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안거해제. 빠와라나(Pavāraṇā, 自恣)에 대해서 (20151031.청년법회)

담마마-마까 2022. 1. 4. 09:00

https://youtu.be/_tkszMSIjIg

* 안거해제. 빠와라나(Pavāraṇā, 自恣)에 대해서 (20151031.청년법회)

 

해제한 사람들만 이름 얘기하고 게송을 한글로만 하세요. 빨리어 발음하기 힘드니까 한글로 하고 끝나고 나면 다른 분들은 사-두! 세 번 하도록 하고.

자! 이제 시작하십시오.

 

수계자 자자 게송 독송

 

존경하는 도반님, 저는 이 수행모임에 자자를 청합니다.

보았거나 들었거나 의심되는 잘못에 대해서,

도반들께서는 자비심으로 저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3회반복)

 

사-두! 사-두! 사-두!

 

(방하착님 이후로 일곱분이 더 자자게송을 하고 나서 7:45초 이후부터 법문이 이어집니다.)

 

자! 편하게 앉고, 오늘이 빨리어로 '빠와라나(Pavāraṇ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Pa가 무슨 뜻일까? pa, du, su, 이렇게 첫머리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좀 있지?

su 할 거 같으면 강물이 쭉 밑으로 내려가잖아? 그러면 강물을 따라 쭉 내려가니까 편하잖아. 그래서 편하고 좋다는 의미가 su의 의미, 강물을 따라 흐른다는 거라.

du는 반대로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는 거라. 거슬러 올라가니까 힘들다는 거라. 괴롭다고 할 때 둑카(dukkha), 즐겁다고 할 때 수카(sukha)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빠와라나' 할 때 '빠'는 그럼 무슨 뜻일까? 'pa'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아까는 강물을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수평관계인데, pa라고 하는 것은 우빠(upa) 할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들어올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분이 상승되든지 돈이 더 많아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수행이 훨씬 뛰어나지게 된다든지, 하여튼 그렇게 뭔가 한 단계 위로 올라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교에서 빠와라나 할 때 pa를 쓰는 것은 뭐냐면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많이 짓는다 할 때는 악업이 많이 쌓인다 하는 그런 뜻으로 빠빠(pāp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때도 pa를 씁니다. 그러니까 뭔가 많이 쌓이고 하는데 꼭 좋은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pa라고 하는 것은 수직, 위로 올라가고, 그다음에 위로 올라가는 게 좋은 게 올라가는 게 있고 나쁜 게 올라가는 것이 쌓이는 게 있고, 그럴 때 pa 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그럼 '빠와라나(Pavāraṇā)'라고 할 경우에는 '와라(vāra)' 라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담마와라'라고 한다. 보통 '담마와로(dhammavaro)' 그렇게 보통 이름을 짓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는 법에 대해서 잘 알아서 법이 마음속에 꽉 들어와 있는 사람들, 그래서 부처님 법이 너무 좋아갖고 그냥 그속에서 내내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 그런 걸 말할 때 '와라' 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법에 따라서 살고 법에 어긋나는 짓은 안 하고 그러는 것들을 얘기할 때 '와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빠와라나는 뭔 뜻이 될까? '와라니(vāraṇī)', '와라'에 '와라+이니'는 사람에게 붙일 때 '이니', 그다음에 어떤 주제를 할 때 '이니' 이렇게 명사형으로 나뉠 때 '이니' 라고 붙입니다. '담미니' 했잖아. 저것도 마찬가지로 '담마'에다가 '이니'가 합해져 가지고 '담미니'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건데,

'빠와라나' 할 때 '와라니'는 어쨌든 법에 따라서 법을 꽉 지닌 자가 됐으니까 내가 지금 현재 뭔가 한 단계 더 좋은 식으로 나아가지고, 법에 따라서 법에서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갔다, 그걸 성취했다고 할 때 '빠와라나' 라고 이름을 붙이고 되고 쓰게 되는 겁니다.

 

결제(結制)를 했으니까 마지막에는 뭔가 얻는 것들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마지막에 해제(解制) 할 때는. 그런데 해제할 때 뭔가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빠와라나 할 필요가 없는 거라. 그 의미에 맞지 않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어쨌든 해제를 하긴 해야 되니까 하긴 하는데,

 

원래의 의미 자체는 '빠와라나' 라고 쓸 때는 해제(解制) 라는 용어를 사실은 쓰면 안 돼! 중국에서 나오는 서적들을 다 뒤져보면은 빠와라나의 의미를 뭐라고 하느냐면 '안거가 끝난다' 할 때 '빠와라나'라고 이름을 한자로 씁니다. 그래서 '마칠 시'자 해가지고 시자를 쓰더라고. 그거는 의미가 좀 맞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

해제는 '풀어버린다'는 의미이고, 뭔가 일을 성취해가지고 끝냈다고 할 때는 '마칠 시'자를 쓰기 때문에, 오히려 빠와라나의 의미에는 그게 조금 더 맞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빠와라나는 언제 처음 시행을 했느냐 하면 경전에는 왕기사가 그걸 찬탄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 빠와라나 날에, 안거가 다 끝나는 마지막 날에 넓은 잔디밭에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한 일곱 시쯤 됐겠지.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그 시간에 잔디밭에 앉아가지고 다른 대중들 사리뿟따고 목갈라나 존자고 다 있는데 뺑 둘러 앉아가지고 부처님이 이 게송을 하게 됩니다.

상감(Saṅgham), 부처님이 최고 어른이니까 상캄 아우소(āvuso)라고 해야 되겠지.

 

Saṅgham āvuso pavāremi,(상감 아-우소- 빠와-레-미.)

diṭṭhena vā sutena vā parisaṅkāya vā(딧테-나 와- 수떼-나 와- 빠리상까-야 와-)

vadantu maṁ āyasmanto anukampaṁ upādāya.(와단뚜 망 아-야스만또- 아누깜빵 우빠-다-야)

 

이렇게 이 게송을 세 번 독송합니다.

 

"내가 혹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으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달라. 그러면 내가 그 지적한 것을 가지고 아, 내가 잘못했다 하고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안 저지르도록 하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하니까, 그다음에 사리뿟따 존자가 얘기하고, 그다음에 목갈라나 존 자가 얘기하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 아라한들인데 다 그러고 있거든.

왕기사가 봤을 때는 너무 좋은 거야, 이게. 그 모습이! 티끌 만큼도 잘못하는 부분이 없이 사는 분들이 저렇게 잘못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들이 참 보기가 좋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뭘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아무리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살아가면서 업을 짓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잘못으로 인식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개미가 있다. 개미를 못 보면 개미를 밟아 죽이고 그냥 지나가게 됩니다. 전혀 죽일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그걸 죽인 사람은 잘못을 범한 건 아닌데 뒤에서 봤을 때는 기분이 안 좋다는 거라. 저 사람이 왜 개미는 안 보이겠지만 벌레를 저렇게 밟아 죽이고 갈까? 기분이 나쁘니까, 깨닫지 않은 사람들이 기분이 나쁘니까 앞에 사람한테 괜히 악감정을 가지고 '쟤는 뭐 저렇게 행동해?' 하고 악감정을 가질 수가 있다는 거라.

또는 부처님이 아무리 법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법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일 거 같으면 그 소리 듣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 저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싫은 마음을 낼 수도 있고.

 

그럼 말을 한 사람이나 행동한 사람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그게 싫은 것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지적을 한 겁니다.

혹시 내가 너희들한테 불편하게 한 것은 없느냐? 하는 얘깁니다. 불편하게 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 그러면은 그것은 이렇고 저렇고 해서 변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 '네 말도 맞다. 내 다음부터는 조금 더 조심할 게'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걸 부처님 뿐아니라 사리뿟따 존자 목갈라나 존자 마하깟사빠 존자 이렇게 쭉 다 돌아가면서 얘기하니까, 달은 휘영청 떠있어가지고 부처님이나 다른 제자들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왕기사 스님이 봤을 때는 너무 좋거든.

 

"부처님! 내 평생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이건 너무 좋습니다. 반드시 우리는 다음부터는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이거 합시다!" 이렇게 부처님한테 건의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래. 다음부터는 그럼 그리하자. 해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는 결제를 하고 나서는 마지막 날은 반드시 이 빠와라나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아, 내가 안거 석달 지내면서 내가 그래도 잘 살아왔는가? 내가 공부는 열심히 했는가? 내가 선한 행위들은 좀 많이 하고 살았는가?'

 

처음에 아마 안거 시작하면서 "이번 석달 동안에 한번은 그래도 공양 한번 올려봐라."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올린 사람도 있고, 안 올린 사람도 있고 그랬을 거라. 그래도 올리려고 그런 마음을 먹었을 거라. 올리는 법도 사실은 모르고, 저기 우리 연경이가 쟤는 스님 밥을 갖다 주라고 하니까 뭘 갖다 준지 알아? 과일 요만큼 한조각, 그리고 빵 그것도 많이도 안 줘. 요만큼 갖다 주는 거라. 그다음에 뭘 한쪼가리 해서 주더라고. 그걸 먹고 나보고 하루종일 견디래. 그래서 아, 참 내 이걸 먹고 밥도 안 들어가고 이거 먹고 살아야 되는 구나 싶어가지고 어쨌든 그래도 기분좋게 받아 먹었어.

그러니까 방법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한 행위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거라. 너는 그래도 잘했고, 너는 너무 많이 가져와서 문제였지.

 

안거가 그래서 참 좋은 게 그런 것들입니다. 안거 마지막 날에는 그것들을 자신들이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아, 내가 마음 먹은 것들을 했는가? 그것이 성취되어서 그것을 끝냈는가?' 끝을 냈으면 빠와라나를 할 자격이 있을 거고, 그렇지 못하면 '아, 내가 나태했구나'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되는 거고.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나 제자들은 업을 지을 행위들을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아마 숱하게 있을 겁니다. 아마 살아가면서, 살아가면서 뿐 아니라 이번 안거기간 동안이라도 성질부리고 욕심부리고 잘못한 거 많았을 거라.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것들이 있지만 또 잘한 부분들도 있고, 그렇지만 조금 더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이 이 마지막에 빠와라나를 한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부처님도 부처님을 따르는 출가자든 재가자든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왕이 와서 부처님 법문하는 모습을 보았거든.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요만한 소리도 안 들리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와서 그럽니다.

부처님 희한합니다. 나는 사람들 많이 모아놓고 내가 아무리 무슨 얘기를 하고 하더라도 딴짓하는 놈은 딴짓하고, 저희들끼리 속닥속닥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어찌 됐는지 부처님한테 온 사람들은 전부 부처님 말씀 듣는데 온 마음을 다 쏟고 있지 다른 거 일절 안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아무런 잡담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다는 거라.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그거는 내가 법문을 잘해서, 아니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유익한 말을 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멧딴짜 위하리' 남을 배려하고, 남이 행복하기를, 남에게 방해가 되는 것들은 일절 안 할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딱 지니고 있다는 거라.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더라도 남이 싫어할 만한 일은 안 한다는 거라. 이쪽에서 부처님 법문 듣고 있는데 옆에서 속닥속닥할 것 같으면 그사람이 듣는데 방해를 하고 기분이 안 좋아진다는 거라. 그런 거를 일체 안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가족 간에든 아니면 같은 도반 동료들 간에든, 그렇지 않으면 이런 모임이든 그런 모임에서 아, 그래도 왕기사가 말하듯이 '아, 참 좋다, 이렇게 모여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좋느냐?' 하고 마음을 먹을 수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기본적인 조건은 '멧딴짜 위하리' 멧따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그속에서 자꾸 살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하는 것들도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들이 아니고 가족이면, 그렇잖아 가족끼리 '아, 우리 가족끼리 모이면 너무 좋다' 이런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가족끼리 모이면 말도 안 하고.

어떨 땐 밥 먹으러 가서 다른 사람들 밥 먹는 거 식당에서 보면 가족끼리 분명히 온 거 같은데도 밥을 먹으면서도 각각 스마트폰 하고 있어. 그래서 뭐하러 저리 앉아가지고 저러고 있노. 그냥 얼굴 보면 기분 좋아가지고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냥 밥 먹고 자기 스마트폰 보면서 이렇게 하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건 참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할 일인가? 다른 사람들 그것으로 인해서 기분 나빠하고 싫은 마음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들을 항상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그걸 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밥 먹으면서 서로 딴짓들은 안 한다는 거라.

그런 마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법을 들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법만 듣는다는 거라.

 

또 물어봅니다. 부처님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또 있지. 그게 뭐냐면, 저기 모이는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 일을 해야 될 때는 자기가 먼저 할려고 한다는 거라. 자기가 먼저 뭔가를 할려는 마음들을 지니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불교를 배울 때 무상·고·무아라고 배웁니다. 무상하다고 배우면서도 본인 자신은 고정된 것이 있다고 생각할 거라. 둘이 부부지? 그런데 만약에 너가 집에서 밥을 한다, 그럼 너가 집에 들어갔는데 부인이 밥을 안 해놨다, 그러면 성질부터 내게 되는 거라. "와 밥 안 해놨노?" 그 소리 들으면 부인은 기분 좋나? "나도 바빴다" 어쩌고 하겠지.

그런데 불교적으로 그거는 안 맞는 거라. 본인이, 남편이 밥을 안 했잖아. 그럼 본인이 안 한 것에 대해서는 남이 안 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탓할 수 있는 것이 못 돼. 본인이 한 것들, 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탓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자신이 확인된 것들, 자신이 그 상태를 이해한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는 거라.

스님들도 자신이 어느 정도 수행에 이르러가지고 그 수행상태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수행상태에 대해서 얘기를 할 것 같으면 바라이죄가 돼버리는 거라. 스님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되는 거라.

재가자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뭐냐면 만약에 부처님 말씀대로 할 것 같으면 부인이 밥을 안 해놨다, 그럼 지가 하면 되는 거라. 안 해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밥이 없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먼저 그 일을 하는 거라. 그럼 밥을 그냥 하게 되는 거라. 그럼 부인도 조금 미안할 거고, 그러면 남편이 밥을 하고 있으면 자기는 놀고 있겠어? 와서 반찬이라도 만들려고 하고.

 

그러니까 서로 화합되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원칙이 뭐냐면 "고정된 것은 없다"는 거라. 실체가 없는 것이고, 항상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할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고정돼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자기의 사고나 자기의 개념에 딱 매여버린다는 거라. 고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게 불교의 진리라는 거라. 변하는 성질을 지닌 거고, 고정된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해야 될 사람이 안 했다고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고정화시키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러느냐면 "먼저 안 사람이 그걸 행한다"는 거라. 먼저 본 사람이 그걸 행한다는 거라. 여기 먼저 왔으면 남들을 위해서 좌복 깐다는 거라. 그냥 그것 뿐이라는 거라. 만날 깔던 사람이 왜 안 깔았냐? 그런 법이 어딨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 부처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저렇게 많은 대중들이 있지만 저렇게 질서가 있고 조용한 것들은 고정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아는 사람이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라.

 

스님들도 법납이 많으면 많을수록 할 일이 많아집니다. 왜? 내가 먼저 앞서갔기 때문에 내가 해야 되는 거라. 인제 출가한 스님들은 그냥 닐니리맘보야. 좋아! 아마 수한이도 그랬을 거라. 몇개월 있으면서 누가 뭘 시키기를 하나, 자신이 법문을 해야 될 일이 있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출가생활이 너무 좋은 거라. 이런 출가일 것 같으면 나는 평생하겠다고 그러지.

그런데 점점 더 법납이 높아지고 할수록 할 일이 많아져버리는 거라. 후배들도 가르쳐야 되는 거고, 자기가 솔선해서 빗자루질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법문도 해야 되는 거고, 어디 다른데 가서 초청돼가지고 행사 인도도 해야 되는 거고, 뭐 자꾸 많아지는 거라. 그래서 법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이고, 나 인제 중 생활 못하겠다. 힘드니까. 밥 먹는 건 똑같은데 점점 많아진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먼저 안 사람들이 그 일을 행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라.

그게 불교의 진리라는 거라. 고정된 실체가 있고, 고정된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오산이라는 거라. 병원에 있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먼저 보이면 먼저 행하면 됩니다.

단지 불교는 행한 것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행한 것으로써 본인의 일은 끝나버립니다. 그것에 대해서 칭찬을 하든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남이 내가 했다는 걸 알아주지 못하든, 그거 전혀 문제삼지 말아라는 거라. 본인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물어봅니다. 부처님! 그러면 그거 말고 또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견해, 어떠한 견해도 그것들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라든지 생각은 항상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하고 맞다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항상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본인은 맞다고 자꾸 생각하고 남들에게 강요를 한다는 거라.

똑같은 의식을 지니고 있고 자유롭게 생각해서 자유롭게 뭔가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일 거 같으면 다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거라. 그것을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것은 오산이라는 거라.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설혹 누군가가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 이거는 이렇다 저렇다 하고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그 부처님 말씀을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얘기하지, 그것을 토를 달아갖고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는데 이런 이런 의미입니다" 하고 뒤에 자기의 견해나 생각들을 덧붙이질 않는다는 거라.

앗사지 존자도 사리불 존자가 출가하기 전에 앗사지 존자의 모습을 보고 따라가서 그 스승의 가르침을 한마디만 들려주십시오 하니까 말한 것이 뭐냐면 "나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것이든 조건이 지어진 것은 일어나게끔 돼있다."고. 딱 그말만 합니다. 자신의 견해라든지 자신의 생각은 일절 얘기하지 않고, 출가한 스님들도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말씀만 그냥 전하는 거라.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인데, 자신의 견해나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해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그건 참 나쁜 버릇들이라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들을 하기 때문에, 나의 법을 들어온 사람들은 저렇게 평화롭고 저렇게 서로 자애를 지니고,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겁니다.

 

오늘은 해제하는 날입니다. 빠와라나 날이니까 해제의 의미를 잘 새기고, 또 내년되면 또 이런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게끔 자꾸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자꾸 따르면서 그 길을 가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