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수행의 완성은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uppakkilesa> (20151112)

담마마-마까 2022. 1. 9. 09:00

https://youtu.be/oHAsrvcXmIM

* 수행의 완성은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20151112)

<위빳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오염원 uppakkilesa>

 

··· 여러분도 마음속에서 다 같이 그런 마음들을 가져서 "오늘 수능보시는 분들이 모두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하는 그런 마음으로서...

탁발을 할 때 스님이 하는 게송들이 있습니다.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 이렇게 할 때도 있고, 아니면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자요 혼뚜" 할 때도 있고, 아니면 "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이렇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금씩 게송을 달리해서 합니다.

 

행복하다고 하는 의미에는 보통 4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하다는 것하고,

그다음에 괴로움이 없는 것하고,

그다음에 내가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해탈에 이르도록 하는 것하고,

그다음에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하고,

이렇게 보통 4가지를 얘기합니다.

오늘 수능날이니까 평온한 마음으로 다들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수행의 완성은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빨리어 용어가 '빠빤짜 비라따 빠자(Papañcābhiratā pajā)'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상에 집착하고 있다'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보여지고 들리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다들 집착하고 있잖아요. 그것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니고,

살고자 하는 것에도 집착하고 있는 거고,

또 뭔가 하기 싫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을 하고 있는 거고,

그다음에 가장 근본적인 것 어리석음이 집착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경전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어느 곳에서 안거를 지냈는데 안거를 지내고 나면, 우리 얼마 전에 까티나 했잖아. 까티나 하듯이 사리뿟따 존자가 지낸 그곳에서 까티나를 하기로 했는데 까티나 날짜가 다 됐는데 아무도 누가 보시를 하는 게 없었어요. 스님 가사를 보시하는 것, 그다음에 스님들이 필요한 물품들을 보시하는 것, 이런 것이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이상하다. 까티나 날짜는 다 돌아오는데 왜 이리 안 올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 까티나가 되기 전에 부처님을 뵈러 갈 일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사원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까티나 가사 행사 때 물품들이 오거든 그거 전부 나한테 다 주시오. 아니면 뭐뭐가 왔다는 목록을 전부 다 빠짐없이 나한테 알려주시오. 그렇게 하고 떠났거든. 그러니까 이 절에 있는 스님들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을 하는 거라. 어, 사리뿟따 존자가 욕심이 있어가지고 그 물건들 전부 자기가 하려는 갑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죠? 사리뿟다 존자는 까티나 가사 때 들어오는 여러 가지 물품들은 거기에 머물고 있던 모든 스님들에게 골고루 분배하기 위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당신이 분배를 할 것 같으면 가장 공평하게 골고루 분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물품들을 전부 다 모아두라고,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다 얘기해달라 얘기한 건데 다른 스님들이 그거를 오해를 하거든. 사리뿟따 존자가 욕심이 있어서 그렇다고. 그런 것은 아니죠?

 

아라한들은 어떤 경우든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한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극에 대한 반응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자극을 할 것 같으면 금방 반응들이 일어납니다. 그 얘기는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떤 것이든지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어떤 경우든지 지금 현재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아라한들은 최고 원하는 것이 빨리 죽는 것이 농담 처럼 할 정도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욕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고자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리고 또 여러분들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보면 게으름 부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떨 때는 보면 시간을 쓰는 것들을 보면 왜 저렇게 시간을 허비할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어떨 때는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걸 효율적으로 쓸 거 같으면 참 좋을 건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아라한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할 때 필요한 일들을 반드시 합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무명을 이미 벗어났기 때문에 무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반대인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가 그렇게 당부를 한 것은 사미 스님부터 시작해서 모든 스님들에게 골고루 까티나 공양물들을 분배해서 그 공덕들이 공양물 올린 분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그런 목적이었습니다.

 

수행을 완성한 사람들은 그래서 어떤 것에도 그 4가지들을 비롯한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러분도 집착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카-- 삿사따- 낫티(Saṅkhārā sassatā natthi)'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현상들에는 항상하는 것, 늘 있는 것, 실체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하는 겁니다. 모든 현상은 항상 변하게 돼있는 것이지 그것이 그대로 있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집착할만한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집착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어느 정도 집착은 안 한다 치자.

그런데 인제는 뭘 가지고 집착하느냐면 나쁜 것을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좋은 것들을 가지고.

예를 들어볼까요? 수행하다가 뭔가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럼 집착합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이 못 보던 새로운 보석을 하나 봤다, 한 번도 이런 보석을 본 적이 없다, 그럼 그거 신기해하지 않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어, 새로운 거 봤다' 하고 알고 그냥 놓아버릴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신비한 체험들을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신비한 체험이 해탈에 이른 것인가? 전혀 그렇지는 않거든. 좋은 것들도 이렇게 집착을 하게끔 됩니다.

 

이때까지 쭉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 전에 얘기한 4가지 집착은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싫은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을려고 자꾸 하고, 집착을 끊어야 되는 것들은 자꾸 끊을려고 하고 하는데, 딱 안되는 것들이 수행하는 사람들이 좋은 현상들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것이 참 안 끊어집니다.

 

그것조차도 집착하지 않아야만이 수행의 완성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들을 조금 더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던 수행에서 신비한 체험들을 하는 것.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수행이 잘돼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고, 또는 이때까지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알지 못한 것뿐이지 주변에 숱하게 일어났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수행하다 보니까 그런 현상들을 본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대상으로써 그대로 그냥 봐야 됩니다. 뭔가 부처님이 나타났다, 아니면 뭔가 강렬한 빛이 나에게 비쳤다. 그것도 하나의 대상으로 봐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붙잡혀 있어가지고는 수행에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을 잘하다 보면 현상들이 무상한 성품으로 그대로 드러나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은 압니다. '아, 모든 현상들은 이렇게 무상한 것이구나. 모든 현상들은 불만족스러운 것이구나. 모든 현상들은 나라고 집착할만한 것이 어떤 것에도 없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수행이 굉장히 잘되기 때문에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그것에 그냥 매여버립니다.

무상한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럼 그 무상한 성품을 그냥 그대로 봅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무상한 것을 안다고 해가지고 해탈에 이른 것인가? 수행이 끝난 것인가?

바꾸어서 생각하면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가 물건이 탁 깨트려져서 물건이 깨졌으면 '아, 저것은 깨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무상한 것이지' 그렇게 아는 거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깨진 물건이 원상복구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깨진 것은 깨진 것뿐이라는 거라. 그런데 수행이 잘 되면 무상한 성품들을 알면은 그냥 그것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상한 것만.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들로부터 벗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해탈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무상한 성품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지혜에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 무상한 것조차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 넘어가야 되는데 무상한 성품으로 계속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 자체가 그냥 무상한 것으로만 계속 보여버리는 거라.

 

어떤 경우에는 앉아서 수행할 것 같으면 너무나 빠르게 변합니다.

그러면 그 빠르게 변하는 것 때문에 슬퍼. 그래서 앉아가지고 수행을 하면서 엉엉 울고 있는 거라. 본인이 그 무상한 성품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무상한 성품을 안 것은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것만 놓아버려야 되는데 그걸 못 놓고 있기 때문에 그냥 무상한 성품에서 나중에는 슬픔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수행에서 조그만한 지혜(ñaṇa)가 일어났다 해서 그 지혜에도 집착을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단계에 진입을 했다, 그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장애가 되기 때문에 빤냐(paññā)라고 안 하고 냐나(ñāṇa)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수행을 하다 보면은 현상을 아는 것에 대해서 기쁨(pīti)들이 일어납니다.

기쁨은 왜 일어날까요?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중력이 있으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집중력은 변하게 됩니다. 물결과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집중력이 동일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약해지면 기쁨의 성질들도 약하게 일어나는 거고, 집중력이 강해지면 기쁨의 성질들도 더 크게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지혜의 성품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집중력은 이렇게 각각 다른 성질로써 이렇게 다가와지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 기쁨들을 그냥 그대로 붙잡고 있는 거라. 그 기쁨들도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수행의 완성은 아닙니다.

완성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쁨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설혹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집중력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집중하는 힘들이 분명히 다르구나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냥 그 집중력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동일하다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그 기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라.

 

그다음에 또 수행을 잘 하다 보면은 아주 편안해집니다. (passddhi)

대상 자체를 알아차리면 금방 사라져버리고 알아차리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수행하는데 장애되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어져버립니다. 나에게 문제 될 만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럼 고요한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그냥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돼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알아차리는 현상도 그전에는 의도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 인제는 자연스럽게 그냥 알아차려집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마음도 가벼워져 있고, 알아차리는데 대상도 굉장히 가벼워져 있고, 내 몸도 굉장히 가벼워집니다.

몸과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지면 나중에는 어디까지 바뀌냐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내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공의 상태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고요하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딱 머물러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보통 거기서 그냥 몇날며칠이고 그냥 그렇게 머물러서 빠져있다고.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한 것들은 그것들이 해탈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해탈이라고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 앉아있는 것들에서 일어나기는 일어나봐요. 금방 일어날 때 힘을 그렇게 가벼워지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솜털 같은 몸이 어, 무겁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손 하나를 뻗쳐 올리더라도 금방 무게감, 무거움이 느껴진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해탈은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이것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가볍고 고요하고 경쾌한 거기에 마음이 그냥 딱 머물러 있어버립니다. 그것도 마음이 그러한 대상에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포지션을 바꿔주든지 그리하지 않으면 '아, 이것이 해탈은 아니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붙잡아야만이 그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있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특히 이거는 스님들이 많이 하는 건데 확신(adhimokkha)이 딱 들어가지고 다른 것들은 일체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위빳사나 외에는 다른 것들은 안 보입니다. 또 자기가 수행하고 있으면 그 수행이외에는 다른 것들은 눈에 안 보입니다.

맞긴 맞는 건데, 이것도 장애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불교에 대한 확신(saddhā)이 들 거 같으면 그 확신으로 인해서 마음이 넓어져야 되는 것이지, 좁혀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그럽니다. 편협되게 확신이 탁 들었을 때는 그거 외에는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수행에서 어느 정도 성취감이 있고 나면 이런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것도 장애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에 못박혀가지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내가 또다른 장애에 빠졌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이 끝났다고는 누구든지 얘기를 못합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면 해탈에 이른다고. 만약 그런 확신이 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어떤 수행법들도 나에게 적용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다른 어떤 가르침도 자기 스스로 옳고 나쁨들은 분별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금 잘못된 확신들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삿다'라는 확신의 부분이 아니고, '아디목카'라는 부분으로 바뀌어져 버렸다는 거라. 맹목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상태가 돼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빨리 바꾸어주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노력하는 성질이 바뀌질 않는 거라. (paggaha)

수행을 할 거 같으면 끊임없이 수행을 합니다. 마치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그냥 담금질을 해나갑니다.

대구 갈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시간이 좀 급해가지고 빨리 좀 가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려다 보면 가속 페달을 더 밟게 됩니다. 그럼 어떨 때는 아, 이거 위험하다 할 때가 있어요. 가속 페달을 세게 밟을 경우에. 규정 속도가 100키로면 100키로를 지키고 가야만이 이게 위험하지 않다고 느낄 건데, 100키로를 넘었으니까 가속페달을 밟으니까 위험한 거라. 그런데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시간이 급하기 때문에, 목표가 보이기 때문에 가속페달을 밟아버리게 되는 거라. 다행히 거기까지 도달하면 괜찮은데 자칫 잘못하면 도달하지도 못하고 내가 사고가 날 수가 있다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어떨 때는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막 밟아나갈 때가 있습니다. 규정속도는 지켜야 됩니다. 차라리 조금 늦더라도 규정속도를 지킬 것 같으면 안전하게 도착을 하게 됩니다. 잘 수행된다 해가지고 그렇게 막 달리면은 그것은 오히려 규정속도를 지키는 것보다도 더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가끔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도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그걸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그대로 달려나가면 사고 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어떨 때는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아, 나 출가하겠다' '나 어디 버마 가서 수행하겠다' 마음이 톡 일어납니다. 하고 나서 좀 있다가 내가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얼마 안 가서 내가 해탈에 이를 것 같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는 거라. 나중에는 후회합니다.

차라리 꾸준하게 하면서 대상들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알아차리면서 살아오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나을 뻔했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수행은 정해진 것들을 반드시 지키십시오.

좌선하고 경행을 하라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지키십시오.

또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수행을 지속해라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에서도 수행을 지속을 해나가야 됩니다.

자애와 알아차림이 양립하지 않을 것 같으면 한쪽으로 또 기울어집니다. 그 규정들은 반드시 지켜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냥 알아차림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이 할 것 같으면, 뭐 앉은뱅이만 할 것 같으면 해탈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것은 목적지가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달리는 것이 아니고, 그 노력하는 것들이 지나쳐버릴 것 같으면 안 됩니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렇게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하다가 보면 안주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upaṭṭhāna)

알아차리는 것들이 능숙해지면 저절로 모든 것들이 알아차려집니다. 그래서 그냥 그 알아차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대상이 일어나는 족족 분명히 알아차리고는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그런데 거기서 그냥 끝나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들이 수행의 완성이라? 끝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도 그냥 그러고 있다는 거라. 뭔가가 하나 빠져있다는 거라.

알아차리는 것은 그 알아차리는 것에서 '분명하게 아는 기능'들이 있어야 됩니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같이 가야되는 것이지 사띠만 있어가지고는 안됩니다.

알아차린 것은 알아차린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분명하게 알고 그것이 기억돼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삼빠자나는 빼버리고 사띠만 자꾸 하는 거라. '대상만 알아차리면 되지'

대상을 좋은 대상을 만났을 때는 또 자기가 콘트롤 할 대상을 만났을 때는 그래도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대상은? 반응해버리는 거라!

 

어떤 경우엔 사람들이 그럽니다. “스님, 자애명상을 하다 보니까 싫은 사람에 대해서는 진짜 자애명상이 안됩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고 있는데 그런 싫은 대상을 만나면 사띠는 있는데 삼빠자나는 이미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들을 못하게 되는 거라. 대상을 알면은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도록 해야 됩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가슴속에 딱 박혀있어야만이 그 분명한 앎들이 지속적으로 사띠와 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에 알아차림만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또 수행을 잘하면서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하면 쌔하게 욕심부리는 것. (nikanti)

자신은 욕심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욕심부리고 있는 거라. 가끔 그럴 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몰라요. 자신은 열심히 법을 전하고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분명히 그거는 맞긴 맞는데, 뭔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모르는 거라.

 

그거는 한번 돌아보십시오. 그분들의 성품을 보면 자기가 그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법문하는 것을 좋아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미세하게 욕심부리고 있는데 그것이 좋아한다는 것인 줄 모르고 그냥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뭔가 가서 자기가 법문할 자리가 아닌데도 뭔가 자꾸 자기가 법문 할려고 그럽니다. 자기가 좋아한다는 것들이 있는 줄을 모르는 거라. 그걸 좋아한다는 걸.

 

또 수행을 하면서 잘못하는 것들이 뭐냐하면 고요함에 빠지는 것들입니다. (upekkhā)

대상 자체를 싫은 대상이든 좋아하는 대상이든 그것들을 평정하게, 평온하게 바라본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참 좋은 것들입니다. 어떤 대상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온하게 자꾸 대할려고 하는 것들. 그런데 그게 도가 지나쳐버리면 안 됩니다. 도가 지나쳐버리면 그 평온한 것이 자칫 잘못하면 냉랭하게 평온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사람을 보면 아주 차가워. 그런데 그사람 자신은 평온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주 차가워.

도가 지나쳐버리면 그것들을 노력할려는 마음들은 자꾸 소멸돼버리고 대상 자체를 평온하게 대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거라.

 

이렇게 수행을 잘해도 집착하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수행을 잘못하는 사람들은 집착하는 것은 더더구나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 좋은 현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싫은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악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고, 선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수행을 잘해도 이렇게 집착할 대상들은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에도 집착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이 수행을 더 나아가도록 하는데 장애요인이 됩니다.

오늘은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들이 수행의 완성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