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용서 (20160609)

담마마-마까 2022. 2. 17. 09:00

https://youtu.be/xVKEntk-lsc

* 용서 (20160609)

 

오늘은 「용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양해주러 안 오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 되면 스님은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거든. 가끔씩 가는 식당에 가니까 어느날 그 주인이 그런 얘기를 해요. 스님 이 화분은 이상하게 키가 안 큰다는 거라. 다른 것들은 다 잘 크는데 이 화분은 키도 안 크고 잘 자라지를 않는다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물은 알맞게 잘 주고 있습니까? 하니까, 물은 다른 거하고 똑같이 하는데 이거는 잘 안된다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그 화분이 다른 화분들에 비해서 잡초들이 많아. 그래서 잡초만 뽑으면 되겠다 해서, 그 잡초를 한번 뽑아보십시오 하니까, 잡초를 뽑는데 잡초가 잘 안 뽑혀. 잡초가 안 뽑힐 정도로 밑에 땅이 단단하다는 거라. 아, 이게 꽃나무가 잘 안 자라는 이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꽃나무에 물을 한번 부어봤어요. 물을 부었는데, 보통 보면 화분에 물을 부으면 조금 있으면 물이 밑으로 스며들어 가는데, 이 화분은 땅이 딴딴하니까 물이 밑으로 스며들어가지 못하고 위로 그냥 넘쳐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부어봐야 소용이 없는 거라. 밑에 뿌리까지 물이 흘러 가지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위에 자라는 잡초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잘 자라게 되고, 그 밑에 뿌리가 있는 나무는 영양분이 없고 물도 없고 하니까 잘 못 크게 되는 거라.

 

그걸 보면서 마음에 장애가 있는 것들이 마음을 성장시키는데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고, 또는 마음의 공간들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들 여유들이 없을 거 같으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성장시키는데 장애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꽃나무가 잘 자랄려면 위에 있는 풀도 매줘야 되는 거고, 화분에 있는 흙도 너무나 단단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일궈줘야 됩니다. 일궈줘야만이 이 나무가 잘 자랄 수 있게끔 되는 거라.

 

여러분들이 경험을 해봐서 알 겁니다. 마음에 안 좋은 생각들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수행 못 해나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든지 탐욕이든지 성냄이든지 일어날 거 같으면 그런 여러 가지의 장애들은 잡초와 마찬가지로 놓아두면 자꾸 번성해져버립니다. 그런 것들을 제거를 해주지 못하게 될 거 같으면 그것이 여러분들 마음을 성장하지 못하게 해준다는 거라.

왜 그런 것들이 자꾸 성장하지 못하게 잡초로써 남아서 괴롭히게 될까?

 

또 한번은 조금 오래된 일이기는 한데, 태종사에 있을 때 공양주 보살로 있던 분이 한 번은 찾아왔어요. 와가지고 “스님 용서해주십시요” 그러는 거라. 뭘 용서해줘? 그러니까 그분이 뭐라고 하느냐면, 옛날에 태종사에 있을 때 스님한테 자신과 관계된 것들 안 좋은 말을 퍼뜨렸다는 거라.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거든.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자신은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괜히 엉뚱한 사람한테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나서 자신은 태종사를 나가버렸으니까 그랬는데, 이유는 뭐냐면 스님 모시고 절을 하나 만들어서 잘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거 하기 싫어하거든. 나는 그거 안 할려고 하니까, 자신은 스님을 좋아하는데 스님은 자기를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거꾸로 스님이 자기를 좋아해가지고 뭘 어떻게 했다 이렇게 소문을 낸 거라.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덮고 흘렸는데, 어느날 와가지고 용서를 구하더라고.

 

그게 뭐냐면 자신이 과거에 했던 나쁜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걸 '꾹꿋짜(kukkucca')라고 그럽니다. '꾸' 라고 하면 나쁘다는 뜻입니다. '꿋짜'는 '꿋다'에서 나온 건데 '꿋다'의 과거형이기 때문에 행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나쁜 일을 행했다, 나쁜 일을 행한 것 때문에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후회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후회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는 이미 옛날부터 그런 거 생각 없으니까 마음에 부담가지지 마라. 그리고 용서해라 할 거 같으면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니까, 그때사 마음이 펴져가지고 밝아지면서 아이고, 내가 마음에 죄책감이 있었는데 인제 좀 털어냈다 하면서 가더라고.

 

그걸 겪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려고 하더라도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간이 없으면.

그런데 실제로는 그 마음에 공간이 없으면 자기 자신도 성숙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 나무와 같이 땅이 딴딴하게 굳어있으면 아무리 좋은 거라도 그게 들어올 여지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마음의 성장도 안 되게 되는 것인데도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거라.

 

이 두 가지를 보면서 스님이 생각을 한 게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을 몰아내고,

또 마음에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여유있게끔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용서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경험을 해봐서 알겠지만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용서하지 않는 대상을 마음에 딱 담아두고 있는 것들, 자기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대상은 내 마음에 감옥 속에 딱 갇혀져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이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괴롭고 힘들게 되는 거라. 감옥이 많으면 많을수록 본인은 자기 자신이 그것을 용서해야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않을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본인은 더욱더 부자연스러워지는 거라.

가끔씩 요즘은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가 있으니까 부모를 안 볼려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안 보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는 어떤 나하고 원수진 사람이 있을 거 같으면 '내가 그 사람 안 보면 되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감옥을 만들고 있는데 그 감옥을 부술 생각은 안 하고, 그 감옥을 피할 생각만 자꾸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런 감옥이 생기면 본인도 그 감옥 속에 갇힌다는 생각을 못한다는 거라.

왜 그럴까? 그걸 자꾸 피할려고 하는 것은, 뭔가 다른 핑계거리를 자꾸 나에게 준다는 거라. '너가 잘못한 거기 때문에 너만 피하면 된다. 너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핑계거리를 자꾸 준다는 거라.

생활해가면서 뭔가 하면 자꾸 다른 탓을 하는 버릇들을 언젠가부터 자꾸 심어주는 것이, 그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마음속에서 감옥으로 탁 가둬두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누가 그 감옥에 갇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래서 그걸 피할려고 하는 거라. 실제 그 감옥을 부술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러다 보니까 그거에 맞는 핑계를 자꾸 다른 핑계거리를 주게 되는 거라.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냥 그 대상에서 끝나버리면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핑계 거리를 주고, 또 다른 감옥들을 만들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용서라고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뭐하면 그 사람이 잘못했다 할 거 같으면, “그래 괜찮아. 나는 너 다 용서해” 하고 툴툴 털어버리고, 그 사람하고 그거 없는 것처럼 친하게 지내는 경우들을 봅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그 사람 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다' 하는 이해들을 하지 않으면 용서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그러한 일들이 나쁜 일이다 하는 생각만 할 거 같으면 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바라봤을 때 그 사람을 용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일들을 하지 말아야지' 또는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용서할 수 있도록 내가 용서를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랬을 때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한테 , 내가 그거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주라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라.

공양주로 있던 그분도 마음속에 담아두었을 거 같으면 평생 아마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거라. 그런데 인제 계속 수행을 하다가 보니까 마음이 어느 정도 강해지니까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할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 논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은 꼭 마찬가지로 마음에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거에 사로잡히는 거와 같습니다. 성냄이 있을 때 성냄을 다스리지 못하면 성냄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탐욕이 있을 때 탐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탐욕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용서를 구할 때 용서를 해줄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마음에 또 사로잡혀 버리게 됩니다.

 

수행은 세간적인 일을 뛰어넘는 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것은 전부 세간적인 일들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고 용서하지 못하고 하는 것들은 세간적인 일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수행을 통해서 탐욕이나 성냄이나 그런 것들은 잘 극복해나가면서, 생활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남을 용서하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들은 왜 못하고 있느냐는 거라. 똑같이 세간적인 일들인데도.

 

마음은 어떤 것이든 세간적인 일에 머물러 있을 거 같으면 성장하질 못합니다.

여러분이 조금 더 성숙하고 싶으면 거기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여러분이 얻는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되겠지만, 겨우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핑계 거리를 대는 것밖에 없다는 거라. 자꾸 다른 탓을 하는 핑계 거리.

용서하지 못하는 습관이 붙으면 붙을수록 자꾸 다른 탓을 하게 됩니다.

 

여기 우리 건물도 그런 게 있습니다. 앞에 쓰레기를 내놔야 되는데, 어떤 층에서는 쓰레기를 앞에 꺼내놓지 않고 문 있는 데다가 내놓았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누군가가 “와 쓰레기를 거기다 놔가지고 쓰레기차가 그걸 못보고 가도록 했느냐” 하면서 막 싸우고 있는 거라.

그래서 그걸 보고 그런 생각이 좀 든 적이 있습니다. 그냥 봤으면 아, 이거는 거기다 놔가지고는 쓰레기 수거하는 사람이 못 볼 수도 있겠다 싶으면, 본 사람이 그냥 보이는 데다가 살짝 갖다 놓으면 간단할 걸 갖다가, 왜 저렇게 저걸 갖고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고 싸우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핑계거리를 자꾸 대는 거라.

네가 거기 안 놓았기 때문에 저걸 못가져갔다. 그럼 또 그사람은 전에는 거기 놔놓으니까 가져가던데 왜 또 나한테 시비거느냐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뭔가 그럴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해버렸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라. 그 쓰레기를 거기에 놔둔 것에 대해서 용서해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른 핑계를 댄다는 거라. 네가 거기 놔두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거라.

 

용서하지 않는 습관들이 붙으면 이와 같이 다른 핑계 거리를 자꾸 대게 됩니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꼭 마찬가지로 다른 핑계 거리를 댑니다.

'나는 정당한데, 나는 잘하고 있는데, 너는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의 에고(ego)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강해져버린다는 거라.

 

가끔씩 스님들 간에도 그런 것들이 보입니다.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참지를 못해. 참지 못해서 그 사람하고 싸워서라도 그 잘못을 바로 잡아줄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항상 다툼이 생길 때가 있어요.

다툼은 언제든지 남의 잘못을 바로 잡을려고 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 그걸 이해해줄려는 마음이 없을 때, 다툼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항상 경전에서 배우고 또 수행할 때는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하면서도, 에고가 강해지면 그것이 '진실 때문에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그것을 다툼으로써 연결시켜 버리게 된다는 거라. 용서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을 때는 항상 이와 같이 다른 구실을 자꾸 찾을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바람직한 방향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는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냥 잊어버리고 용서해라.” 잊어버리면 용서가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는 법이 있습니까? 그냥 마음속에서 '아이고, 내가 잊어버려야지' 하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니면 그와 같은 행위들이 용서가 되고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자꾸 사람들을 호도한다는 거라.

잊어버려서 용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천천히 마음을 안정시켜서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침착해져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됐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행위들을 생각을 해본다는 거라.

상대에 대한 '아,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다' 하는 이해가 있을 것 같으면 지금 당장 용서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한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고요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용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용서할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마음이 고요해질 것.

그다음에 상대방에 대해서 이해할려고 할 것.

그게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용서하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거라.

상대방을 이해할 뿐아니라 자기 자신도 이해를 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는 쉬운데, 자기 자신이 용서를 받는 것은 참 어려울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이들이나 아니면 잘못한 대상에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거라.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선한 마음이 된 상태에서 그 상대방을 이해했을 때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를 구하는 데는 그것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는 어떡할 거라?

요즘은 무슨 구조조정 해가지고 노동자들을 많이 해고를 하는 편입니다. 물론 스님은 찬성을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근로자를 해고 해가지고 문제를 해결된다고 했을 경우에 해고하는 것은 정당하게 봐야 되겠죠. 그게 맞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다고 해서 해고당한 사람들이 상처 입은 것까지, 그 해고를 시킨 사람이 정당화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식으로든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아, 내가 참 잘못했다”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사실은 맞는 겁니다.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뭐라 할 때는 그것이 맞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도 주관적인 거지만, 맞다고 하더라도 맞는 것에 대해서 아이를 나무랐을 경우에 아이가 잘못했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다시 또 아이한테 “아, 내가 그래도 너한테 그렇게 뭐라 하면서 울고불고 하고 마음에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참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거라. 대부분 잘 없다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용서를 구하는 것이, 자신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들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불행한 사람의 책임자로 만들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자꾸 용서하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꾸 돌아봐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용서하게 됐을 때,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을 때 그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것, 그것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할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한 행위는 여러분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을 경우에는 그것은 여러분들의 행위입니다. 거기서 오는 결과들은 여러분들에게 악한 결과들을 간접적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는 거라. 왜 그럴 수 있다는 걸 생각을 못하고 바른 것들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을려고만 하느냐는 거라.

 

그럴 위험성이 항상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들도 아무리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도 아픔을 줬다고 생각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용서를 빌게 됐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용서하는 것들이 생활화될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에게 자신이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경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악꼬데나 지네 꼬당(Akkodhena jine kodhaṃ)" 그렇게 얘기합니다.

"화를 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써 이긴다."

"아사둥 사두나 지네(asādhuṃ sādhunā jine)" 라고 얘기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속였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 사람에게 진실되게 행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이긴다."

누군가 나의 물건을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나는 진실되게 '아, 그 사람이 참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이긴다는 거라.

 

가끔씩 길거리를 가다 보면 그런 걸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CCTV 있습니다」 하면서 적어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어떤 데는 보면 CCTV에 누군가가 뭘 훔쳐가는 것을 찍어놓은 사진을 거기다가 딱 갖다 놓고, 이거 안 갖다 놓으면 고발할거다 하고 적어놓은 것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저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하나 이기지 못하면서 나를 속이고 가져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참 어불성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네 까다리양 다네나(jine kadariyaṃ dānena)" 그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써 그사람을 이긴다"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도 나누어준 사람이 이기는 것인데, 그런 수고로움 없이 그 사람이 그냥 필요했기 때문에 가져갔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나는 적어도 그사람에게도 이기고 나 자신에게도 이기는 것인데, 꼭 그 조그만한 거 하나 뭔가 가져갔다는 건 밖엔 놔두는 것들이 뭐 그렇게 중요한 걸 놔두겠어요? 다 집안에다 놔놓지. 그런데 그거 하나 없어졌다고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뭘 써놔놓고 하는 걸 보면서 '아, 참 저 사람은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와 같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있고, 자기 자신에게 이기게 됩니다. 또 내가 용서를 빌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도 이기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기게 됩니다.

그게 용서라고 하는 겁니다.

 

잡초가 있는 것들을 제거 해야만이 마음에 영양분이 생겨납니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을 먼저 제거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땅들은 갈아서 그 속에 공간이 생기도록 해야만이 잘 흡수가 됩니다.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씩 감옥을 만들지 말고, 그 감옥들을 용서하면서 부수어버리게 될 때 그 공간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라는 나무는 잘 성장을 하게 됩니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 두 가지가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선한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마음에 그런 자유로운 공간들이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은 성장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그래도 하기 쉬운 것 일상생활에서 많이 일어나는 것이 "용서하는 습관"입니다. 남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것, 그것은 바르게 이해를 했을 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눈을 감고 편안하게 하고 나서, 몸이 긴장돼있는 것부터 하나씩 풀어보십시오.

 

오른쪽 눈꺼풀, 왼쪽 눈꺼풀, 또는 입술, 또는 턱, 아니면 입속에 있는 혀, 어깨, 손, 몸 이런 것들이 편안하게 먼저 만들어 보십시오.

그것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마음의 안정을 시키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하고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또는 내가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내가 스스로 상처받고 있는 것이 없는가.

그걸 한번 보도록 하십시오.

용서하지 못했을 때 자신이 입은 상처들은 참 클 겁니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는 부정적인 생각들 마음들이 일어나고, 육체에는 고통스런 느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했을 때 자기 자신이 먼저 고통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남을 용서할려고 할 때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인제는 용사할려는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는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랬을 때 용서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기 자신은 자유로워집니다. 그 대상으로부터.

마음에 공간이 생겨나버립니다.

내가 만들어놨던 감옥을 자꾸 스스로 부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게 될 때, 또한 내가 지은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나를 용서해주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자신이 아무리 정의롭게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용서를 구했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자신의 마음은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아무리 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해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남을 용서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용서 받을려고도 하고.

그랬을 때 우리 마음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고,

마음에 감옥들을 하나씩 부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