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20110726)

담마마-마까 2021. 6. 5. 08:29

https://youtu.be/Lpj11Q6W234

*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20110726)

 

오늘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될까? 수한아.

그냥 괴로움을 당하면 돼? (수행자 대답)

그럴려고 수행하지? 음.

 

경전에는 "모든 것은 둑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무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야띠 아닛짱 땅 둑캉 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다들 괴로움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둑카라는 말, 괴로움이라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변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변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게 부처님이 설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너에게만 해당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든 것들은 멈추어있다고 인식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멈추고 싶어하지? 그걸 부처님이 '무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수한이한테 하나 더 물어보자.

 

무명하고 무지의 차이점이 뭐라?

무명(無明)은 빨리어로 아윗자(avijjā) 라고 그럽니다.

무지(癡)는 빨리어로 모하(moh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쉐우민에서 모하 많이 들었지? 차이점이 뭐야? 무명하고 무지하고? (수행자 대답)

지혜가 있는 게? 아, 바른 견해가 있으면 무지가 없는 거야? 뭐 바른 견해가 있으면 지혜도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무명이 만드는 물결이 탐··치입니다. 그렇죠? 어리석지 않으면 탐·진·치를 안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서 탐·진·치라는 물결을 만든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탐심(貪心)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알고, 치심(癡心)이 일어났으면 치심이 일어났다고 알고, 진심(嗔心)이 일어났으면 진심이 일어났다고 아는 것들입니다.

탐심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죄를 짓게 되죠? 진심이 일어나도 죄를 짓게 되고, 치심이 일어나도 죄를 짓게 되고. 왜? 탐·진·치는 불선(不善)이기 때문에! 죄로 악업이 된다, 악업으로 인해서 업을 쌓게끔 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수행으로 탐심이 일어났다고 알면 그 뒤부터는 탐심이 줄어들고 탐심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계속 망상피우면 탐진치가 일어나는 걸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 탐·진·치를 제어할 수 없을 경우에는 악업이 되게 됩니다.

 

악업을 더 이상 쌓지않을려면 스스로 탐심이 있다 하고 알아차려서 그걸 제어해야 됩니다. 제어하지 않으면 제거를 하든지 해야 됩니다. 적어도 악업을 쌓지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에는 탐·진·치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노력하는 것들을 우리는 보통 "수행"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천천히 지혜가 일어날 때, 아까 수한이가 얘기했지만 바른 견해, 그것도 지혜의 부분입니다. 바른 견해라든지 아니면 아,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구나 하고 아는 것들이라든지, 마음이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지혜의 부분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혜가 일어나면 우리는 명(明)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지혜를 완성해버리면 '무명은 없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 잡초가 많이 있습니다. 잡초 없앨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부지런히 뽑는 수밖에 없습니다. 탐심이라는 잡초가 일어나면 탐심이라는 잡초를 뽑고, 진심이라는 잡초가 일어나면 진심이라는 잡초를 뽑아버려야 됩니다. 그리해도 또 잡초는 생겨나게 됩니다.

뽑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잡초가 생겨나는 속도는 느려집니다. 부지런히 밭에 가가지고 잡초를 자꾸 뽑아주면 잡초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뽑는 게 적으면 적을수록 잡초는 무성해져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인제는 지켜봐가지고 일어나는 즉시 그대로 쏙 뽑아버릴 것 같으면 잡초라는 것은 인제는 그 밭에는 없게끔 됩니다.

 

그걸 우리는 "무명이 사라졌다". "지혜로써 완전하게 무명을 말려버렸다" 하고 얘기합니다. 잡초가 일어날 근거를 아예 만들지 않는 거라.

쉽게 말하면 잡초를 완전히 제거를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무상!

무상의 법칙을 알아야만이 잡초를 완전하게 제거를 하게끔 됩니다.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 처음 할 때 배가 일어남 사라짐 하면 배가 일어날 때 한번 알고, 배가 꺼질 때 사라짐 하고 한번 압니다. 아주 느리죠? 아는 게!

조금 더 수행 지나면 어떻게 돼요? 일어날 때도 여러 개가 일어나는 것을 압니다. 배가 꺼질 때도 사라지는 것이 여러 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조금 더 빨라지는 거죠.

그러다가 점점 더 빨라져서 배가 불러올 때 배가 '일어남' 하고 알 때 아주 셀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사라지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점점 더 지혜가 날카로워져서 일어나는 즉시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무명을 제거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무명을 제거하는 길은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일어나지 않으면 제거를 못합니다.

그런데 무지는 제거할려면 꼭 지혜가 없어도 제거가 가능하죠? 그렇습니까? 수한아.

어리석다고 할 것 같으면 니가 빨리 정신 번쩍 차리고 게으르지 않게끔 자꾸 하고,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됩니다. 니가 그걸 알아차림을 하든 어쨌든 간에. 그럼 어리석지는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 무지도 분명하게 볼 것 같으면, 수행을 통해서 무지를 봐야만이 그 무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결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그게 무명(avijjā)과 무지(moha) 하고의 차이점입니다.

모든 현상들은 무상이라고 보면, 무명은 사라집니다.

 

여기 불이 들어와있습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전기교류가 끊임없이 생멸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흐르게 돼있습니다. 그 계속 빛나는 상태로 정지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고정돼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죠, 그리고 빛이 있다 하고 착각을 하는 것뿐입니다.

스님 소리가 여러분들에게 들립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째서 들리는 겁니까? 끊임없이 하나의 소리가 순간순간 사라집니다. 만약에 소리가 사라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음 소리가 들어가지지를 못하니까. 그래서 계속 돼버립니다. 뭔가에 생각이 매여있으면 다른 생각이 못들어갑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무상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몸이 있다' 하고 인식을 하는 겁니다.

살아가는 게 그런 겁니다. 무상의 법칙입니다. 생멸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서 모든 것들은 성립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든 것들이 무상한 것이고, 지금 있는 것들도 모든 것들이 무상한 겁니다.

그걸 빨리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르면은 계속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무상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알고 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서, 요즘 스님이 지병인 허리 때문에 고생을 좀 많이 합니다. 아픕니다.

일반적으로는 아프면 어디 법문 나다니기 힘듭니다. 안갈려고 합니다. 어제도 진주가서 법문을 하고 왔는데, 갔다 올 때 스님은 속된 말로 똥차가 되어 갖고 수동이라. 클러치 바꿔가지고 이렇게 합니다. 그게 허리에 굉장히 부담이 돼거든. 굉장히 아파. 그걸 내가 뻔히 안다고. 그래서 장거리를 갖다 오면 안 그래도 요즘 몸이 좀 안 좋은데 아주 죽겠어.

그러면은 마음도 괴로워지고 법문하러 가기 싫어집니다. 안갈려고 그럽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상의 법칙을 알면 적어도 그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신체적인 아픔과 정신적인 아픔을 분명하게 분간할 줄 압니다. 구별하게 되는 거라.

 

부처님도 몸이 아프면 아프다 하고 압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아프다 해가지고 아난다야 내가 몸이 아프다 하고 얘기는 할지언정 내가 아프기 때문에 오늘은 누가 오더라도 내 없다 해라 해갖고 문 잠가놔 놓고 만나주지도 않고 뭐 그러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다 법문 다 다니고, 누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다 만나고 그렇게 합니다.

 

아픔이라는 것들은 그와 같습니다. 신체적인 아픔이라 해서 정신적인 아픔까지 연결을 시키지 않게 될 때, 그리고 그 아픔이라는 것들도 무상한 성품이고, 정신적인 고통들도 무상한 성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될 거 같으면 적어도 자기 일에 대해서 게을러지지는 않게끔 됩니다.

괴롭다, 싫다, 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하고 할 거 같으면 정신적인 아픔으로 연결돼서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고 할 일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병은 더 악화되고 마음도 병이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것들은 무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상하지 않으면 존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도 우리는 그럴리 없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지고 나면 슬픕니다. 왜 슬픕니까? 돈이 없어질리 없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병이 들면 슬프다는 거라. 괴롭다는 거라. 왜 괴로워? 병이 들리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무상한 성품에서는 병이 들기도 하고 낳기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누가 죽으면 슬픕니다. 왜? 죽을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무상한 성품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무상한 것은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을 거 같으면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정신적인 괴로움 그리고 뒤따라서 육체적인 괴로움, 이렇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아이를 데려가서 풍선 하나 쥐어줬다. 풍선이 탁 터져버립니다. 애가 웁니다. 애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터지지 않는 풍선 본 적 있느냐" 하고 물어보십시오. 세상에 터지지 않는 풍선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이해를 합니다. "어, 풍선은 터지는 갑다" 하고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울음을 뚝 그칩니다.

부모가 알려줘야 되는 거는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아, 그래 내가 풍선 하나 더 사줄께" 이렇게 알려줄 수도 있지만 그 풍선은 또 안 터집니까?

 

우리가 보통 무상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상한 성품을 모르는 것을 "출구가 없는 미로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무리 빠져나올려고 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녀봐야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을 모르는 사람은 굉장히 분주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오만 것 다 합니다. 그런데 무상한 성품을 알면 알수록 분주한 게 없어져. 고요해지는 거라. 아무리 돌아다녀봐야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 다녀. 그냥 그자리에서 서성서성하고 있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출구로부터 벗어날려고 생각을 안 하고, 노력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

 

부처님은 어떻게 했어요? 그 미로의 출구로부터 어떻게 탈출을 했어요? 간단합니다. 벽을 타고 올라가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벗어나버립니다. 탈출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생각을 해야지, 그 출구를 찾을 생각을 하니까 분주하기만 해지는 거라.

무상한 것인 줄 알 거 같으면 분명히 그 답을 찾아냅니다. 그와 같이 담을 뛰어넘어 가든지, 아니면 벽을 부수어버리든지 해서 분명하게 답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게 지혜라는 거라.

 

괴로운 것으로부터 벗어날려면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게 무상! 그리고 고! 그리고 무아! 아닛짜(aniccā)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 라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무상하지 않으면 괴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상하고 그렇게 괴롭기 때문에 거기에는 실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빨리 알도록 해야 됩니다.

 

진리의 끝,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렇게 지혜를 자꾸 가져야 됩니다. 진리를 보는 눈을 자꾸 길러서 그 진리를 이해할려고 하고, 수행에서 그것을 체험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둑카로부터 탈출하는 길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