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갈애를 알아차리면 윤회를 알 수 있다. (20151210)

담마마-마까 2022. 1. 17. 09:00

https://youtu.be/QHCA6eARTk4

* 갈애를 알아차리면 윤회를 알 수 있다. (20151210)

 

오늘은 「갈애를 알아차리면 윤회를 알 수 있다」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윤회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행자 대답 : 있습니다.) 있어요?

윤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수행자 대답 : 연기를 보면) 연기를 안다고 윤회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대답 : 불만족을 알면) 불만족을 알면? 물론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한 것으로 인해서 갈애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은 됩니다.

그런데 갈애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은 윤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을 얘기해볼까요? 만약에 내가 죽을 날짜가 삼개월 남았다고 병원에서 탁 선고를 받았다. 그러면 가슴이 덜컥 하고 내려앉겠지. 삼개월 후에 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럴 경우에 가끔 윤회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 그럴까?

살려고 하는 마음을 탁 내려놔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아, 나에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탁 알게 됩니다. 그러면은 윤회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를 하게 됩니다. 어렴풋이 이해하니까 마지막 순간에 천국 간다고 할 것 같으면 종교 바꿀려고 그러는 거고, 이렇게 윤회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완전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들이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망상에 들어갑니다. 망상에!

 

망상하고 사고하고 차이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보통 4가지를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도움을 주는 것일 거 같으면 뭔가를 사고해야 되고 그것을 사유해가지고 실행해야 되는 것인데, 그래서 사고하는 것들을 불교에서는 바른사유라 해가지고, 바른 사유는 괜찮은 것으로서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망상은 어떤 경우든지 하지마라 합니다. 자기한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내가 뭔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망상인가 아니면 사고인가 구분을 하는 것은 도움의 유무를 가지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결론에 도달하는가, 아닌가? 결론이 있는가, 없는가?

결론없이 계속적으로 생각만 계속하고 있다. 그건 망상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고의 범주에 드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결론에 딱 도달합니다. 그게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거라. 길어져 버릴 것 같으면 사고도 망상으로 바뀌어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살아가는데 생활하는데 방해가 되는가, 아닌가?

어떤 경우에는 방해가 너무 심해가지고 그 망상이 생활을 전부 덮쳐버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병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망상을 멈추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들이 옵니다. 생활에 방해를 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망상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중단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낭패를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감정, 감정을 진정시키는지, 증폭시키는지?

감정을 더욱 더 유발하게끔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망상이라는 거라. 그런데 감정을 고요하게 자꾸 진정시키고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끔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사고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보통 이 4가지를 가지고 망상인지 사고인지 분간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도 생각이 일어나고 할날 거 같으면 '어, 이게 망상이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당장 그만두어야 됩니다.

왜 사고는 일정 부분은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으로 하면서도, 망상은 왜 바로 즉시 하지 말아라고 그럴까?

망상은 어떤 경우든지 탐·진·치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렇게 연결되지 않을 거 같으면 망상도 하라고 하겠지. 그런데 망상은 어떤 경우든지 탐 진 치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망상하는 거 자체만으로도 나쁜·선하지 않는·악을 범하는 염려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망상은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해도 망상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보통 보면 망상이 멈추지 않는 이유들을 보면,

 

자기합리화시켜 버립니다. 자기합리화시키는 것.

그다음에 그 망상하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것들.

그 만족하는 것을 자꾸 합리화시켜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망상이 멈추지 않고.

또 하나는 망상이 안 멈춰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들이 올바르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라.

내가 이것은 망상이 아니고 사고라고 생각을 해버릴려고 하는 거라. 그것을 하는 것들이 올바르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라.

 

망상을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게 됩니다. 자신이 해야 될 것들을 하지 않고 망각해버리는 겁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야 되는데도 망상을 알아차리고 착각을 해버리고 그 시간들을 흘려보내게 되는 거라. 자신의 의무를 자꾸 망각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망상을 멈추질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망상은 반드시 망상이라고 판단될 때는 반드시 멈춰야 됩니다.

 

망상이 계속 진행이 되면은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욕구들,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욕구들이 더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뭔가를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싶은 것이 더 강해지는 거고,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게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더 강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 존재하는 욕구들을 더욱 더 강하게 하는 겁니다.

존재욕이 점점 없어져야만이 해탈의 길로 이르게 되는데 오히려 존재욕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줘버리는 거라. <바와 딴하>

 

그다음에 또 하나 안 좋은 게 뭐냐면, ''라고 하는 것을 자꾸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나, 나의 견해, 나의 것들,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걸 자꾸 강화시켜버리게 되는 거라. 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봤으면서 나라고 하는 것을 자꾸 강화시키게 되는 거라.

자아를 자꾸 강화시키고 존재욕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망상하는 것은 망상이 일어났으면 그것이 일어났다고 알면 판단되면 바로 멈추도록 자꾸 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망상과 사고의 차이입니다.

그런 것들은 잘 구분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조금 전에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겁니다. 있는가 없는가 하고 판단하는 것이 망상의 범주에 들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 윤회는 오감으로 인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 듣고 이런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살아가는 게 그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거라. 그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판단할려고 하니까 윤회하는 것을 생각할 것 같으면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전부 망상하는 것으로서 들어가버리게 되는 거라.

 

대부분 보면 그렇습니다. "내 자신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윤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 다른 종교에서 다 윤회를 말했기 때문에 불교도 그와 같은 윤회다." 그렇지 않으면 "이건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는 부정한다."

이런 식으로 다들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전부 감각기관에서 생겨난 거 외에는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사실은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할 부분은 사실은 아닙니다. 그래서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갈애를 완전하게 알기 전에는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는 얘깁니다.

 

그런데 지금 갈애를 모르고 있다 해가지고 윤회를 부정하면 더 안 좋은 상황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죽고나면 뭐 아무것도 없다' 할 거 같으면 지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거라. 죽음에 이르는 것도 똑같기 때문에, 죽고나면 다 똑같기 때문에, 그래서 막행막식을 하든 뭘 하든 사는 것은 어떻게 살아도 죽는 것은 똑같다고 판단할 거 같으면, 지금의 생활 자체가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일들을 자꾸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윤회가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윤회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 현재는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된다는 거라. 그것도 어찌 보면 임시 방편입니다. 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한 방법에는 들어갑니다.

 

그러면은 윤회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윤회합니까? 윤회하면 뭐가 윤회합니까? 뭐가 윤회하는 거라?

그래서 "윤회합니까?" 하고 물어볼 거 같으면 그것은 말이 이미 잘못돼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 윤회할려면 뭔가 실체가 있어야만 윤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라리 '나는 무엇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볼 거 같으면 그거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오온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라는 물질적인 것도 변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는 거라. 수상행식은 더불어서 일어나는데도 그것도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지만은 그것도 변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하는 거라.

그럼 실체가 없는 것들이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것이라는 거라.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 것 같으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윤회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윤회하는가? 아니면 생명들은 윤회하는가?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참 말이 잘못된 상황이 돼버리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거북이 등에 털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거북이 등에는 껍질이 있는 것이지 털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털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 해도 틀린거고 없다고 해도 틀린 것이 돼버립니다.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인해서 오감으로 느끼는 상황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윤회를 증명할 방법도 없고,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그건 잘못된 것이라는 거라.

그래서 갈애의 상태를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알기 전에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알 수 있는 방법이나 확신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지금 내가 갈애를 알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서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오히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인 것이지, 지금 현재 상황에서 오감의 상황에서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단정적으로 윤회는 있다, 윤회는 없다, 하고 얘기한다? 그건 참 어리석은 행위라는 거라.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인도의 윤회와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윤회가 있다" 또는 "윤회가 없다"

갈애를 아는 것은 불환자에 이르른 사람들, 멸진정에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갈애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럼 본인은 불환자 이상이라고 선언하는 꼴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선언한 자가 "윤회가 없다" 하고 부정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을 부정하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윤회는 있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럼 부처님을 부정하는 자가 돼버리는데 부처님을 부정한 자가 불환자에 이를 수가 있을까?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또는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윤회가 있다" 하고 얘기하는 자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윤회가 있다 하고 단정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냥 남의 말을 빌려와가지고 그것을 그냥 앵무새처럼 얘기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확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자신이 확인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얘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확인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윤회가 있다, 없다" 하고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질적인 신체 오온에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그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일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이 변하지 않고 영속해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물질적인 현상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물질 불변의 법칙'이라고 그러나, 물리학에서는? '물질은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 물질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얘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어떤 실체를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는 겁니다.

 

실제적으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그걸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라.

「변화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도 물질적인 것도 뼈나 물이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변화돼서 그 물이나 뼈들도 계속 변하는 속성인 것이지, 그것을 질량이 똑같은 상황으로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물질적인 것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 맞는 것이지,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꼭 물리학 같이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해서 죽은 몸도 자연계에서 똑같은 물질을 지닌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증명해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틀린 것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물질적인 현상은 무상한 것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게 된 겁니다.

실제적으로 그것은 진리라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은 한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이 변해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은 어떤 것도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내 마음으로써 하고 있는 감각, 그다음에 인식하는 것 감정들, 그다음에 알음알이들 이런 것도 변화하고 있다는 거라. 그것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거라.

 

느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괴로울 겁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괴로울 겁니다. 서있는 상태를 그대로 알고 있다, 신체는 그대로 서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서있다는 생각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은 끊임없이 바뀌지 않으면 그건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인식하는 것도 느낌으로 인해서 인식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인식하는 것 그 자체만 계속 변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괴로움이 되게 됩니다.

느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라고 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지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지고, 지각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고, 이런 식으로 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계속적으로 변해서, 다른 마음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가 돼서 계속 변하는 상태로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우리는 괴롭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어떤 것이든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윤회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한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이 얘기를 얘기하는 겁니다.

「내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거라! 그것이 이생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도 또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은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변하고 있다는 거라.」

 

아까 의식을 얘기했지만 의식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 의식에서 다음 의식이 생겨나는 거라.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식에서 새로운 생존의식들이 생겨나게끔 되는 거라. 그 연결이고 그 흐름일 뿐인 것이지,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은 존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살아가는 것 자체는 그것은 굉장한 괴로움입니다. 실제로는 사는 것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맞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윤회」라고 하는 거라.

'나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하는 거라.

 

그러면은 왜 그렇게 끊임없이 변하게 될까? 왜 변하게 될까?

왜 물질적인 현상도 변하고 정신적인 현상도 변하고, 왜 끊임없이 변하게 될까?

 

그게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라고 하는 딴하(taṇhā)입니다. 갈애라고 하는 것.

 

예를 들어봅시다. 뭔가 맛있는 음식이 있다, 그러면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먹어야 됩니다. 먹고 나면은 또 먹고 싶어집니다.

만약에 변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먹고 싶다고 하는 것에서 그쳐야 됩니다. 그런데 마음은 거기서 그치질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그것을 먹게끔 변하게 됩니다.

누가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거기서 그칠 것 같으면, 보고 싶은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끊임없이 기름을 붓듯이 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까마 딴하'라고 그럽니다.

'뭔가 색수상행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자꾸 취할려고 하는 것'

변하기 때문에 취할려고 하는 겁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취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나에게 업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윤회하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게끔 또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면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거 그냥 계속 먹어야 되는 거라. 그것이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걸 하게 되는 거라. 죄를 저지르고 또 나쁜 짓을 하고 하는 것들은 전부 그 요인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

 

그런데 까마 딴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일으키질 않습니다.

'아,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갈구하는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알아차리는 거라.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적어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날 것 같으면 그것을 버려버린다는 거라. 더 이상 좋아하는 것들을 갈구하는 것들을 하질 않게 되는 거라.

 

갈애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속성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 위험성을 알고 그것들을 버려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자기에게는 다시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은 적어도 까마 딴하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봤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서 변하는 속성들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라. 윤회하지 않게 되는 거라.

 

살아가면서 거의 대부분 감각을 지니고 있으면 이 '까마 딴하'라는 것, 좋아하는 것들로 인해서 갈구하는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그걸 사람들은 자꾸 다른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내가 열심히 살려고 하기 때문에, 아니면 열심히 뭔가를 하려고 노력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만족하는 법은 없습니다. 10원을 모았으면 20원을 더 모으고 싶고, 뭔가 하나를 맛봤으면 더 맛있는 것을 맛보고 싶어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윤회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거라.

 

적어도 자기 자신이 까마 딴하인 줄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뭔가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아,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윤회의 원인이 되고 있구나' 하는 겁니다. 무상한 줄 알 거 같으면, 아까 우리 사띠님이 얘기했듯이 무상한 줄을 알 거 같으면 무상한 것에 대놔 놓고 그것을 원하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무상한 줄을 알 거 같으면 까마 딴하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호흡을 해서 분명하게 변하는 속성들을 무상하게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나면' 더 이상 까마 딴하를 일으키지 않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호흡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뭔가 원하는 것이 있게 되는 거라.

 

[ Kāma taṇhā는 오관(····)에 자극을 주고 싶다고 하는 욕구입니다.

Bhava taṇha 라고 하는 것은 생존 욕구· 존재욕구 입니다. 살아가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기분입니다.

Vibhava taṇha 라고 하는 것은 파괴 욕구, 싫은 것을 배제하고 싶다라고 하는 욕구입니다. 붓다가 발견한 진리법문교재에서 ]

 

그다음에 또 하나가 '바와 딴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고 싶다, 조금 더 살고 싶다고 하는 것' 그걸 바와 딴하(존재욕구) 라고 그럽니다.

어찌 보면 '바와 딴하''위바와 딴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거고, 뭔가 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그거 더 안 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더 만나고 싶어지는 거고, 싫은 사람 만나면 안 만나고 싶어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사실은 그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왜? 그것들은 변하기 때문에!

 

그런데 살고 싶은 욕구 · 존재욕구는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적어도 불환과 이상이 되어야만이 존재욕구가 사라질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존재욕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불환자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존재욕구가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단지 알아차림이 연속으로만 계속 있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존재욕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춰져 있는 것들 뿌리부터 잘라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욕구는 없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더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가질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싫은 것이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버려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에서 좋고 싫은 마음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있을 거 같으면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좋고 싫음들을 완전히 벗어나버린 상태는 아닙니다. 그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뿌리가 살아있을 것 같으면 아무리 위를 짤라놓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또 뿌리에서 가지로 잎으로 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아라한이 됐을 때 그 존재욕구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그것을 그때 끊을 수 있다 해서 알아차림마저도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야만이 '바와 딴하'와 '위바와 딴하'라고 하는 것들을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 주게 됩니다.

 

수행에서 현상들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으면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탁 놔버립니다. 의도적으로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들은!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가 뭔가를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있구나!'

 

또는 대상들이 끊임없이 변하다가 사라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면 사라지려고 하는 모습들을 볼려고 하는 마음들을 탁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 그게 사라짐으로 인해서 다음 것들이 일어나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 이것이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바와 딴하''위바와 딴하'라고 하는 것은 좋고 싫은 것들을 붙잡고 있는 성질과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들을 놓아버리게 될 때 윤회에 대한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열반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경전에는 물론 불사(不死)라고 해서 아마따(amata)라고 하는데, 불사는 사실은 열반의 다른 이름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불사(amata)에 이르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물어봤을 때 부처님이 대답한 것이 있습니다.

욕구 성냄 무지 분노 원망 위선 기만 질투 아까워하는 것, 이 아홉 가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아라한에 이를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 아홉 가지를 따르는 사람은 아라한에 이를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원망 질투 욕구 분노 위선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전부 다 붙잡고 또 밀쳐낼려고 하는 그런 성질들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딴하라고 하는 것들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애는 어떠한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들을 붙잡고, 그것들을 또 밀쳐내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딴하에는 꿀이 달려있다"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꿀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면은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멀리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윤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면 윤회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갈애를 분명하게 봤을 때, 윤회하는 부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한 윤회와 힌두교에서 말한 윤회가 분명하게 차이가 있구나,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완전하게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가야되겠다' 하는 마음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하면,

윤회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고유한 가르침입니다.

그 어떤 종교, 어떤 것에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윤회와 업은 반드시 불교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걸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만의 고유한 특색입니다.

 

그다음에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는 설문의 방법이 이미 잘못돼있습니다.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것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갈애를 본 자만이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감각기관의 정보만으로써는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보다는 '내가 이 몸과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갈애가 윤회의 원인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갈애를 끊을려고 하는 겁니다.

'갈애'는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존재욕구'입니다.

존재욕이 점점 없어지게 될 때 그 갈애들은 엷어지게 되는 거고, 종국에는 그 갈애들을 완전하게 탁 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길로 따라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무상한 성품을 알면, 무상한 성품으로 인해서 갈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무상이 갈애를 낳게 됩니다. 무상한 것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오온을 물질적 정신적인 그런 생멸에 하나의 흐름을 윤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되겠네요?

 

스님 답변 : 그거는 선등님이 뭔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거는 교리적인 방법으로만 자꾸 알려고 합니다. 그거는 전혀 이거하고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실체적인 것, '아, 내가 갈애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고 하는 거기에서 출발점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다」 그건 경전에 이미 다 있습니다. 그것으로 윤회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