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수행법문- 수행의 순서와 자세(좌선과 경행) (20180707. 울주)

담마마-마까 2022. 6. 4. 09:00

https://youtu.be/DvaZGjGlvbI

* 수행의 순서와 자세(좌선과 경행) (20180707. 울주)

 

교재 한번 펴보십시요. 저번 시간에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부분 하면서, 수행하는 순서를 쭉 얘기를 했습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먼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몸도 본인에게 맞는 자세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한시간이면 한시간 동안 수행할 수 있도록 되는 자세를 취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편하게 앉을 거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을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부좌를 하고 앉을 겁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대상이 나타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통 하는 예비적인 수행법에서 자애수행이라든지 아니면 불수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면서 마음이 가볍게 되어가는 기초적인 수행들을 먼저들 합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내서, 마음이 적어도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줘야만이 그 대상을 알아차릴 때 즉각즉각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지금 여러분들 마음이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금 어디에 가 있어요?

(수행자 대답 : 귀에 있습니다.) 귀에 가 있습니까?

(수행자 : 스님한테 가있습니다.) 나한테 와있습니까? 나한테 왜 와있어요? (수행자 : 스님이 말씀하시니까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마음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버리면 외부로 마음이 향해져버립니다. 그래서 설혹 스님이 여러분들 눈에 보이죠? 소리가 들리죠? 그래도 여기에 다가와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 보여도 마음이 그쪽에 가 있으면 안 되고, 귀로 들리더라도 마음이 거기에 가 있으면 안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몸이 여기 있으면 마음도 여기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것이 소리가 들리면 자기 귀에 가 있든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에 가있든지 가슴의 느낌에 가 있든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가 있어야지 밖으로 향해져 있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수행대상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나면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것을 조금은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볼 때도 내 눈을 볼려고 하든지 눈을 의식할려고 한다든지 귀를 의식할려고 한다든지 입술을 의식할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귀를 의식하고 있다. 스님 소리가 들리죠? 들리는 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겁니다. 그냥 평이하게 그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툭툭 끊어지듯이 들리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무상한 성품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귀에서 느껴지는 느낌으로, 따가우면 '따가움' 아니면 무거우면 '무거움' 이런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단순하게 몸과 마음 중에 자기의 몸을 수행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더라도 알아차리는 강도에 따라서 이해하는 정도는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해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길은 비슷합니다, 대부분은 보면.

 

예를 들어볼게요. 귀를 통해서 소리가 들린다. 그냥 그 소리 들린다고 쭉 알아차릴 경우에는 그냥 그 소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뒤에 그것을 이해하고 하는 것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신경써야 될 부분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다가 소리가 툭 끊겼다 그러면 끊기는 줄을 알고, 소리가 시작되면 적어도 즉각적으로 소리가 시작된 것을 알아차리고, 이게 아마 가장 기본적인 패턴일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 그 대상 중에 움직임을 먼저 알려고 하는데 움직임의 전체적인 것들을 알려고 하라. 시작되는 것부터 해가지고 마지막 끝나는 데까지를 분명하게 이해할려고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될 때 1단계가 어느 정도는 완성이 된 겁니다.

 

그게 어느 정도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큰 뭉텅이로 얘기하면, 그다음에 소리들리는 것들이 이제는 흐름으로 움직임으로써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느낌으로 알아차려집니다.

소리가 들릴 때 귓바퀴에서 울리는 소리의 진동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 그게 딱딱함이면 딱딱함, 치는 느낌이면 치는 느낌, 아니면 쏘는 느낌이면 쏘는 느낌, 각각의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느낌으로써 이해를 하게 됩니다.

 

보통 이 방법을 많이 하는 경우들은, 특히 스님들은 법문을 할 때 대부분 법납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돌아가면서 법문을 합니다. 한 스님만 지속적으로 그 사원에서 법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큰스님들 입장에서는 아주 어린 스님들이 법문하는 것들이 그렇게 들을만한 가치가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걸 지적하고 잘잘못을 분명하게 바로 잡아줄 때는 그 소리를 들어야 되는데, 그럴 필요성이 없는 위치에 있는 스님들은 대부분은 느낌으로 들을려고 합니다, 소리 들리는 것을. 그래서 그때 들리는 느낌들이 분명하게 그 느낌을 알아차려서 그 느낌들이 변해가는 속성을 알아차립니다. 쉽게 말하면 무상한 성품으로써 그 느낌을 이해하고 듣고 있게 됩니다.

 

하나 질문을 해볼게요.

소리의 예를 들었는데, 소리 듣는 거 하나 가지고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을 아는 사람? 어떻게 차이가 나요?

(수행자 대답...)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사마타인 거고, 대상에서 무상·고·무아로써 알 거 같으면 위빳사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래서 스님 법문이 잘 들리고는 있는데 그래서 내가 거기에 집중은 하고 있는데, 그게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아는 것이 아니면 지금 현재는 나는 사마타 수행으로 그 소리를 알아차리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생각에 사마타가 단순할 때는 뭐 코끝에다 '들이쉼' '내쉼' 하는 간단한 것이지만, 어느 대상이든 그 대상에 집중해가지고 마음이 집중해가지고 딱 움직이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사마타 수행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는 분명하게 이해도 하고 알아듣기도 하고 그 내용도 훨씬 더 잘 가슴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앞에 전자의 움직임을 본다고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은 보면 사마타쪽이 강하지, 위빳사나쪽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사마타 수행방법이 들어가질까?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아주 기본적인 사마타의 사마디 부분은 존재를 해야만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움직임을 분명하게 파악을 하고, 그다음에는 그 느낌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순서를 밟아가는 것이 수행을 하는 데는 조금 더 용이합니다.

 

하다가 보면 조금 왔다갔다 할 겁니다. 어떨 때는 그 느낌이 변하는 것이 보이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보면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한데 지속적으로 그냥 그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지속적으로 보일 경우에, 그럴 때는 사마타쪽으로 많이 치우쳐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사띠가 어느 순간에,

 

사띠는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한번 착 강해지고 나면 다시는 안 떨어질 것 같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띠의 힘은 일정부분에서 사띠의 힘이 완전하게 강화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의 힘도 강해지고 약해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리는 대상도 어떨 때는 그냥 편안하게 그 대상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떨 때는 그 합이 잘 맞아가지고 변하는 것으로써 알아차려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느낌들이 아주 강하게 다가왔다가 빨리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왔다갔다 하게 돼있습니다.

그 과정들을 여러분들은 어쩔 수 없이 겪어나가야 된다는 것들을 이해를 하고,

 

그리 하더라도, 처음에는 수행에 접근하기 쉬운 것은 대부분은 보면 느낌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강하게 뭔가를 붙잡을려고 합니다. 강하게 수행을 한다든지 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보통 느낌을 알아차릴려고 처음에는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말고 처음에는 무조건 움직임만 먼저 볼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주대상이 배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그것만 그냥 본다고 알아차린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배가 불러올 때 이게 팽창하는 느낌인지 아니면 배 한쪽에서 뭐가 뽈록하는 느낌이 있는지, 이 느낌을 볼려고 해서는 자기가 왜곡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거 같으면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보라는 거라.

 

 

그게 자기의 패턴에서 정확하게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것은 나중에 뒤에 체크를 하면 됩니다. 대상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명히 일치돼야만이 상기도 안 일어나고 들뜸도 없고 또 수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좀 사라지는 것들도 방어할 수 있고 그러는데 지금 그거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단지 대상을 딴 생각 안 하고 또 딴 마음 안 일으키고,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도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먹고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고 해야 되는 것이지, 초반부터 너무 강하게 느낌의 변화라든지 느낌을 알려고는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또 하나 유념해야 될 것은 마음이 편한 상태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을 붙이지 말아라.

명칭을 붙이는 순간 그 대상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고 관념적으로 바뀌어버린다 하는 겁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진다, '일어남' '사라짐',

아직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이 스스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강제적으로 마음을 여기에다가 갖다 붙여야 됩니다.

그러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일어남' 하면서 일정하게 자기가 한 3.5초 아니면 4초 이렇게 시간을 부여해가지고 붙입니다. 딱 맞아떨어질 수도 없고, 그렇게 해가지고 문제가 안 생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명칭을 붙이지 말고 마음이 이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없는지만 알면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끔씩은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게 아주 짧게 앞에 부분이나 뒷부분이나 대부분 다 놓쳐버리고 중간부분만 약간만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만 보면 됩니다.

나머지 다 놓치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다시 숨이 꺼질 때 숨이 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약간만 보인다, 마지막 것만 보인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냥 그대로 놔둬버리고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없는지만 지속적으로 보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될 때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느 정도 순일하게 잘 알아차리고 있고, 대상이 다른 데로 벗어나지 않는다' 할 때 그때 인제는 집중하는 힘들을 키우기 위해서 명칭을 붙여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럴 때는 일정하게 이미 몸의 자세도 안정되어 있고 마음도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 대상에 오롯하게 안정돼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럴 때는 명칭을 붙여줬을 경우에는 그뒤에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을 거기다가 붙잡아둘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을 키워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 방법들을 동원해주는 것이 좀 유용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면 그 대상만 쭉 알아차리면 좋은데, 대부분 그 대상만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갖가지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어, 내가 계속 이거 해야되나' 하는 마음도 일어날 거고, 아니면 금방 졸음도 올 거고, 아니면 몸이 약간 가려움이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어가지고 다리를 펴려고도 할 거고, 갖가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사실은 주의를 좀 해야 됩니다. 그런 장애들을 호흡과 마찬가지로 대상으로써 인식하지 못하면 일단 그 장애들은 버리십시요.

 

그 장애들을 알아차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아까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기 전에 명칭을 붙이게 되면 의도적이게 되기 쉽듯이, 이런 장애들도 일어났을 때 그것을 대상으로써 인식하지 못할 거 같으면 대부분은 보면 '당기고 밀고' 합니다. 마음이 그 대상을 '당기고 밀고' 합니다. 좋아하든지 아니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그냥 대상을 놓아버리십시요.

탁 놓아버리고, 지금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가만 먼저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그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다시 한번 알아차려보십시요. 아까와 다르게 그 장애라는 대상이 그냥 대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안 보이면 또 놔버려야 됩니다.

 

놓아버리고 그냥 호흡으로 들어와있든지 아니면 경행을 하고 있으면 경행을 하든지, 하고 있는 일 하고 있으면 하고 있는 일 하든지, 하다가 다시 다시 그 장애가 있는 쪽으로 마음이 가면은 그 대상을 다시 한번 알아차려보십시요.

그 장애가 그냥 대상으로써만 탁 보일 때 그것을 처음에는 알아차릴려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걸 강하게 '이게 사라지는 걸 보겠다' 아니면 '시작해서 마지막 사라지는 것까지 끝까지 보겠다' 안 됩니다 그거는!

 

그 방법이 있고, 또 하나의 방법은 그 대상이 크지 않으면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냥 내버려둬버리고 그냥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자기의 주대상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대상은 커지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마음을 강하게 주대상에다가 둘 것 같으면 지금 일어나는 장애라고 하는 것은 주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마음이 거기에 가있기 때문에 그게 주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장애가 일어나는 것들을 그것도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또한 지속적으로 반복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수행을 하다가 보면 본인도 모르게 대상은 알아차리는데 대상이 빨리 사라져버린다든지, 아니면 대상이 일어났는데도 한참 뒤에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다든지. 이럴 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럴 때는 틀림없이 배가 구부정하게 돼있어서 호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돼있다든지, 목이 굽어져 있다든지, 허리가 굽어져 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보다는 다른데 갈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져 있다든지, 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몸과 마음은 다시 가다듬어야 됩니다.

자신의 몸의 자세 그리고 마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다시 붙잡아둬야 됩니다. 다시 교정을 하고 나서 주대상으로 갈 때, 그 한시간 수행은 좀 더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알아차리면서 수행들을 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좌선 수행은 그러한 방법으로 해나가면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그다음에 경행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24페이지 한번 펴보십시요.

본인이 생멸의 지혜를 체험한 사람? 손한번 들어봐요. 아니 죽은 체험하지 말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무상한 성품으로 보일 경우, 그것도 무상한 것이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보인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좌선과 경행은 동일한 시간으로 해야 됩니다.

좌선을 한 시간 했으면 경행도 반드시 한시간을 하도록 하십시요.

지금 현재는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오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섯 가지의 힘이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좌선과 경행은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들이 균형을 맞춰줍니다.

좌선을 할 거 같으면 노력하는 힘들보다는 집중하는 힘들이 더 커지게 되고, 경행을 할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들보다는 노력하는 힘들이 더 커지게 됩니다.

 

수행에서 이 두 가지가 균형이 안 맞으면 수행을 지속적으로 계속 못해나갑니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혜에 도달하기 전에는 반드시 좌선과 경행은 반드시 동일한 시간으로 계속 지속을 해주어야 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그다음에 오늘은 사람이 많으니까 경행을 할 시간이 되면 여기에 3분의 1만 남고 3분의 2는 다른 데 가서 해야 됩니다. 앞에 마루에 가서 하든지, 아니면 다른 장소에 가서 하든지,

 

보통 경행을 할 경우에는 10M를 잡으면 됩니다. 여기서 저기까지가 아마 10M 정도 될 겁니다. 그럼 경행을 할 때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 해야 됩니다.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이나 될 거 같애요? 5명 정도입니다. 그럼 5명이 넘으면 서로 부딪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스스로 잘 판단해가지고 내가 여기에서 하고 싶다 할 것 같으면 여기서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루든지 아니면 저 방이든지 아니면 앞에 툇마루든지 다른데 가서 경행을 하고, 좌선시간에는 다시 들어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좌선에서 가장 신경써야되는 부분이 뭐냐면 노력하는 힘이 강해지면은 산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산만하지 않고 노력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경행이 단순해야 됩니다. 왔다갔다, 기역자를 긋는다든지 원을 그린다든지 아니면 보는 대상이 많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산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여기서 저기까지만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기까지 갈 때는 설혹 눈을 뜨고 있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은 듯이 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게 안 되는 사람은 차라리 처음에 경행을 할 때 뒤로 한번 걸어보십시요. 앞으로 보통 이렇게 걸어가야 되는데, 눈은 앞에 있는데 발은 뒤로 들고 뒤로 나아가고 내리고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걸어갈 때 마음이 오로지 발에만 가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보는 것이나 들리는 것들이나 여러 가지들이 많으면 마음이 거기에 안 가있습니다. 그럼 의도적으로라도 스스로 자꾸 차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행에서 가장 단순하게 산만하지 않게끔 그리고 힘들을 키울 수 있는 방법들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경행할 때 너무 느리게 합니다, 대부분이 보면.

전혀 그럴 필요성이 없습니다. 스님이 느리게 한다고 느리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인에게 맞는 속도로 하면 됩니다. 단지 경행을 할 때 발을 들고 완전히 내려놓고 나서 그다음 발을 들려고 해야 되는데, 내리면서 동시에 닿은 다른 발이 들리는 사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것만 조심해서 할 것 같으면 경보 수준으로 걸어도 괜찮고, 보통 자신이 걷는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걸어도 관계없습니다.

 

대부분 좌선수행이 잘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경행을 할 때 대부분 천천히 걷습니다. 그런데 경행을 하는 이유가 뭐 때문에 경행을 하는지 본인이 자꾸 까먹는 거라.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여주는 노력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경행을 하는데도, 아주 천천히 하다 보니까 노력하는 힘이 전혀 안 키워지는 거라.

호흡을 '들이쉼, 내쉼' 하고 단순하게 알고 있듯이, 발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한시간 동안 그것만 알고 있습니다.

뭐하러 경행합니까? 차라리 좌선하고 있지.

 

경행은 경행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본인이 경행을 할 때 이 정도 속도로 걸으면 내가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나고 대상을 알아차리는데도 훨씬 더 수월하겠다 싶은 속도로 걸어야 됩니다.

그래서 경행하는 속도를 본인에게 맞게끔 반드시 조절하라.

 

한번 더 얘기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늦습니다.

지금 경행할 때 '들어올리임, 나아가암, 내려놓으음' 이 정도의 속도면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속도보다 약간 느린 속도입니다. 많이 느린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본인은 천천히 '들어올리이이이임' 하고, '나아가아아아암' 하고, '내려놓으으으음' 하면서 내려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정도의 속도가 아닙니다.

지금 속도라고 할 것 같으면 들어올림 할 때, '들어올림''들어올림''들어올림' 들어올리는데 들어올려지는 그 움직임이 여러 차례 변하는 것들을 인식할 때 그정도의 속도입니다.

내려놓을 때도 '내려놓으음' 하면서 내려놓는 것들이 내려놓는 순간에 그 느낌들이 자꾸 변하는 것들이 보여질 때의 속도라는 거라.

그냥 '들어올리임, 나아가암, 내려놓으음' '들어올리임, 나아가암, 내려놓으음' 이 정도의 속도로 하면은 적당합니다.

 

그정도의 속도에서 조금 더 천천히 해야 되겠다 할 것 같으면

여기에 적어놓았듯이 6단계 나누면 됩니다.

'뒤꿈치 들어올림' '앞꿈치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닿음' '디딤'

 

이 정도 속도로, '뒷발드음' '올리이임' '나아가암' '내리이임' '닿으으음' '디디이임'

그리해도 지금 그 6단계까지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걷는 속도보다도 훨씬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경행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그것들을 각자 맞게끔 조정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경행을 하면서 멈춰서 있을 때는 대부분은 멈춰섰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즉시 호흡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서있을 때가 앉아있을 때보다도 호흡을 관찰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래서 배를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서있음' 하고 관찰하고, 반드시 180도 돌도록, 돈다는 사실을 알고 돌고, 다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아가도록 해야됩니다.

지금은 의도를 내가지고 '나아가고자함' 하는 의도를 내고나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하지말고, 그냥 나아간다는 사실만 알고 발을 든다는 사실을 알고 나아가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좌선과 경행은 수행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본인에게 조금 부족한 것들은 채워가면서 수행들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요.

문경 분들은 점심공양 하고 왔어요? (예) 저녁에 먹을 것도 없는데 쫄딲 굶을라고? 먹을라해도 여기는 반찬도 잘 없습니다. 딱 필요한 것외에는 없기 때문에, 일단 수행을 해보고 각자 질문 있는 분들은 아까 올 때 스님 방 보이죠? 그쪽으로 와서 질문들 하십시요.