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지혜가 나타나는 몇 가지 단계 (20151105)

담마마-마까 2022. 1. 8. 09:01

https://youtu.be/rKm9jOXBfow

* 지혜가 나타나는 몇 가지 단계 (20151105)

 

저번주 까티나 때 참 원만하게 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준비하고 여러분들이 다 진행하고 그렇게 한 건데도, 스님을 비롯한 어떤 다른 사람들도 흠잡을 데 없이 참 훌륭하게 잘 치뤘다 하는 얘기들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제 부산 붓다의 길따라 선원은 이제 스님 없어도 훌륭하게 잘 치뤄나가겠다. 스님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 이렇게 얘기하면 꼭 "스님 어디 갑니까?" 자꾸 물어봐싸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회장님을 비롯한 운영진들 그다음에 각각이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 식구들이 다 한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스님들 공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행사 진행하는 것 모든 것들이 원만하게 잘 이루어졌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수행 열심히들 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지혜가 나타나는지 아느냐?

 

어느 정도 지혜가 나타나는지 압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잘 모르겠죠?

그럼 첫째 물어볼게요. 뭔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이게 선한 것이다, 악한 것이다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거는 하겠죠? (수행자 대답 : 예)

그것도 지혜입니다. 그거 구분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또 하나, 악한 것이 일어났을 때 선한 것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압니까?

만약에 누구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럼 미워하는 마음을 자애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 하는 방법은 아는데 원활하게 잘 안되면 그것은 지혜가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전환하는 법은 아느냐는 거라.

가끔씩 그럴 때도 있습니다. 스님들끼리 싸워. 그러면 "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한번 내봐라." 내고 있는데도 밉다는 거라. 그거는 쉽게 말하면 아직은 나쁜 걸 선한 것으로 바꿀 줄은 아는데 그게 익숙하지 못하니까 그게 완전히 바뀌어버리지는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도 지혜에 해당이 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 뭔지 아는가?

수행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 그다음 일상생활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 장애가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장애를 제거해버리는 상태. 그러니까 수행하는데 만날 앉으면 조분다. 그럼 조부는 것은 어쨌든 제거를 해야만이 수행을 해나갈 거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게 조는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졸지 않기 위해서 뭔가 어떤 방법들을 취해가지고 졸음을 극복했든지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할 때 자신에게서 장애가 일어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이구, 뭐 여러 가지 일들에 끄달려가지고 알아차리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럼 일을 줄이고, 내 주변에 나쁜 놈들이 많아가지고 만날 거기에 꾀임에 빠진다 할 것 같으면 그 나쁜 사람들을 좋은 선한 사람들로 빨리 바꿔가지고 내 주위에 선한 사람이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자신의 장애가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 그것도 하나의 지혜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또 모든 현상들을 대할 때, 수행을 할 때든 일상생활이든 아,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이 나라고 하는 개념이 없이 살아가는 것들, 또는 망상하는 시간이 없이 살아가는 것들, 그것도 지혜에 들어갑니다.

 

과연 여러분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혜가 나타나 있을까?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게 한번에 나타나는 건 아니죠? 꾸준하게 하다가 보니까 그게 이루어지고, 그래서 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고 이렇게 됐을 겁니다.

이솝우화인가 어디에 보면 잭과 콩나무라고 하는 것이 있든데, 한번 심어놓으니까 씽 그냥 하루만에 천상까지 도달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죠? 우리는 뭔가를 심어놔 놓으면 매일같이 조금조금씩 자라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거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서 뭔가 열리고 따먹고 또 그렇게 해서 계속적으로 그 나무에서 이로움들을 보고 성장해나가는 것들을 보는 것들 그건 참 재미가 있다고 그럽니다.

 

수행에서 지혜가 나타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가 나타났으면 그다음에 나타날 때까지 꾸준하게 또 해나가가지고 그다음 게 나타나지고 하나씩 하나씩 진척돼나가지는 게 참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뭔가 수행하면 단박에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차라리 기도하고 말지 뭐하러 그러느냐는 거라. 기도하면 어느 순간 탁 서원이 이루어지고, 아니면 부적하나 탁 붙여놓으면 뭔가 선원에 좋은 일이 탁 일어나지고, 그거 믿는 거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

 

수행은 그런 거하고 다른겁니다. 수행은 어떠한 식으로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게 본인에게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선원에 1년 다니고 2년 다니고 해도 내가 얼마만큼 바뀌는지 모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매일 같이 자라는 것들을 볼 거 같으면 본인 자신은 잘 모릅니다. 그 자라는 것을. 그런데 밖에서 보았을 때는 많이 자랐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지혜가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단계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것으로 판단해야 되는 거라. 아, 내가 적어도 이게 선한 것이고 이게 악한 것이다 구분할 줄 안다. 그러면 아, 인제 지혜의 처음 단계에는 이르렀구나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아직 지혜하고는 관계없이 지금 닦아야 될 것들이 많다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삼매를 체험해서 어떠한 현상들을 봤다. 그래서 너무나 좋았는데 삼매에서 빠져나오고 나니까 그냥 일상생활로 도루묵이 돼버려서 돌아와졌다.

그걸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비유를 해놓느냐면 "농부가 임금님 옷을 입는 거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임금님 옷을 입을 수는 있지만 임금님 옷을 입고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때가 되면 임금님 옷을 벗어놔야 농부의 옷으로써 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는 거라. 밖으로 봤을 때는 화려하고 삐까뻔쩍 할지는 모르지만은 그것이 농사를 짓는데 이로움을 주지는 못한다는 거라.

 

뭔가 체험을 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뭔가 다른 일들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되는 것이지 그 삼매 얻기를 바라고 아니면 거기서 무슨 체험하는 것을 자꾸만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할지 몰라도, 그것은 언젠가는 임금님 옷과 마찬가지로 벗어버려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보다는 먼저 내가 아, 이것은 선한 말이고 이것은 선한 행동이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될 악한 말이고 이건 악한 생각이다 하는 것들을 먼저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지혜가 자라는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딱 두 개가 있다고 그럽니다.

자아! 두 번째는 망상!

지혜가 자라면 자랄수록 자아와 망상은 줄어들어갑니다. 그런데 지혜가 자라지 않고 정지해버릴 것 같으면 그 상태에서 자아와 망상은 항상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일정하게 망상이 일어나고 일정하게 자아개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자꾸 다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아와 망상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따당가 빠하나(tadaṅga-pahāna)' 그렇게 얘기합니다.

반대쪽, 반대쪽으로 인해서 그것을 극복해나간다 하는 뜻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고 선한 것일 거 같으면 적극적으로 더 해야 되는 것인데, 악한 것이 일어날 것 같으면 반대쪽으로써 그걸 극복해야 되는 거라. 물론 완전하게 극복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성이 일어났다. 그러면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그걸 연민심으로써 극복한다고 그러는데 연민심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자애로써 극복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남들이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계속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은 극복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하다가 보면 그게 잘 안됩니다. 반대의 것으로써 극복해나간다 하더라도. 그리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내가 당신에게 분노라고 하는 해로운 것들을 일으키지 않겠다.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는 것으로 인해서 당신이 괴로움을 당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하고 자꾸 자기 자신이 자애의 마음을 길러야 됩니다.

 

반대쪽으로 인해서 꾸준하게 해나갈 때 어느 순간에 아, 그렇게 성냄이라는 것이 극복돼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성냄은 있어. 성냄이 나에게 완전히 없어져 있다고는 얘기를 못합니다. 지금은 안 나지만 어떤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또 성냄이 일어납니다. 똑같은 그사람이라도 또 뭔가 다른 얘기를 할 것 같으면 또 성냄이 탁 일어납니다. 분명히 그것을 꾸준하게 극복했는데도 극복을 했는데도 성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 그러면은 반대적인 것으로 인해서 이것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것은 힘들구나' 하고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뛰어넘어갈 수가 있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않고 성냄이 극복된 상태에서 그냥 그쳐버렸다. 아, 이것도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면 지속적으로 계속 그렇게 하게 됩니다. 뭔 조그만 자극이 있어서 성냄이 일어나면 또 자애의 마음으로써 그걸 극복해나가고, 또 다른 것으로써 극복해나가고 계속적으로 그런 작용들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도 불완전하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극복해나가는 것이,

'윅캄바나 빠하나(vikkhambhana-pahāna)' 그렇게 얘기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원인을 찾아야 됩니다. 뭔가 원인이 있어가지고 내가 계속적으로 분노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찾아가지고 원인을 제거하려고 해야 됩니다. 정 안되면 이 사람하고만 얘기할 것 같으면 뭔 말만 얘기할 것 같으면 자꾸 분노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돼. 우선은! 그래서 이 사람을 안 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말할 때 아예 듣지를 않든지 어떤 식으로든 원인을 자꾸 제거할려고 해야 됩니다.

외부적인 것으로 제거를 하는 데는 그것도 한계를 지닙니다. 안 보려고 해도 계속 안 볼 수도 없는 거고, 안 들을려고 해도 안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원인의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인 겁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저 사람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제거를 해나가야 됩니다. 그럴려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만 다스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어느 때든지 자애의 마음을 자꾸 지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애의 반대적인 것을 항상 마음에 지녀야 됩니다.

마음에 항상 자애의 마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외부적인 조건이 어떤 조건으로 바뀌더라도 나에게서는 분노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분노가 완전히 없다고도 얘기하지 못합니다.

분노를 일으키고는 있지만 말은 평온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분노를 일으키고는 있지만 내가 행동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이 없이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압니다. '아, 아직 잠재돼있는 분노는 제거가 안됐구나' 하고 압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망상도 떨어지고 했는데도 남아있는 게 자아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분노가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내」가 일으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떨어져버리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불완전함을 알고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사뭇체다 빠하나 (samuccheda-pahāna)'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분노를 완전히 파괴해버린다는 뜻입니다.

분노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에 들어갑니다.

내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원인이 있어서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일어난 것은 일순간의 마음이고 그 분노의 마음도 일순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지속하는 것도 또 다른 마음들이 지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분노가 툭 떨어져버리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적어도 내 마음에서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들은 완전히 제거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 단계들을 밟아나가게 됩니다. 그랬을 때 지금 현재 분노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잠재돼있는 분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들까지 완전히 제거해버렸을 때 하나의 번뇌는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의 번뇌가 떨어지면 다른 번뇌들도 연쇄적으로 약해져버립니다.

간혹 그렇게 얘기합니다.

번뇌가 굉장히 많은데 그게 언제 다 떨어져버립니까? 요거 하나 떨어뜨리고 또 요거 하나 떨어뜨리고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언제 다 떨어뜨리느냐는 거라.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떤 것이든 탐·진·치의 항목에 들어갑니다. 분노의 성격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을 내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미워하는 것들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뭔가를 비판적으로 자꾸 사고하고 하는 것들도 있는 거고, 그리고 뭔가를 의심하는 성격들이 있는 것도 있는 거고, 그것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건 몇 개 항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를 떨어뜨리면 나머지 것들도 연쇄적으로 약해져버린다는 거라.

분노만 완전히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의심하는 분노, 그다음에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분노도 연쇄적으로 약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거라.

그런데 지금 현재는 완전하게 다른 것들 의심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싫어하는 마음들까지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적어도 내가 마음에서 내가 성냄을 일으키는 것들은 떨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렇게 해나가다 보면 하나의 번뇌는 완전히 제거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번뇌가 있지만 실제적으로 다스려야 될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간혹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승들이 "하나를 완전하게 다스려버려라. 그 하나를 완전하게 다스려버리면 나머지 것들은 약해져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예를 들어보면, 다리를 구부리고 좌선하고 있으면 고통스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 고통스러운 것들을 완전하게 극복하려면 어떠한 식으로든 다리를 움직이지 말고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나아가야 됩니다. 자기가 그것을 극복하든 극복하지 못하든 그 시간 동안 꼼짝말고 있어야 되는데, 이걸 자꾸 바꿔버릴 것 같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있지만 그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어떠한 식으로든 다른 상태에서는 또 그러한 상태가 온다는 거라.

 

그런데 자신은 착각합니다. 고통스러운 것이 얼마 안 나오기 때문에, 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로 스님들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대중생활을 하다가 보면 자신이 잠재돼있는 번뇌들이 일어나는 걸 모릅니다. 잘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홀로 토굴에 들어가 있을 거 같으면 그 잠재돼있는 번뇌들이 몽글몽글 자꾸 올라옵니다. 그럼 그때 그럽니다. '아, 내가 삼매를 체험했고 뭘 어느 정도 수행을 했고 했는데 이 잠재돼 있던 이 번뇌가 제거되지 않았구나' 하고 압니다.

 

하나의 현상을 완전하게 극복해나가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장애가 된다. 장애되는 것들을 먼저 자꾸 제거할려고 해야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나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다. 그거 하나를 완전하게 제거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나갈 때 본인은 '아, 내가 스스로 지혜가 자라나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지혜가 나타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본인이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게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