선한 것들이 드러날 수 있게끔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누가 자신을 대신해줄 수 없을 뿐아니라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잘 연소 된 연료가 매연을 뿜어내지 않듯이 자기 자신을 잘 지키는 자만이 나쁜 행위들을 짓지를 않고 나쁜 과보를 받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경고해야 됩니다. '아, 내가 아직 이러한 것들은 멀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할 것 같으면 위험하다.' 자신을 경고해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자신을 경고할 뿐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제어해야 됩니다.

그렇게 제어된 마음은 항상 커져가는 겁니다. 증장되어 나가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성숙되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그런 위험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마트에 가면 과일 하나를 고르더라도 싱싱한 걸 고릅니다. 좀 썩고 아니면 오래된 과일은 안 고릅니다. 그건 인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그렇게 잘 제어돼서 잘 성숙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누구도 그걸 고르지 않습니다. 외면받게 된다는 얘깁니다. 사회는 그런 겁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아무리 남 탓으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는 여러분들에게 무관심하게 됩니다. 단지 잘못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제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남을 탓하고 하는 것들은 지금부터라도 버려버려야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싱싱한 과일이 되어서 잘 익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사람들이 그러한 과일을 고르듯이 여러분들은 그러한 마음으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잘 경고하고 잘 제어해서 마음이 성숙돼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들 곁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수행입니다.

지금 현재의 즐거움에 또는 지금 현재의 괴로움에 빠져서 그 덫에 걸려서 넘어지지 말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끝까지 그것들을 해나가는가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수행에서 얻은 것들이 사회에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되고, 그래서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입니다. 자꾸 자신을 만나서 자기 자신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스스로이다 하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