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열반에 이르는 법 - 그러기 위해 지혜를 개발하는 7가지 방법 (20110802)

담마마-마까 2021. 6. 11. 08:47

https://youtu.be/Ji_Mfn1ytgM

* 열반에 이르는 법 - 그러기 위해 지혜를 개발하는 7가지 방법 (20110802)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고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부처님이 라꾼다까 밧디야(Lakuṇḍakabhaddiya) 라고 하는 아주 키 작은 비구 스님을 보면서 다른 비구 스님들에게 한 얘기입니다.

다른 비구 스님들이 키가 작은 스님이 있으니까 놀리거든. 그러면서 다른 멀리서 온 분들은 이 밧디야 비구가 아라한인 줄 모르고 있는 거라.

 

그걸 보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저기 봐라.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고 괴로워하지 않는 수행자가 걸어가고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질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의아해하듯이 이 스님들도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의아해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두 왕도 죽여버리고, 그리고 세금을 걷는 세무공무원과, 이 나라 이 땅도 파괴해버리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게 걱정 없이 걸어가고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앞에 왕하고는 똑같은데 학식있는 두 왕이라고 그럽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학식있는 두 왕도 죽여버리고, 그리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조차도 없애버린 자, 그자는 괴로움 없이 걸어 간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부처님이 거기에 대한 설명을 쭉 합니다.

 

연경아! 어머니 아버지가 너에게는 어떤 대상이냐? 보기도 싫은 대상이야? 그렇지는 않아? 너를 낳아주고 너를 키워주고 너에게 애정을 가진 그런 분들이지? 음.

 

대부분 불교를 그렇게 믿지 않는 분들을 "왜 수행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지금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 수행한다 하고 그럽니다.

'산딧팃꼬- 아깔-리꼬-(sandiṭṭhiko akāliko)' 지금 즉시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납니다.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난 것을 바로 알아차리니까 화가 일어나지 않는 결과가 즉시 나타납니다. '아깔-리꼬-'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그런 것들이 좋아서 수행을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뭐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분들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좀 더 많은 공덕을 쌓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그럽니다. 수행하면서 선한 마음을 내니까 공덕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수행하다 보면 어떤 것이 나쁜 것이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이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좋은 일을 자꾸 하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공덕을 쌓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계율도 지키게 되고 또 바른 생각도 하고 바른 행위도 하고 하면서 좋은 행위들을 많이 쌓게끔 되죠. 그러고 나면 끝이라.

 

더 나아갈려고들 잘 안 합니다, 간혹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좋으니까 그게.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방어할 수 있으니까 좋거든. 그래서 그렇게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도 그중에는 또 이 속세 생활이 불편하다고 마음먹어서 여기 있는 스님 같이 출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가하는 스님들은 보통 보면 뭘 목표로 합니까? 열반을 목표로 하고, 해탈을 목표로 하고,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도 합니다.

사회생활 한다고 해가지고 그걸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런 마음을 내기가 좀처럼 참 힘이 들어요. 그런데 어쨌든 여러분들은 수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해탈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그 나아가는 과정에서 좀 더 많은 공덕을 쌓고, 또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즉시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것은 있죠.

 

그리하더라도 목표는 해탈입니다. 해탈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해탈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야 됩니다.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지혜가 있는 자의 특권이다"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해탈을 목표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까? 일어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는 얘기라.

지혜가 있으면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지혜를 가지면 집착을 끊어버리고 해탈에 이른다 하고 경전에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완성하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르고, 그렇지만은 지혜가 그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 지혜를 얻는 데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수행, 수행으로 인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죠! 아, 이게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게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그래서 그 물질적인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끔 되고, 이런 어떤 지혜들, 이런 지혜들을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대신에 그걸 얻을려고 할 것 같으면 지혜로써 그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그 현상을 봐야 되겠죠?

 

그다음에 또 지혜를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경전을 잘 공부하고, 스님 법문 같은 것을 잘 듣고, 그래서 어느 정도의 견해를 가지게끔 됩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또 살아간다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것들에 어떤 것에도 집착하면 안된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자꾸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자기 살아가는 데서 그런 무상·고·무아로써 삶을 살아가게 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대하게 됩니다.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보게 되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보게 되고, 그래서 그 존재들이 다같이 행복하고 다같이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스스로 납득해가지고 확립된 상태에서 일반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것, 그게 보통 지혜로운 자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를 얻는 데는 이와 같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는 지혜는 얻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지, 지혜라고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처님한테 기도를 하고 부처님한테 매달려서, 부처님이 좋은 줄은 알지만, 그런 믿음이 강한 것이지 일상생활이 지혜롭게 된다고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왔는데도 집에 와선 애 밥도 안 차려줄라고 그러고, 적어도 지혜로운 엄마일 거 같으면 애가 배고프면 애 밥을 차려줄 줄은 알아야 된다는 거라.

 

보통 믿음은 지혜보다도 격이 떨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으면 지혜를 얻기도 참 힘이 듭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믿음만 너무 강조해가지고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왜 지혜를 강조하느냐면, 해탈에 이르고 싶다 하는 의욕을 일으킬려고 할 것 같으면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믿음 가지고는 절대 해탈에 이르겠다는 굳건한 마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본인은 가진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것은 거짓된 겁니다.

 

모든 속박을 끊고 사는 사람들, 그것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인다 하고 말합니다.

속박을 끊어라.

 

어머니는 연경이를 낳을 때 연경이 가지고 싶어서 가졌나? 연경이 같은 애 태어나기를 바랬나? 그건 엄마도 몰라. 그럼 연경이는 어떻게 네 엄마 아빠의 딸로서 태어났어? 니가 원한 거야? 그것도 모르겠지? 그런데 그건 네가 원한 거야. 네가 원해서 태어나게 된 거라.

자기가 지은 업으로 인해서 자기가 태어나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끔 됩니다.

어머니가 임신하는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자각해가지고 내가 그 아이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이 자기의 행위로 인해서 자기의 책임으로 인해서 윤회하게끔 되기 때문에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연경이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본인이 원해서 태어나게 된겁니다.

 

나를 낳게 하는 것들은, 나를 낳아준 것은 어머니가 아니고, 내가 태어나고 싶은 욕망, 갈망, 딴하-(taṇhā)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딴하- 자네-띠 뿌리상(taṇhā janeti puris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딴하가 태어날려고 하는 생명을 낳는다. 어머니가 낳는 것이 아니고.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그럽니다. 태어날려고 하는 딴하, 욕망이 있어야만이 그게 결합이 되어야만이 생명이 만들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연경이는 연경이의 딴하로 인해서 연경이로서 태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갈애가 생명을 낳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먹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나야 먹게 됩니다. 아무리 음식이 있고 내가 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먹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 '갈애'를 얘기합니다. 갈애를 반드시 죽여버려라.

갈망하는 것. 그 갈망하는 것이 태어나고 싶을 때만 갈망합니까? 죽을 때도 갈망합니다. 죽고 싶지 않다는 거라. '난 안 죽고 싶어' 그 갈망으로 인해서 새로 또, 안 죽고 싶으니까 새로 또 태어나게 되는 거라. 계속적으로 윤회하게 되는 거라. 그 윤회의 씨앗이 되는 갈망, 딴하를 죽여버려라는 거라.

 

가끔 그런 스님들을 보는 적이 있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밥을 먹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먹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나면 밥을 안 먹는 거라. 갈망이 일어나면 그 갈망을 죽이기 위해서 밥을 안 먹어. 그래서 며칠씩 밥을 안 먹어. 정 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될 것 같으면 갈망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실제로 그런 스님들이 있거든.

그 갈망이 나를 윤회하게 하고, 나를 태어나게 하고, 나를 죽지 않을려고 마음을 먹게하게 하고 존재하게끔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걸 아는 사람들은 밥조차도 안 먹을려고 그러는 거라. 내가 원해서 갈망해가지고 먹는 패턴들을 부셔버리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극단적인 예지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모든 것들은 이렇게 갈애의 지지를 받게끔 됩니다. 갈애가 없으면 여러분들 못살아갑니다. 그 갈애로 인해서 죽으면 안된다 그러고 내가 살아야 된다고 그러고 그로 인해서 윤회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끊임없이 그렇게 되는 거니까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거라. 윤회하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사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그래서 그걸 아는 사람들은 이걸 끊기 위해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거라.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그래서 해탈을 목표로 해서 더욱더 나아가고, 그게 지혜있는 자라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지혜있는 자는 그 갈애를 알기 때문에 그 갈애를 끊기 위해서 해탈을 목표로 한다는 거라. 단순히 그냥 목표로 저기 서울가는 걸 목표로 잡듯이 잡아가지고 가는 게 아니고, 진정으로 거기 가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때, 그런 자들을 지혜있는 자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아버지도 죽여버려라 그럽니다.

아버지는 연경이를 키우기 위해서 나가서 뼈빠지게 돈벌어야 되고 그렇게 합니다. 어머니가 기른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연경이를 길러준 것은 아버지라는 거라. 아버지의 그런 노력이 없으면 연경이를 기를 수가 없어. 엄마는 돈을 안 벌기 때문에, 돈 안 갖다주면 연경이를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래서 연경이를 이만큼 초등학교도 보내고, 중학교도 보내고, 고등학교도 보내고, 이렇게 계속 키워가게 된 거라. 그래서 사회에 나오게끔 존재가치를 만들어준 거라. 그래서 연경이는 '아, 나는 연경이다' 하는 이름을 갖게 되는 거라.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걸 '마나'라고 그럽니다. 자아의식!

아버지는 굉장히 권위적이지. 너희 아버지는 더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아라는 의식을 보통 부처님은 아버지로서 비유를 합니다. 나는 학교 선생님인데 하는 마음을 갖게끔 됩니다. 그럼 거기에 맞게 살아가게끔 됩니다. 거기에 맞게끔 자기만 그러면 되는데 내 자식도 거기에 맞게끔 살아가길 바라고, 내 주위 사람들도 거기에 맞게끔 살기를 바라게 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면 마나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나'라고 하는 의식! 그것이 생을 집착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고 또 거기에 따라서 노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나를 끊지 않으면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라고 하는 의식도 죽여버려라는 거라.

무상한 건데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딨어?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의 형태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개념적이고, 필요 없는 것이고,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못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아버지를 죽이듯이 그것도 죽여버려라는 거라.

'내가 지금 아픈데' 하는 것도 마나라는 거라. '내가 요모양 요꼴밖에 안 되는데' 하는 것도 마나라는 거라. 그거 버려버리라는 거라. 그거 뭐하러 그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어머니도 죽이고, 아버지도 죽여버려라 하는 거라.

 

그다음에 두 왕도 죽여버려라 그럽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우리 대에 몇명을 뽑습니다. 내가 살아갈 때, 그렇죠? 1대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쭉, 한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고 나면 다음 대통령이 되고, 다음 대통령이 되고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견해는 과연 몇 개나 될까? 견해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안 바뀐 사람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많이 바뀌어옵니다.

'에이, 이렇게 사는 거 별거 없어. 그냥 편하게 죄를 안 짓고 그냥 살면 되는 것이지 죽고 나서 무슨 의미가 있어?' 하면서 견해를 가지기도 했다는 거라.

또 좀 지나고 나면, '아니야. 그래도 윤회하는 것이 있으니까 내가 요모양 요꼴로 살아가지게 되고 그러지' 하면서 또 다른 견해가 바뀝니다.

또 지나고 나면, '아, 그래도 나를 살아있게끔 만드는 것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나를 이렇게 계속적으로 윤회하게 만들어 줄거야' 하는 그런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자꾸 바뀝니다.

 

특히 여기 와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 견해가 자꾸 바뀝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수시로 경험했던 것일 거라.

그전에 여기 오기 전에는 뭔가 실체가 있다고 판단들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견해가 또 와서 자꾸 수행하고 스님 법문 듣고 나니까 아, 그게 아니거든. 그럼 또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고. 또 좀 있다가 또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라.

 

두 명의 왕을 죽인다 하는 것은 그런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하는 것들입니다. 설혹 내가 윤회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내 개념으로 인해서 벽을 치지는 않습니다.

 

내가 마음에 대한 수행을 한다고 해가지고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거 같으면, 몸에 대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척하지 않는다는 거라. 나름대로 존중하고 인정을 하고 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바른 생활을 하고, 얼마든지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들로써 갈 수 있다는 생각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게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거라.

 

마음에 대한 수행을 한다. 심념처를 한다. 심념처가 최고다 해버릴 것 같으면 이미 개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라. 그 얘기는 뭐냐면 나는 수행 안 하고 있고, 개념만 가지고 수행하고 있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지라.

 

두 명의 왕을 죽인다는 것은, 단멸론과 상주론이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 때에 두 개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견해도 사로잡히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도 죽여버려라는 거라. 없애버려라는 거라.

뭐하러 그 개념에 사로잡혀 있느냐는 거라. 생명이 영원하면 어떻고, 생명이 끝나고 나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뭐할 거라? 자기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심념처를 하든 뭘 하든 자기 수행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래서 개념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그다음에는, 세무공무원도 파괴해버리고, 나라도 파괴해버려라.

세무공무원은 꼬박꼬박 세금 받으러 오는 자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세금 받으러 오는 사람 있습니까? 뭐가 세금 받으러 오는 사람이라? 애착을 가진다는 것!

내가 연경이를 보면 아이고, 연경이 예쁘다 하는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 보기만 하면 되는데 거기 애착을 가져버리는 거라. 그게 세무공무원이야.

 

소리가 들리면 '들린다' 하고만 알면 되는데 '아, 아름다운 소리' '아, 싫은 소리' 이래 해버린다는 거라. 그 세무공무원들을 파괴해버리라는 거라. 못 오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세무공무원이 안 와야만이 내가 돈을 안 뺏기니까 내가 내 것이 되는 거라. 그런데 왜 거기에다가 돈을 자꾸 뺏기느냐는 거라. 마음을 왜 자꾸 그런 쪽으로 빼앗겨버리느냐는 거라.

 

나라도 파괴해버려라는 것은 뭐냐면, 그렇게 마음을 애착을 가지는 데로 빼앗겨버리는 것은 뭐로 가지고 됩니까? 육근을 통해서입니다. 육근이 나라입니다.

그 육근(六根)을 통하는 것들을 잘 방어하라는 거라. 방어하지 못하면 파괴돼버린다는 거라. 귀는 귀로써 존재를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파괴돼버린다는 거라.

 

스님의 귀도 요쪽 오른쪽 귀가 안 들려. 오른쪽 눈도 안 보여.

왜 이렇게 됐는데? 파괴돼버려서 그런 거라 이게. 좋은 쪽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욱더 날카로워지니까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아주 천둥소리같이 들려버리는 거라. 그래서 이게 파괴되어져버리는 거라.

 

육근을 이런 식으로 파괴하지 말고, 육근이라는 것을 잘 방어를 하라는 거라. 잘 방어를 해서 육근을 통해가지고 애착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괜히 삼매 개발한다고 까부작거려 쌌다가 실제 육근이 파괴돼버리는 거라.

실제 육근이 파괴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육근을 방어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로부터 육근을 잘 방어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게 세무공무원으로부터 나라를 파괴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예리한 작용들, 그거 파괴하기 참 힘이 듭니다. 감각적인 것에 물들어 있으면 감각적인 것에 따라서 그것을 육근을 쓰려고 그러고, 스님 같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비감각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면 그것을 또 쓸려고 하고, 한동안 애를 먹습니다. 그래도 어떡할 거라? 그걸 해야 되는데!

 

그러한 자들은 '아라한'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한 아라한들은 걱정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저 밧디야 같이 아주 키작은 밧디야지만, 남이 놀리든 말든 나를 존경해 주든 말든, 나는 아주 고요하고 아주 걱정없이 잘살아가고 잘 걸어간다는 거라. 저 밧디야 걸어가는 모습 봐라는 거라. 얼마나 평화롭게 걸어가고 있느냐는 거라. 엄마 아부지 다 죽여버리고, 왕도 다 죽여버리고, 세무공무원에게 돈 뺏기는 일 없이, 자기 자신을 잘 방어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 두 번째 구절 게송은 똑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죽이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다음에는 두 왕을 죽이는 것의 앞에다 학식있는 두 왕을 죽여버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솟티야(sotthiya)' 라고 그럽니다. '학식있는' '의식·의례에 물들어 있는 것들'

 

빨리어 하면 "빨리어가 최고다" 산스크리트 필요없다. 그거 다 틀렸다.

기도하면 "관음기도만 최고다" 다른 것들은 다 틀렸다. 다른 거 아니다.

어느 절에 가니까 영혼을 천도해 준다. "아, 그게 최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는 것들입니다.

물론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에 대해서 예경을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 앞에 예식을 하기 위해서 과일이나 향, 초 같은 그런 것들을 올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만, 부처님은 그걸 뭐라고 그러느냐면 그걸 '바라문'이라고 그럽니다. '학식있는 바라문' 종교적인 노예가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종교적인 노예가 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겁니다.

 

'벗어난 상태에서 견해를 가지는 것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라' 하는 겁니다.

그걸 '학식있는 두 왕을 죽여라' 그럽니다.

내가 가진 견해, 또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견해들, 그런 견해에 사로잡히지 말아라는 거라. 그건 바뀌게 돼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마리의 호랑이조차도 죽여버려라.

여러분들이 맨몸으로 호랑이 한 마리도 대적하기도 힘이 드는데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어떻게 죽일 거라? 그거는 비유겠지!

 

첫 번째, -마찬다(kāma-chanda),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욕망은 반드시 버려버려라. 오욕락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브야--(byāpāda), 악한 마음이죠. 악의, 분노하고 내가 또 싫은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짜증이 난다? '아, 이거 브야빠다구나' '내가 악의를 가지고 있구나' 반드시 판단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 들뜨는 것,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것. 들뜰 필요도 없고,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지금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서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면 들뜨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그다음에, -나 밋다(thīna-middha), 게으름에 빠지고 혼침해서 멍한 상태로 있는 것. 혼침 망상하는 것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 알았어? 멍해가지고 멍때리고 있지마. 뭐하러 그렇게 시간을 헛되이 보내? 분명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리고 망상피우지 마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하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어. 생각한다고 해가지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거라.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그걸 티나-밋다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에 위찌낏차-(vicikicchā), 의심하는 것.

'아, 내가 이거 해가 될까 말까?' '우리 스님 말을 듣고 이길 따라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가보지도 않고 그런 의심을 한다는 거라. 가보고 나서 의심하면 좀 덜하겠지. 그런데 가본 사람은 의심을 하질 않아. 안 가보니까 어떻게 돼? 만날 물가 앞에서 발을 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툭 뛰어들고나면 ‘아, 이게 차갑구나’ 아니면 ‘아, 이게 생각보다 차갑지 않구나’ 하고 아는데, 그래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안 담가보고 만날 앞에서 ‘담굴까 말까’ ‘야, 이거 으짤까?’ 이러고 있는 거라.

 

다른 것들은 참 버리기가 쉽습니다. 감각적인 욕망도, 악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게을러지지 않게끔 하는 것도, 망상 피우는 것도, 그리고 들뜨고 후회하는 이런 것들도 간단하게 그래도 할 수 있는데, 최고 힘든 게 의심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마음의 큰 누름돌입니다. 마음에 의심하는 것들이 누름돌로써 있을 것 같으면 절대 그 사람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큰 돌로 마음을 꽉 누르고 있는데 어떻게 일어날 거라? 못 일어나는 거라.

 

그 의심으로 인해서 나머지 것들도 다 생겨나버린다는 거라. 개념을 가지게끔 되고, 망상도 피우게 되고, 의심하지 않으면 망상도 피우지 않습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그냥 걸어가버립니다. 내가 나태해지지도 않습니다. 의심하지 않을 거 같으면 내가 나쁜 길로 가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잘 걸어가게 됩니다.

의심하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싫은 마음도 들지 않고 그냥 하는 일 계속 해나가게 되는 거라. 후회하지도 않고.

 

그런데 의심을 해버리면 다 생겨나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걸 부처님이 '큰 돌'이라고 그럽니다. '마음을 누르는 큰 돌'이라는 거라. 그것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도록 하라.

물론 과거부터 익숙해져 온 삶의 형태들을 지금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해탈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해탈에 이르게끔 만들어줍니다.

이때까지 역사가 그걸 증명해왔고, 스님들이나 일반인들 중에서 그렇게 해탈에 이른 사람들이 그걸 증명해왔다는 거라. 육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한 것들이라는 거라.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내 눈앞에 해탈이 존재한다, 내 눈앞에서 해탈을 이룰 수 있다 하는 마음을 반드시 가지고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생각해서 해탈에 이르고 싶다 해야 되는 것이지 마음만 '내가 해탈해야지' 의욕만 앞서가지고는 그거는 진짜 해탈에 이르르려는 자가 아니라.

 

「수학자 목갈라나 경(Gaṇakamoggallānasuttaṃ)」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지혜를 개발하는 방법을 몇 가지를 적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하면 계율! 계율에 인해서 몸과 마음과 말을 바로잡도록 하라.

계율이 밑바탕이 되도록 반드시 하라는 거라. 오늘도 오계 받았죠? 오계 지켜나가면서 그 계율을 바탕으로 해가지고 내 행동거지, 마음 씀씀이를 똑바로 잡도록 하라는 거라. 나쁜 곳으로 물들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게끔 똑바로 중심을 잡으라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방어하라.

계율이 밑바탕이 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방어하기가 수월해져. 그런데 첫 번째가 안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방어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반드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잘 지켜서 방어하도록 해야 됩니다. 볼 때는 보도록 자꾸 해야 되는 거고, 들릴 때는 들리도록만 자꾸 해야 됩니다. 보면서 '예쁘다' 또 '저것을 가지고 싶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잘 방어하도록 하라는 거라.

 

세 번째, , 먹는 식사량을 조절하라.

먹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반드시 식사양을 조절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잘 먹는 스님들을 보면 “그 스님 복스럽고 참 좋습니다” 하고 얘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적당한 양일 때를 얘기하는 겁니다. 적당한 양이 지나버릴 것 같으면 그거는 식사량을 조절 못하는 자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적당한 식사 양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에 따라서 조절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게 올바르게 마음을 가지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 양의 3분의 1씩 다 빼십시오. 적당한 양입니다.

식사량을 많이 해가지고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로움을 가져올 거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영양분이, 칼로리들이 넘쳐나서 문제지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 열악한 환경 조건에서도 자꾸 밥을 적게 먹어라, 식사양을 적당히 해라, 적게 먹어라, 적게 먹어라 그랬는데 지금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 그러면 어떤 게 적당한 양입니까?" 물으니까, "밥공기에서 다섯 숟가락 빼라" 하고 얘기합니다. 다섯 숟가락 빼면 반이나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런데도 그게 적당한 양이라는 거라.

 

네 번째, 항상 눈을 뜨듯이 알아차림을 유지할려고 노력하라.

뭐든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항상 깨어있으라는 거라. 듣고 있으면 듣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걸어가면 걸어가는 줄 분명하게 알고, 운전하면 운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항상 깨어있도록 하라.

 

그다음이 다섯 번째가, 뚜렷하게 신구의(身口意)에 마음을 유지하라.

몸이면 몸에다가 마음을 유지하고, 말하면 말하는데 마음을 유지하고, 생각하면 생각하는데 마음을 유지하라는 거라. 엉뚱하게 두 개 세 개씩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또 그릇 씻으면서 말하고, 이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뚜렷하게 신·구·의에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라. 하나에다가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라는 거라.

 

여섯 번째가, 조용한 곳에 좌와구를 깔고 다섯 가지 장애물로부터 벗어나도록 자꾸 수행하라.

한갓진 걸 자꾸 좋아해야지, 번잡해져버리면 수행 못합니다. 내가 할 일들이 자꾸 생겨나고 할 일들이 자꾸 있는데 언제 수행하느냐는 거라. 휴가철이면 휴가 보내야 되고, 누가 옆에 아프면 내가 가서 도와줘야 되는 거고, 일이 생기면 끊임없이 자꾸 생겨납니다.

왜 생겨나느냐 하면 내가 좋아하니까! 일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자꾸 생겨나는 거라. 그래서 조용한 곳에 앉아있는 것을 자꾸 즐기라는 거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걸 좋아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다섯 가지 장애물로부터 마음이 벗어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선정과 지혜를 자꾸 닦도록 하라.

사선정은 다른 것이 사선정이 아닙니다.

대상에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하나가 될 때가 1선정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대상과 일치하고 나면 항상 마음에서는 희열이 넘쳐납니다. '아, 참 이리 좋구나' 그게 2선정입니다.

이런 희열이 있으면 이런 희열이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고요해지면서 쭈욱 그 희열들이 퍼져나갑니다. 격하게 움직이지 않고 아주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행복해집니다.

그럼 그 행복해지는 걸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게 3선정입니다.

그게 쭈욱 다 퍼지고나면 인제 행복하다는 것도 없어. 그냥 고요합니다. 적정의 상태입니다. 그런 그 적정의 상태가 대상이 되는 거라. 그게 4선정이라.

 

선정이 뭐 크게 여러분들에게 무슨 경지가 있어가지고 툭툭툭 갈 거 같애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선정들을 자꾸 즐기도록 하라는 거라.

 

그리고 지혜를 닦도록 하라. '아, 집착해가지고 내가 이마만큼 손해구나' '내가 이런 견해를 가짐으로 인해서 이마만큼 안 좋은 결과들을 가지고 오는 구나'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자꾸 버리도록 하라는 거라. 어디에도 걸림이 없도록 하라는 거라. 그리고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을 왜 스스로 발을 내밀어가지고 걸치고 앉아있느냐는 거라.

 

이게 「수학자 목갈라나 경」에 있는 지혜를 개발하는 일곱 가지 방법입니다.

오늘은 해탈에 이르는 것들에 대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