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숲을 가꾸는 자 (20160526)

담마마-마까 2022. 2. 14. 09:00

https://youtu.be/j9DausHI3xY

* 숲을 가꾸는 자 (20160526)

 

오늘은 「숲을 가꾸는 자」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번 토요일날 붓다의 날 행사를 경주에서 했습니다. 요즘 날이 좀 덥다 보니까 사람들이 밖에 있을 때는 나무 그늘 아래서 쉴려고 그럽니다. 그날도 보니까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무 아래에 있는 거죠. 누가 땡볕에 나와가지고 서서 얘기하는 것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아, 나무를 기르고 또 키우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참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제목이 「숲을 가꾸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숲이라고 할 때 빨리어가 '와나(vana)' 입니다.

단순히 그냥 숲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데 숲도 잘 가꾸어 놓으면 사람들이 햇볕으로부터 피하고, 더위로부터 피하고, 여러 가지 이로운 점들이 많이 있는데, 숲을 관리를 잘못하면 칡넝쿨 같은 게 덮어버려가지고 나무 자체를 죽여버립니다. 그럼 칡은 나중에 되면은 그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숲은 보면 잎이 없는 나무들만, 그리고 키 낮은 나무들이 있으면서 넝쿨만 막 엉켜갖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런 데는 사람들이 쉴 수도 없고,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 돼버립니다. 단순하게 그냥 숲이라고 하더라도 관리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차이가 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숲"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숲을 관리를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 마음의 더러움들, 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한 마음들, 이런 것들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

나무 한 그루 있을 때는 크게 영향을 못 미칩니다. 숲에도 그 숲 전체에 나무 한 그루만 달랑 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건 숲의 의미는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의 의미만 있는 거지. 그래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든 아니면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든 그 하나만 만약에 달랑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조합을 만들면 그것이 선한 마음의 조합이든 불선한 마음의 조합이든 조합을 만들면 그것은 어떤 것은 굉장히 위험해지고, 어떤 것들은 해탈로 나아가는 토양이 되고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무리를 만들기 때문에 조그만한 거라고 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라. 소나무 한그루 있다 해서 그 소나무 한그루만 있습니까? 조금 있으면 소나무는 솔방울을 떨어뜨리고 또 다른 소나무를 생기게끔 만든다는 거라. 그래서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데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그 한그루가 무리를 이룰 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되는 거라.

조그만한 잘못이라도 '뭐, 이거 어때' 하고 놔둬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조합을 만든다는 거라. 조그만한 선한 마음이라도 '아, 이거 뭐 내가 크게 좋은 일 했다고' 이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큰 힘들을 발휘하는 역할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왜 숲은 이렇게 조합을 이루게 될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이로운 숲은 그대로 두더라도, 나무 한그루는 그것이 나쁜 영향을 미칠 때는 반드시 잘라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번뇌가 일어날 때 항상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을 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났든 아니면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든 그것이 나하고 결합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선한 마음, 오늘 탁발을 했다, 탁발하기 전에 올리는 때의 마음하고, 탁발을 올릴 때의 마음하고, 올리고 나서의 마음하고, 그 뒤에 다시 생각할 때 일으키는 마음하고, 그것이 설혹 다 선한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별적으로 봤을 때는 그냥 선한 마음 하나 일어난 것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합이 돼버리면 큰 역할들을 하게끔 됩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마음이 하나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악한 마음이 지속되지를 않고 놔두었을 때는 큰 문제가 안 되는데, 그 악한 마음이 나라고 하는 것과 딱 결합이 돼버리면 항상 그 악한 마음은 증폭이 돼버리고 더 나쁜 결과들을 초래하게끔 됩니다.

나무는 숲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숲은 잘 가꾸라고 있는 것이지, 내버려두고 그것이 덤불이 엉켜가지고 쓸모없는 숲이 되도록 만들라고 놔두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천신이 물어봅니다.

"누가 계속해서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을 때,

부처님이 첫 번째 얘기한 것이 "숲을 잘 가꾸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저번주 토요일 같이 경주 선원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법담을 할 수 있고 또 더위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무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누군가가 숲을 그렇게 가꾸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것은 그 숲이 존재하는 한은 항상 그분 그 숲을 가꾸는 사람의 공덕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공덕을 쌓을 수 있을려면 먼저 숲을 가꾸어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숲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으로 말하는 숲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의 숲들도 자꾸 가꿀려고 해야 됩니다.

항상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숲은 여러 개의 나무가 모여 있듯이, 선한 마음이 모였을 때 해탈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반대로 악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들은 무리를 짓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탐심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탐심인 것을 알아차릴 때,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개입을 시키지 않고 그대로 한번 알아차려보십시오. 무리를 짓지 않도록 만들 것 같으면 그 탐심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제거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들이 결합을 해버리고 나면 제거하기가 힘들어져 버립니다. '왜 내 거 내 마음대로 하는데!' 이렇게 돼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반드시 결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마음의 번뇌들은 제거를 해야 되는 거고, 마음의 영양소가 되는 선한 마음들은 반드시 그것들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도록 자꾸 노력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마음의 숲을 가꾸도록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숲이 가꾸어지면 항상 여러분들에게는 공덕이 돌아가게 됩니다.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면 반드시 그 결과는 드러나지게 돼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뭐냐면, "다리를 만드는 것"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물이 있을 거 같으면 건너가지를 못합니다. 다리를 만들어야 만이 그곳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가면 스님들에게 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널 때 배를 이용할 경우에는 뱃삯을 안 받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이익보다도 더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 뿐아니라 건너갈 수 있는 도구 어떤 것이든 다리와 같은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배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행을 할 경우에는 스님들에게 뱃삯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돼있습니다. 관습화가 그렇게 돼있습니다.

 

뛰어난 성자들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큰 공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배나 그런 다리들을 만들고 있습니까? 뛰어난 성자들을 잘 모시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씩 하나씩 다리를 놓고 있느냐는 거라. 물질적인 다리는 단순히 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또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주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의 다리는 과연 얼마만큼 튼튼하게 지금 만들고 있느냐는 거라.

보통 다리를 얘기할 때 '세뚜(setu)'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흐름을 건너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소따빤나(sotāpanna)' '소따(sotā)'도 마찬가집니다. 그 '흐름을 건너도록 한 자'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마음의 흐름이 욕망으로부터 흐르는 것들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방향을 틀어 놓은 건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출세간적인 것으로써 마음을 돌려놓은 건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으로 마음이 바뀌어져 있는지,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그 다리를 건널 때, 건널 때마다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되듯이,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다리를 놓았을 경우에는 그 사람은 다시는 이쪽으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다리를 놓는 일도 큰 공덕을 쌓는 일이지만 마음에서 다리를 놓는 것, 수다원이 되기 위해서 한걸음한걸음 나아갈 때는 오히려 더 큰 공덕을 쌓는 일들이 되게 됩니다.

 

수다원이 되기 위해서는 삼보에 대한 믿음들을 확고하게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 됩니다.

그런 믿음이 확고하게 됐을 때 그것에 대한 존경과 예경을 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에게는 마음에서 힘이 생겨납니다. '아, 내가 좀 더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노력하는 힘이 있을 때 알아차림도 점점 더 강해지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할 때는 대상 외에는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대상들만 꾸준하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집중하는 힘들이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집중하는 힘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속에서는 알아차리는 힘이 있고, 노력의 힘이 있는 상태에서는 집중하는 힘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지혜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오력은 균형을 맞춰야 되는 것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바탕이 돼야만이 그 오력은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믿음들을 확고하게 자꾸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 "다리를 만드는 사람" 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물을 제공해주는 사람"입니다.

가끔씩 마을에 가면 물항아리에다가 위에 지붕을 씌워놓은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마를 때 그 물을 떠마시라는 뜻입니다.

우리 선원에도 옆에 그 브리타 정수기 조그만한 것을 마련을 해놓았습니다. 정수해놓았으니까 그 물을 마음껏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보면 그게 싹 비어있는데도 누군가는 틀림없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 건데도 그 물을 채워놓는 것을 못 봐.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보면 먹고 시원하게 되는 것들, 나만 먹고 나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가끔 있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물을 마시는 것은 생명에게 살아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많은 양의 물을 놔두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하루나 이틀이나 필요한 물만 거기에다 채워놓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또는 누군가가 지나가는 사람이 '아, 참 목마르다'고 얘기할 때 스스럼없이 물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은 그런 조그만한 물이지만 그 물들을 채워놓고 또 나누어줄 수 있느냐는 거라.

마음에 적어도 사무량심을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자기자 신에게도 물을 채워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물을 나누어줄 수가 있습니다.

 

오력이 균형이 맞아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사무량심은 개발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들, 함께 기뻐할 줄 알고, 또 그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구해줄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고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한 상태가 돼있을 거 같으면 언제든지 물을 나누어줄 수가 있습니다. 또 자신도 항상 그 물을 마실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물질적인 물을 나누어주는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마음속에도 항상 사무량심이라고 하는 한량없는 물들을, 퍼도 퍼도 줄어들지 않는 물들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사무량심을 지니게 됐을 때 그분들은 이제는 생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비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아무리 오력의 균형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또는 나에게서 번뇌가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것을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다음 생에서 비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사무량심이 채워졌을 때 그분은 틀림없이 다음 생에서는 비천한 상태에 빠지지는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물을 제공해주는 자" 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큰 호수를 건설하는 것들" 입니다. 식수로 쓰기 위해서 댐을 건설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해당이 되겠죠. 그건 여러분들이 아마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닐 겁니다. 정부나 아니면 큰 지방 같은 데서는 그게 가능할 일입니다.

큰 호수는 사람들에게 물을 끊임없이 제공해줄 뿐 아니라, 그 호수 주위는 사람들이 휴식처로 쉬기에도 참 좋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항상 고요하게 돼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들 곁에서 참 쉬기 좋습니다.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동요함이 없이 항상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해야 됩니다. 성냄을 만났을 때든 칭찬을 받았을 때든, 뭔가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취한 것이든, 어떠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항상 고요해져 있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고요해져 있을 때 사람들은 주변에 와서 쉬기가 참 좋아집니다.

 

수행을 시작을 했으면 적어도 지혜에서 '상카루뻭카냐나'라고 하는 항상 평정돼있는 대상들,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들을 당할지 모릅니다. 급작스럽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다가와지는 것은 숱하게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만나더라도 항상 고요하게 돼있어야 된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호수에는 조그만한 돌을 던지든 아니면 그 물을 퍼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미동하지 않고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항상 호수와 같이 항상 넓고 고요해져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우빠사양' 그렇게 얘기합니다. "집을 제공해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의지할 거주처는 어디입니까? 이 집을 제공해준다는 것은 자신의 집을 내주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법을 펼치기 위해서 스님들이 머물 곳들을 마련해 주는 것, 법을 설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 이런 것들이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큰 공덕이 되는 것들은 선원을 짓는 것이다" 하고 다른 경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거주할 곳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과 그리고 담마입니다. 여러분이 거주할 곳들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담마를 따라서 실천할 때 담마가 여러분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몸의 현상으로, 느낌의 현상으로, 마음의 현상으로, 여러 가지 법의 현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것이 여러분들이 거주할 곳이 됩니다.

 

여러분이 머물 곳들은 사념처 이외에 다른 곳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사념처 외에 다른 곳들에 머물려고 합니다, 마음이. 마음은 어떤 곳이든 사념처에 머물러야 됩니다. 사념처가 곧 부처님이 설한 여러분이 의지할 법입니다. 마음이 사념처에 머물 때 머무는 곳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집을 짓고 남에게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들 마음이 반드시 머물 곳에 머물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부처님이 공덕이 되는 행위들이다. 그런데 그런 공덕은 항상 일어나는 공덕이라는 거라. 영구적이라는 거라. '타와라 다나(thāvarā dān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일어나는 보시, 항상 일어나는 '타와라 뿐냐(thāvarā puñña)' 공덕이 되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자신의 행위들이 분명하게 될 때 그것은 올바른 공덕이 됩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것들이 몸과 마음을 벗어나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도 공덕이 생겨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마음에서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공덕이 되지만,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선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공덕이 되질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들을 갖췄을 때, 그런 사람을 일러서 "숲을 가꾸는 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념처를 수행하고 마음이 그 사념처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이해하게 됐을 때, 법의 의미를 갖춘 자가 됩니다. 항상 사념처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물질적인 숲을 가꾸는 일만 해야 될 것이 아니고, 마음의 숲을 자꾸 가꿀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