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집착은 버려버리자. (20160616)

담마마-마까 2022. 2. 19. 09:00

https://youtu.be/OnKhAf0D0Q0

* 집착은 버려버리자. (20160616)

 

오늘은 「집착은 버려버리자」 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눈 시력검사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눈이 요즘에 많이 좀 안 좋아져요 자꾸. 스님 오른쪽 눈이 지금 거의 안 보이는 상태거든. 그러니까 왼쪽 하나 가지고 보고 있는데 한쪽이 안 좋으니까 한쪽도 계속 조금씩 안 좋아지는 상태라. 이게 편차가 심하다 보니까 안경 도수 할 때도 굉장히 애를 먹습니다. 교정을 하는 것이.

그래서 눈이 자꾸 안 좋아서 시력을 보러 갔는데 거기서 느낀 게, 앞에 있는 글자를 보라고 그러더라고. 눈을 감고 하니까 이쪽은 아예 안 보이니까 글자 전체가 아예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요쪽으로 하면 일정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전에 보던 거는 인제는 잘 안 보여. 그게 여러 가지로 보이기도 하고,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그러면 이쪽 눈 왼쪽 눈으로 보는 것들이 뭐라고 얘기했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는 거라. 틀렸다는 거라. 나는 분명히 왼쪽 눈으로 보기는 그것으로 보인다는 거라.

 

그걸 좀 겪고 나서 생각한 게 "모른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들도 모르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하는 사실을 경전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지만 그때야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인제 수행을 하니까 수행에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보면서, 그걸 어떤 사람들은 무상한 성품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고통스러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게 실체가 없는 것이다 하는 것으로 알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가끔 그럴 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예리해져 있는 상태에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 편안한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괴로움이라는 사실들을 자꾸 부정할려고 그럽니다.

숨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참 싫다'는 생각이 먼저 탁 일어나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걸 고통스러운 성품으로 보지 못하는 거라.

사람마다 성품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무상한 성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고의 성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각각 다르는데, 지금 현재 내가 뭔가에 탁 집착돼 있는 것으로 인해서 지금 드러나는 실재적인 현상들을 잘못되게 이렇게 하는 경우들을 본다는 거라.

 

그래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과연 내가 이 집착되어지는 것들이 참 많은데, 뭣 때문에 내가 이런 집착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잘못되게 알고 또는 모르고 하는 무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또 그것이 좋고 싫다는 갈애가 일어나서 잘못되게 볼 수도 있는 거고, 또 뭔가에 대해서 마음이 착 달라붙어가지고 그 현상이 변하는 것들을 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집착되어지는 것들이 뭐가 있습니까? 일상생활에서.

아마 모르긴 해도 참 많을 겁니다. 집착할 대상들은 참 많기 때문에. 어제 그제 스님들이 계속적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또 오늘도 누가 재가자 중에 한 분이 온다고 그러더라고. 왜 일 생기면 만날 나한테 와서 뭐라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그 얘기들을 들으면서 조금 생각이 드는 것이, 뭐가 저 사람들을 저렇게 왜곡되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냥 놔버리면 간단할 건데, 왜 저렇게 골치 아프게 저렇게 할까 하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주위에 집착하는 대상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해서 집착하기도 할 거고, 어떤 경우에는 물건에 대해서 집착하기도 할 거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나 아니면 이익들에 대해서 집착하기도 할 거고, 또 그런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생각들이나 견해에 대해서 집착들을 하기도 할 거고, 참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집착되어지는 것들은, 그게 지금 필요한 건지 아니면 없어도 관계가 없는 건지, 하는 것들은 잘 생각을 안 해본다는 거라.

 

어제 같은 경우에는 다대포팀들이 공양을 올리는 날인데, 늦게사 전화가 왔어. 온다고 그러더라고. “그래 그러면 내일 공양하니까 일찍 온나. 여기서 같이 먹자” 하니까, 미리 내가 다대포팀들한테 공양준비를 하기 전에 몇사람 온다고, 세 사람 왔으니까 나까지 치면 네 사람 온다고 얘길 안 했으니까 공양이 모자랄 거 같은 거라. “모자랄 거기 때문에 그냥 우리 먹고 들어갈게요” 이러더라고. 그래서 “마음대로 해라. 와도 되고, 오면 나눠먹으면 되고 맘대로 해라.” 그러니까 먹고 들어왔더라고.

 

개미나 벌꿀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모읍니다. 꿀을 모으든지 아니면 양식을 모으든지 이렇게 모읍니다. 그런데 개미나 벌꿀들은 그게 없으면 죽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걸 모은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꼭 지금 없으면 죽는 것이 아닌데도 뭔가를 자꾸 모은다는 거라. 공양하는 것도 뭐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눠 먹으면 되는데, 하루 그렇게 적게 먹는다고 해가지고 죽을 정도는 아닌데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좀 더 풍부하게 먹기 위해서 다른 방편을 쓰고 한다는 거라.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아둔 쓰레기는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해봅시다. 모아둔 것들은.

왜 쓰레기라고 하느냐면 지금 필요한 것들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쓰레기라고 여겨야만이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생겨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 대상이 내가 집착하는 대상이 돼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들 또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집착하는 대상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어제 같은 경우도 생각으로 인해서 집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스님,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건 자기 집착이라. 생각들이 얼마만큼 불필요한 것들인지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아마 여기에 우리 선원도 쓰레기를 일주일에 몇번씩 갖다 버리지 않을 것 같으면, 여기 냄새나서 아마 수행들을 못 할 겁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들어있는 생각들, 아니면 지금 꼭 필요하지 않는 어떤 물건들 그런 것들은 쓰레기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필요하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집착을 일으키게 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 그것이 괴롭게 다가와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정작 괴로움으로써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런데 집착하는 것이 딱 생겨버리면 그것은 괴로움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싫다는 것으로 탁 다가와져버리게 되는 거라.

 

또는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참 무상한 것으로써 알아야 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이 강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서 바른 법에 대해서 믿음들을 가지지 않을 거, 같으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냥 똑같은 현상으로써만 보게 된다는 거라. 변하고 있는 것으로서 보질 못한다는 거라.

 

수행에서도 집착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겨났을 때는 그 성품을 바르게 보질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을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아디목카'를 개발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결정 내려서 '내가 분명히 이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끊임없이 그것들을 향해서 노력하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그런 믿음과 그런 바른 이해가 바탕이 됐을 때 '아, 지금 내가 관찰하는 대상이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로서 알게 됩니다.

 

또는 "괴로운 성품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빳삿디'를 개발하라" 그럽니다.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고요하고 경쾌하게 대상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상태가 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라.

 

법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가지고 또 그런 법을 듣고 하는 상태가 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무아의 성품으로 실체가 없이 변하는 것이다 하는 성품으로써 알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건 자명한 이치입니다.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이 법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들을 가져야 되는 거고,

그리고 많은 법을 듣고 그것에 따라서 이해를 하고 하는 것들이 뒷받침이 되어야만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집착하는 법들에 딱 얽매이게 된다는 거라. 견해에 얽매이게 되는 거고 갈애가 생겨나는 거고, 또는 내가 잘못 이해를 하고, 또 모르는 상태가 돼있고, 그래서 무명과 갈애와 집착들이 생겨나서 실재 성품들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라.

 

생활에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집착되어질 만한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버려버려야 됩니다. 물론 집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겁니다.

변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변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들을 가질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불안도 변한다는 사실을 자꾸 부정할려고 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냥 변하는 것은 변하는 것으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라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불안할 것도 없어.

불안하지 않을 거 같으면 집착할 대상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들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끝없이 집착할 대상이 생기고,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모아둘려고 하는 것들, 그런 것은 정신적인 병이라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불안에서 오는 정신적인 병입니다. 습관된 것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자꾸 몰아낼려고 해야 됩니다.

 

무상한 성품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 있는 그대로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습관되어지는 것들에서도 그런 무상한 성품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들은 자꾸 제거해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생각도 그리고 어떤 대상들도 모아두면 그것은 쓰레기가 됩니다. 부패하고 썩고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듯이 법의 성품들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끔 합니다.

그래서 모여진 쓰레기들은 자꾸 버릴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은 그런 겁니다.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 어디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끊임없이 대상이 없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들, 그래서 집착할 만한 것들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험하는 것들입니다.

 

생활에서 그러한 것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들은 수행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고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모아둔다 해서 해결이 될 것 같으면 그래도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은 무상한 성품입니다. 변해가게 돼있습니다. 그 불안한 것들이 오히려 모아두면 모아둘수록 오히려 더 커지게 되지 작아지는 법은 없습니다.

살아가는데 집착할 만한 대상이 없는 것,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무명에 대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 갈애가 생기는 것들로 인해서 집착하는 것, 대상들로 인해서 집착하는 것들, 그런 집착하는 것들은 반드시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자꾸 버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버리는 것들로 인해서 모여지는 쓰레기들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르게 수행해나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모아두는 것들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