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윤회의 바다를 벗어나는 열쇠는 사띠뿐이다. (20151203)

담마마-마까 2022. 1. 14. 09:00

https://youtu.be/8avxZ5_wxrQ

* 윤회의 바다를 벗어나는 열쇠는 사띠뿐이다. (20151203)

 

오늘은 「윤회의 바다를 벗어나는 열쇠는 사띠뿐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욕계 다섯 종류의 번뇌를 끊고,

색계 무색계의 다섯 가지 번뇌를 버려버리고,

믿음 · 노력 · 알아차림 · 마음집중 · 지혜의 오근을 증장시켜서

· · · · 견해다섯 가지의 파도를 넘어서라.]

그렇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오온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하라 하는 뜻입니다.

오온인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해서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그래서 존재욕까지도 전부 버려버리게 될 때, 그 윤회의 바다를 뛰어넘을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불교 진리 첫 번째가 괴로움의 진리입니다.

사는 것들은 다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르게 생각을 해보면 그것들을 잘 조합을 할 것 같으면 꼭 나쁜 뜻으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 꽃꽂이 된 것이 있습니다. 꽃을 누가 생화를 사와가지고 꽃다발로 탁 갖다 놨다 할 것 같으면 참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걸 누군가 꽃꽂이를 잘하는 사람이 잘 제대로 꽂을 거 같으면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거 같아도 그거 하나가 빠지면 꽃꽂이 자체가 오히려 조화가 흐트러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살아가는데 얼마만큼 잘 조화롭게 그것들을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사는 건 어차피 괴로움이지만, 그 괴로움들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들이 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살아가면서 공덕이 되는 4가지는 반드시 행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첫 번째 보시의 공덕.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탁발 올린 것도 보시의 행입니다. 보시를 할 때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쩨따나', 내가 어떤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가? 선한 마음을 지니고 보시를 하도록 하고, 또 그걸 받는 사람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보시자에 대해서 인도를 해주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행하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내용이 뭐가 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어떤 마음을 지니고 보시를 하느냐? 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조금 전에 오계를 받았습니다.

계(戒) 실라(sīla) 라고 해서, 계를 지키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계가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하고 순조롭게 잘 행해나갈 것 같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지켜져 나가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사마타.

집중하고 그리고 고요하게 하는 방법들을 스스로 자꾸 터득하려고 하고 그렇게 수행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위빳사나 수행.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착함이 없도록 하는 것.

 

이것들 네 가지가 살아가면서 공덕이 되는 것들이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4가지가 있을 것 같으면 그래도 살아가는 것들이 꼭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괴로움들을 맛본다고 하더라도 이 4가지가 잘 증장 돼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꽃꽂이 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급작스럽게 괴로움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비탄에 빠진다든지 이런 일들은 없어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꽃꽂이에 꽃을 하나하나 꽂듯이 여러분들도 공덕이 되는 4가지들은 잘 꽃꽂이를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잘 키워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덕이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아무리 여러분들이 계를 잘 지키고, 삼매에 순조롭게 들고, 위빳사나를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해탈에 이르렀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끊임없이 사띠를 하는 거라. 대상 자체를. 마음이 자꾸 대상을 벗어나도록 만들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 선원에 여기 보면 원숭이 세 마리가 있죠? 하나는 눈 닫고 있고, 하나는 입 닫고 있고, 하나는 귀 닫고 있습니다. 저게 수행에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에서 다섯 가지는 잊어버리지 마라 하고 얘기합니다.

 

맨 첫 번째가 천천히 하는 것.

수행은 빨리 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왜? 마음은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행은 뭐로 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것도 일부러 자꾸 천천히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첫 번째가 어떤 경우든지 천천히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해야만이 집중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 그런 것들이 발란스를 맞춰지게 됩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힘들이나 집중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이 발란스가 맞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뭔가를 하더라도 뒤만, 뒤를 알아차립니다. 끝나고 나서.

걸어가고 나서도 이미 발을 다 내려놓고 그다음 발이 들리고 있는데도 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발이 쑥 들리면 끝 무렵에야 인제야 들린다고 알아차립니다. 빨리 해버리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그거는 뭐냐면 마음의 속도는 그것보다도 훨씬 빠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행동을 천천히 할 것 같으면 마음의 속도도 그마만큼 더 천천히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라도 처음에는 자꾸 천천히 하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눈 뜬 장님처럼 하라. 그렇게 나옵니다.

저기 원숭이 한 마리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은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아름답다 하는 욕망이 일어날까? 또는 추한 것에 대해서 싫다 하는 마음이 일어날까? 아니면 어떤 대상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이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그런 욕망과 집착은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들이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밖에 있는 대상들을 자꾸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실제 수행의 대상인 몸과 마음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밖에 있는 대상을 보면서 그 대상으로 인해서 '보인다' 하고 분명하게 그것만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눈을 뜨고 봐도 됩니다. 대부분은 보는 것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은 그냥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관념입니다. 보면 '선등님'이라고 아는 거고,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거라. 똑같은 형상의 다른 사람이 오더라도 나는 이미 저런 형상은 '선등님'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선등님'이라고 안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이미 자기 스스로 조작을 하고 있는 거라. 그렇게 보게 될 것 같으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안 볼려고 해야 되는 거고.

 

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몸을 돌릴 때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고, 몸 전체를 돌린다 하고 경전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한번 보십시오. 뭔가 옆에 대상이 있을 것 같으면 몸이 먼저 돌아가는 게 아니고 고개가 먼저 돌아가게 됩니다. 볼려고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볼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몸을 돌려서 그 대상을 보게 되는 거라. 그것이 그냥 보인다 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보는 것들을 줄이라는 거라.

그래서 눈뜬 장님과 같이 감각적인 욕망과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을 줄일려고 할 것 같으면 보는 것들을 줄여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는 지금 보이는 대상이 보인다고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으면, 어떤 형상으로 알아차려지고 색깔로 보여진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는 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럼 안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차라리 눈을 감고 하더라도 안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수행을 할 때 좌선을 할 때 눈을 감고 하면 그래서 보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경행을 할 때는 대부분 눈을 뜨고 합니다. 눈을 감고 한번 해봤어요?

 

눈을 감고 한번 해보십시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물론 아직은 생존욕구가 있고, 존재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많이 더 뒤뚱거려지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보이는 대상이 없을 거 같으면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에 더욱 더 집중하게 됩니다. 집중하는 힘이 굉장히 커져버리게 되는 거라.

경행을 하는 이유는 노력의 힘들을 배가시키고, 그리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을 더 크게 만들어 주고 그러는 것인데, 그렇게 경행하면서 눈을 감고 할 것 같으면 집중하는 힘들도 훨씬 커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떨 때는 집중하는 것과 노력하는 것이 발란스가 탁 맞아질 때가 있습니다. 크게 노력을 안 해도 분명하게 집중하는 것들이 일어나지고, 대상을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할 때는. 그럴 때 '아, 이게 발란스가 맞을 때는 이렇게 평온해지는구나' 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알게 됩니다. 강제로라도 경행을 할 때 눈을 감고 조금씩 해보는 습관들을 가지는 것들은 좋습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안 볼려고 해야 됩니다. 옆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그리고 뭔가 밖에 있는 다른 대상들에 마음을 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눈 뜬 장님과 같이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하는 것이 귀머거리,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처럼 하라.

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은 자기 욕을 하든, 자기 칭찬을 하든 전혀 관계없이, 그거하고는 관계없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그마만큼 침착하게 돼있지 않으면 밖에 있는 소리에 반응을 하게 됩니다. 아주 고요하게 마음을 둘려고 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가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귀를 막아야 됩니다. 평온한 마음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귀를 막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있을 때는 밖에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 수행대상은 밖에 있는 소리가 아니고 내 귀고, 그리고 내 마음이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이 강해질 것 같으면 밖에 있는 소리에도 전혀 반응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영향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침착해져 있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밖에 있는 소리에도 크게 반응을 안 합니다.

 

실제 여러분들이 생활하면서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급격하게 바뀌는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자꾸 동요하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밖에 있는 소리에 금방 성을 내고 금방 좋아하고 그렇게 합니다. 침착한 마음 고요한 마음을 지니려면 먼저 귀를 자꾸 닫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말하지 마라.

다른 것보다도 우리 선원 식구들이 참 안 되는 게 이 말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때 보면 안에서 듣고 있으면 그냥 조잘조잘조잘 해. 말을 안 하면 뭔가 허전한 모양이라. 그냥 고요하게 알아차리면서 먹기에도 바쁜데 자꾸 말을 할 거 같으면 대상을 자꾸 놓쳐버립니다.

그게 습관이 되면 자꾸 논쟁거리만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자꾸 시시비비를 가리게 됩니다. "이것은 옳은 거고, 이것은 그른 거다." 하면서. 마음에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 거라. 요건 좋은 사람, 저건 싫은 사람, 나쁜 사람, 선과 악에 대한 구분들을 자기 스스로 하고 있는 거라. 그게 바른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은 자꾸 말하기 좋아하는 거고.

 

말을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삼가해야 됩니다. 말을 할 때 말하는 소리를 듣든지, 말을 할 때 입술에서 일어나는 감촉을 알아차리든지, 말을 할 때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든지. 그게 될 것 같으면 말을 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진 않고, 또 자신이 말하기를 즐겨하지는 않는 거고, 그리고 말을 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것들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이 잘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점은 이 말하는 데서 딱 차이가 납니다.

수행이 잘 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행이 잘 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남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또 수행이 잘 된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말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도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버릇이 들은 사람들은 자꾸 자기 것만 얘기합니다. 자기 얘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특히 이런 수행처에서는 말하는 것들은 삼가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죽은 사람과 여러분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느낌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금방 느낌이 있습니다. 손을 이렇게 스치더라도 손에서 일어나는 감각, 느낌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손을 이렇게 스치더라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느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이 다섯 번째 주의해야 될 것은, 시체처럼 하라.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들, 그 감각들은 분명하게 알아차리기는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반응을 일으키지는 말아라는 거라. 반응을 일으키면은 수행하고는 거리가 멀어져 버립니다. 살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느낌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분명하게압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들을 느낌으로만 자꾸 알려고 해야만이 그 느낌이 더 이상 진행되지를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느낌으로 인해서 항상 탐·진·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탐진치를 없애자고 하면서 탐진치를 일으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죽은 사람이다' 생각하고 느낌만 그냥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라.

 

이 다섯 가지가 수행을 잘 진행해나가고 진척이 있게끔 하는데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잘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까 첫머리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 괴로운 것들도 내가 어떻게 꽃꽂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유용하게 잘 쓸 수가 있다는 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이 대부분 뭐가 있는지 한번 잘 보십시오.

그 대부분은 보면 딱 이 네 가지에 거의 한정이 됩니다.

 

불필요한 욕구,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 뭔가를 원하는 마음들입니다.

자기가 필요 안 한 건데 뭐 할라고 일으키느냐는 거라. 어떤 사람은 보면 물건도 필요 없는데도 나중에 필요할 거를 생각을 하고서 그걸 구입을 하고 이럽니다. 필요할 때 구입하면 됩니다. 요즘 같이 이 좋은 세상에 뭐 미리 그걸 구입해 놓을 필요가 뭐 있어? 그런데 나중에 되면 그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그게 필요해지는 상황이 되면 좋은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싸다고 필요할 거라고 탁 구입을 해놨는데 나중에 되니까 옷이 안 맞아. 조건이 달라져버렸다는 거라. 그때는 물론 세일 할 때보다도 훨씬 비싸겠지만 불필요한 걸 구입을 해놔버리면 나중에 그거는 못쓰게 돼버리는 거라.

 

욕구도 마찬가집니다. 뭔가 수행을 할려고 하고 선한 공덕들을 자꾸 쌓을려고 하는 그런 욕구들은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거 말고 다른 필요 없는 욕구들을 너무 많이 가지진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자꾸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필요한 것들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라는 거라. 지금 필요 없는 일일 것 같으면 그 욕구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자기 괴로울 짓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불필요한 성냄, 분노입니다.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정당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당한 것들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성냄을 일으켰을 때는 자기 자신이 먼저 화상을 입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면서 '아, 다른 사람은 뭘 경험했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라. 내가 지금 쓸데없는 것에 마음 쓰지 말고 더욱 더 수행하는데 마음을 강하게 내야되겠다 하는 것은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라.

마음이 선한 것들을 할려고 할 경우에는 그것이 필요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해탈을 목표로 해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필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뿐이라는 거라. 분노를 일으켜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분노 없이도 지금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탐욕과 분노는 불환과에서 떨어집니다. 맨 처음에 여러분들에게 떨어져야 되는 것은 이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끝까지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는 것들 불필요한 것들은 탐욕이든 욕구든 그것은 부리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수행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위해서 지나치게 고행하는 것, 그다음에 삼매에 대한 집착들, 아니면 어떤 현상 수행하면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들에 대한 집착들, 이런 것들도 괴로움을 일으키게 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이 하는 겁니다. 드러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맞게끔 정확하게 수행을 해나가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삼매에 들기도 하고, 그리고 오래도록 수행도 할 수 있게끔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뭔가 남에게 내가 어쨌든 이 시간은 반드시 앉아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을 한다? 아니면 수행을 하면서 뭔가를 바라고 삼매에 들기를 바란다? 그거는 오히려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지 바른 수행법은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딱 묶여버리는 것, 집착하는 것.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괴로움을 받는 부분들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견해는 어떠한 경우든지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이 네 가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온에 대한 집착입니다.

몸에 대한 것, 느낌에 대한 것, 그다음에 인식하는 것에 대한 것, 이런 오온에 대한 집착이 더 우선적으로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온에 대한 집착들을 가질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답형으로 얘기를 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 윤회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열쇠는 알아차림인데, 그 알아차림은 오온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지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온에 대해서 집착할 것 같으면 윤회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고,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쇠를 쥐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좀 더 정확한 답입니다.

 

앞서 얘기한 네 가지 것들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끊임없이 그런 것들이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는 오온에 대한 집착만큼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문장의 첫 번째 '빤짜 친다(pañca chinda)' '다섯 가지 속박을 끊어라'고 하는데 이르르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다 보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 어디에도 내가 집착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 어디에 '나라고 하는 견해'가 붙어있을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나',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전혀 거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보면 이 유신견이 떨어져나갔는지 아닌지를 전혀 본인은 모릅니다. 나중에 수행을 하다 보면 뭔가 떨어진 것 같기는 같은데, 그게 유신견이 떨어졌는지 뭐가 떨어졌는지를 모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은 그전에 내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았다.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견해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은 뒤에 돌아봤을 때 ', 인제 나에게는 유신견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아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다 보면 아까와 같이 눈을 감고 하다 보면 두려움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두려움 없이 그냥 눈을 감고 경행을 했다. 경행을 했는데 끊임없이 그냥 걷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그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져버리고 '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이 탁 들면 의심이라고 하는 것이 탁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도 수행할 때는 실제로는 모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아, 그 길이 바로 맞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이게 가야 되는 길이다' 하는 것이 분명하게 탁 확신이 들면 ', 그것이 내가 의심이 떨어진 부분이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결박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내가 지금 유신견을 끊겠다. 아니면 계금취-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누가 무슨 견해를 가지고 있든, 아니면 어떤 수행을 하고 있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고 하는 것들을 가지겠다', 그걸 지금 하겠다 해가지고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이 세 가지는 어떤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보기보다는, 세 가지가 동시에 거의 뚝 떨어져버립니다. 하나가 떨어지면 나머지 두 개도 거의 동시에 같이 툭툭 떨어져버립니다.

 

맨 처음에 수행해서 진척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들입니다.

분노나 욕구가 먼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런 부분이 먼저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이 세 개가 먼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 개는 실제로는 동일한 겁니다.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릴 때 일어나는 보너스와 같은 겁니다.

그걸 지식으로만 자꾸 알아가지고 '아, 유신견이 이런 것이다! 의심은 이런 것이다! 아니면 계금취는 이런 것이다!'

그거 알면 뭐 할 건데? 그건 의미가 없어지는 거라.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해야 되는 것은 끊임없이 그냥 알아차리는 것뿐이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끊임없이 알아차려라. 아까 얘기한 다섯 가지 봉사같이 천천히 하고, 느낌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이런 다섯 가지들을 끊임없이 해나가면서 대상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이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든 그냥 그대로 알아차려나갈 때, 그렇게 될 때 나에게 오는 보너스가 이 세 가지들이라는 거라. 그러면 본인은 아는 거라.

'아, 내가 인제 다시는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구나.'

 

그렇다고 해가지고 성냄이나 분노가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크게 영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구나. 일어나긴 합니다. 욕심이 일어나기는 하더라도 그것이 실행되지는 않는 거라. 성냄이 일어나기는 하더라도 성냄이 표출되지는 않는 거라.

수행의 과정은 그와 같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렇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해나갈 때 나중에는 성냄과 분노도 '아, 인제는 완전히 떨어졌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살려고 하는 마음들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디에 태어날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것까지도 전부 다 버리게 되고, 그 존재할려고 하는 욕구들이 조금씩 조금씩 엷어지는 것에 따라서 나머지 다섯 개도 점점점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탁 눈을 뜨듯이 '아, 이제 더이상 나에게 의심이 없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나에게 미혹되게 남아있는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은 경전에서 '다섯 가지', '열 가지' 이렇게 분류를 해놓은 것이지, 실제로는 여러분이 마음을 써야 되는 부분은 전혀 아니라는 거라.

해야 되는 것은 지금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는 거라. 그리고 그 대상을 놓치지 않아야 되는 거고.

그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게 될 때 눈이나 귀라고 하는 것들은 대상으로서만 알 뿐이지 밖에 것들을 보고 듣고 하기 위한 것들로서는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들리더라도 내 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밖의 것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귀에서 들리는 소리만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해나갈 때 여러분들은 윤회의 바다를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게 됩니다. 아,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인제는 그냥 사띠만 해나가면 됩니다. 알아차림만.

대상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법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해나가면 언젠가는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문을 열게 된다는 거라. 문을 하나 열 때 뭐가 하나 떨어져 나가고, 문을 하나 열 때 뭐가 하나 떨어져 나가고 하는 것이지, 그것은 열쇠가 없을 때는 어떠한 경우도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인식들을 분명히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