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생명의 존엄에 대하여 (20151119)

담마마-마까 2022. 1. 12. 09:00

https://youtu.be/1E06WwR0A0A

* 생명의 존엄에 대하여 (20151119)

 

오늘은 생명의 존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요즘 테러가 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911테러 그 이후 계속 테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응하는 게 조금 불교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테러를 하는 사람도 불교적인 것은 아닌 거고, 또 거기에 대해서 대응하는 것도 불교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불교적인 입장에서의 생명의 존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는 것이 있습니다.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게송입니다. 아마 어린아이라도 그 게송은 누구든지 할 겁니다. 그 정도로 그 게송은 널리 알려져있는 거고, 여러분들 「필수독송자애경」에 나와 있는 게송 중에 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 하고, 만약에 예를 들어서 "신이 당신을 축복하기를" 이렇게 했을 때 하고의 차이가 뭐가 있을까?

의지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신이 당신에게 축복하기를" 할 것 같으면 신을 강하게 의지해야만이 그 축복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는 누구를 의지해야 됩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그것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바뀌고 마음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되는 것이 불교적인 게송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과 그다음에 명상수행해서 그 게송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들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대상을 의지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되는데, 명상수행했을 때 그와 똑같은 그와 같은 게송을 독송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증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주지는 못한다 하는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성장할 수 있는 게송들을 되도록이면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해가지고 자꾸 마음속에 가져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그렇게 합니다.

 

그때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해라고 하느냐면 "외동아들을 둔 어머니가 그 외동아들을 대하듯이 하는 마음으로 그 게송을 독송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끔씩 스님도 길을 걷다가 보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 엄마를 보면 되게 보기가 좋습니다. 위험한 데로 갑자기 뛰어갈려면 화를 내기도 하지만 급하게 끌어당기고 그리고 아이를 위하면서 보는 눈빛이 애들이 커가지고 있는 애들을 보는 거하고는 또 다릅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들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돌봐주는 마음을 분명하게 지닌 채 아이를 캐리어 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 저게 외동아들을 둔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과 마찬가지구나 생각을 한 때가 있습니다.

 

하기야 요즘은 극히 일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그렇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인 것은 경전에도 나와 있듯이 외동아들을 둔 오직 하나뿐인 아이,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게송을 독송하라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애를 기르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생명을 대하는 기본적인 불교의 입장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모든 생명들이 죽는 걸 바라지도 않고, 다른 생명들을 해치거나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도 행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아이, 어린아이를 그렇게 해치고 아이를 죽이는 엄마는 없다는 거라. 그런 마음으로 항상 하도록 하는 것이 생명을 대하는 자세다 하는 겁니다.

 

많이 죽여봤죠? 사람은 안 죽였겠지만 각각의 벌레들이나 뭐든 죽이는 것을 자꾸 정당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아이를 보면 좋아 죽어, 엄마들이. 얼굴만 봐도 기쁘고 미소가 피어오르고 그러는데 그 벌레를 봐도 그렇게 기쁘고 미소가 피어오르도록 될 수 있을까? 조금 전에 얘기할 때 "삽베 삿따" 했습니다. 모든 생명입니다.

사실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라. 그것이 나에게 해를 끼치든, 아니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든, 아니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생명들을 대할 때는 항상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서 미소짓고 행복한 마음이 우러나도록 그렇게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벌레나 아니면 어떤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은 그것은 죽여도 괜찮다' 하고 자신이 판단내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아주 나쁜 결과들을 초래합니다. 당연히 자기 자신이 판단 내린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 내리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 판단 내릴 권리나 능력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세계 창조자도 아니고 뭐를 가지고 그 권리가 있다고, 그것이 바른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될 것 같으면 그 상대는 자신의 마음에 운명이 달려있게 됩니다. 그럼 내가 이 벌레를 죽이고 싶다 할 것 같으면 탁 죽여버리는 것은 나의 판단에 달려있는 것이지, 이 벌레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나쁜 방법입니다.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아마 이 세계는 계속적으로 살인의 세계, 싸움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판단 내리는 것은 개인의 판단으로써 어떤 것이든 다른 생명들을 해코지 하고 다른 생명들을 죽이고 하는 것들을 좌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사회가 그렇게 판단 내리면 그것은 정당할 것인가?

이 사회에서 '너는 살인자다', 아니면 '이 사회 말고 다른 사회는 악의 무리이다' 그렇게 그 사회가 판단했다 해서 그것들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거라. 그러면 그것은 아마 핑계거리 하기 바쁠 거라. 신의 이름으로 처단을 할 수가 있는 거고. 아니면 이것은 그 사회의 잣대로 인해서 그걸 '악의 무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거고, 그럴 것 같으면 죽이고 해코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신이 그렇게 죽이는 것을 좋아할까? 아니면 이것은 '악의 소굴'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사회가 변하면서 그것은 바뀌지 않는 건가?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회에서 판단 내려 가지고 규정짓는 것도 사실은 그건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개인이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 같이 이 사회는 그냥 혈육 살육의 현장이 돼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누구든지 다 바퀴벌레는 나쁜 동물이다 판단한다 해가지고 그것을 내가 죽인다 해가지고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죽이는 것이 사회의 책임으로 돌아가는 것은 또 아닙니다.

공업, 공동적인 업은 물론 존재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죽이는 행위는 내가 실제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죽이는 행위에 대한 업은 나에게 돌아오게 되는 거라. 아무리 사회에서 그렇게 판단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사회에서 그렇게 판단 내린다고 해서 모든 테러들이 정당화될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생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해서 멀리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라. 내 가까이 있는 하나뿐인 내 아들과 같은 존재로써 생각을 하라." 나하고는 관계없는 또 멀리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테러로부터는, IS라고 하는 이슬람독립국가를 건설한 사람들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당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느껴져버린다는 거라. 항상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로. 그래서 저쪽에서는 어떤 일들을 저지르더라도 그냥 묵인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끔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은 모든 생명, 그 IS도 그 모든 생명에 들어가 있는 거라. 그 모든 생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가까이에 있는 나의 하나뿐인 외동아이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에 있는 존재로서, 그렇게 자애의 마음을 지닐 수 있는 대상으로 대하라는 거라. 그것이 나쁜 무리이고, 죽일 무리이고, 없어져야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애로써 대해야 될 존재로서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자애로써 대할려고 하지 않는 것들은 차별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도 "모든 악의 근원은 차별감으로부터 온다" 하고 얘기합니다.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선인과 악인이 구분되는 것이고, 좋은 무리와 나쁜 무리가 구별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차이와 차별은 분명하게 다른 겁니다.

남자 여자가 차이가 있고, 능력의 차이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고위관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렁뱅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 차이가 차별을 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 차이는 인정을 해야 되지만 그 차별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항상 평등하게 대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차별을 두게 될 것 같으면 원리주의를 따르는 자들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서 다가오게 됩니다. 아마 80년대나 70년대 데모를 했던 사람들이 바라보는 사회에서는 저놈들이 나쁘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저놈들 때문에 사회가 더 발전하지 못하고 각각의 기관이 부서졌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저놈들은 나쁜 놈들이라는 거라. 왜? 자기 권리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또 테러를 하고 이러기 때문에. 이미 그 무리들도 차별감을 가지고 있듯이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로 차별감을 가지고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그 원리주의에 따르는 무리들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서 우리에게 다가와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은 계속적으로 모순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악의 근원 그 차별감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차별하고 있지 않는가?'

간단하게 얘기하면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이 국가를 건설할려고 할 것 같으면 국가로서 인정을 해주고,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차이들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면 큰 문제는 없는데 안 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 계속적으로 폭력이나 테러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라.

 

경전에 이렇게 돼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얘깁니다.

"바라문들은 바라문들만이 자기들이 우수한 인간이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라문들은 바라문들만이 힌두경전을 읽을 수 있고 독송할 수가 있게끔 되고, 바라문들이 태어나는 것은 다른 계층하고 다르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얘길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지금도 카스트제도가 존재를 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면,

"비록 바라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친다면 도둑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바라문의 어머니의 배로부터 태어났다고 해서 바라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단지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더러움이 완전하게 사라져버려서 아무것도 차별하지 않고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바라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사람의 간에도 차이가 있고, 식물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짐승들 간에도 각각의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가지는 것은 신체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식물에도 차이가 있고, 벌레들에도 차이가 있고, 짐승에게도 차이가 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차이가 있고, 물고기에도 각각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이에서는 어떤 차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똑같은 하나의 생명일 뿐이다." 하고 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차이는 인정을 하고 차별은 부정하는 겁니다.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각각의 생명은 각각의 독립된 생명입니다. 그 독립된 생명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란성쌍둥이라 하더라도 그 둘은 각각이 차이가 있습니다. 독립된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둘을 어머니는 차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생명에 대해서 조건없이 무조건적으로 자애의 마음을 펼쳐라 하고, 그것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든지 그 존재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님은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들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각각 개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경전에는 그런 존엄성이 있지만 누구든지 인간은 한 종류일 뿐이다 하는 겁니다.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든지 하나의 종류의 인간이다 하는 겁니다.

각각의 강물이 이름을 달리해서 흘러내려 오지만 바다에 이르면 똑같은 색을 띠게 됩니다. 바다색이라는 똑같은 색을 띱니다. 인종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각각 다른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라고 하는 무리에서는 똑같은 색을 띨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든지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제자는 동일하다는 거라.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만장일치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불교에서는 결정할 때 만장일치가 안되면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수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수결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에서 말하는 거하고 다릅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다수결은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이 A를 선택하고 한 사람이 B를 선택하면 그 다수결로 인해서 A가 만장일치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한사람이 B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B를 선택한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합리성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그것이 진리에 맞다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 B라고 하는 작은 것이 다수가 돼버립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수결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원칙을 지니게 됩니다.

다수결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에 따르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있을 때 그것을 다수결이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됐을 때는 아무리 소수라고 하더라도 진리에 따르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일로써 결정됐다고 할 것 같으면 소수가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다수결로써 만장일치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다수들도 모두다 그것을 따라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의 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의 역사에서 다른 종교하고는 다르게 차이가 나는 것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적어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불교의 이름으로 다른 생명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폭력으로 전쟁으로써 만들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 「차별감」, 이것은 「자아」라고 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이 돼있습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자아라고 하는 것을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믿음에 편승해서 자아를 회복시키게 해서 자아를 강하게 드러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너의 영혼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 종교의 이름으로 뭔 일을 할 것 같으면 너는 죽지 않고 천국에 간다'고 하게 되는 겁니다. 죽지 않는 자기 자아·영혼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에 지금 내가 저지르는 테러도 정당화 돼버린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길하지 않습니다. ?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당연히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으로 가는 영혼이라는 것도 존재를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내가 한 행위들은 반드시 그 결과를 낫는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나쁜 테러를 행했으면 나쁜 결과가 나한테 오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얘기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과법칙, "자아는 존재하지 않고 인과법칙만이 분명한 것이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극론적인 것에 빠진다든지, 아니면 자아는 없다고 해가지고 도덕까지 무시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하는 또다른 극론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이 양극단을 초월해버립니다.

그게 부처님이 말한 인과법칙입니다. 네가 저지른 행위는 네가 바로 받는 것이다. 그것이지 그 어떤 자아가 그것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걸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결과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 상태에서는 살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일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벌레도 변하게 돼있는 거고, 그래서 그 싫던 애벌레도 지가 변해서 나비가 되기도 하는 거고 그렇게 똑같은 개체인데 왜 벌레는 싫어하고 나비는 좋아하느냐는 거라.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바퀴벌레라고 하더라도 바퀴벌레가 죽어서 또 다른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생명으로 바뀌면 나는 또 좋아할 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가능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것이 각각의 다른 자아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가능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똑같은 자아라고 할 것 같으면 애벌레의 자아와 나비의 자아가 똑같은 자아인데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고, 만약에 또 다른 자아라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는 것은 차별감만 주는 것밖에 더 되느냐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자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거라.

단지 너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너가 저지른 행위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결과는 너한데 나타난다는 거라. 좋아하면 기쁨이 일어날 것이고 싫어하면 슬픔이 일어날 것이고, 그 결과는 너가 받는 거라. 슬픔과 기쁨에 따라서 일어나는 결과는 또 다른 결과들로써 너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인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도 특정한 실체가 없는데 살생은 정당화될 수가 없는 거라. 어떤 것이든 살생은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생명을 희롱할 권리는 없다. 자아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빼앗아서도 안된다. 그런 악행의 결과로부터는 결코 도망칠 수가 없다." 하고 경전에서도 얘기를 합니다.

 

가끔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가만히 보면 전부 신을 인정하고 천지창조를 한 것을 얘길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고 그럽니다. 인도에는 하도 종교가 많으니까, “우리 종교의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니까 그 종교를 믿지 않는 다른 아이가 “그럼 우리 신은 그때 뭐 했습니까?” 하고 그러는 거라. 그 신도 천지창조를 했다고 하니까, 다 신들이 천지창조를 했다고.

 

경전에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잇살라 님마나 웨다" 잇살라-지배자가, 님마나-창조했다고 하는, 웨다-이론, 천지창조를 했습니다, 자신의 지배자라고 하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이 반론을 합니다.

그렇게 다들 신이 창조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친구여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것도 잇살라의 뜻이 된다. 도둑이 되는 것도 잇살라라고 하는 신의 뜻이다. 거짓말하는 것도 신의 뜻이고, 욕을 하는 것도 잡담하는 것도 신의 뜻이고, 욕구를 가지는 것도 사악한 견해를 가지는 것도 신의 뜻이다.

신이 무엇을 창조했다고 하는 것을 성실하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내가 해야 할 것이고, 이것은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의욕마저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너는 뭔가를 행하고 있는 거라. 의욕이 없으면 뭔가를 행할 수가 없는 것인데 뭔가를 행하고 있고, 뭔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거라.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고 너의 의지라고 하는 거라. 그런데 왜 신의 뜻이라고 자꾸 얘기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신의 뜻이라고 하는 그것은 바른 종교가 되지 못한다" 하고 단언을 해버립니다.

자기가 걸어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걸어갈 수가 없는 거고, 멈출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신의 뜻이냐는 거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자기가 살인을 저지르려는 마음이 일어나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지 살인이 어떻게 신의 뜻이 되는 거고, 남을 비판하는 것이 신의 뜻이 될 수가 있느냐는 거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용인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결코 바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사회에서 국가의 명령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고 종교가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법칙은 분명하다는 거라.

자신이 죽일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일 수가 없는 거고, 자신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선한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개인이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의 법칙이 곧 규칙입니다.

그 규칙을 따라야 되는 것이지 다른 신의 뜻이라든지 어떤 사회적인 통용으로 그것들을 규칙으로써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슬람은 무서운 국가다, 그것은 없어져야 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이슬람에 대해서 압니까? IS에 대해서? 왜 그렇게 따라들 하느냐는 거라.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은 인정하고 똑같은 생명으로 대해야 됩니다. 마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닐 경우에는 그 존재들은 그것이 IS든 무엇이든 무엇이든지 다 평등한 겁니다. 생명을 가지고 숨을 쉬고 있으면 살아갈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화를 내거나 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원리주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도 먼저,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도 먼저, 자신을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경전에는 얘기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잘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경전에 이런 비유를 해놨습니다.

어느 파코나라고 하는 스님이 비구니 스님들하고 얘기하기를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만날 하루 종일 비구니 스님들 있는 곳에 가서 잡담하고 있으니까 다른 비구 스님이 그 파코나 스님에게 뭐라 합니다. 거 왜 비구니 스님들하고 어울리고 다니느냐? 그게 뭐 계율에 저촉되고 하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그렇게 뭐라 하는 거라. 그러니까 비구니 스님들도 다른 비구 스님들을 싫어합니다. 왜 파코나 스님이 와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때문에 파코나 스님을 왜 그렇게 뭐라 하느냐 하면서 다른 비구 스님들을 언짢게 생각을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파코나야! 출가했다고 할 것 같으면 비구니들과 장시간 얘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만약에 다른 비구들이 그것을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널 비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너는 자신의 마음에 아, 왜 이리 비판할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라. 그런 집착을 가지지 말아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에 동요하지 않도록 해라. 비판될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말아라. 설혹 네가 좋아하는 그 비구니들 아니면 누군가가 너를 때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돌에 맞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말아라. 마음의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라. 그것이 출가한 사람이 해야 될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단지 나는 그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동일하게 자애를 실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거라. 모든 생명들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평등하게 대할려고 하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비구니 스님을 싫어하고 비구 스님만 좋아해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느 대상은 좋아하고 어느 대상은 싫어하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대하라는 거라.

설혹 그 대상이 다른 대상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해침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마음에서는 동요를 일으키지 말고 평등심을 항상 지니도록 하라는 거라. 그러면서 마음에서는 그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자애의 마음을 지니라는 거라.

 

포교사를 보낼 때 부처님이 물어본 게 있습니다.

누가 너를, 거기는 불교가 없는 곳인데 거기 가서 불교를 포교하다가 누가 너를 욕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욕을 하면 그냥 듣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그냥 알아차림의 도구로써 들을 뿐입니다.

누가 너를 때리면 어떡할 것이냐?

- 때리면 그냥 때리는 거, 고통이 있으면 고통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겠습니다.

누가 너의 사지를 절단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 아, 그래도 그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런 너를 죽이면 어떡할 것이냐?

- 나는 올바른 것을 전하면서 죽음을 당하는데 평온한 마음을 항상 가질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힘이 있어서 나는 그래도 참 행복하다 하고 죽겠습니다.

 

그게 불교의 기본적인 자세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불교에서는 다른 존재를 죽이는 것, 다른 존재를 해치는 것, 아무리 하찮은 벌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들은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죽이는 행위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경전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원한으로 돌려주면 원한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테러가 있다고 해서 또 다른 테러가 있을 거 같으면 계속적으로 테러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원망하지 않는 것으로서 돌려줄 때에 그 원한은 사라진다는 거라. 그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고 평등하게 대할 때 테러들은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다. 나를 때리고 나의 것을 빼앗았다, 나를 이겼다고 계속 생각하면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테러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내 마음 속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복수할려는 마음이 사라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계속 일어난다는 거라. 그와 같은 것들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원한심은 사라진다는 거라. 때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이 저지른 행위는, 테러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자기행위에 따라서 자기가 벌 받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다시 테러할 생각은 없어지는 거고, 그리고 내 마음에는 그 원한심들 보복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자신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알고 있으면 싸움은 없어진다" 하고 경전에 나옵니다. 자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변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거라. 그럼 자신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싸움은 없어진다는 거라.

적어도 성자들은 내가 지금 언제 죽는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열심히 자기 할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올 때는 그냥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또 경전에는 "하늘에 있든 바닷속에 있든 산의 동굴에 숨어 있든지 자신이 저지른 악업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신이 지은 것들은 자신이 받게 되는 것이지, 어디에 숨는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행위들이 그 보복으로부터 그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라. 죄를 저질렀으면 그 악업은 자신이 받게 돼있다는 거라.

 

경전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쐐기를 박습니다.

"다른 어떤 존재, 외부적인 어떤 존재를 죽이는 것, 해코지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이게 불교의 법칙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산딧티꼬 아깔리꼬" 라고 합니다.

"어떤 것에도 거기에 대해서 의문이 일어나지 않고 완전하다"는 거라. 그 진리를 따를 것 같으면 모든 존재들은 평등하다는데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존재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가져야 됩니다.

생명의 존엄은 평등한 데서 나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차별하는 것들은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