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려라. (20151126)

담마마-마까 2022. 1. 13. 09:00

https://youtu.be/Vmxznn_bPh0

*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려라. (20151126)

 

오늘은 "까마 딴하 빠하나(kāmataṇhā pahāna)" 라고 해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려라」 하는, 감각적인 즐거움은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으로서 얘기를 했습니다.

 

스리랑카에 가보면 절 앞에 마다 반달 모양으로 해가지고 있는 디딤돌 같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디디고 절에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특히 큰 부처님 법당 앞에 반드시 이걸 돌로써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달 모양으로 생겼다 해가지고 그걸 '반월석'이라고 그렇게 풀이를 하는 게 있습니다.

정확하게 빨리어 이름은 '산다까다 빠하나(sandakada pahana)' 그렇게 얘기합니다.

 

'산다(sanda)'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얘기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빠하나(pahāna)'라고 하는 것은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들어가면서 그런 여러 가지를 버리라는, 밟으면서 버리라는, 우리 절에 들어가면 처음에 일주문부터 해가지고 천왕문 불이문 이렇게 있듯이 그렇게 반월석을 놔놓고 그렇게 했습니다. 생긴 게 꼭 달을 딱 반으로 짜개어서 반월 형식으로 해놓았는데, 그러니까 원 부분이 들어가는 입구쪽으로 되는 거죠? 그러면서 저쪽은 반듯하게 짤라져 있는데, 거기에 보면 세 가지 테를 둘러놨습니다. 그거는 아마 여러분들이 뭘 의미하는지를 대부분 압니다.

 

삼세 윤회를 얘기합니다. 윤회하는 '상사라(saṁsāra)'를 뜻합니다.

그거 안쪽에 보면 문양이 이렇게 돼있습니다. 대부분 백조를 표시를 해놓습니다. 백조는 대부분 그걸 의미합니다. 감각적인 즐거움 욕망 그런 것 뜻하고, 그다음에 그 안쪽으로 보통 네 마리 동물들 코끼리부터 해가지고 말, 사자, 그거는 조금씩 사원마다 다르기는 하는데, 공통적인 것은 반드시 네 마리 동물을 그려 놓습니다. 음각을 해놓는데, 그거는 보통 생노병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삼세 윤회를 하면서 감각적인 욕망에 빠져가지고 살 거 같으면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거 탁 벗어나면 반달의 마지막에 보면 볼록하게 올려놨는데 연꽃받침 연꽃형태로 해놓았습니다. 그건 윤회로부터 벗어나면 열반에 이른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데, 그게 인제 '산다까다 빠하나' 라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이름을 알고 있는 '반월석' 이라고 하는 겁니다.

 

'빠하나(pahāna)'는 '제거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멀리 피한다', '눌러버린다'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보듯이 감각적인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빨리 제거를 해버리든지 아니면은 그 감각적인 즐거움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꽉 눌러버리든지 그렇게 해야만이 대해를 건너서 연꽃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그 그림으로 상징적으로 표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즐거움에 안 빠질 수 있습니까? 아마 그러기는 좀 힘이 들겁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뒤에 따르는 것들을 모르고 덥석 받아먹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 결여하고 있는 항상 잊어버리고 있는 함정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함정인 줄 모르고 지나가다가 거기 그냥 웅덩이에 쏙 빠져버린다는 얘깁니다.

왜? 왜 그리 갈려고 하겠어? 뭔가 달콤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꼭 그 "함정 앞에 매달아 놓은 당근을 먹기 위해서 그걸 쫓아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비유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즐거움을 쫓는 것은 좋은데,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이든 그게 먹는 즐거움이든 아니면 사람에 대한 즐거움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것들에 대한 즐거움이든 어떤 경우든 그걸 만족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는 겁니다. 만족할 줄 알고 그럴 것 같으면 그걸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건데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불이 일어나있는데 불에다가 아무리 그 불을 끄기 위해서 휘발유를 푹푹 떠놓아도 그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즐거움을 쫓는 것은 그 불이 일어나는 것들을 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휘발유를 더 붓는 것과 마찬가지 형태를 취한다" 하고 그렇게 주석서에서는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 위험성을 알면 좋은데 참 그러기가 힘이 듭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졌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감각적인 즐거움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감각적인 즐거움은 그것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결합을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갈망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다. 감각적인 즐거움과 존재하고자 하는 즐거움 그리고 뭔가 하기 싫어하고 파괴해버리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그런 욕망들 이런 것들이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지금도 현대에서도 즐거움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있는 형태입니다.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괴로움은 행복의 옷을 입고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즐거움의 옷을 입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만족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은 어떤 경우든지 탐·진으로 빠집니다. 뭔가를 자꾸 더 원하게 되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성냄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입고 있는 옷이, 오히려 즐거움이 탐·진을 일으키기 때문에, 탐·진은 어떤 경우든지 태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옷을 태워버리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 옷을 태워버리게 되니까 내가 괴롭기 때문에, 그래서 괴로움은 행복의 옷을 즐거움의 옷을 입고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욕구,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은 불길과 같이 계속 타는 것이다." 그럽니다. 그 불길을 꺼주지 않으면은 그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어떤 경우든지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내는 것은 어리석고 내가 실망하는 길로 빠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탐·진을 일으킬 수 있는 즐거움을 어떤 경우든지 만족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바른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그 옷을 입고 있는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경전에는 나와있습니다. "아닛짜 둑카 와 까마" 라고 해가지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영원하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않고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불러온다. 빨갛게 달아오른 다리미처럼 근본적으로 괴로움을 토대로 해서 생겨나서 결과적으로 고통만을 일으킨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감각적인 즐거움은 약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한 대가로 엄청난 고통을 일으킨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달아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통해서 환상적인 기쁨과 쾌락을 느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알아서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제거하는 것- 빠하나(pahāna)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수행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있고, 또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인해서 없애는 방법이 있습니다.

 

'윅캄바나 빠하나(vikkhambhana-pahān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억제하는 것'

감각적인 즐거움이 오면 그것으로 오는 고통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 감각적인 즐거움들을 억제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에서 제1선정에서 2선정으로 갈 것 같으면 즐거움은 더 커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2선정으로 올라가지게 될까? 1선정에 대한 것들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2선정으로 올라가집니다. 마찬가지로 2선정에서 3선정으로 올라갈 때도 2선정에 대한 것들을 버려버려야만이 3선정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선정수행을 열심히 해버린 사람들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즐거움의 위험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여기서 내가 깨어나면 그 즐거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그걸 버려버려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기쁨이 일어나고 할 것 같으면 그 기쁨을 버려야만이 더 나은 즐거움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 거고, 즐거움을 버려버려야만이 청정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는 거라.

 

마찬가지로 수행에서 열심히 선정수행을 하듯이 더 나은 즐거움을 찾을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즐거움들은 '아,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에게 언젠가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버려버릴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다음 즐거움들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즐거움은 그거 말고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즐거움들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조금 지나고 나면 그것은 사라져버릴 뿐입니다. 어떨 때는 그게 의미 없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하고 두드리고 놀기 좋다 해가지고 그것을 하루종일 할 수도 없는 거고, 맛있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해가지고 그것을 하루 종일 먹을 수도 없는 거고, 그 어떤 경우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계속 누릴려고 할 것 같으면 나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지 고통을 안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 적당히 하고 거기서 그쳐야,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다음에 오는 즐거움들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선정수행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즐거움도 더 나은 즐거움들을 누릴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하물며 세속적인 즐거움들도 그러는데 즐거움이 어디 그것뿐이겠어?

법을 듣는 것도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고, 내가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들도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고, 내가 또 수행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르면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도 더 큰 거고, 자꾸 더 나은 즐거움을 찾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밑에 있는 즐거움에 자꾸 머물러 가지고 거기에 자꾸 빠져버릴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에 넘어가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서 즐거움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을 억누를 줄을 알아야 됩니다. 선정수행에서도 그것을 억누르듯이 일상적으로 분명하게 즐거운 것들은 고통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자꾸 버릴려고 해야 됩니다. 적당하게 '이 정도 해서 만족하자' 하고 마음을 먹고 버려버려야만이 다른 것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윅캄바나 빠하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사뭇체다 빠하나(samuccheda-pahāna)'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혼자 고요하게 수행하는 분들이나, 또는 혼자 지내는 스님들을 보면 가만히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발견한다고 그럽니다. '어, 나에게 이런 게 있었나?'하고 자신이 놀랠 정도로! 그러니까 뭔가 탐욕을 지닌 것들이 또 다른 형태로서 전혀 거기서 욕심부릴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불현듯이 자꾸 올라온다는 거라. 잠재되어 있던 욕망들이 올라오는 것들을 보는 거라.

 

실제로는 우리가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은 위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뿌리에서 연결되어 가지고 올라오는 것인데 뿌리에 것은 사실은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위에 드러나는 탐·진·치가 없으면 고요한 상태에서는 밑에 것이 위로 올라오게 되는 거라. 어떤 형태로도 올라온다는 거라. 그걸 보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자신이 '아, 예전에 나는 이러한 번뇌는 끊었다고 생각한 것이, 그것이 끊은 것이 아니구나.' 일시적으로 눌러진 것이고 여러 조건들에 인해서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지, 고요하게 돼있을 때 그것이 드러나는 거라.

실제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도 수행을 하지 않을 때보다도 훨씬 더 괴로움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가지고 테레비 보고 있을 거 같으면 한시간이고 이렇게 앉아있는데, 수행하고 앉아있으면 한시간 동안 여러 가지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또 생각들도 '내가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할 정도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고요하게 돼있으면 그런 것들이 자꾸 드러나게 되는 거라.

 

그럼 수행에서는 어떻게 해요? 고통이 있으면 고통을 그대로 바라보는 거라. 알아차립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생각이 일어나고 쭉 진행되고 사라지는 것까지 완전히 보고 나면 그것들에 대해서 영향을 받는 것이 마음으로 적어져 버리는 거라.

 

고통도 고통이 일어나서 완전히 사라져서 그다음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게 되는 거라. 그러면 물질적인 괴로운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들을 분리할 수 있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떨 때는 수행하다가 다리에 고통이 있더라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 것 같으면 이걸 무시해버리는 거라. 마음을 거기에 두지 않는 거라. 그거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리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이걸 무시해버리고 그냥 배를 관찰하게 되는 거라.

 

또는 어떨 때는 그것이 강할 경우에는 대상을 그것으로 두고 그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거라. 그러다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탁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뭐가 있다가 완전하게 탁 없어지는 것같이 느껴지는 거라. 그냥 시원하게 뭐가 확 뚫린 느낌이 드는 겁니다. 분명하게 사라진 걸 보기 때문에!

그러면 '아, 내가 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을 봤다'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완전하게 봤다는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진 것을 완전하게 보고 나면은 그뒤부터는 그다음 것이 오더라도 자연스럽게 그걸 관찰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마음을 거기다가 온데 기울여가지고 볼라고 해가지고 완전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인제는 그리 안 해도 일어나면 그냥 알아차리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니까 거기에 영향받지 않으니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것이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어, 그냥 또 사라지네' 보기만 하면 사라지는 거라. 관찰만 하면.

그렇게 계속 진행이 되다 보면 사라지는 것들이 여기도 생겨나고 저기도 생겨나고 각각 자꾸 생겨납니다.

그럼 두려워지는 거라.

'아, 내가 이 상태가 계속 지속돼선 안된다' 하는 공포심이 자꾸 일어나는 거라.

 

그럼 여기에서부터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지다 보면 그다음부터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이 탁 생긴다는 거라.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러면 대상은 단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은 단지 알아차리는 것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것이 내가 지금 알아차리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것이든, 아니면 아무것도 안 보이든, 아니면 괴로움으로 보이든, 즐거움으로 보이든, 그냥 내가 할 일은 그냥 그거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어떤 대상을 만나나더라도 그냥 평온한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 뿌리를 완전하게 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탁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걸 '사뭇체다 빠하나'라고 그럽니다.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거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을 선언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분명하게 원인·결과를 봤기 때문에 이것은 사라져버렸다는 거라. 더이상 불난 데다가 기름을 붓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 불은 반드시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그 불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봤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불은 없고 그냥 뜨거움이 있고 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기름을 붓지 않을 거 같으면 이것은 몸을 지닌 상태에서는 그대로 있을지는 몰라도 몸이 사라지고 나면 이것도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사실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해서 관찰했을 때 그것이 완전하게 사라질려고 할 것 같으면 아까와 같은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을 겪어야 됩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르고 불환과까지 이르르게 됐을 때 다시는 사실은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만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본인은 압니다. 지금 이게 완전하게 끊어진 건 아니지만 잠재되어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영향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걸 두 번째 '사뭇체다 빠하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빠하나- 제거해 보겠느냐?

선정의 방법으로 그것을 눌러가지고 그것이 확장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끔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분명하게 관찰해가지고 그것의 뿌리를 끊어내버리든지, 어떤 방법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반드시 병행하게 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그래서 끊어내는 것은, 제거하는 것은 꼭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아니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감각적인 즐거움은 반드시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고 인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을 끊을 고리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이 빠하나(pahāna) 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아까 스리랑카에서 얘기하는 그 월장석 비유처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면서 그 윤회의 고리를 자꾸 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걸어가는 길이 정말 바른길이구나' 하는 것들을 새삼 자꾸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수행자 질문 : 저번에 스님께서 사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띠를 하되 기억을 해야 된다.(스님 : 예. 삼빠자나)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기억은 어떤 기억을 말씀하십니까?

 

스님 답변 : 처음에 사띠가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 때는 사실은 기억하고 하는 것들은 잘 안 됩니다. 단지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아는 것뿐입니다. 그때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 대상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 앞의 대상을 알아차렸다는 것들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상태가 지속이 됩니다. 사띠가 연속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띠가 계속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내가 자연스러워지게 될 때 사띠는 연속하게 됩니다. 의도를 기울이지 않아도 그냥 대상이 일어났으면 반드시 자연스럽게 내 마음은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갑니다.

그런데 그 알아차려나가는 것이 변하는 속성으로써 알아차려나가게 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형태의 힘들을 가지게 됩니다.

(수행자 : 저절로 되는 거네요?)

예. 예를 들면 지금 현재 내가 이걸 들 수 있는 힘이 있을 거 같으면 이거 외에는 못 듭니다. 이것보다 무거운 것은. 그런데 내가 힘이 있을 때는 이것보다 더 큰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냥 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알아차리는 것들이 분명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흐리게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고, 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것을 기억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이 못 된다고 해가지고 사띠가 없다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라.

사띠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분명하게 알든 희미하게 알든 아니면, 그것을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분명하게 내가 인지를 하는 능력이 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사띠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어떤 경우든지 자연스러워지게 될 거 같으면 대상은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하는 것으로 볼 것 같으면 반드시 그것은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억을 하는 능력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기억하는 능력이 있을 때는 사실은 사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띠에는 그것을 연속할 수 있는 자연스럽게 되도록 연속할 수 있는 '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거기에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집중하는 힘들도 그 속에는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노력의 힘들도 분명하게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는 확신들도 분명하게 거기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력의 힘의 균형이 딱 맞춰져있는 상태가 자연스럽게 사띠가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자 질문 : 의도적으로 사띠할 때 의도적으로 기억할려고 하는 것은...?

스님 답변 :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사띠가 아니고 그것은 머리로써 관념화시키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나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사띠'를 '기억함' '분명한 마음챙김' 이런 용어를 안 적고, '알아차림'이라고 자꾸 하는 이유가 사띠의 영역은 그 모든 것들을 포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냥 알아차림만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걸 할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 됐습니까?

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