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사람보다 나은 사람(우 빤디따 큰스님 말씀) (20160421)

담마마-마까 2022. 2. 3. 09:00

https://youtu.be/QU_vFBQ-iJM

* 사람보다 나은 사람(우 빤디따 큰스님 말씀) (20160421)

 

오늘 우 빤디따 큰스님이 열반하셨습니다. 입멸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바로 앉아서 스님에 대한 예경을 잠깐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행복하시기를" "스님께서 하루빨리 윤회로부터 벗어나시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스님에 대한 예경을 잠깐 해주시기 바랍니다.

· · ·

자! 편하게 앉으십시오.

 

우 빤디따 스님은 제가 80년도 말부터 해서 90년도 초까지 스님 밑에서 수행을 배워가지고 거기에서 법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신 그런 스승입니다. 스님에게는 여러 스승들 중에서 특별하게 스승으로서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 빤디따 스님이 평상시에 자주 했고 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서 전하겠습니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제목인데

 

"앎과 지혜가 있는 사람의 생을 얻었을 때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또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사람과 같은 사람이란 오계,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방법, 그리고 사무량심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 이러한 사람들이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삼매와 통찰지, 위빳사나 수행을 단계단계 더욱 향상되도록 노력해서 얻고 지니도록 노력하라.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을 구족했을 때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된다" 하고 얘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람이죠? 사람으로 어떻게 태어났을까?

부처님 법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나와있습니다.

사람을 태어나기도 힘들고 또 수명이 오래도록 유지되고 하면서 살아가기도 힘들고, 또 부처님 법을 만나서 듣고 실천하기도 힘들고, 또한 그 길을 계속적으로 갈 수 있는 출가의 길로 가는 것도 힘들고, 그런 얘기들을 했습니다,

 

어쨌든 첫째 조건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든데 여러분들은 사람인데 어떻게 태어났을까? 단순하게 얘기하면 욕계 선업의 힘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위들은 몸으로 행하기 전에 마음으로 뭔가를 의도를 내야 몸으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행위를 할 때 선한 마음을 내지 않을 거 같으면 그 행위는 선한 행위가 되지 못합니다.

욕계 선업이라는 것이 첫 번째가 그겁니다. 선한 의도를 내는 것들.

몸으로 하는 행위에 의도를 내는 것들!

그것이 선한 것들이 될 때 그런 선한 것들이 많을 때 사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말을 할 때도 의도를 내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들이 없을 거 같으면 선한 말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한 말을 할려고 하는 의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짓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들을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들, 망상을 부리더라도 선한 마음을 지니고 하는 것들, 뭔가 계획을 하더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선한 마음의 업이 됩니다.

이런 것들 선한 의도로 신··의를 짓는 의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첫 번째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여기 빤디따 스님은 계를 지키는 것들을 특히 강조를 했습니다.

조금 전에들 받은 오계, 오계를 오늘은 반드시 지키겠다 해서 오계를 지켜나가는 행위들, 또한 오늘 같은 날은 탁발이 있는 날이니까 탁발을 올리면서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행위들, 또는 수행하면서 선한 마음을 지니는 것들.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을 하고 하는 것은 마음이 항상 앞섭니다. 그 마음이 그것들을 결정하게 됩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 보시는 공덕이 되지 못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계는 그것은 그냥 종이에 쓰여진 글씨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몸에 익혀지지를 않습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의도가 일어나서 그 의도로 인해서 항상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 의도가 선한 의도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은 항상 대상을 놓쳐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나쁜 쪽으로 흘러가버리게 됩니다.

보시·지계·수행이라고 하는 것들도 이런 선한 의도가 밑바탕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는 두 번째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열 가지 선업, 선한 공덕들을 쌓았을 때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대표적인 게 법을 자주자주 청해서 듣는 것들, 그다음에 그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담론을 하고 잘 나누고 하는 것들,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을 잘 시봉하는 것들, 그리고 가족이나 나이 많은 분들에 대해서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들, 자기가 지은 행위들에 대해서 잘 회향할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기쁜 일이 있으면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해주는 것들, 그리고 바른 견해들을 가지는 것들,

이런 10가지들이 익어질 것 같으면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욕계 선업의 의도로 인해서 태어난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다시 윤회하더라도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될 거 아니라?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면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냥 욕심부리는 대로, 화나는 대로 또는 게으름 부리는 대로, 그대로 따라갈 거 같으면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면, 여기 우리 선원에 겨울 되면 저 히터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곧 여름이 됩니다. 여름이 되면 히터는 안 틀어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름에도 히터를 트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가끔씩 와보면 지금은 날씨 이럴 때는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어떤 때는 저게 틀어진 채로 놔두고 사람들이 나가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렇다는 거라.

"··치는 방치해버리면 여름에 방에 난방을 하는 거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방치해버리는 순간에 나는 습관적으로 그냥 여름인데도 더욱더 방을 따뜻하게 한다는 거라. 욕심을 부리는 것들을 방치해버리면 더욱더 욕심을 부리게 되고, 게으름 부리는 것을 방치해버리면 더욱더 게으름 부릴려고 하게 되고, 성내는 것을 방치해버리면 더욱더 성이 일어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여름에 난방을 계속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거기서 질식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삶을 자꾸 살려고 하느냐는 거라. 적어도 그런 것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이 되도록 먼저 해야 됩니다.

 

그것이 되고 나면 빤디따 스님이 얘기했듯이 통찰지를 얻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꺼질 때 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배가 불러올 때 팽창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배가 딱딱해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걸어갈 때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알고 가벼워지는 것을 알고 그리고 나아가는 것을분명하게 알고, 그 특성들을 분명하게 알 때 그것을 '-따 빠린냐-(ñāta pariññā)' 라고 합니다. '분명하게 아는 통찰지가 생겨났다' 하는 겁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 통찰지는 생겨납니다.

배가 불러올 때 팽창하는 느낌을 모른다고 해가지고 냐따 빠린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위에서 밑으로 불러와지네' 하고 그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알고 있더라도 그것은 냐따 빠린냐 입니다.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겁니다.

발을 '왼발' '오른발' 하면서 나아갈 때 나아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닿을 때 닿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움직임을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통찰지의 첫 번째는 분명하게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배가 불러올 때 그냥 불러오는 것이 아니고 '어, 변하면서 불러와지네' 조금 전에 불러와지는 거와 그뒤에 다시 불러와지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무상'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또는 배가 불러오는 것이 변하는 것이 빠르기 때문에 너무 빠르기 때문에 힘들다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때 나는 '괴로움'으로서 알게 되는 것들이라. 불러와질 때 그것들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성품인 것이고 조건에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고 알게 될 때 '무아'로써 알게 됩니다.

그 고유한 특성들을 분명하게 알게 됐을 때 '-라나 빠린냐-(tīraṇa pariññ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고유한 특성들을 분명하게 내가 그것을 조사해가지고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거라. 수행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런 통찰지를 개발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수행을 하다 보니까 뭔가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일어났음' 하고 알아차리니까 생각이 샥 사라지는 것을 봤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 뭔가 욕심이 일어났다, 욕심을 관찰하니까 욕심이 샥 사라지는 끝을 봤다, 그럼 분명하게 그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다 본 겁니다. 관찰하자 말자 대상은 그 알아차리는 힘의 정도에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이 일어나고 성냄이 일어나고 또는 게으름 부리는 것이 참 나에게는 안 좋은 것이구나, 나에게는 오히려 부처님 말씀대로 여름에 난방을 틀은 거와 같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그것을 버려버릴려고 합니다. 다시는 안 일어나도록 할려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도 탐·진·치 없이 선한 마음을 지니고 계속적으로 살아갈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걸 '빠하-나 빠린냐-(pahāna pariññā)' 그럽니다. 탐·진·치를 버리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러한 통찰이 생겨나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든지 이런 통찰지들을 개발하게 됩니다.

통찰지가 개발되어야만이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길입니다.

 

어른은 나이가 먹었다고, 또는 수행을 몇십년 많이 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이 되면 그마만큼 더 의무와 책임들이 많아집니다. 수행을 오래도록 열심히 했으면 그마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도 많고 또 앞장서서 인도해나갈 일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놔두면 커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개발되지 않는 마음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하고 똑같이 됩니다. 아이들이 떼쓰면서 욕심부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른들도 그것을 방치해버리면 항상 욕심이 앞장서게 됩니다. 항상 탐·진·치가 먼저 일어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여름철에 방에 난방을 하는 그런 삶은 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자칫 그렇게 하면 사막에 가면 오아시스가 있는 것처럼 신기루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 가보면 물이 없습니다. 그냥 사막일 뿐인거라.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신기루를 여기서도 보고 또 저기서도 보고 계속 그걸 쫓아갑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막 한복판에 들어가서 완전하게 길을 잃어서 생명마저도 위태롭게 돼버립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이 혹시 신기루를 쫓는 삶은 아닌가? "조금 더 벌어야지, 조금 더 지혜가 높아져야지, 조금 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잘나야지" 언제까지 그 신기루를 쫓고 가서 살 거라? 신기루를 쫓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멸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 전 같이 통찰지를 개발하는 삶이 어른이 되는 첫 번째 일입니다.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사리뿟따 존자가 앗사지 존자를 만나서 예류과에 이릅니다.

앗사지 존자의 뭘 보고 했을까요? 그분의 평온한 모습입니다! 평온한 마음입니다!

또는 아소카 왕이 전쟁하는 것을 버려버리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그런 삶을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뭐였을까? 동자승입니다!

아주 어린 동자승이 아라한인데,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평온하게 보입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동자승은 자기 주변에 자기 보다 수행에서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왕의 손을 잡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소카 왕은 오히려 그 어린 동자승에게 사미승에게 존경의 마음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 전쟁이라는 삶 조금 더 얻을려고 하고, 한 평 얻을려고 하고 또 한 평 얻을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얼마나 큰 잘못된 삶이라는 것을 반성을 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온이 가지는 힘은 그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깨달음으로도 이끌어줍니다. 여러분 가족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평온한 것들을 지니지 않으면 그런 힘이 없으면 이끌어주질 못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탐·진·치로부터 떠났을 때 마음의 평온함들은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남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자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의 평온함은 언제든지 유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힘들은 더욱 더 크게 되도록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삼매를 경험하고, 또 삼매를 자유롭게 자재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그럴 것 같으면 고요함이 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꼭 그렇게 안 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이 얼마만큼 나에게 평온함을 준다는 것을 알 거 같으면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그럽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며칠 전에 그런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스님은 차를 멈추고 나면 차에서 내릴 때 항상 뒤에서 오는 걸 백미러를 통해서 보고 차문을 엽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 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덜컥 열다 보니까 뒤에서 오토바이가 와서 탁 받아버리는 거라. 문을 열 때 문을 여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적어도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해야 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니까 항상 실수들이 따르게 되는 거라.

 

배를 탈 때 다리 한 쪽은 이쪽 땅에 디뎌져 있고, 다리 한 쪽은 저쪽 배에 디디게 됩니다. 어디에다 마음을 두어야 될까? 땅을 디디고 있을 때는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고, 발을 배에 디딜 때는 배에 디딘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배에 안전하게 올라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땅을 디딘 데도 알아차릴려고 하고 배에 디딘 발도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태가 되는 거라.

지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만이 실수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자동차에 올라탈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발을 디디고 또 손을 대고 했으면 그거 하는 움직임에, 지금 현재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상 실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음식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음식 하면서 생각하고 음식 하면서 뭔가 딴 일을 할 것 같으면 항상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난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만큼 내가 두려움도 없어지고 또 실수하는 것도 없이 마음이 평온한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또는 삼매를 통해서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의 평안이 가지는 힘들은 엄청납니다. 그 마음의 평온함을 계속적으로 유지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진리에는 정직해야 되고, 진리의 삶을 살려는 고집을 부려야 됩니다.

자신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지 그것을 감출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탐심은 제거해야 되는 것이지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원망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원망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진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으로써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진리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필요 없는 원한심을 가지고 필요 없는 욕심을 부리면은 다른 사람들은 "그거는 세상의 법칙과 어긋난다"고 얘기합니다. 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얽매여버릴 것 같으면 그것도 세상 사람들은 싫어하게 됩니다.

세상의 법칙은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진리를 거역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출려고 하고 속일려고 하고 그러한 삶들이 계속되면 진리 따라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진리에는 항상 정직해야 됩니다. 탐·진·치는 극복해야 되는 것들이고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둔 채 진리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고 진리의 삶이 아니다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분명하게 버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삶을 고집스럽게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법에 눈을 뜨면 적어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행해나갑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 진리를 거역하지는 않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어른이 되는 길은, 설혹 우는 한이 있어도 설혹 힘드는 일이 있어도 선한 일을 행하라.

울면서도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행해야 됩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설혹 그것으로 인해서 우는 일이 있어도 나는 그사람에게 용서해주는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선한 일을 행할려고 해야 됩니다. 설혹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선한 일들을 행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탐·진·치로 흘러가버립니다. 본래의 마음은 선한 일들을 할려고 하지를 않기 때문에!

내가 아프고 내가 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보시하는 것이 나에게는 손해가 오는 것이라도 그 보시가 선한 일일 것 같으면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다른 일들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수행은 해야 된다는 겁니다.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내 주변에 친구들이 자꾸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계를 지킬려고 해야 되는 거라.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을 어른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어른이 되는 길을 자꾸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면서 오늘은 마치겠습니다.

천신과 부처님의 대화입니다.

신이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제일 거룩한 보배를 가진 분들입니까?”

부처님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원인과 결과,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어떤 법이 행복을 가져다 줍니까?”

“열가지 선한 법들, 열가지 공덕행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

 

“어떤 것이 가장 맛있는 맛입니까?”

“진리! 진리의 맛이다! 진리 따라 가는 것이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까?”

“통찰지로써 살아가는 것이 가장 거룩한 것이다!”

 

지혜를 개발하고 삼매를 개발하고 위빳사나 수행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듣는 것도 선한 것들을 마음에 지니기 위한 것들이고, 그것을 따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곧 어른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 빤디따 스님이 얘기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 하는 그런 제목으로 법을 설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